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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파 시리즈] 변신 이야기

로크네스, 2013-12-25 01:04:35

조회 수
874

푸파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 마지막이니만큼 굉장히 길어요. 평소보다 훨씬 길죠. 폭력적이고 길어서 길이의 폭력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감안하고 읽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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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이야기

  

애벌레를 고치로, 고치를 나비로, 나비를 먼지로 만드는 그 원인은 죄인가? 아이를 어른으로, 어른을 노인으로, 노인을 먼지로 만드는 그 원인 또한 죄인가?

-막스 뮐러

 

“경치 진짜 끝내준다! 그렇지 않아, 푸파?”

이거랑 비슷한 말을 언젠가 한 번 들어본 적이 있었던 것 같아. 지금하고 똑같이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캠프장에 막 도착했을 때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마 강원도 어디로 가족 여행을 갔을 때였을 거야. 그렇다면 경치 얘기를 한 사람은 아마 아빠였겠다. 비엔나 봉봉의 쓸데없이 발랄한 목소리 대신에 아빠의 쓸데없이 발랄한 목소리였을 거고, ‘푸파’가 아니라 ‘우리 사랑하는 딸’이었던 나는 아마 심한 멀미로 기진맥진한 채 아빠 차에서 비틀비틀 내리고 있었겠지. 그때랑 비교해서 달라진 점을 조금 꼽자면 지금은 버스에서 내리고 있고, 캠프장도 강원도가 아니라 아르덴 숲에 있고, 같이 도착한 두 사람이 부모님이 아니라 비엔나 봉봉하고 쿨도어고, 나는 엄마 취향의 괴상한 분홍색 드레스 대신에 실험가운을 입은 채고, 멀미가 많이 나아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치 얘기를 들으면서 “나한텐 엄청 지루해 보이는데.” 하고 생각하고 있는 건 똑같고, 멀미는 아니지만 어쨌든 몸이 안 좋은 것도 마찬가지. 엄마 대신에 쿨도어한테 기대서 비틀비틀 차에서 내리는 것도 마찬가지. 뭐야, 결국 중요한 부분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잖아.

특히 몸이 안 좋은 게 짜증나. 9월이 돼서 가을을 타는 건지, 수상한 약을 너무 많이 먹었는지, 벨기에에 숨어있던 미지의 바이러스에 감염됐는지, 아니면 다이아몬드에 얽힌 원혼들한테 저주라도 받고 있는지 최근 들어서 건강이 굉장히 나빠졌어. 무기력하고 온몸이 쑤시고, 머리는 뻥 터질 것처럼 아프고, 기분전환 겸 가볍게 운동이나 하려고 해도 너무 쉽게 지쳐버리지. 그저께에는 러닝머신 위에서 쓰러질 뻔 했다니까. 마침 헬스장에 있던 토피가 평소에는 그렇게 내 시선을 피하다가도 위급상황이 되니까 자존심 내팽개치고 달려와 준 덕분에 큰 부상은 피할 수 있었어. 그렇다고 걔랑 다시 사귀고 싶은 마음이 든 것도 아니고(그러느니 부상을 당하는 게 나아), 물론 몸 상태가 극적으로 개선되지도 않았지만. 이런 참담한 꼬락서니 덕분에 비엔나 봉봉이 제안한 대로 멍청한 축제에서 멍청하게 시간을 보낼 생각은 완벽하게 사라졌지. 그래, 그건 긍정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무슨 얘기냐면, 9월 초에 루벤에선 커다란 축제가 열리거든. 관람차(아무 의미도 없이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지루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기구), 회전목마(아무 의미도 없이 빙빙 돌면서 지루하게 시간을 낭비하는 기구), 각종 노점상(평소에도 먹을 수 있거나 입에 대기도 싫은 음식을 사는 데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곳)이 온 도시를 빼곡히 채워. 그딴 걸 같이 구경하자고 하는데, 걔도 그렇지만 나도 작년에 이미 봤거든? 그걸 또 가자고 했으니 내 반응도 뭐 예상할 수 있는 범위겠지.

“차라리 죽여. 원망 안 할게.”

그러니까 하는 말이, 축제날에는 학교도 쉬는데 뭔가 하지 않는 건 죄악이라는 거야. 나처럼 불쌍한 여자애를 괴롭히는 것보다 더 큰 죄악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지.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한이 있어도 축제만은 가기 싫다고 난 끝까지 버텼고, 지금도 나를 부축해 주고 있는 쿨도어가 그 때도 내 편을 들어줬어. 적어도 축제 말고 다른 데 갈 수 있지 않겠냐고.

“캠핑 같은 것도 있잖아!”

쿨도어 말이 내 건강이 나빠진 건 루벤에 종일 틀어박혀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공기 좋은 데서 푹 쉬게 해 주자는 거야. 처음엔 “그것도 싫거든!” 하고 태클을 걸 작정이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까 처음 가족들하고 갔던 캠핑은 지루하긴 했어도 그렇게까지 나쁘지만은 않았거든. 적어도 축제보다는 나을 거란 말이야. 인터넷을 좀 뒤져보니까 아르덴 숲에서 하는 캠핑이 그나마 괜찮을 거 같더라고. 나랑 쿨도어가 끝까지 우긴 덕에 캠핑 쪽으로 살짝 마음이 기울어가던 비엔나 봉봉은 특가 할인을 하는 캠프장을 보고 완전히 격침. 요즘 아르덴 숲에 살인마가 돌아다닌다는 미확인 소문에 대해서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특가 할인을 하는 거라고 비엔나 봉봉한테는 절대로 밝히지 않았지만, 사실 그 살인마 얘기는 총에 맞은 채 호수에 떠 있던 시체 하나랑 이상한 표식들 가지고 자아낸 일종의 음모론 같은 거고 나도 냉정하게 생각하면 별로 기대하고 있는 건 아니란 말이지. 어쨌든 존재 여부조차 불분명한 살인마 덕분에 모든 일이 계획대로 되긴 했어. 그건 긍정적인 일이고 분명히 기뻐해야 할 일이지. 다만,

“지금은 좀 어때, 푸파? 몸 괜찮아?”

쿨도어의 이 물음에 “응, 좀 괜찮아졌어.” 라고 대답해줄 수 없다는 게 문제야. 억지로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어. 뇌도 결국엔 몸의 일부, 몸이 아프면 생각도 따라서 우울해지게 마련. 아직 빛이 바래지 않은 초가을의 녹음에 둘러싸여서도, 따사로운 햇살과 상쾌한 바람 아래 캠프장을 걸어가면서도 내 뇌는 암흑에 둘러싸여 음울한 진창으로 걸어 들어갈 뿐이야.

 

짐을 풀고 텐트를 치고 그 안에 틀어박히는 와중에도 우울함의 수면에서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생각은, 바로 얼마 전에 아르투아 교수랑 했던 면담의 기억. 그래, 우울한 건 꼭 몸이 아프기 때문만은 아니야. 금요일 아침 면담이 항상 지루하긴 하지만 그것 때문에 우울해지는 것도 아니지. 지루함이 불러오는 우울 가지고 이렇게 호들갑을 떨었다면 난 벌써 한참 전에 목을 매달았을 거 아냐. 하지만 이번엔 달랐어. 면담은 그냥 지루한 것도 아니었고, 절망적으로 지루한 것도 아니었고, 그냥 절망적이었어.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자다가 갱단한테 습격당해서 생명의 위협까지 겪은 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으면서도 아르투아 교수는 굉장히 침착했어. 밤에는 막 벌떡벌떡 일어나고 그러겠지만, 적어도 나랑 만나는 아침에는 멀쩡하기 짝이 없었지. 검사 결과는 전혀 멀쩡하지 않았지만. 그건 교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지.

“왜 그래요? 설마 제가……, 미쳤다는 결과라도 나왔어요? 그건 사양인데!”

