크리스마스다운 이야기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디가 그런지 묻는다면, 폭력성과 잔인성? 나홀로집에가 그런 작품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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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트베르펜의 연인
동물에게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몇 있지만, 듣는 사람은 얼마 없다. 그 점이 문제다.
-앨런 알렉산더 밀른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루벤에 있는 내내 지루하다고 너무 많이 징징댄 것 같단 말이야. 칙칙한 건물, 칙칙한 사람들, 놀라울 정도로 강의를 못 하는 교수들, 상담, 집단 심리치료, 와플,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주말, 그런 것뿐 매력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도시라고 오 초에 한 번씩 투덜거렸지. 진심이긴 해. 진심이긴 한데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냥 징징대는 게 너무 과했던 거 아닌가 싶다는 거야. 어쩌면 루벤이라는 도시는 나한테 그런 비난을 들을 정도로 지루하기만 한 곳은 아니었는지도 몰라. 정말 맛있는 와플도 있고, 강간범도 있고, 무엇보다도 학교 기숙사에 약물을 퍼뜨려서 멋진 꼴을 보여주신 분도 계시잖아? 응, 그래. 어쩌면 루벤은 그렇게까지 지루한 곳은 아니었는지도 몰라. 내가 지금 있는 이곳에 비하면 말이지.
여기는 벨기에 제 2의 대도시이자 최대의 항구도시 안트베르펜. 그 중에서도 바닷가 근처에 외따로 떨어진, 그리고 ‘허름하다’는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낡아빠진 호텔이야. 뜨거운 물은 제대로 나오지도 않고 식사는 엉망, 벽지는 누렇고 소방설비는 없다시피 한데다가 밤만 되면 쥐랑 고양이 울음소리가 7중주로 울려 퍼지는 곳이지. 공포영화 세트장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이딴 데서 제정신을 잃지 않고 있으려면 그나마 재밌는 사람하고 같이 있는 수밖에 없는데, 그나마도 불가능했어. 내 여행 파트너는 비엔나 봉봉도 쿨도어도 아닌 아르투아 교수거든.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학교 기숙사에 약물을 퍼뜨려서 멋진 꼴을 보여주신 그분이 나한테 의도치 않게 남기고 떠난 마지막 저주에 걸려들었다고나 할까. 기숙사 약물 난동으로 인한 사상자 발생이라는 루벤대학 사상 최대최악의 절망적 사건을 처리하려면, 가장 좋은 방법이 뭐겠어? 학교를 한 일주일 정도 폐쇄하고 뒤처리를 하는 거 아니겠어? 그러면 교수도 바쁜 일정에서 잠시 해방될 수 있겠지? 그러면 막 자기가 예전에 묵었던 분위기 좋은 호텔에 여행을 가보고 싶겠지? 근데 아르투아 교수는 신혼여행을 가도 일거리를 싸들고 갈 작자거든? 그럼 누굴 데려갈까? 현재 교수가 가장 집중하고 있는 연구주제 아닐까? 경제위기 덕택에 호텔은 다 쓰러져 가지, 그래도 교수는 좋다고 여기 묵겠다고 하지, 나는 여기에 무슨 추억이 있는 것도 아니지, 게다가 교수는 시내 관광 시켜주겠다고 온갖 지루한 곳으로 나를 새벽같이 끌고 나가지……, 비엔나 봉봉한테서 장갑하고 알코올을 좀 얻어두길 잘 했어. 이거라도 없었으면 난 망할 시내 관광을 하는 동안에 급성 지루함 과다로 완전히 이성을 잃어버렸을지도 몰라.
음, 근데 또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안트베르펜 관광 내내 지루하다고 너무 많이 징징댄 것 같기도 하단 말이야. 왜냐면 적어도 시내가 호텔보다는 낫잖아? 칙칙한 건물, 칙칙한 사람들, 놀라울 정도로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위대한 화가 루벤스의 그림들, 그래, 이 정도로 해 두자. 잘 생각해보면 적어도 이 호텔을 빼면 안트베르펜은 루벤보다는 덜 지루한 곳이 아닐까 싶어.
이를테면 그루트 마크트(루벤에 있는 거랑 이름도 똑같고, 이름에 안 어울리게 그다지 크지도 않은 것도 똑같아)에는 ‘안트베르펜’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는 동상이 분수 한가운데에 서 있어. 그 이름의 유래는 ‘손을 던지다’라는 뜻이고 동상은 잘려나간 손목을 막 던지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최근에 유명해진 소아성애자 아저씨를 기리는 건 아니래. 통행세를 강제로 징수한 폭군의 손을 잘라서 강에 내던졌다는 정의감에 넘치는 사이코 범죄자 군인을 기리는 거라고 하더라고. 사람을 토막 낸 범죄자를 상징으로 삼는 도시라면 매년 손목 자르기 축제라도 열면 좋겠지만, 하기야 그것까지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이겠지.
또 이를테면 다이아몬드가 있어. 그래, 다이아몬드. 안트베르펜은 세계 다이아몬드 유통의 중심지거든. 보기만 해도 머리가 띵해지는 까만색 일색의 옷을 차려입은 유태인들은 세계 다이아몬드 원석의 80 퍼센트 이상이 통과하는 안트베르펜 다이아몬드 구역의 터줏대감들. 그 외에도 안트베르펜에는 다이아몬드 박물관이 있고 거래소가 있고 밀수 강도 납치도 있고, 하여튼 다이아몬드랑 관련된 건 다 있다고. 그 다이아몬드 구역을 돌아다니면서 느낀 게 있는데, 다이아몬드라는 물건이 진짜 대단하긴 대단하더라고. 아니, 단단해서 대단하다는 게 아니라. 가격은 터무니없이 비싼 주제에 무색투명하기만 하고 진짜 지루하기 짝이 없게 생겼는데, 그 지루하기 짝이 없게 생긴 걸 내가 몇 초 동안 들여다보고 있었다니까. 다이아몬드에는 뭔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는 게 분명해.
또 또 이를테면, 맞다, 플랜더스의 개! 어릴 때 동화책에 굉장히 빨리 질리는 편이긴 했지만, 어떤 방법으로든 개가 죽는 동화라면 기억하고 있거든. 애니메이션으로도 봤고. 그 이야기의 배경이 앤트워프 지방이라 하더라. 정작 얘기 들어보니까 원작은 영국 사람이 썼고 유명해진 건 일본에서 만든 애니메이션이라서 일본 관광객들이 말해주기 전까진 제대로 알지도 못했다고 하더라고. 지금은 일본 관광객들 끌려고 열심히 써먹고 있는 모양이지만 말이야. 그리고 어느 나라에서 이야기를 재해석하든, 사람이 구원받는 건 몰라도 개가 죽는 건 변하지 않잖아? 주인 잘못 둬서 죽는 개 얘기라면 나한테는 아주아주 익숙하단 말이지. 동물 학대와 방화는 아이가 어떻게 훌륭한 범죄자로 클지를 진단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얘기가 좀 빗나가는데 좀 더 빗나가게 둘까? 모두가 좋아하는 동물 얘기로 말이야. 난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말이지. 왜냐면 말을 못 하고, 좀 지루한 면이 있잖아. 동물이 나한테 좋은 자극이 되려면 맛있는 요리가 되든지, 아니면 시계나 노트북 대신에 곱게 희생돼주는 방법밖에 없어. 그렇게 어릴 때부터 수십 마리를 희생시키면서 알게 된 게 있는데, 비록 난 동물을 좋아하지 않을지라도 동물들은 날 꽤 좋아한다는 거야. 등 뒤에 칼이며 톱을 감추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손을 내밀면, 개며 고양이며 이구아나며 하나같이 나한테로 와서 손에 뺨을 비비더라고. 어째서일까?