하, 하, 하! 이딴 농담이나 할 정도였으니 내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는 잘 알겠지? 이번 검사는 내가 특별히 부탁해서 한 거였어. 교수는 별로 내켜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었거든. 왜, 가끔씩은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해보고 싶을 때가 있잖아? 몸 상태가 나빠서 마음도 착 가라앉고 의욕도 없고 그렇지만, 객관적인 검사 결과를 보면 어떻게든 기분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어. “치료 끝! 당장 집으로 돌아가세요!” 같은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면 몸도 씻은 듯 나을 것 같고 그렇지 않더라도 어딜 어떻게 노력해야 될지는 알 수 있으니까 의욕이 생길 거 아냐ㅡ그래, 사실 그것까지 생각하고 받은 건 아니야. 그냥 확인하고 싶었어. 내가 얼마나 나아졌는지, 언제쯤 이 우울한 곳에서 벗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비타쿠스 아피칼리스에게 멋진 다이아몬드를 전해줄 수 있을지. 언제쯤이면 네 이름을 다시 소리 높여 외치면서, 잠에서 막 깼는지 부스스한 그 엉킨 머리를 멋대로 쓰다듬으면서, 네 뺨에 입을 맞추고 반대쪽에 또 맞추고, 그 가느다란 팔다리를 영구기관처럼 손으로 쓸고 혀로 맛볼 수 있을까, 달아오른 피부와 뜨거운 점막을 맞댈 수 있을까, 네 귀에다 대고 속삭일 수 있을까, 좋아해, 사랑해, 만나고 싶었어, 같은 말들이, 지난 2년 동안 네게 닿지 못하고 뇌세포 사이사이에서 소용돌이치며 끝없이 뿜어져 나오며 거대한 나선은하가 되어버린 말들이, 아마 우주의 종말까지 계속 속삭일 수 있을 것 같아, 하지만 할 수 있을지, 가능한 일일지. 나는 정확히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그리고 대다수의 달콤한 상상들이 그렇듯이 내 로맨스도 현실의 망치 아래서 무자비하게, 철저히, 한 조각도 남김없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지. 교수가 내게 건네준 검사 결과가 바로 그 현실의 망치였어.

처음엔 결과 보고서에 적혀있는 내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어.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섯 단계 중 첫 번째가 ‘부정’이었던가? 나한테 그 결과는 죽음만큼이나 끔찍한 거였고, 그래서 결과를 부정하려고 애쓰기 시작했지. 받아보고 나서 처음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나.

“이거 좀 이상한 거 같은데요?”

“아니에요. 그 결과가 정확해요.”

두 번째 단계는 분노. 오, 그래. 분노하고말고. 도대체 어떤 멍청한 돌팔이가 이딴 터무니없는 결과를 내놓은 거야?

“전 2년 넘게 치료를 받았어요! 좀 있으면 3년이 된다고요!”

“알아요. 하지만 결과가 이렇습니다.”

세 번째는 협상-협상 좋아하네! 분노가 아직 안 끝났거든! 난 여기 치료받으러 왔어. 더 나아지러 왔다고. 그런데 2년이 지나도록, 이 보고서에 따르면……,

“2년 전에 비해서 단 하나도 나아진 게 없다는 게 말이 돼요?”

정말로 단 하나도 없었어. 2년 전 수치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코멘트도 전부 머릿속에 저장돼 있는데, 소수점 하나 토씨 하나 달라진 게 없다고. 2년 전 여기 벨기에에 올 때와 완전히 똑같은 정도로 병적이고 이기적이고 가학적이고 반사회적이고, 나르시시즘이랑 마키아벨리즘 정도도 그대로에, 심지어 뇌 영상 촬영 결과도 예전 사진을 복사 붙여넣기 한 것처럼 생겼단 말이야!

“그래서 검사를 안 받는 게 좋겠다고 말했잖아요.”

받아야 했어! 뭔가 나아진 게 있다는 걸, 그래서 당장이라도 그 애를 만날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다고, 그러면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고! 그런데 결과가 이래, 단순한 우울에서 ‘죽음을 수용하는 제 4단계 : 우울’로 멋지게 다이빙했어. 그리고 그 우울함 가장 깊은 곳에는 이런 생각이 바다뱀처럼 똬리를 틀고 있지. 2년 내내 차도가 없으면 3년, 4년, 10년이 지날 때도 차도가 있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어?

 

그 날은 내내 교수 방에서 화를 내다가, 마지막엔 펑펑 울다가, 간신히 진정하고 방에 돌아와서 또 쓰러져 울었어. 뭘 부술 기운도 안 났어. 그렇게 하면 정말로 내가 달라진 게 없다는 걸 증명하는 꼴밖에 안 될 것 같아서. 이미 그 증명은 내 손에서 구깃구깃 구겨지다 못해 종이뭉치로 변해 있었지만. 그리고 지금 여기, 아르덴 숲의 캠프장 텐트 안에서 가만히 누워있는 내 머릿속을 민달팽이처럼 생생히 기어가며 온 머릿속에 끈적이는 우울함의 자국을 남기고 있지만. 그 자국을 따라서 통증이 저릿저릿 퍼져나가고, 혈관을 따라 전신으로 퍼지면서 손끝 발끝을 간질이고 아랫배에 모여들어 소용돌이쳐. 잔뜩 예민해진 센서들이 그 신호를 받아들여 다시 뇌로 피드백, 그리고 다시 우울한 증명의 톱니바퀴는 돌기 시작하고.

그래, 몸이 이렇게 되니까 신경까지 잔뜩 예민해졌어. 얼마나 예민하냐면, 그래, 얼마 전에 내가 너무 기운이 없으니까 쿨도어가 와플을 사준 적이 있거든? 그 자리에서 먹고, 어쩐지 부족해서 또 먹고, 배는 부른데 그래도 이상하게 더 먹고 싶어서 세 개째 시켜서 먹으려니까 그만 먹으라고 하는 거야. 그 자리에서 포크를 집어던져서 쿨도어 눈 밑을 몇 센티미터 정도 찢어놨어(테이블에 집어던질 생각이었는데 조준이 빗나간 거지만, 결과적으론). 어째서인지 걔가 사과했지만, 응, 걔는 요즘 확실히 좀 이상하고 그건 내 문제가 아니니까. 중요한 건 센서는 수백 배 민감해졌는데 브레이크는 제대로 작동을 안 한다는 거야. 쉽게 화가 나고 쉽게 극단적인 행동을 하고, 그 다음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문구가 머릿속을 맴돌면서 쉽게 후회하고. 악순환의 교과서적인 사례지. 단순히 순환하기만 하는 것도 아니야. 왜냐면 뭐든지 똑같은 사이클을 빙빙 돌다 보면 진절머리 나는 부산물을 내놓게 마련이거든. 익숙하고 친근하고 소름끼치는 지루함 말이야.

지루함, 그래, 근본적인 지루함. 내 머리에 착 붙은 채 태어난 사악한 샴쌍둥이. 조금이라도 가만히 있으면 그 녀석은 센서의 스위치를 켜고 브레이크의 나사는 풀어버리지. 이건 뇌의 문제야. 태어날 때, 어쩌면 DNA의, 이중나선의 어느 한 부분이 잘못되어서 생긴 오작동으로 인해, 어쩌면 어머니가 나를 임신한 채로 먹어서는 안 되는 약을 먹었기 때문에, 어쩌면 단지 태어날 때 산소가 잠깐 부족해서 생긴 뇌의 이 흉터. 오래 된 흉터에서 번지는 멈출 길 없는 가려움처럼 온몸이 지루함에 잠식되어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교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비엔나 봉봉도, 쿨도어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여동생도, 한국과 벨기에에서 만난 그 어떤 사람들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단 한 명을 제외하고, 말이지. 생각이 여기에 이르게 되면 이젠 멈출 수 없어. 강박적으로 상처에 앉은 딱지를 긁어 떼어내듯이, 고통스러울 것을 알면서도 사고의 나락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거야ㅡ

 

“푸파! 푸파! 얘 좀 봐봐! 너무 귀엽지 않아?”

 

이번엔 비엔나 봉봉한테 고마워해야겠네. 우울한 생각은 하다 보면 끝이 없으니까, 이렇게 딱 끊을 계기라도 있어야지. 별로 재밌는 계기는 아니겠지만. 텐트 밖으로 몸을 반쯤 내미니까 거기엔 쪼끄만 금발 곱슬머리 여자애 하나가 아장아장 걸어가고 있었어. 어머니는 근처에 있는 것 같고, 가족 여행인가보지. 비엔나 봉봉이랑 쿨도어는 걔 보면서 귀엽다고 난리야.

“아, 그래. 귀엽네.”

귀엽긴 무슨. 솔직히 말하면 저런 꼬맹이 따위 진절머리가 나. 여동생을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딱 저 나이였거든. 한심하게 빽빽 울어대기나 하고, 떼나 쓰고, 똑같은 말을 몇 번씩 하고, TV에서 해 주는 만화 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하려고 들고. 그 날도 그랬어. 만화가 끝나니까 심심한지 계속 같이 놀자고 귀찮게 하다가, 내가 화를 내니까 또 징징 짜다가 침대에 기어 올라가서 잠이 들었지. 그 작은 애가 일주일 내내 손꼽아 기다리던 만화 다음 편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된 그 날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침대 아래 걸터앉아서 생각했어. 시간이 이것밖에 안 지났네. 엄마 오려면 한참 남았는데. 앞으로도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왜 시간은 이렇게 느릴까, 이렇게 길까 하고, 그리고 그게 바로 금요일 아침 상담 때마다 내가 하는 생각이야! 어라, 달라진 게 없어? 정말로 난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거야? 정말로, 2년이 지나도 3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난 나아질 수 없는 거야? 아아, 머리가 아파, 손을 내려다보면 거기엔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피가 선명하게, 그래, 그런 짓을 저질러놓고 더 나아질 걸 바라는 것도 이상한가, 정말로 그 애한테로, 나의 사랑스러운 만티스 렐리기오사한테로는 영영 돌아갈 수 없는 걸까, 아니, 하면서 고개를 세차게 저었어. 피는 없어. 환각인가? 내가 지금 환각을 보고 있는 건가? 하려는 찰나에 사라져버리고. 나쁜 징조야. 확실히 몸이 안 좋긴 안 좋은가봐.

 

상태가 이러니 가방에 처박아 둔 수영복은 꺼내지도 못했고(내 취향에 맞는 정말 굉장한-그러니까 자원 절약의 혁명이라고 할 정도로 천을 적게 사용한 수영복인데!), 결국엔 비엔나 봉봉 혼자서만 신나게 물놀이 하러 가게 됐어. 쿨도어? 내가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고 옆에 있어주겠다나 뭐라나.

“너 저번에 엄청 비싼 수영복도 샀잖아! 누군가 보여주긴 해야지!”

비엔나 봉봉이 이러면서 끌고 가려고 해도 요지부동.

“난 혼자 있어도 되는데.”

이렇게 주장해도 꿈쩍하지도 않지. 비엔나 봉봉이 떠나고 나서야 주섬주섬 준비해서 어디 가려고 하는 것 같은데, 이번엔 또 나를 끌고 가려고 하네.

“저쪽에 낚시터가 있대. 경치 좋다는데.”

“지루할 거 같은데.”

낚시처럼 지루한 걸 하는 사람들을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해해 본 적이 없어.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지루하게 만든다고.

“그래도 가자, 푸파. 이왕 캠핑 왔는데 바깥 공기도 쐬고 그래야지. 그래야 아픈 게 나아.”

그런 건 말라리아가 나쁜 공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했던 고대 로마 시절에나 통하던 의학이야. 바야흐로 과학과 이성의 21세기에 헛소리는 작작 해야지.

“푸파,”

그래, 차라리 진지하게 말해. 쿨도어 너한텐 그게 훨씬 잘 어울린다니까. 요즘은 뭐에 홀린 것처럼 흐느적거려서 기분 나쁘다고. 얼굴도 너무 가깝고 말이야. 하프도 그렇지만, 참 사람이 미치는 것도 한순간이다 싶다니까. 그래서 무슨 진지한 말을 하려는 건데?

“몸이 안 좋고 기운이 없다고 가만히 있으면 안 돼. 그럴 때일수록 변화를 줘야지. 관성의 법칙 몰라? 가만히 있으면 계속 가만히 있고, 움직이기 시작해야 계속 움직이는 거라니까.”

고대 로마 시절에도 그딴 물리학은 안 통했어! 정말 학점은 잘 받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덜떨어진 소리를 할 수가 있지……, 하지만 이런 멍청한 논리를 가지고도 쿨도어는 굉장히 끈질겼는데, 생각해 보니까 이 녀석은 안 되는 건 확실히 포기해도 가능한 일에는 최선을 다하는 성격이었단 말이지. 현재 나는 장갑을 끼고 있어서 센서는 예민하지만 브레이크는 확실하게 작동하는 상태고, 몸에 힘도 별로 없고, 무엇보다 쿨도어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단 말이지. 이거 참 지루한 상황이네. 차라리 낚시터가 나을 정도로.

“알았어, 알았다고.”

“그럼 가는 거지? 걸어갈 수 있겠어? 업어줄까?”

부축이나 제대로 해, 아니, 그냥 멋대로 해라. 이 바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지 지금은 그냥 아픈 사람의 특권을 누리는 게 좋겠네. 쿨도어는 나를 업고 걸으면서 심하게 휘청거렸고, 덕분에 조금 덜 지루했던 게 그나마 다행이었어.

 

그렇게 낚시터가 있는 호숫가에 도착하고 나서야 알게 된 건데, 확실히 쿨도어는 날 걱정해서 같이 있어주겠다고 한 건 아닌 것 같아. 아니 뭐, 쿨도어가 생각하기엔 밖에 나와서 좋은 공기라도 쐬는 게 내 건강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주된 이유는 아니라는 거지. 호숫가 나무그늘에 앉아서 내 기진맥진한 얼굴을 힐끗힐끗 쳐다보기만 하는 걸 보면 확신할 수 있어. 이 여자는 단지 경치 좋은 곳에서 나랑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이야. 그냥 텐트에 있는 것보단 이게 분위기가 좋다 이거지. 할 수 없는 일은 깔끔하게 포기하지만 가능한 일에는 최선을 다한다 이거지.

“어때, 기분이 좀 낫지?”

아니면 그냥 순수하게 내 건강을 염려한 걸 수도 있고. 방법이 굉장히 수상쩍은 우격다짐이긴 했지만, 확실히 공기도 경치도 텐트 안보단 여기가 훨씬 나으니까. 호수는 깨끗하고 나무는 푸르고, 캠프장 홈페이지에는 사람이 무지 많은 것처럼 나와 있었는데 실제로는 특가 할인을 하는데도 한산해서 더 나았고, 왠지 여기서도 아장아장 걸어 다니다가 가끔씩 프랑스어로 “아, 아까 그 예쁜 언니다!” 하면서 나를 보고 까르르 웃는 금발 애새끼는 짜증나고.

“낚시 할래? 낚싯대 대여가 된대. 내가 받아올까?”

그래, 애새끼가 아무리 짜증나게 굴어도 너만 하겠니. 내가 시큰둥하게 구니까 쿨도어는 이번엔 호숫가에 서서 능숙하게 낚싯대를 휘두르는 여자애를 가리켰어. 동그란 안경을 끼고 어깨까지 오는 풍성한 갈색 머리를 찰랑찰랑 흩날리면서, 휘파람으로는 슈베르트의 《송어》를 즐거이 불면서, 그거 분명히 낚시꾼이 송어를 잡는 걸 굉장히 떨떠름하게 바라보는 내용이라서 별로 선곡이 좋지 않은데, 어쨌든 노래 내용대로 낚싯바늘로 불쌍한 물고기를 꿰어 바닥에 내팽개치는 모습을. 어때? 너랑 나이도 비슷해 보이는데. 한 번 해 봐!

“해. 한다고. 그만 좀 귀찮게 해.”

아까도 생각한 거지만, 낚시가 차라리 너랑 있는 것보단 덜 지루하겠다. 이 플라이 낚시라는 건 생전 처음 해보는 거고, 호숫가에 멍청하게 서서 뭘 어떻게 휘둘러야 생선이 잡히는지 나는 도저히 아는 바가 없지만 그래도 비교하자면 말이야. 쿨도어가 뒤에서 카메라를 꺼내서 연신 사진을 찍어대는 걸 무시하면서 나는 옆에 있는 여자애를 어떻게든 따라하려고 애썼어.