뭐어, 그 이유랑은 상관없이, 내가 동물을 싫어하는 거랑도 상관없이, 난 아직도 동물들 괴롭히는 걸 상당히 좋아해. 이건 그렇게까지 빨리 질리지는 않더라고. 가끔씩 한 마리 정도, 이를테면 해부 실습시간 같은 때에 하는 건 뇌에 신선한 청량감을 주지. 루벤에서는 보는 눈이 하도 많아서 실습 때 말고는 자주 하지 못했지만, 여기서는 교수가 잘 때 슬쩍 나가기만 하면 되니까. 게다가 이건 정당방위란 말이야. 자는 데 사방에서 뛰어다니질 않나 발정이 나서 앵앵 울어대질 않나, 이러면서 손대지 말라고 하는 건 너무 이기적인 게 아닐까?
그래도, 그래도 동물 괴롭히는 것만으로는 확실히 많이 부족해. 열이 날 때의 해열제, 통증이 심할 때의 진통제일 뿐 이것만으로는 뿌리 깊은 지루함을 해소하기엔 역부족이란 말이야. 이 호텔은 너무나도 지루해. 안트베르펜 시내도 아마 두 번째 가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지루해지고 말 거야. 며칠 후에 루벤에 돌아가게 되면? 그래, 이렇게나 비참한 운명 속에서 나는 아마도 영원히 더 자극적인 일을 바라게 되겠지. 내 사랑스러운 밀레니엄 스타를 다시 이 품안에 안게 되는 그 날까지ㅡ약이 몇 알 없는 게 진짜 아쉽다니까. 그것만한 자극도 없는데. 그거라도 없으면 정말로 자극이 필요해서 미칠 것만 같은데.
“그렇다고 이런 자극을 원한 적은 없었는데.”
호텔방 구석에 처박혀서 이렇게 말했더니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나를 쳐다봤어. 침대에 앉아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교수야 물론 날 쳐다보는 게 일이니까 쳐다봤겠지. 여행지까지 일거리를 가져왔으면 이렇게 좀 보기라도 해야 되지 않겠어?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정장 차림에 험악하게 생긴 권총을 든 저 남자들은, 지금 인질로 잡혀 있는 내가 헛소리를 할 때마다 협박하고 그러는 게 일일 거 아냐. 방 한가운데서 무시무시하게 생긴 보스가 시종일관 째려보고 있다고. 우리 교수도 학장이 보고 있을 때는 저렇게 쭈뼛쭈뼛하려나?
“어이, 꼬맹이.”
낮은 목소리로 한껏 분위기를 잡으면서 말을 걸어오는 보스는 마른 것 같으면서도 정장 안에 근육이 빼곡히 차 있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는, 다시 말해서 ‘와, 강해 보이네!’ 같은 인상을 주는 흑인이야. 머리는 벗겨졌고 눈은 움푹 들어갔고, 무엇보다 양 뺨의 살이 흉하게 도려내져 있어서 새까만 해골을 보는 것 같은 게 꽤나 으스스하네. 나처럼 연약한 여자애는 한 방에 나가떨어질 것 같지만……, 나를 쳐다보는 저 눈은 당장 죽이고 싶다는 눈은 아니야. 그나마 좀 다행이네.
“이 상황이 안 무서운가보지?”
이런 식으로 말이나 걸고 있고. 안 무섭냐고? 고양이 울음소리가 어제보다 좀 줄어들어서 그나마 편하게 잠이 들었는데, 한밤중에 갑자기 총소리가 들리더니, 아래층부터 올라오는 비명소리가 순식간에 옆방까지 향하고, 우리 빼고는 이 호텔에 유일하게 묵고 있던 옆방 커플이 비명을 지르다가 조용해진 다음에, 교수가 막 경찰한테 연락하려는 와중에 총을 든 갱들이 들이닥쳐서 죽을 뻔했는데 안 무섭냐고?
“그다지요.”
아니, 그야 나도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 건 아닌데, 그것보단 항상 다른 감정이 더 크더란 말이지. 앞으로는 어떻게 되려나, 이거 안 지루하려나, 그런데 벌써부터 여기 처박혀있는 게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했는데, 나가서 길고양이나 조금 더 괴롭히다 온다고 하면 허락 안 해주겠지, 이런 것들.
“배짱이 있는 꼬마로군.”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별로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중요한 이유는, 갱들이 방에 들이닥쳐서 막 교수랑 나를 벌집으로 만들어놓으려고 한 순간에 저 보스가 한 행동 때문이야. 부하들이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에 보스가 이쪽을 힐끗 보더니 나랑 눈이 마주쳤고, 그러자마자 부하들을 퍽 때려눕히면서 이렇게 소리쳤거든.
“꼬맹이는 건들지 마라, 바보들아!”
그렇게 해서 지금의 상황이 만들어진 거야. 나랑 교수는 경찰한테 연락하지 못하도록 부하 갱들의 감시를 받으면서, 그리고 갱들은 나한테 총알구멍을 내지 못하도록 보스의 감시를 받으면서, 밤은 늦었는데 잠도 못 자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대치상황만을 유지하고 있는 거지. 보스는 시종일관 나를 굉장히 불쾌한 눈빛으로 뚫어지게 쳐다보기만 하고, 가끔 다른 부하 하나가 방으로 뛰어 들어와서 보스와 귓속말을 하고, 그러면 또 몇 마디 지시를 내리고, 또 다른 부하가 와서 나한테도 거의 들리다시피 하게 “저 여자들은 처리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했다가 무시무시한 눈초리에 슬금슬금 물러서고, 나는 장갑 낀 손을 연신 비비면서 무모한 짓을 하고픈 충동을 어떻게든 억눌러보려고 하고. 그렇게 시간이 한참 지났고, 교수는 참 간절하게도 날 쳐다봤지만 나한테도 한계란 게 있는 법이야.
“이봐요, 아저씨.”
그래, 해골 아저씨. 아까부터 형언하기 어려운 얼굴로 이쪽을 계속 쳐다보고 있는 바로 당신 말하는 거야. 인질이 말하는 게 그렇게 신기한 건 아니잖아? 입도 멀쩡히 달려 있는데.
“이렇게 잡아만 놓지 말고, 무슨 상황인지 얘기라도 좀 듣죠.”
그리고 교수님은 좀 가만히 있어요. 잘못돼 봐야 죽거나, 사창가에 팔려가거나, 사창가에 팔려가서 죽는 정도지 어디 더 하겠어? 저거 봐요, 보스도 당장 우릴 죽일 생각은 아닌 거 같다고. 더 얘기해보란 표정이잖아. 해골처럼 생겨서 무슨 표정을 지어도 무섭긴 하지만.
“이것 봐요, 아저씨. 살려두는 건 고맙지만 지병이 있어서 이렇게 오래 앉아있는 것도 고역이거든요. 아저씨랑 아저씨 부하들이 뭣 때문에 이 같잖은 호텔에서 총질을 하고 난리를 쳤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인 게 확실한 거 같은데 어떻게 빨리 좀 나가볼 수 없을까요?”
아 진짜, 권총에 손 가져가지 말고요. 말 아직 안 끝났는데.
“내가 도망가면 경찰에 신고할까봐 걱정되는 거죠? 보아하니 사람이든 물건이든 여기서 찾는 게 있는 모양인데, 그걸 찾기 전까지는 경찰이든 누구한테든 방해받고 싶지 않은 거죠?”
“어떻게 알았지?”
“총 좀 치우고 말해요. 부하들이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소곤소곤했잖아. 소지품을 뒤져 봤다느니, 로비에도 없다느니, 뭐 그런 얘기 하는 거 아니에요? 여기 뭐라도 숨겨뒀든지, 아니면 누가 중요한 물건을 가지고 도망가서 여기에 숨었다는 제보가 들어왔든지, 그런 거겠네.”