물은 반짝이고 낚싯대는 흔들리고 내 몸도 흔들리고, 힐끗 옆을 보면 프랑스 여자애가 내팽개쳐진 물고기를 쿡쿡 찌르면서 놀고 있어. 동물 학대, 그래. 나도 저 나이 때부터 꽤 좋아했지. 넌 소질이 있구나. 나도 그런 짓 꽤 좋아해ㅡ지금도 그렇고. 정말 바뀐 게 없어. 나아진 게 없어. 검사 결과대로야.

아니, 정말로 아주 어릴 때부터 바뀐 게 없는지, 그 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똑같이 미친 살인광이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건 아니야. 분명히 어느 한 순간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바뀐 적이 있기는 해. 그 이후의 나는 결코 그 이전의 나와 같을 수 없었지. 약에 취한 것처럼, 완전히 중독되어버린 것처럼 모든 사고체계가 새로 짜였으니까. 까마득한 오래 전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또 얼마 전이라는 느낌도 들어, 응, 그건 거의 4년 전의 일이었어. 아무도 다시는 만화를 틀어놓지 않게 되었던 날로부터 아마 몇 달 후였을 거야.

홀로 남은 나한테 부모님은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어.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난 언제나 ‘우리 사랑하는 딸’이었으니까. 그렇게 난 혼자 쓰는 컴퓨터를 손에 넣었지. 그것 자체만으로는 사실 별다른 변화가 없었어. 인터넷이란 항상 나쁘지 않은 도구였고 지금도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결코 지루함을 덜어줄 수 없는 법이니까. 나는 조금이라도 지루하지 않은 모든 정보를 정말 필사적으로 흡수했지만 그렇게 쌓인 정보들은 순식간에 지루해졌어. 조금이라도 지루하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게 말을 걸었지만 곧 그 사람들도 지루하기 짝이 없는 족속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어. 정보의 바다가 회색 진흙의 바다로 변하고 노트북이 다섯 개째 박살날 무렵이었지만, 부모님은 어처구니없이 마음이 좋으신 분이었고 나는 여섯 번째 노트북으로 회색 진흙 속에서 진주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지. 그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내가 아는 탈출구는 그것뿐이었으니까ㅡ그래, 그 때 찾아낸 거야. 진주 따위가 아닌, 차라리 100 캐럿이 넘는 다이아몬드라고 해도 좋을, 아니, 어떤 비유로도 표현할 수 없는 내 삶의 이유를. 그 카페의 그 게시판에서 왜 하필 그 글이 눈에 띄었을까. 만약 어떤 거대한 섭리가, 천지만물을 주관하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책임지는, 다시 말해서 이 모든 사태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잔혹한 고문장치의 신이 존재한다면, 아마 내가 그 글을 클릭한 것도 신의 섭리겠지. 신에게 고마워해야 할 내 인생 단 하나의 일이었고, 벨기에의 모든 사람들을 산 제물로 바쳐 드리고 싶을 정도로 고마운 일이었어, 그건. 나는 별 생각 없이 댓글을 달았고, 그 애도 다시 댓글을, 그렇게 댓글은 대화가 되었고 우리는 채팅방으로 옮겨갔어, 믿을 수가 없었어, 그런 감각이, 그런 기분이, 그런 정신상태가 내 안에 존재할 수 있다니! 이게 진짜로, 진짜로 지루하지 않을 때의 감각이구나! 유레카! 유레카! 홀딱 벗고 뛰어다니기에는 그 애와의 대화 하나하나가 너무 소중했지만!

황홀했지, 응, 황홀함의 번개가 정수리에 내리꽂혀 전신을 짜릿짜릿하게 관통하는 매일이었어. 지루하지 않았어. 그 애는 항상 나를 놀라게 했고, 나를 기쁘게 했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이해해주었어. 처음엔 개미에 대해서 말했고 그 애는 이해하는 듯 보였어. 고양이에 대해서도 말했는데 그 애는 정말로 이해하는 것 같았어. 조심스럽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꼭 누르면서 여동생에 대해 말했는데, 잔혹한 섭리시여, 믿을 수 없사오나 저 아이는 정말로 이해하고 있사옵나이다. 그 다음부터는 기억도 안 나. 정말 모든 걸 털어놓았어. 그 애는 묵묵히 들어주었어. 그리고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모니터에 떠오르는 글자들, 그래, 내가 생각하는 게 그대로 떠오르면서, 그 모든 순간들. 그 애는 진짜 탐정이었어. 추리소설을 좋아한다고 했어. 그 애가 좋아할만한 것들을 이것저것 전부 가르쳐주었어. 범죄에 대해서 이상심리에 대해서 질병과 증상에 대해서 독과 약물에 대해서 전부, 하나도 남김없이, 그 애는 전부 이해했어. 내게 모든 것을 배우면서 모든 것을 이해해갔지. 내가 묻는 모든 것을, 내가 궁금해 했던 모든 것을 이해하고 또 대답해 주었어. 나를 둘러싼 세계, 이해할 수 없는 지루함으로 가득한 세계가 마침내 이해 가능한 수식과 문자열로 환원되기 시작했어. 농업혁명 과학혁명 산업혁명? 웃기지 말라 그래. 그 사람들은 이런 혁명을 맞이해본 적이 없어. 그 때의 감각을 비유하자면, 그래, 물고기가 처음 육지로 올라와 바깥 공기를 들이마셨을 때, 연약하고 부드러운 폐를 가득 채우는 차갑고 아린 산소의 감각. 그 순간 나는 이전까지와는 다른 세계에 살게 되었던 거야. 평생 물속에서 살다가 낚싯바늘에 걸려 물 밖으로 내동댕이쳐진 저 물고기처럼, 회색 진흙 속에서 얼어붙어 있던 시간이 마침내 흐르기 시작했어.

덜떨어진 물리학을 다시 가져오자면 이건 그야말로 뉴턴의 운동 제 2법칙, 가속도의 법칙. 힘은 계속 가해지고 속도는 점점 늘어나고, 시간의 흐름은 점점 빨라지며 격렬해지고. 나는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어. 그 애도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어. 사진을 공유하면서 살아온 삶을 공유했어. 처음 그 애의 사진을 봤을 때의 그 느낌, 그래, 저런 어린애한테 느낀 감정을, 난 결코 잊지 못할 거야. 그렇게 모든 것을 공유해가면서 나는 조금씩 그 애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어.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가슴은 요동쳤어. 그 애는 여전히 나를 전부 이해해주는 듯 보였어. 하지만 가슴속에 남은 혁명 이전의 잔재는, 온 몸을 다 풀어헤친 채 침대에 누워 일어나지 않는 여동생을 보고도 부모님이 보였던 그 반응을 되새겨보면, 아직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어. 확신해야만 했지. 세상에는 지루하지 않은 것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어. 게다가 마침 그 애는, 나의 사랑하는 브라콘 헤베토르는 아주 꼬인 가정에서 살고 있었거든. 그 애 앞에서 정말로, 텍스트가 아니라 실제 장면으로 내 감정을 보여주기로, 그리고 그 애가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면 난 정말로ㅡ

“푸파!”

 

그래, 잘 했어. 마침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던 차였는데, 역시 생각은 제때 끊어야 한다니까. 그러고 보면 쿨도어가 저렇게 소리치는 거 전에도 한 번 들어본 적 있는데, 약 먹고 정신 나가 있던 때였나? 그럼 지금은 왜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 거지? 그리고 시야는 왜 이렇게 점점 기울어져 보이는 거지? 음, 글쎄, 내 생각엔 아마도, 몸도 안 좋은데 낚싯대 멋대로 휘두르면서 딴생각 하다가, 두통 때문에 균형을 잃어버린 것 같네. 젠장. 그리고, 첨벙.

“푸파! 괜찮아?”

“호들갑떨지 마. 별로 안 깊어.”

쿨도어가 내미는 손을 잡고 기어 올라오니 온 사방에서 물방울이 뚝뚝. 초가을에 흠뻑 젖으니까 역시 춥네. 쿨도어는 자기가 오자 그래서 그렇다고 미안하다면서 호들갑을 떨다가, 내가 가운을 벗어던지려고 하니까 더 심하게 호들갑을 떨고, 그러면서도 볼 건 다 보고 있고, 뭐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중요한 건 첫째로 내 상태가 생각보다 훨씬 많이 안 좋다는 거고, 둘째로 기껏 빌린 낚싯대가 호수에 빠져 사라져버렸다는 거야. 아니다, 둘째 문제는 별로 안 중요하다. 쿨도어가 알아서 변상한다네.