그리고 교수님은 좀 그만 떨고요! 보시다시피, 아니 보기만 해서는 잘 알기 힘들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은 상당히 긍정적이란 말입니다. 내 치료 현황보다 수만 배는 더 긍정적이라고. 슬슬 결판만 내면 되거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꼬맹이.”
“뭘 찾고 있는지는 몰라도, 빨리 끝나도록 내가 도와줄 수 있다고요.”
지루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라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고요. 당신 같은 갱들을 도와서 뭔지도 모르는 물건 찾는 것도 도와줄 수 있다고요. 하다못해 교수를 사창가에 팔아넘기는 걸 도와달라고 해도 기꺼이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라니까? 이렇게나 충실하고 믿음직한 조력자가 또 어디에 있겠어, 안 그래? 이런 내 진심이 전해졌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보스는 권총에서 손을 떼고 잠시 생각하다가, 마침내 말했어.
“잠깐 얘기 좀 하지.”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역시 진심은 전해지는 법이라니까.
그래서 다른 방에서, 문 앞은 갱들이 지키고 있지만 방안에는 나랑 보스랑 단둘뿐, 조금 두근거리는 상황에서 먼저 보스가 입을 열었어. 먼저 말 안 하면 지루해져서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판이었는데 잘 됐지 뭐야. 부하를 여럿 거느리는 위치에 있어서 그런지 분위기를 잘 읽는 거 같네.
“뭘 찾고 있는지 물었지.”
딱히 그걸 물어본 적은 없지만, 어쨌든 알아야 하는 내용이긴 하죠. 뭘 찾는지도 모르면서 도와줄 수는 없잖아.
“아프리카의 연인. 그게 내가 찾는 물건의 이름이다.”
“삼류영화 제목 같네요.”
농담이었는데 해골이 얼굴을 찌푸리니까 진짜 보기 싫다. 앞으로 이런 농담은 하지 말아야겠어.
“‘아프리카의 연인’은 다이아몬드야, 꼬맹이. 100 캐럿이 넘는 커다란 녀석이지.”
“아, 역시.”
“알고 있었나?”
“안트베르펜이잖아요.”
세계의 다이아몬드가 거쳐 가는 이 항구도시에서 다이아몬드 도난사고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거겠지. 게다가 100 캐럿이 넘는 다이아몬드라면 누구라면 한 번쯤 훔쳐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겠어? 나만 그런가?
“엄청 비싼 거였던 모양이죠?”
100 캐럿이면 얼마나 하려나? 태평양에 섬을 사서 내 사랑스러운 그라프 핑크와 함께 평생토록 침대에서 뒹굴면서 살 수 있을 정도는 되려나? 아니, 그건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비싸긴 엄청 비싸겠지만.
“돈이 문제가 아냐. 그 다이아몬드는 내 모든 것이다. 이 장바티스트 고빌라의 모든 것이라고.”
“어지간히 비싼 건가보네요.”
“그러니까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했잖아. 하기야 너 같은 꼬맹이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아주 긴 이야기야.”
아주 긴 이야기면 안 해도 되는데! 진짜로! 그렇게 무서운 얼굴로 추억에 잠기지 않아도 되는데! 하지만 모든 진심이 전해지는 건 아니었고, 나를 꼬박꼬박 꼬맹이라고 부르면서도 정말 쓸데없이 친근하게 대하는 이 장바티스트 고빌라라는 남자의 과거 회상이 시작되었어. 정말이지 왜 나한테는 이런 지루한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거람.
왜 인질인 나한테 이런 얘기까지 들려주는지 모르겠는데, 혹시라도 나한테 반하기라도 한 거라면 정말 죽여 버릴 생각인데, 어쨌든 지루하기 짝이 없는 과거 얘기의 시작은 아프리카의 이름도 잘 기억 안 나는 어떤 나라에서였어. 이것만 들어도 앞으로 무슨 얘기가 펼쳐질지 느낌이 오지 않아? 엄청 진부한 얘기잖아, 안 그래? 정부군과 반군의 대립이 있을 거고, 군자금으로 쓰기 위한 다이아몬드 광산을 둘러싼 내전이 있을 거고, 그 와중에 총을 들게 된 운 나쁜 남자애도 있을 거 아냐. 물론 온갖 나쁜 짓은 골라서 하는 지역 군벌도 있겠지.
“고릴라의 손을 잘라서 재떨이로 쓰고, 안에 사람이 있는 집에 불을 지르길 즐기는 잔인한 작자였지.”
“동물 학대에 방화. 훌륭한 살인마들은 많이들 그렇게 하죠.”
“정말 짐승 같은 놈이었어. 자기가 죽인 고릴라보다도 훨씬. 꼬맹이 너도 만나보면 알겠지만 고릴라는 아주 신사적인 놈들이거든.”
어라? 그럼 설마 동물이 나를 잘 따르는 것도, 내가 워낙에 사람 같지 않은 애라서 자기 동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에이, 설마 그럴 리가. 내가 아무리 잔인하고 윤리의식이 없고 단순한 욕구에 휘둘리는 생명체라고 해도, 고양이가 그런 것까지 알아챌 리가 없잖아, 안 그래?
“내 얼굴을 이 꼴로 만든 것도 그 작자였어. 총을 안 들겠다고 했더니 본보기로 이렇게 만들었지. 정글칼로 위협하고, 나이프로 도려내고, 그래, 그래. 나는 운이 좋은 편이야. 남자는 다 토막내 죽이고 여자는 자기 노리개로 삼는 게 취미인 놈이었으니까. 어떻게 그 작자 맘에 들어서 경호까지 하게 됐으니 운이 좋지.”
“그래서 다이아몬드는요?”
이야기 진도 좀 나가라! 지루하단 얘기를 내가 꼭 해야겠어?
“놈은 다이아몬드를 팔아서 무기를 샀지만, 광산에서 나온 다이아몬드 중에서도 가장 큰 건 팔기 아까웠는지 자기 방에 전시해 놨지. 그게 ‘아프리카의 연인’이야. 그걸 어지간히 아꼈던 놈이라 잠도 못 자고 경비를 서게 했는데, 그렇게 밤새 그 앞에 서서 항상 생각했어. 저것만 있으면, 저것만 있으면 부자가 될 수 있어, 이렇게 살지 않아도 돼, 전쟁 같은 건 일어나지도 않는 먼 곳에 집을 사서 가족이랑 다 같이 사는 거야, 하고.”
“그래서 훔쳤어요?”
“그 작자한테서? 상상도 못 했지! 어떻게 될 줄 알고! 하지만 기회가 왔어. 내전이 격해지니까 프랑스인지 어디인지에서 지원이 왔거든. 폭탄이 우르르 떨어지는 와중이었다. 상상이 가냐, 꼬맹이? 그 와중에 불타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서, 같이 싸웠던 애들이 다 불이 붙어서 뒹굴고 있는데, 그 돼지 같은 작자는 다이아몬드를 끌어안고 있었어! 그 놈한테 총알을 박아주고 가지고 나왔다. 내 삶을 망쳐놓은 값으로 말이야. 내 인생 값으로.”
이 대목에서 한숨을 푹 쉬고 나서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그 다이아몬드는 내 모든 걸 바쳐서 얻은 거다.”
그 이후로 온갖 역경을 거쳐서 마침내 여기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 다이아몬드 밀수는 물론 필요하다면 납치 강도까지 지시하고 그렇게 얻은 물건의 출처를 세탁해 큰돈을 벌어들이는 업계의 괴물이 될 때까지, ‘아프리카의 연인’은 항상 이 사람의 곁에 있었다는 거야. 그런 지루한 얘기였어. 그 이야기의 끝은, 지루한 인생을 전부 바쳐서 얻어내고 지켜낸 그 ‘아프리카의 연인’이ㅡ
“그걸 도둑맞다니, 그걸 훔쳐가다니! 죽여도 분이 안 풀린다고!”
우리 옆방에 묵고 있었지만 지금은 황천의 투숙객이 된 커플, 장바티스트 고빌라의 최측근이었던 남녀한테 도둑맞은 거야. 금고의 위치도 비밀번호도 알고 있었으니 뭐 훔치고 싶었던 것도 이해는 가지. 다이아몬드의 마력이란 정말 굉장하지 않아? 그건 그렇고 얘기가 너무 길어지는데 슬슬 본론을 들어볼 수 없을까나.
“꼬맹이 너, 아까 우리가 뭘 찾고 있다는 걸 바로 맞혔지.”
“별 거 아니에요.”
내 사랑스러운 코랄 선드롭에 비하면 말이지. 나는 탐정도 아니고, 기껏해야 진짜 탐정인 그 애가 어떻게 했는지를 흉내 내는 것뿐인걸.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눈동자로 가능한 한 단서를 모으고,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듯 돌아가는 그 머리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 그를 통해서 나한테 비정상적으로 친절한 이 남자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것ㅡ이 부분은 내 오리지널이지만.
“아니, 지금 엄청 자신 있다는 표정이잖아. 일이 빨리 끝나도록 도와줄 수 있다고 했지?”
“충분한 정보만 주신다면야.”
좋아, 그럼, 하더니 고빌라는 문 쪽으로 호통을 치고, 부하들이 달려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무슨 파티 영상을 준비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그렇게 해서 몇 분 만에 나랑 고빌라에 부하들 전부하고 인질로 잡힌 교수까지 둘러앉은 멋진 상영회가 시작되었어. 노트북에서 흘러나오는 어느 고급스러운 연회의 영상을, 그래, 그 애가 했던 것처럼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눈에 담는 거야.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것도 그렇지만, 100 캐럿이 넘는 다이아몬드가 사라지는 사건 현장이라면 누구라도 눈에 담아보고 싶지 않겠어? 이것도 나만 그런가?
영상에 담긴 연회는 갱들의 단합을 위한 것으로, 고빌라가 말하길 들어오고 나갈 때 신체검사를 공항 세관보다도 철저히 한다더라고. 옛날 다이아몬드 광산 노동자들한테 했던 것처럼 X레이 사진까지 찍어서 검사를 하는데, 어떻게 다이아몬드를 빼돌렸는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귀신에 홀린 것 같다는 거야. 물론 귀신이 그랬을 리는 없으니 잘 들여다보면 알게 될 일이지만. 그렇게 들여다보면 보이는 것은, 사람들은 다들 샴페인 잔을 들고 살짝만 들어도 지루한, 그래서 더 듣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를 좋다고 나누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건 역시 보스인 고빌라. 그리고 그 곁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긴장한 듯 쭈뼛쭈뼛하면서 서로를 계속 쳐다보고 다른 사람들 눈치도 보는 수상쩍은 남녀.
“저 사람들인가요?”
“여자가 클레아 무랏, 남자가 베킴 바이라미. 십 년 넘게 내 오른팔처럼 일했는데 그런 짓을 하다니.”
이름이랑 생김새를 보아하니 아마 알바니아계 갱인가, 뭐 최근에도 그쪽 범죄자들이 일으킨 사건이 좀 있긴 했지. 뭔가 일을 꾸미고 있는 사람 특유의 긴장이 영상으로도 느껴지긴 하는데 이것만 봐서는 알 수 있는 게 별로 없군. 그런데 이 시점에서 갑자기 끼어드는 우리 교수님. 직업병 같은 건가?
“신혼부부 같네요. 둘이 결혼할 계획이 있었나요?”
뭐? 나한테는 그런 게 안 보였는데. 고빌라도 고개를 젓고. 하지만 교수가 말하길 두 사람 태도에는 분명히 연인다운 게 있다네. 하기야 이 분야에서 전문가는 감정 기능에 심대한 장애가 있는 내가 아니라, 그쪽 공부로 학위도 따고 논문도 내는 아르투아 교수겠지. 전문가의 의견을 따르자면 그럼 저 두 사람이 다이아몬드를 훔친 이유는,
“돈을 갖고 도망가서, 일에서 손 떼고 둘이서 살고 싶었던 거라고? 그런 이유로 ‘아프리카의 연인’을 훔쳤다고?”
음음, 난 그 기분 알겠어. 사랑하면 극단적이 되게 마련이니까. 보스의 배를 갈라서 죽인 다음에 연회장에 불을 지르고 도망치지 않은 게 다행이지. 사랑이란 사람이 그런 일을 하게 만드는 악마 같은 감정이라니까? 이건 나만 그런 건 아닐 거라고 믿어! 그렇게 믿으면서 영상에 다시 집중해야지. 모든 것을 보는 거야. 샴페인 잔, 테이블, 창문, 지루한 이야기로부터는 귀를 닫고, 대신에 내가 보는 건 케이크하고 드레스하고 연회장을 뽈뽈 돌아다니는 새끼 고양이들, 샹들리에, 응, 저 고양이 귀엽다!
“아저씨가 키우는 거예요?”
그야 마피아가 고양이 키우는 건 영화에도 좀 나오지만, 그래도 저렇게 귀여운 새끼고양이를 키울 줄은 몰랐는데!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놈들이 쥐를 잡아오는 걸 보면 대견하잖냐.”
아, 그거라면 나도 인정. 그러면 저 많은 고양이를 혼자서 키우는 건가? 매일 밥도 주고 똥도 치워주고 하면서? 갱단 보스도 참 고달픈 직업이네.
“아니, 고양이는 무랏이랑 바이라미가 돌봤어.”
그렇군. 그럼 갱단 보스의 오른팔도 참 고달픈 직업이네. 새끼고양이를 저렇게 많이 돌보는 건 힘든 일이겠지. 쥐를 물어오게 풀어놓다시피 한다면 더더욱. 이게 결정적으로 배신을 결심한 요인이 되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보스에 대한 반감이 생기는 한 가지 원인인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또 하나, 새끼고양이를 여러 마리 기른다면 기생충인 톡소플라즈마 감염을 조심해야 하지. 예전까지는 톡소플라즈마가 에이즈 환자나 임산부를 제외하면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알려져 왔지만, 최근에는 조현증부터 시작해서 양극성 장애, 자살, 위험한 운전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증상을 나타낼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했단 말이야. 순전히 가설의 영역이긴 하지만 어쩌면 저 두 사람도 고양이를 돌보다가 톡소플라즈마에 감염되었고, 그것 때문에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닐까? 아주 믿음직한 가설은 아니지만 적어도 재밌잖아? 사람이 동물처럼 기생충한테 조종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말이야.
“저기 저 고양이 보이지? 하얀 녀석.”
어, 저 고양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언제 저런 애랑 놀았던 적이 있나? 여덟 살 때 밥솥에 넣고 쪘던 애가 저렇게 생겼었나, 아니다, 걔는 까만 무늬가 있었지. 어쩌면 일곱 살 때 폭죽을 먹이려다가 실패했던 애가 저렇게 생겼을 수도 있겠다. 하기야 다 비슷비슷하게 지루하게 생기긴 했지만.
“저 애는 무랏하고 바이라미한테 선물로 줬던 애야. 충성의 대가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지도 않지.”