“진짜 괜찮은 거지? 걱정 안 해도 되지?”

안 해도 된다고 말해도 할 거잖아. 정말로 걱정 안 해도 되지만. 기껏해야 여기에 감기 정도 더 걸리는 거 아니겠어? 어차피 물에 빠지는 것 정도로는 나를 더 이상 우울하게 만들 수도 없다고. 이 정도의 사건으로는, 고작 이 정도의 변화로는 나를 움직일 수 없어. 변화가 필요하다는 건 나도 인정해. 하지만 옳은 말을 하기란 쉬운 법이라고, 쿨도어. 항상 중요하고 또 어려운 건 ‘어떻게’야. 그 애는 나를 바꿀 수 있었지만 이 아르덴에는,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와 독일과 프랑스 네 나라의 국경이 모이는 곳인데도 그 애만큼은 없어. 여기에서 내가 어떻게 바뀔 수 있겠어? 어쩌면 이거야말로 관성의 법칙일지도 몰라. 변하지 않는 건, 결국 변하지 않아.

 

가능하면 이런 기분으로 칼을 잡고 싶지는 않았어. 칼을 쓰는 게 아주 즐겁지는 않아도 나한테는 그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의 한 조각이거든. 하지만 저녁으로는 바비큐 파티가 예정되어 있었고, 감격스러울 정도로 생각이 없는 비엔나 봉봉은 나한테 고기 손질을 맡겼어. 아르투아 교수가 봤으면 아마 기겁했겠지. 내 방에는 가위도 없는 거 알아? 내 팔만큼 길고 톱날이 난 칼은, 오랜만에 쥐었지만 정말로 익숙한 감촉이었고 덕분에 손에서 다시 피가 뚝뚝 흐르는 환각이 보이기 시작했어. 고개를 흔드니까 알코올과 함께 증발해버리는 환각이었지만, 머리도 계속 아프고, 고기는 멋지게 잘라지고, 사각, 사각, 사각,

그래, 이 감촉. 금속을 타고 손잡이를 지나 피부로 전해지는 진동. 혈관을 거꾸로 흘러 팔을 거쳐서 심장으로, 뇌로 전해지는 짜릿함. 단순히 고기를 자르는 것 때문에 느껴지는 건 결코 아니야. 이 행위 자체는 그저 지루할 뿐. 하지만 이를테면 홍차에 적신 예쁜 마들렌을 한 입 먹자마자 그 맛을 느꼈던 과거로 정신이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고기를 써는 감촉만으로도 과거에 비슷한 일을 했던 경험이 소름끼치도록 생생하게 느껴질 수 있는 거라고. 그 때는 훨씬 큰 고기였고, 핏물도 안 뺀 고기였지만. 손에 흐르는 피를 다시 느끼면서 주위를 둘러보면 나는 어느새 캠프장이 아니라 어느 집 침실에 있어, 숨을 한껏 들이마시면 낡은 가구의 냄새와 새로 흘러내린 피 냄새가 아찔하게 뇌를 자극해, 그래, 이 날이었어. 내 시간이 가장 빠르게 흘러갔던 날, 그리고 다시 얼어붙었던 날, 그런 날이 있었어……,

피 냄새로 가득한 방에서 조금 시간을 뒤로 돌려 보면, 밤늦게 학원을 마치고 버스에서 꾸벅꾸벅 졸며 돌아가는 내 또래들과 언니 오빠들 사이에, 자주색 트레이닝복 위에 하얀 외투를 걸치고 야구모자를 푹 눌러쓴 내가 다소곳이 앉아 있어. 무릎 위로 꼭 끌어안은 배낭 안에는 준비물이 가득. 오래도록 계획한 끝에 모든 준비는 끝났어. 나의 사랑스러운 루키올라 크루시아타, 네가 얼마나 날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 줄 시간이야. 네가 알고 있는 계획은 이렇겠지. 불합리한 논리와 규칙이 지배하는 집에서, 부모님에게서 도망쳐서 나와 함께 벨기에로, 네가 그렇게나 가자고 주장했던 벨기에로 날아가서, 위조해 둔 신분증을 가지고 새로운 두 사람으로 재탄생해 둘이서만 영원히 사는 거야. 힘들지라도 둘이 있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말했고 너는 동의했지. 그 계획 자체에 거짓말은 없어. 말하지 않은 디테일이 있을 뿐.

버스를 갈아타고, 한참 걸어서 멀리 떨어진 정거장에서 다시 타고, 외투를 벗어서 배낭에 집어넣은 다음에 택시를 타서 괜히 뒤로 돌아갔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행적을 숨기려는 것만은 아니었어. 뭐랄까, 긴장되는 것도 당연하잖아? 내 인생에서 최고로 중요한 날이라고? 그래도 언젠가는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는 법, 그 6월 초의 밤에, 내 기억이 맞는다면 무슨 지방선거 날이었고, 마침내 긴 여행을 끝마쳤을 무렵 시간은 새벽 두 시. 겨울엔 어떻게 다니나 싶을 정도로 경사가 심한 골목길을 발걸음도 가벼이 올라서, 좋아, 이 집이 맞지, 공주님이 갇혀 있는 악마의 성은 그 애가 말했던 것과 똑같이 생긴 단독주택이야. 거창한 대문도 있고, 담벼락 옆의 노란 쓰레기통도. 이걸 밟고 올라가면 담을 뛰어넘을 수 있어. 정원을 가로지른 다음에는 이 날만을 위해서 지루함을 꾹 참고 연습해둔 낡은 자물쇠 따는 법. 딸깍, 딸깍, 수십 수백 번 연습해서 눈 감고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현관문 여는 것도 순조롭고. 멋져, 전부 계획대로야. 문이 열리는 소리까지 전부. 현관 너머로 펼쳐진 어둠에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쾅쾅 울렸어.

“시, 실례하겠습니다.”

막 이래. 신발은 딱히 벗어놓지 않고, 거실을 흙발로 짓밟으면서, 그 애가 말하길 자기는 보통 소파에서 잔다고 했는데 어디에 있는 거지. 정말이지 부모는 무슨 생각이람. 저렇게나 가냘프고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애를 그런 식으로 대하다니. 벌을 받아야 해, 암 그렇고말고. 어두워서 잘 안 보이지만 TV가 저쪽이니까 소파는 아마 그 반대편에 있겠

 

“거기 야채 좀 이쪽으로 줄래? 푸파? 푸파, 뭐 해?”

 

이런, 아무래도 잠깐 정신을 놓고 있었던 것 같네. 환각도 아직 조금씩 보이는 것 같고, 이러면 안 되는데, 하지만 아무리 벗어나려고 노력해도 그 순간을 생각하면 할수록 정신이 점점 흐려져서 빠져나올 수가 없어. 환각하고 현실이, 아아, 구분이 잘 안 가는데 그도 그럴 게, 그 날 처음으로 그 애를, 모니터를 통해서가 아니라 진짜 두 눈으로 보았는데,

 

“거기 소금이랑 후추 있지 않아? 푸파?”

 

보았는데, 아 정말, 이 부분을 생각하려고 하면 항상 그래. 기억 속에 섬광탄이 터진 것처럼 제대로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어. 자세히 보려고 하면 할수록 뇌세포는 점점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태양을 똑바로 쳐다보기라도 하는 듯 눈이 타는 빛 속에서 어두운 형체만이 춤을 출 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응, 그것 정도는 알고 있어.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추측하고 확신할 수는 있어. 내가 뭘 하러 여기에 왔는지조차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저 소파 위에서 인기척에 부스스 일어나는 그 애를 꼭 껴안았겠지. 아마 껴안는 걸로는 끝나지 않았을 거야. 내 첫 입맞춤이었을지도 몰라. 낡은 잠옷으로 가려진 맨살을 영원처럼 쓰다듬었을지도 몰라. 만화였다면 아마 하트가 퐁퐁 솟아나왔겠지, 아니면 모자이크 처리가 됐겠지. 그러면서 귀에 끊임없이 사랑을 속삭였을지도 몰라. 나의 사랑하는 헤미플레비아 미라빌리스, 나의 사랑하는 시멕스 렉툴라리우스, 나의 사랑하는 마기시카다 셉텐데심, 분명히 그랬을 거야.

그리고 지금, 비엔나 봉봉이 날 흔들어 깨우면서 정신을 차리게 한 것처럼, 그 때도 바깥에서 들려온 빵빵 소리에 정신을 차렸어. 누가 고맙게도 경적을 울려 줬거든. 깜짝 놀라면서 다시 긴장이 몸을 가득 채우고, 아직도 무슨 일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그 애한테 나는 손을 내밀면서 말했어. 방금 비엔나 봉봉이 한 말처럼, 일어나, 이제,

“바비큐 파티 시간이야.”

 

처음으로 갔던 캠핑에서 부모님은 나한테 잡다한 심부름은 맡겼지만, 고기 굽는 건 두 분께서 직접 하셨어. 내가 하기엔 너무 위험하다고. 하지만 그 이후로 시간이 꽤 지났고, 그래서 비엔나 봉봉하고 쿨도어한테 나도 끼워 달라고 멋대로 졸라 봤더니 의외로 또 흔쾌히 수락해 줬어. 잘려나간 고기 조각들이 집게에 집혀 달궈진 불판 위로, 하나씩 하나씩, 캠핑 땐 이걸 그저 보기만 했는데, 지금은 내가 직접 하고 있어. 그리고 침실 문가에 주저앉은,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나의 사랑스러운 텔레오그릴루스 엠마의 커다란 눈은 그 과정을 전부 보고 있어.

“푸파, 그쪽에 있는 거 뒤집어야겠다.”

“알았어.”

방이 너무 어둡네. 안 보이지? 불 좀 켜야겠다.

“알았어.”

그 애는 정말로 그렇게 말했어. 침실에 불이 환하게 들어오고, 잠시 눈이 부셨다가 적응이 될 즈음, 입에 테이프가 붙여진 중년 남녀는 침대에 묶인 채 그 딸의 눈앞에서 필사적으로 꿈틀대고 있었어. 그래, 그 딸은 아직도 이 상황을 이해 못 하는지, 아니면 그저 갑작스러운 사태에 정신이 무너져버린 건지, 칼을 든 채 침입한 위험천만한 여자애의 말에 너무나도 충실히 따르고 있었지.

“고기 부족하다. 그거 좀 더 잘라줄래?”

잘라주고말고. 봐, 지금도 하고 있잖아. 먼저 아버지 쪽부터 자르면 되지? 사각, 사각, 이 칼은 집에서 가져온 거야. 캠핑 때 보고 마음에 들어서, 이걸로 하면 되겠다 싶어서. 여기 이 톱날 덕분에 고기도 야채도 뼈도 살도 깔끔하게 잘라진답니다. 놓칠 수 없는 기회, 지금 바로 전화하세요! 홈쇼핑 광고 속에서 시연을 보이는 사람처럼 나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어. 손끝부터 천천히, 전부 토막을 내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가장 고통스러울지 생각하면서. 즐거웠냐고? 글쎄, 굉장히 긴장하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히 기억나. 그도 그럴 게 관객이 있잖아. 그냥 관객이 아니지. 그 애는 심사위원이야. 버튼을 누르면 전광판에 선고가 번쩍, ‘이해했어!’ 아니면 ‘이해 못 하겠어!’ 둘 중 하나가 뜨지. 이건 이를테면 오디션 프로그램 같은 거야. 심사위원을 이해시키지 못하면, 그러면ㅡ안 돼, 지금은 그저 여기에 집중하자. 내 모든 것을 전부 보여주지 않으면 의미가 없잖아. 자아, 나를 봐. 눈을 감지 말고 고개를 돌리지 말고, 내가 너희 부모님한테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 똑똑히 보라고.

“푸파! 고기가 타잖아!”

알았어, 알았다고. 굽는 건 이번이 처음이란 말이야. 태우는 것밖에 안 해봤다고. 게다가 원래 이렇게 빨리 구워지는 건가? 쿨도어가 가져온 아웃도어용 연료 젤이 아무래도 화력이 너무 강한 것 같아. 한국에서 쓰던 건 안 이랬는데. 그래봐야 두 번밖에 안 썼지만. 캠핑 때는 고기를 구웠고, 그리고 그 때도, 화려하게 해체된 두 사람의 고기가 불판 대신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었고 나는 피범벅이 된 바닥을 젤로 꼼꼼히 칠해갔어. 굉장히 기쁘고 들떠 있어서 굉장한 속도로 했던 게 기억나. 왜냐면, 그래, 심사위원이 하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결과가 좋을 것 같았거든. 모든 것을 그 커다랗고 까만 눈에 전부 담은 뒤에도, 그 애는 도망치지도 비명을 지르지도 기절하지도 않았어. 대신에 나랑 같이 연료 젤을 구석구석 칠하면서, 아아, 얼마나 멋진 시간인지!

 

아까부터 나를 졸졸 쫓아다니는 프랑스 여자애한테 비엔나 봉봉이 고기를 몇 점 나눠줬더니, 이번엔 걔네 어머니가 과일에 맥주까지 가져오더라고. 아버지는 저 멀리서 혼자 담배 피우고 있는 것 같은데, 뭐 가족이란 게 항상 함께할 수는 없는 거니까. 프랑스 여자가 재잘대는 것처럼 경제위기 때문에 남편이 직장을 잃어서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을 수도 있는 거고, 부모가 저기 저 비엔나 봉봉처럼 술을 퍼 마시다가 맛이 가서 애들을 때릴 수도 있는 거고, 다 괜찮았는데 하필 제정신이 아닌 애가 태어나서 다 망쳐놓을 수도 있는 거지. 그래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야. 집이고 부모고 활활 불타는데, 그 집 딸은 이 모든 범행을 저지른 범죄자랑 같이 샤워나 하면서 “샴푸 많이 써도 돼?” 이러는 거야. 난 단언할 수 있어. “응, 얼마든지 써. 이젠 아무도 뭐라고 안 하잖아.” 이렇게 대답하면서 뒤에서 꼭 껴안아 주던 이 순간이야말로 내 인생의 절정이었어. 지금 이 순간, 마법처럼, 지옥의 불꽃처럼 가장 환하게 타오르는 절정.

하지만 ‘절정’이라는 단어는 그 자체만으로도 비극적이야. 절정에 오르는 길은 힘겨운 오르막길이지만, 절정 이후로는 비참한 내리막길만이 남으니까. 짧디 짧은 환희를 위해 나는 그 모든 지루함을 견뎌왔지만 보상은 곧 끝나고 말아. 불타는 집 앞에서, 소방차가 비탈을 오르지 못해 쩔쩔매는 사이에. 계획은 전부 세워져 있었고 몰래 도망쳐서 공항으로 가면, 비행기를 타면, 먼 땅에 발을 디디기만 하면 되는 찰나에 그 애는 고개를 저었어. 불꽃이, 마음속에 환하게 타오르던 지옥불이 사그라지고 있었어.

“많이 먹었어?”

응, 쿨도어. 솔직히 말하자면 좀 과식한 것 같아. 뇌가 환각 속에서 헤매는 동안 몸은 멋대로 영양분을 보충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불판의 열기는 식어가고, 태양의 열기도 그에 비례해서 식어가고 있어. 두 번째, 고기를 먹으려고 한 게 아닌 것까지 합하면 세 번째 바비큐 파티였으니 별로 즐겁지도 않았어. 모든 열기는 언젠가는 식게 되어 있는 거야. 그 애를 앞에 둔 내 몸의 열기도 그렇게 밤바람에 빼앗겨 차가워지고 있었어. 사형선고는 피했지만, 막 징역 선고가 내려진 참이었어.

“왜 같이 안 간다는 거야?”