당연히 웃기지도 않죠. 줄 거면 돈으로 주던가! 보스가 고양이를 줬으니 이거 기르지 않을 수도 없고, 죽이기라도 했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잘 쳐줘야 민폐밖에 안 되는 선물을 받은 저 커플도 불쌍하지 뭐야. 민폐 고양이는 시종일관 주인인 여자 근처에서 엉덩이를 다리에 문지르거나 시끄럽게 울거나 하면서 연회의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드는 또 다른 민폐를 저지르고 있었어. 예전에 내가 엄마랑 아빠랑-여동생은 그땐 이미 없었으니까-같이 살 때도 집 근처에 저런 고양이가 하나 있었거든? 다른 고양이들보다도 훨씬 더 나한테 친근하게 굴더라고. 정말로 그 애는 나한테 감춰져 있는 짐승의 본성을 알아챈 걸까, 냄새를 맡은 걸까ㅡ하지만 그렇다면 그 본성이 누구를 향할지도 알아챘어야지. 안 그래? 내가 그 애랑 3일 동안이나 놀아준 건 정말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란 말이야. TV에서 물을 너무 많이 마시면 죽을 수도 있다는 얘기를 볼 때까지는 말이지. 결론만 말하자면 그 애는 물을 정말 ‘너무’ 많이 마신 나머지 내장이 다 찢어지고 말았고, 영상 속의 남녀는 시끄러운 고양이를 안고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고, 나는 알고 있는 걸 확실히 해둘 겸해서 이렇게 물어봤어.
“저 고양이한테도 X레이 찍어 봤죠?”
침묵이 흐르고,
“왜 대답이 없어요?”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과연, 이럴 줄 알고 있었지. 이렇게 단순한 방법일 줄 알고 있었다고. 이게 사람이 하는 일의 본질이라니까? 정말로 언제든지 이런 식의 실수가 일어날 수 있다니까? 공항 세관보다 철저하다고는 해도 애초에 세관을 고양이가 통과할 일은 없고, 보스가 직접 준 고양이니까 섣불리 손대기도 힘들었을 거고, 특히 지금 영상에 나오는 것처럼 신경질이 나서 팔을 긁어대는 고양이라면 가능하면 건드리지 않고 통과시키고 싶었겠지. 그렇게 고양이는 어떤 의심도 받지 않고 연회장을 빠져나갈 수 있었던 거야. 장바티스트 고빌라의 인생 전부를, 수백만 달러를, ‘아프리카의 연인’을 꿀꺽 삼킨 채로 말이지. 담당자는 이제 어쩌나? 보스가 돌아가면 제일 먼저 끝장날 텐데, 도와줄 수만 있다면 도와주고 싶어지는 심정이네!
물론 지금 도와주기로 한 것부터 처리하고 나서 얘기지만.
다들 멍해져서 서로 “내 탓 아니다?” 하는 표정만 짓는 갱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서 분노와 허무가 뒤섞인 표정으로 어쩔 줄 모르는 보스, 이 사람들의 문제를 빨리 해결 보지 않으면 이 호텔에서 나가기란 요원한 일. 마음 같아서는 이딴 낡아빠진 호텔이나 멍청한 갱들 문제 따위는 빨리 불태워버리고 싶긴 하지만, 당장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는 법이고 계획이란 게 필요한 법. 먼저 뭐부터 하는 게 좋을까나, 그래, 역시 시작은 이것부터지.
“다이아몬드가 지금 어디 있는지, 좀 알 것 같네요.”
“정말이냐?”
물론이죠. 기대해도 좋다니까요? 고양이 뱃속에 있는 다이아를 찾는 일이라면 어릴 때부터 고양이 수십 마리의 배를 갈라온 나만큼 적임자도 없으니까!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첫째, 가능하면 다들 제 지시에 따라줄 것. 둘째, 담배 연기는 싫으니까 일이 끝날 때까지만 금연할 것. 셋째, 교수님은 방해만 될 거 같으니까 먼저 풀어줄 것.”
교수는 사실 나한테 꽤 중요한 사람이기도 하거든. 이 벨기에에서 나는 사실상 불법 체류자랑 크게 다를 게 없는 신세인데, 이런 내 신분을 보장해주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아르투아 교수란 말이야. 게다가 내가 인질로 잡혀 있다면 아르투아 교수도 경찰에 신고해서 일을 그르치거나 하지는 않을 거 아냐. 여기 남아서 떨고 있는 것보다는 차라리 히치하이킹이라도 해서 시내 쪽으로 나가서, 이딴 쥐 나오는 데 대신에 안전하고 위생상태도 좋은 호텔을 하나 잡아두는 게 나한테 수백 배 도움이 된다고. 난 방에 TV도 있고 인터넷도 되는 데가 좋단 말이야. 무엇보다 아침 식사로 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게 나와야 될 거 아냐! 그러니까 해골 아저씨, 지루하게 생각하는 건 그만두시고 요구를 빨리 수용해주실 것을 이 자리에서 요청 드리는 바입니다.
“정말 다이아몬드를 찾을 수 있는 거 맞지?”
“어디 있는지 감이 잡힌다니까요.”
“좋아, 다들 이 꼬맹이 말대로 해.”
이렇게 움직여줄 줄 알았다니까. 일 처리에 걸림돌이 되는 교수님은 위협을 받으면서, 그리고 자기나 걱정할 것이지 쓸데없이 나를 걱정하면서 호텔을 나섰고, 그러고 나니 남은 것은 다이아몬드 밀수를 일삼는 흉악한 갱단 전체와 연약한 소녀 하나. 그리고 이 호텔 안 어딘가에 있을 고양이와 다이아몬드. 무대는 전부 갖춰졌어. 화려한 불꽃놀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지금 그걸 기대할 수는 없겠지? 어쨌든 갱들을 내 말대로 움직여볼 수 있는 기회도 그렇게 흔한 건 아니잖아. 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호텔에서 보내는 마지막 시간, 어디 한번 지루하지 않게 즐겨 보자고.
“먼저, 여러분이 죽여 버린 비극의 커플이 문제의 고양이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이유부터.”
이렇게 시작하면 되는 거겠지. 다들 집중해서 잘 들어주고 있다고.
“엉덩이를 비벼대고 시끄럽게 울고, 그 고양이는 발정기였어요. 게다가 이상한 걸 억지로 먹여져서 짜증도 난 상태. 고양이한테 다이아몬드를 삼키게 해서 빼돌린 건 좋았지만, 고양이는 주인 맘대로 움직여주지 않잖아요? 호텔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도망쳐버린 거예요. 이런 데 머물러 있다가는 여러분한테 잡힐지도 모른다는 걸 알았으면서도 며칠이나 머물러 있었다는 건, 두 사람이 고양이를 마지막까지 찾지 못했다는 증거죠.”
“그럼 지금 고양이가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다는 거냐?”
“글쎄요,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억지로 삼키게 된 고양이라면 아마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 근처에도 고양이는 많으니까 짝을 찾더라도 근처에서 찾으려고 했겠죠. 쥐가 우글거리는 이 호텔 안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데, 그래도 언제든지 도망칠 가능성은 열려 있으니까 모두들 호텔의 창문을 전부 닫아주시지 않겠어요?”
정장 차림의 갱들이 일사불란하게, 고작 나 같은 꼬맹이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사실에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다가도 보스의 호통이 떨어지자마자 쥐들이 달아나는 것처럼 우르르 달려 나가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어. 관광객들을 위해서 그럴듯하게 꾸며 놓은 안트베르펜 시내 관광 따위보다 훨씬 낫다니까? 평생 주인을 따르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었던 멍청한 파트라슈처럼 호텔 창문이나 닫으러 흩어지는 멍청한 개들. 응, 아주 보기 좋다고.
“그 동안 아저씨도 잠시 나가 계시지 않을래요?”