핏기 잃은 손은 허공에 그대로 멈춰 있었고 그 애는 끝까지 손을 잡아주지 않았어. 대신에 내 모든 것을 빨아들일 것처럼 새까만, 블랙홀 같은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어. 블랙홀이 떨리고 있는 게 보일 정도였어. 내가 한 짓 때문에, 눈앞에서 부모가-물론 제대로 된 부모는 아니었지만-바비큐가 되는 걸 전부 지켜보게 했기 때문에 그 애는 망가져가고 있었어. 그렇게나 어린 애였으니까 당연하지. 하지만 그런데도 얇고 창백한 입술 사이에서 나오는 그 가냘픈 단어들은 심리 검사 결과만큼이나 논리적이고, 냉정하고, 나 자신보다도 나를 더 잘 이해하고 있어.

“너, 넌 내가 있으면 충분하다고, 나만 있으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잖아. 그래서 안 돼. 내가 곁에 있으면 넌, 넌 절대로 변하려고 하지 않을 거야. 그러지 마. 나아질 수 있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어. 나는 비록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미치광이지만 그래도 그 애랑 같이 있으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 애는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둘이서 있으면 언제까지고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 애가 생각하기엔 그게 아니었던 거야. 나는 아팠고, 치료를 받아야 했고, 심지어 벨기에라는 나라를 선택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 와플이나 플랜더스의 개 때문이 아니라, 루벤 대학의 스텔라 오티에르 교수가 나와 유사한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을 연구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어. 내가 가르쳐 준 그대로 인터넷으로 모든 정보를 긁어모았고, 내가 그 애한테 진짜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신나게 계획을 짜는 동안 그 애는 내가 치료를 받게 하려는 계획을 짜고 있었던 거야. 정말, 정말이지 그걸 깨달았을 때 나는, 그저……, 난 네가 어쩌면 나를 이해해주지 못할 거라고, 내 진짜 모습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런데 넌 이렇게나 나를 이해해주고 있었어. 그 애는 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걸 이해하고, 인정하고, 나아질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어. 엄마도 아빠도 마지막까지 하지 못했던 걸!

하지만 동시에 그 이해는 잔인한 선고이기도 했어. 치료를 받으라고, 나아지기 전에는 돌아오지 말라고, 만나주지 않을 거라고. 그건 즉, 이제 겨우 끔찍한 삶에서 벗어나려고 하는데 행복이 멀리 달아나버리려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지. 그 애는 계속 말했어. 아무도 죽이지 말라고,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고, 정당방위에 대해서, 벨기에에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진정으로 이해받는 기분에 한껏 취하고, 또 그 애가 날 너무나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기에 함께 있을 수 없다는 사실에 한껏 절망하고 있었어. 그 애가 나를 떠밀 때까지. 소방관들이 오기 전에, 경찰이 오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그 애와 나눴던 마지막 대화는 그 때였어. 내가 무심코 물었을 때.

“어느 쪽으로 가야 될까?”

그 애는 지쳐서, 간신히 그 연약한 몸을 가누면서 손을 들어 내가 왔던 길하고는 반대쪽을 가리키며 입술을 달싹여 나한테 말하길,

“저쪽 길에……, CCTV 없어.”

모든 문제에 마법처럼 답을 내놓는 그 아이에게서 들은 마지막 대답, 그게 마지막이었어. 그 말 이후로 2년이 지났어. CCTV에 살짝 찍힌 게 전부인 불분명한 내 형체가 한국에서는 ‘소녀 A’라는 의미심장한 이름의 유령이 되어 미해결사건과 청소년범죄의 상징으로서 떠돌고 있지만 나는 여기에 있어. 아르덴 숲 한복판에, 모든 일과가 끝나고 텐트 안에 누워서, 비엔나 봉봉이 이렇게 말하는 걸 들으면서.

“진짜 재밌었어! 푸파 말대로 캠핑 오길 잘한 거 같아.”

그 애 말대로 여기에 오길 잘한 걸까? 2년 동안 나아진 게 하나도 없는데? 그래서 돌아갈 수 없다면, 나를 진정으로 이해해 주었던 유일한 사람을 다시 볼 수 없다면 나는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걸까?

 

나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그런 어마어마한 문제를 생각하기엔 지금 머리가 너무 아픈데다가 인식의 문 저편에서 환각들이 어서 건너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으니, 가능한 한 스케일을 작게 해서 생각해 보자. 나는 왜 지금 텐트 안에 처박혀 있을까? 그건 간단해. 아파서 발버둥치고 물에 빠지고 환각 속에서 헤매는 동안 해가 져서 잘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지. 밤새도록 떠들 생각인 것 같았던 비엔나 봉봉이랑 쿨도어는 피곤에 지치고 맥주에 취해서 순식간에 꿈나라로 떠나버렸고, 나는 이 지루한 현실에 홀로 남겨졌어. 그래, 이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럼 나는 왜 지금 이 캠프장에 있을까? 그것도 어려운 건 아니야. 몸이 아플 땐 좋은 공기 쐬면서 요양하는 게 제일이라고 쿨도어가 우겼으니까. 왜 하필 아르덴 숲에? 이것도 쉽지. 내가 정한 장소인걸. 아무한테도 말은 안 했지만 아르덴 숲에 살인마가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니까. 시체가 발견되고, 나무에 웃는 얼굴이랑 물고기 표시가-그게 살인마랑 무슨 관련인지는 모르겠지만-그려져 있어서 ‘웃는 얼굴 학살자’라는 멋들어진 별명까지 붙었고, 덕분에 인터넷에서는 온갖 억측이 들끓고 캠프장은 특가 할인을 하고. 그런 상황이니 이왕 캠핑을 할 거라면 그나마 덜 지루한 데에서ㅡ

덜 지루한?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살인마가 그렇게 재밌나?

아니, 그렇지 않잖아. 이 정도의 소문은 어디에나 있다고. 범죄자 무작정 쫓아다니는 건 한참 전에 질렸고, 그게 존재 여부조차 모르는 범죄자라면 말할 필요도 없어. 희미한 희망만을 가지고 쫓아다니는 건 정말 생각만 해도 지루하고, 4개국 국경에 걸친 이 드넓은 아르덴에서 내가 진짜 살인마를 만날 가능성을 생각해보면 차라리 아프다고 우기면서 안 오는 게 나았을 거야. 충분히 할 수 있었다고.

그런데 왜 여기에 왔지?

이건 생각보다 까다로운 문제네. 이럴 줄은 몰랐는데. 아파서 침대에서 끙끙대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기에 지금 여기에 있는 거지, 그래, 정신이 나가 있었기 때문에 멍청한 판단을 했다고 말하면 모든 게 간단하지. 언제든지 심신미약을 주장하는 것만큼 편리한 꼼수도 없다고. 하지만 이 경우에는 안 먹혀. 왜냐면 나 스스로 그게 아니란 걸 아주 잘 알고 있거든. 그게 답이 아니란 것 정도는 알겠어. 하지만,

 

나는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아아, 확실히 정신이 이상해지긴 이상해진 거야. 이렇게나 온 몸이 아픈데, 팔다리가 저리고 아랫배에서 전신으로 통증이 소용돌이치며 퍼져 나가고 있는데, 이런 상태로 여기까지 따라와서, 멍청한 질문에 사로잡혀서, 이젠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겠어.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건 나를 꼭 껴안고 있던 쿨도어의 팔이고,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 하는 말에 으응 하고 답하면서도 나를 놓아주지 않던 그 감촉이고, 억지로 몸을 비틀어 빠져나와서 터덜터덜 걸어나온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여긴 어디야? 어둡고, 달빛이 있어서 뭔가 보이긴 하는데, 나무를 지나고 숲을 지나면 여긴 호수일까. 아까 낚시하다 빠진 호수랑은 다르고 아마 숲 속 깊이까지 들어온 것 같은데.