아니, 그렇게 수상하게 쳐다보지 말고요. 이 방에는 딱히 도망칠 구멍도 없잖아?
“가운에 땀이 차서 샤워를 좀 하고 싶을 뿐이에요. 생각도 마지막으로 정리할 겸. 제가 샤워하는 것까지 감시할 생각은 아니시죠?”
그렇게 해서 고빌라까지 방을 나갔어. 갱들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맛도 각별하지만, 갱단 보스를 움직이는 맛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니까! 저 사람은 왜 이렇게 내 말을 잘 듣는 거지? 흐음, 지금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긴 하지만! 지금 신경 써야 되는 건 뭐냐면 말이야, 장갑에, 알코올이 좀 말랐는데, 최근에 안 사실인데 아무래도 알코올이 부족하면 ‘장갑을 끼고 있다’는 느낌이 좀 떨어지는 거 같아서, 그러면 자제력이 아무래도 부족해지고, 그래, 그렇더라고. 지금까지 많이 참았어. 절대적으로 지루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앞으로 뭔가 상당히 재밌는 일이 일어날 거 같은데 그걸 기다리기에는 지금 이 순간이 상대적으로 지루해서 그래. 그러니까 이런 상황이 되면 아무래도 확실히 해두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 응? 그렇지 않아? 알코올이 필요하고, 새 장갑도 필요하고, 그리고 자극이 필요해, 재밌는 일이 일어날 때까지는 시간이 걸릴 테니까, 그걸 기대하면서도 제정신을 유지하려면 자극이 정말로 필요하다고. 가운을 한 번에 벗어던지고 속옷을 내팽개치고 그대로 욕실로 들어가. 이 호텔에 좋은 점이 딱 하나 있다면, 온수 조절이 엉망이라서 뜨거운 물을 틀면 불타는 물이 쏟아진다는 거야. 타는 물방울이 머리카락에 스며들어, 불길이 뺨을 타고, 목을 타고, 가슴을 지나 배를 불태우면서 다리를 향해, 아아, 고통스러워, 뜨거워, 아주 마음에 들어, 이제야 좀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거 같네.
김이 잔뜩 서린 거울을 닦아내면 샤워를 마친 꼬맹이의 모습이 보여. 악의로 가득한 눈, 그 애의 눈처럼은 결코 될 수 없는 색안경이 씌워진 커다란 눈이 거울면에서 춤을 추고 있어. 그래도 새까맣고 긴 머리카락은 물에 축축하게 젖어서, 이렇게, 이렇게 멋대로 흐트러뜨리고 나면, 그리고 눈을 좀 멍하게 뜨고 나면 내 사랑스러운 아자일 핑크 쥬빌리처럼 보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전혀 아니네. 비슷하지도 않잖아. 저주의 인형이나 우물에서 기어 나온 귀신같은 모습인걸. 이런 어색한 모습은 빨리 지워버려야 한다고. 드라이기, 드라이기가 어디에 있더라? 아직 안 부숴버렸지?
머리가 길면 말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서 지루해. 그런데 왜 짧게 자르지 않느냐고? 글쎄, 이게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거든. 누구한테서 들었느냐고? 그걸 꼭 말로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 안 그래? 나는 그 애의 흐물흐물 늘어지는 머리카락이 정말, 정말, 이 생머리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들지만. 하지만 그 애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야. 그러니까 빨리 머리나 말리자고. 너무 지루해지기 전에. 드라이기는 점점 더 뜨겁게 데워져가고, 그와 비례해서 나는 점점 더 참을 수 없게 되고, 손톱을 세워서 전선 피복을 까득까득 벗겨내기 시작하고, 까득, 까드득, 머리가 어느 정도 말라갈 즈음에는 드러난 전선과 과열된 드라이기가, 스위치가 들어간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어. 그래, 불타라, 차라리 불타라. 온 사방에 알코올을 튀기면서 구석구석 닦은 손을 라텍스 장갑 안으로 밀어 넣고 나면 모든 준비는 완료. 이 절망적인 구속감, 훌륭해, 사라진 다이아몬드를 세상에 선보일 그 순간까지 어디 끈질기게 기다려 보자고.
샤워를 전부 마치고 방을 나섰을 때쯤, 과연 잘 훈련된 갱답게 호텔의 모든 창문은 고양이는커녕 쥐 한 마리도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닫힌 채였어. 귀찮은 일을 시켰다고 아직도 짜증을 거두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야 내가 상관할 게 아니지. 왜냐면 내 뒤에는 보스가 있거든. 자기 인생을 걸고 얻어낸 다이아몬드를 찾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아저씨가 말이야.
“부하들을 시켜서 그 녀석들이 묵던 방은 물론이고 다른 방까지 다 뒤져봤지만, ‘아프리카의 연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어. 어디 있는지 짐작이 가냐, 꼬맹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는 확실히 알겠어요. 고양이가 주인을 떠나서 바깥에서 길고양이들하고 뜨거운 밤을 보냈다면, 아마 지금도 길고양이들이 가장 많은 곳 근처에 머물러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길고양이들이 가장 많이 있을 만한 곳이라면 당연히 음식도 많고, 음식 냄새를 맡고 온 쥐도 많은 주방이 아닐까요?”
그래, 호텔 주방. 이 따위로 쥐가 우글대는 데를 주방이라고 부르다니 정말 역겹지 않아? 베이컨 하나 더럽게 못 굽던 여기 요리사는 갱들이 들어올 때 다른 호텔 직원들하고 같이 총살당했지만 전혀, 전혀 동정심이 들지 않는다고. 자기가 구운 베이컨처럼 바싹 태워버려야 마땅해. 지저분한 주방 꼴을 보고는 권총 든 아저씨들까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이제 여기서 나온 음식이라고 할 수도 없는 쓰레기를 입에 넣을 일은 다시는 없겠지. 마음 편하게 돌아다녀 보자고. 때가 잔뜩 낀 도마, 뭐가 묻은 식칼, 열어보고 싶은 생각도 안 드는 냉장고 사이를 쏘다니는 거야. 가스 밸브를 확인하는 거야-이렇게 하면 열리는 거였나? 비눗물을 발라보면, 그래, 이렇게 보글보글 올라오면 가스가 새는 거랬어. 이 싱크대는 언제 마지막으로 닦았던 걸까? 요리를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미생물학 실험을 하고 싶었던 걸까? 어머, 길고양이가 들어왔다! 야옹!
“야옹!”
거 아저씨들, 귀여운 여자애가 귀엽게 고양이 울음소리 낸다고 그렇게 쳐다보지 맙시다. 난 고양이 다루는 법을 잘 아는 사람이라고요. 봐 봐요, 얘도 날 잘 따르지. 자기 동족의 피가 묻은 손가락 끝에 천진난만하게 뺨을 비벼대면서.
“이 애가 어디서 들어왔죠?”
“저쪽 열린 문이겠지.”
아하, 주방 뒤쪽으로 통하는 문이 있네. 나도 알고 있었어, 거짓말 아니야! 저 문을 통과하면 나오는 건 곰팡이가 핀 고기나 싹이 튼 감자 무더기. 그리고 사방에 찍힌 쥐와 고양이 발자국들. 사라진 고양이의 행방을 알고 싶거든 여기를 관찰해보는 게 좋겠지.
“어라,”
감자 포대에서 이상한 걸 발견했어. 고양이는 아니야. 고양이가 감자 포대에 들어가 있을 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여기, 여기 감자 포대에 잔뜩 묻은 건 분명히,
“피다. 피가 묻어 있는데요?”
와, 다들 놀라는 거 봐! 당신들 아까 이 호텔에 잔뜩 피로 페인트칠을 해 놓고는, 이제 와서 감자 포대에 피 좀 묻었다고 놀라? 그리고 내가 보기엔 이건 사람 피도 아니야. 새하얀 고양이털이 근처에 떨어져 있거든. 호텔 사방에 튀어 있는 피랑은 다른 거야. 이건 고양이의 피야.
“아까 그 고양이가 하얀색이었죠, 분명히.”
피가 발견되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핏자국을 따라가는 것! 핏자국은 감자 포대에서 이어져서 바닥에 점점이 떨어져 있다가, 흐음, 옥외 냉동고 문 쪽에 묻어 있어. 가능하면 이 호텔에 있는 냉동고는 열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지만, 내가 보기엔 썩어가는 재료를 처박고 잊어버리기 위해 있는 거 같지만, 이런 상황에서라면 한 번 더 열어보는 것도 어쩔 수 없겠지. 자물쇠가 걸려 있지만 이런 건 문제가 아니니까 심호흡이나 하자고. 하나, 둘, 셋,
툭,
하고 발치에 떨어진 건 얼어붙은 허연 물체. 팔다리를 사방으로 쭉 뻗은 채 눈은 둥그렇게 떠서, 배가 세로로 쭉 갈린 채로, 새하얀 털에 새빨간 피를 잔뜩 묻힌 채 꽁꽁 얼어버린 그건 분명히 영상 속 여자의 품에서 신경질을 부리던 고양이였어. 보스가 충성의 표시로 직접 하사한 고양이, 다이아몬드를 뱃속에 품은 채 여기까지 고생스러운 길을 온 고양이. 자아, 아저씨? 이게 찾으시던 고양이 맞죠?
“아프리카의 연인은 어디 있지? 다이아몬드는!”
“글쎄요, 저걸 뒤져본다고 나올 것 같지는 않은데요. 누군가 고양이 배를 가르고 다이아몬드를 가져간 모양이에요. 저렇게 귀엽고 불쌍한 애를 저 꼴로 만들어서, 곰팡이 핀 음식밖에 없는 냉동고에 처박아둔 악마 같은 녀석은 도대체 누굴까?”
그리고 다시 흐르는 침묵. 고빌라는 그야말로 망연자실한 표정이야. 고양이 뱃속에 들어있어야 할 다이아몬드가 사라졌고, 그렇다면 이 사실을 아는 미지의 인물 A가 와서 고양이 배를 가른 다음에 물건만 챙겨서 도망쳤다는 해석도 가능한데, 벨기에 최대의 항구도시인 안트베르펜에서 도망친 사람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 부하들도 마찬가지 표정이야. 자기 인생을 도둑맞은 보스가 이제 얼마나 자기들을 쪼아댈지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기분일 거 아냐? 하아, 이것 참. 다이아몬드 찾는 걸 도와주겠다고 했으니 이쯤에서 “전 빠질게요!” 할 수도 없고. 아무래도 마지막까지 어울려 줘야겠는걸.
“저기, 아저씨?”
그 해골 같은 머리 들어요.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라고요. 왜냐하면 힌트는 이미 전부 주어졌고, 불순물을 빼서 순서대로 나열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얘기는 즉,
“다이아몬드가 어디 있는지 알아요.”
“……, 정말이냐?”
“호텔 밖에서, 둘이서만 얘기할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을 이해할 때가 온 거야.
부하들은 전부 호텔 안에서 대기. 나는 고빌라랑 단둘이 호텔 앞에 서서 해골을 올려다보고 있고. 고빌라는 한시라도 빨리 다이아몬드의 행방에 대한 내 추리를 듣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어. 하지만 그 전에 나도 꼭 듣고 싶은 얘기가 있는걸.
“눈을 왜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봐요?”
아까부터 계속 말이야. 내가 약을 먹었을 때도 쿨도어가 딱 저렇게 나를 쳐다봤다고. 게다가 지금은 약도 안 먹었는데, 아니, 호텔 조명이 영 부실해서 빛이 부족하니까 동공이 커지는 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엄청 부담스럽단 말이야. 이렇게 부담스럽게 쳐다보는 데에는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을 거야.
“닮았어.”
누구랑?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데?
“반군에……, 총을 잡기 전에, 고향에서 살 때 난 일찍 결혼을 했어. 거기선 흔한 일이었지. 작은 결혼식이었지만 술도 있고 고기도 있고, 그리고 그 애도 있었어.”
그렇게 말하는 고빌라의 눈빛은 갱단의 보스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그래, 이를테면 아까 거울을 쳐다보면서 어떻게든 내 사랑스러운 엠프레스 유제니의 모습을 찾아보려고 애를 쓰던, 그런 내 눈빛하고도 비슷했어. 지금은 잃어버린 무언가를 간절히 그리는 것만 같은.
“같은 마을에서 어릴 때부터 줄곧 같이 살던 애야. 요리도 잘 하고 바느질도 잘 하고, 또 얼마나 잘 웃는지! 얼마나 큰 꿈을 꾸는지! 깨진 병유리를 다듬어서 보석처럼 만들면서 그 애가 그랬다고. 이게 진짜 다이아몬드면 얼마나 좋을까? 언젠가는 이런 다이아몬드 하나 가져 볼 거야. 하나만 있으면 우리 둘이랑 엄마 아빠랑 동생들이랑 전부 다 같이 커다란 집에서 매일 배불리 먹으면서 살 수 있을 거 아냐, 그래, 그렇게 말했다고. 그렇게 말할 때면 얼마나 눈이 반짝였는지. 꼬맹이 넌 모를 거다. 그런 상황에서 그런 꿈을 꾸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아하, 그런 얘기였구나. 내가 거울을 통해서 그 애를 보려고 한 것처럼, 이 사람은 내 눈을 통해서 옛날 아내를 보려고 했구나. 그것만이 아니겠지. ‘아프리카의 연인’을 손에 넣고, 팔지도 않고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었어. 자기 인생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말이 맞는 거야. 이 아저씨한테 있어서 ‘아프리카의 연인’은 그냥 비싼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인생 전부, 잃어버린 고향과 잃어버린 아내와 잃어버린 미래의 커다란 집과 호화로운 식사, 그 모든 것이었을 테니까, 그것 참, 그것 참ㅡ
“지루한 얘기네요.”
장갑을 갈아 끼지 않았으면 아마 못 견뎠을 거야. 나한테서 누구의 모습을 봐? 그래서 나를 그렇게 쳐다봤던 거야? 그래서 나를 안 죽이고, 계속 내 말을 들어줬던 거야? 끔찍해라, 끔찍해라, 소년병 출신 깡패 두목도, 수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인물 파악에는 도가 텄을 사람도, 내가 그렇게나 악의를 쏟아냈는데도 그걸 눈치 채지 못하는구나. 정말 사람들은 아무것도 몰라. 엄마도 아빠도 교수도 비엔나 봉봉도 하프도 쿨도어도 아무것도 몰라. 악의의 불꽃이 자기한테 옮겨 붙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그럼 슬슬 제 얘기를 해도 될까요? 다이아몬드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과연 이 호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면 알게 될 때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얘기해 주겠다고. 그러니까 불길이 신나게 타오르는 걸 그 눈으로 똑바로 쳐다보고 있으라고. 당신이 보고 있는 사람은 결코, 결코 과거의 달콤한 연인이 아니니까.
“이미 아시겠지만 이 호텔에는 미지의 인물 A가 있었어요. 아저씨도 아니고, 아저씨의 다이아몬드를 훔친 커플도 아닌 다른 사람이.”
눈빛에 의혹이 깔리기 시작했어, 좋아, 언제쯤 불이 붙으려나? 타이밍을 잘 맞출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 사람은 훌륭한 살인마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제 말은, 동물 학대와 방화를 상당히 즐기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이 호텔 근처에는 고양이가 많았고 미지의 인물 A는 그 고양이들 때문에 잠을 잔뜩 설쳤어요. 그러니 어떻게 했겠어요? 고양이를 괴롭혔죠. 아무래도 이 고양이는, 관리 상태를 보아하니 길고양이가 아니라 누가 기르던 것 같은데? 객실에서 도망쳤나? 뭐, 나랑은 상관없지만, 하면서.
호텔에서 묵으면서 지루함과 짜증으로 미칠 지경이었던 미지의 인물 A의 원래 계획은, 고양이 시체를 냉동고에 집어넣어서 쓰레기 같은 밥을 만드는 작자들에게 따끔하게 경고를 해 주려는 거였어요. 시시한 장난이죠. 하지만 이런 것밖에 할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한테는 정말로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은 바다 건너편에, 고향 나라에 두고 온 그 사랑하는 사람하고 약속을 했거든요. 절대로 사람은 죽이지 않겠다고. 그래서 미지의 인물 A는 고작해야 고양이를 죽이고,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던 거예요. 원래는 그럴 작정이었는데, 고양이 뱃속에서 뭔가가 발견되었죠. 미지의 인물 A의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었어요. 이 지루한 여행을 재미있게 만들어줄 사건이 생길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감은 틀리지 않았죠. 운도 좋았죠. 아니, 어쩌면 운이 아니었을지도 몰라요. 왜냐면 그 사람의 눈에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는 것만 같았으니까요, 최근에는 여자까지 반하게 만들었으니까요. 그냥 친하게 지내는 여자였을 뿐인데 이젠 막 엉겨 붙고, 여행 가지 말고 자기랑 같이 있자고 그런다니까요? 하지만 이건 중요한 게 아니고, 잃어버린 물건을 찾아 호텔에 온 갱단의 보스를 만나면서 미지의 인물 A는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가장 재미있게 만들 수 있을지 생각했어요. 그러기 위해서 정보를 모았죠. 그리고 한 가지 시나리오를 떠올렸죠.
미지의 인물 A는 먼저 이 자리에 있으면 곤란한 여행 파트너를 호텔 밖으로 내보냈고, 그 다음엔 갱들한테 지시해 호텔 창문을 전부 닫게 했어요. 고양이가 나가지 못하게 한다고요? 하! 말씀드렸듯이 고양이는 이미 죽어서 냉동고 안에 들어가 있었어요! 그 다음에는 샤워를 하러 들어갔죠. 생각을 정리? 그럴 필요가 있었죠. 좀 진정할 필요가 있었죠. 하지만 욕실에서 진짜로 하고 싶었던 일은 따로 있어요. 그게 뭐냐면, 이 호텔은 소방 설비가 진짜 부실하잖아요? 그래서 그걸 이용하고 싶었던 거예요. 드라이기를 합선시키고, 가지고 있던 소독용 알코올을 사방에 뿌려서 완벽한 화재의 조건을 만들었죠. 말씀드렸듯이 미지의 인물 A는 훌륭한 살인마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이미 방화 전력도 여러 번 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지의 인물 A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으니까. 정당방위일 경우에는, 목숨이 위험할 경우에는 괜찮아, 하고요. 제가 다이아몬드를 찾아준다고 여러분이 절 살려둘 거란 보장이 있나요? 당신들 총 들고 있거든? 호텔 직원들 다 죽였거든? 이런 상황이라면 괜찮다고요! 오랜만에 마음껏 저지를 수 있다고요!
하지만 방화만으로는 부족해요. 불은 너무 늦게 퍼져요. 그래서 미지의 인물 A는 상황을 더 확실하게 만들 시나리오를 준비해 뒀죠. 고양이를 찾는다는 핑계로 주방으로 내려가, 조사하는 척하면서 가스 밸브에 손을 대면, 천연가스는 공기보다 가벼우니까 주방으로부터 서서히 퍼져서 불씨를 찾아 헤매고, 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아무도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해 두고! 그 다음엔 일사천리죠 뭐. 자기가 가져다둔 고양이 시체를 발견하는 척하고, 답을 알려주려는 척하면서 보스와 함께 바깥으로 나와ㅡ”
ㅡ쾅!
“ㅡ나이스 타이밍. 아아, 불꽃이 치솟는 광경은 진짜 쉽게 질리지 않는다니까요.”
고빌라는 화내지 않았어. 날 죽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어. 정말로 머리가 해골처럼 굳어버린 것 같았어.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나를 쳐다보다가, 마침내 고개를 돌려서 불길을 쳐다봐.
“그러고 보니까 아저씨들이 내가 있던 방은 안 뒤졌구나. 사람이 하는 일이란 게 항상 이렇죠. 바보 같은 실수를 하죠. 그런데 그거 알아요, 아저씨?”
그래, 불길을 쳐다보면서 들어요. 세상에서 제일 로맨틱한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
“다이아몬드가 영원한 사랑의 상징이라고들 하잖아요? 그래서 예물로 주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영원한 사랑의 상징 따위 섭씨 700도면 타 버린답니다.”
그래, 불타라, 차라리 불타라. 세상에 연인은 하나만 있으면 돼. 보스는 다시는 나한테 눈길을 돌리지 않았어. 대신에 중얼거리기 시작했어. 나는 모르는 언어였는데, 뭐라고 하는 걸까? 사랑하는 사람한테 달콤한 약속이라도 하려는 걸까? 저 다이아몬드를 가져다줄게, 그러니까 같이 살자, 부모님도 모시고 동생들도 데리고 커다란 집에서, 하고? 폭격으로 불타는 군벌의 저책에서 다시 다이아몬드를 훔쳐내는 상상이라도 하고 있는 걸까? 으응, 그건 몰라도 돼.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야. 다시 말하지만 세상에 연인은 하나만 있으면 돼.
“그건 그렇고, 다이아몬드가 호텔 안에 있다고는 하나도 한 적이 없는데.”
주머니에서 기분 좋게 달그락대는 다이아몬드의 감촉을 손가락 끝으로 느끼면서 나는 불타는 호텔을 뒤로 했어. 저렇게나 아름답게, 수십의 생명을 집어삼키면서 타오르는 불꽃이지만 너무 오래 보면 지루해질 것 같아서 슬프니까. 지금 손에 닿는 감촉은, 무색투명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게 생긴 결정에 불과하지만, 불꽃보다도 더 지루하지 않은 무언가가 있으니까. 영원하고 유일한 사랑의 상징이기 때문일까? 언젠가 이걸 결혼 예물로 줄, 그럴 생각이라도 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 답이 무엇이든지, 다이아몬드에는 뭔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마력이 있는 게 분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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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해요. 나홀로집에는 적어도 살인이 아니라 살인미수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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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댓글
마드리갈
2021-01-13 21:56:31
크리스마스다운 이야기...
하긴 이렇게 잔혹한 이야기도 크리스마스다울 수 있겠네요. 사실 오늘날의 크리스마스는 완전히 기독교의 유산이라기보다는 로마의 솔 인빅투스와 융합해서 만들어진 것인데다 로마의 관습 중에 오늘날에라면 전면금지되고도 남을 노예제, 검투사 경기 등이 상설적으로 열리는 투기장도 있었다 보니 완전히 불가능한 것도 아니겠네요.
분명 방화범죄는 무서운 것이죠. 게다가 화상에 민감하다 보니 니세코이의 오노데라 코사키같은 캐릭터조차도 이치죠 라쿠와의 만남의 시작이 화상위험을 초래하기 쉬운 사건이다 보니 굉장히 싫어하는 저로서는 이 상황이 반갑지만은 않네요. 그런데 이 사건을 보고 있는 독자인 저는 어느새 로마의 투기장의 관객의 한 사람이 되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