호수는 부글부글 끓고 있었어. 김을 내뿜으면서. 환각일까? 호수가 끓는 환각은, 지금 당장 내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기 때문에 보이는 걸까? 실제로 속이 뒤틀리고 있긴 해. 아파, 구역질이 나, 그리고 더 끔찍한 건 저 끓는 호수가 환각이 아니라는 거야. 더 가까이 가서 보면 알 수 있어. 달빛 아래 날아오르는 증기는 사실은, 수면에서 끓어 넘치듯이 우화하는 하루살이들의 안개였어. 미친 듯이 날아올라 서로 부딪히고 요동치는 수만 마리 하루살이 떼의 춤추는 구름이었어ㅡ

그 구름에 둘러싸여서, 나는 호숫가에 그대로 쓰러지듯 엎드렸어. 머리가 너무 아파, 무거워, 손을 내려다보면 아직도 피가 줄줄 흐르고 있어. 그 광경을 보고 다시 구역질이 나고 속에서 참을 수 없는 소용돌이가 폭발하는 것처럼ㅡ그대로 전부 토해냈어. 하루살이 떼에 둘러싸여서. 아까 먹은 거 전부, 입 안에 되는대로 쑤셔 넣었던 거 전부. 목이 타는 것처럼 쓰리고 손에는 아직도 피가 잔뜩 묻어 있고 하루살이들이 내 뺨을 스치면서 달빛을 향해 날아가고 있어. 그리고 난, 난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 나는 왜 벨기에에 왔어? 나는 왜 아르덴에 왔어? 나는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어떻게 해야 이 끔찍한 지루함에서, 고문장치의 신의 무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야? 역겨워, 모든 게, 지금은 그저 전부 토해내고 싶을 뿐이야. 환각 속에서 나는 계속 그렇게 토했어. 선명한 발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오기 전까진.

“등 두드려 줄까?”

한국어가 아니었어. 그러니까 쿨도어도 아니고 비엔나 봉봉도 아니야. 독일어인데,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독일어로 말을 걸어올 만한 사람은 환각 속에서도 없단 말이지. 그럼 이건 도대체 누굴까. 처참한 몰골로 뒤를 돌아보면 거기에 있는 건,

“어머나.”

나보다 몇 살 더 먹은 것 같은 여자. 깜짝 놀란, 그러나 웃음을 만면에 띤 얼굴에는 하얗게 분칠이 되어 있었어. 네모난 금테 안경을 끼고 반짝이는 짧은 금발에 머리에는 빵모자, 그리고 저 옷은 뭐야? 자수가 들어간……, 수도사 로브? 환각 속에서 걸어 나온 것 같은 형체였지만 어쨌든 분간할 수는 있었어. 이 사람은 환각이 아니야. 숲에서 튀어나온 괴상한 차림의 여자는 자기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어.

“성 비토의 어릿광대야. 뭘 도와줄까?”

아아, 세상에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구나. 호숫가에 엎드려서 하루살이 떼에 휘감겨서, 나는 단지 그 생각밖에 할 수가 없었어.

 

나보다도 키가 머리 하나는 더 큰 생면부지의 아가씨가 나를 무릎에다가 뉘여 놓고 어디가 아픈지 이것저것 물어보는 걸 가만히 놓아 둔 이유는, 단순히 혼란이 극에 달해서 생각하는 걸 거의 그만두다시피 했기 때문이야. 한밤중에 괴상한 차림으로 숲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제정신일 리 없지만, 딱 봐도 이렇게 맛이 간 녀석은 사실 처음 보거든. 경계심이 안 느껴질 정도로 맛이 가 있다니까. 성 비토의 어릿광대는 또 뭐야?

“머리도 아프니?”

“그래, 아파.”

“성 아가시오께서 항상 너와 함께하시길. 두통의 구난성인이자 군인의 수호성인이시며, 마지막까지 주를 저버리지 않으사 복된 피를 흘리셨으니.”

미친 년……, 아니 내가 할 말은 아니긴 한데, 그래도 내가 미친 년 알아보는 데에는 나름대로 전문가라니까. 특히 지금 이 아가씨가 문제인 게 뭐냐면 터무니없는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주제에 의외로 아는 것도 많고 머리가 멀쩡하게 돌아간다는 거야. 완전히 맛이 간 사람보다 반쯤 간 사람이 훨씬 위험하다고. 이를테면 이런 식으로.

“그리고 성 율리아노 자선가께서 항상 너와 나의 손을 잡아 인도하사,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길.”

“그건 또 누구야?”

“성 율리아노 자선가께서는 뱃사공과 아이 없는 사람과 사냥꾼과 살인자의 수호성인이셔.”

그렇게 말하면서 가리키는 건 내 가운 주머니에 들어 있는 고기 써는 칼, 아니 잠깐, 내가 이걸 가져온 거야? 어쩌다가? 아무래도 나한테 당장 필요한 건 정신이상자의 수호성인 같단 말이지. 물론 살인자의 수호성인도 나한테 상당히 필요하긴 한데, 당장은 그럴 생각도 없고 해서 지금은 이렇게 말해 둘 거거든.

“호신용이야. 밤에 숲 속은 위험하잖아.”

그렇게 말했더니 “아하.” 하면서 기분 나쁠 정도로 생긋 웃는 ‘성 비토의 어릿광대’인지 누구인지. 그러면서 또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했어. 배는 안 아파? 요즘 어땠어? 많이 피곤하고 그래?

“미안하지만 몇 살쯤 됐어? 동양인 나이는 봐서는 잘 모르겠더라.”

별 걸 다 물어보네.

“흐음, 그 정도 나이인가. 요즘 애들 치고는 살짝 늦긴 하지만……,”

뭐가? 환각 발작이? 요즘 애들 상태도 심각하네.

“아직 초경 안 했지?”

 

뭐?

 

“맞나보네. 그럴 나이잖아. 생리 전에 몸이 많이 안 좋아지는 사람도 많거든. 소녀와 순결과 정절과 강간 피해자의 수호성인이신 성 아그네스시여, 이 아이에게 축복 내리시기를!”

야, 야, 잠깐. 성 아그네스라는 사람이 별로 나를 축복하고 싶지 않을 거라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그러니까 지금 내가 몸에 힘이 없고 온 몸이 아프고 우울하고 정신이 심각하게 예민해진데다가 환각까지 언뜻언뜻 보이는 게 그러니까, 이 미친 아가씨의 놀라울 정도로 합리적인 판단에 따르면,

“이 놈의 뇌는 항상 문제라니까.”

이럴 줄 알았어. 그렇잖아도 제대로 안 돌아가는 뇌가 호르몬의 홍수에 축축하게 젖다 보니까, 거기다가 검사 때문에 정신에 큰 충격까지 받은 상태다 보니까 멋대로 환각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거지. 아주 훌륭해. 끝내준다고. 아주 어릴 때부터 뇌는 항상 나를 괴롭히기만 했지. 난 이 몸이 정말 싫어.

“좀 괜찮아? 일어날 수 있겠어?”

뭐, 적어도 이해할 수는 있겠어. 이해할 수 있는 문제니까. 특별히 걱정할 것도 없이 앞으로도 정기적으로 이런 문제를 겪기만 하면 되는 거 아냐. 와아, 지루한 인생에 끔찍하게 지루한 요소가 하나 더 늘었군. 이거 정말로,

갑자기 ‘성 비토의 어릿광대’가 내 오른손목을 꼭 잡아서 겨우 눈치 챘는데, 어느 새 내가 칼을 쥐고 있더라고. 그래, 이젠 이 정도 증상에 놀라는 것도 뭣하다. 이건 아마 정상참작 되지 않을까. 듣기로 월경 전에 도벽이 생기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그건 정상참작이 어느 정도 된다더라고. 살인충동도 비슷한 거 아닌가.

“어디서 왔어? 캠프장? 거기까지 바래다줄까?”

그러면 고맙지. 이 상태로 숲을 돌아다니는 건 별로 재밌을 것 같지 않으니까.

“혼자 이렇게 돌아다니면 안 돼. 요즘 이쪽이 흉흉하잖아.”

그래. 재미없는 소문이 돌고 있지. 여기 올 때는 분명히 그게 목적이긴 했는데, 도대체 왜 그걸 목적으로 한 거지. ‘생리 때문에’는 대답이 아니야. 뭔가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 같은데, 그게 뭐지,

“그래도 앞으로는 괜찮을 거야.”

뭐가 괜찮을 거라고? 상쾌하게 웃는 아가씨의 얼굴이 지나치게 눈부셔서 다시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됐지만 어쨌든 대답은 들어야겠지. ‘성 비토의 어릿광대’는 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어.

“웃는 얼굴 학살자 말이야. 내가 죽일 거거든.”

 

내가 아픈 몸을 이끌고 이 어두운 숲 속을, 그것도 제정신 나간 여자 손에 들린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서 지금 이렇게 걷고 있는 건 단지 그 말 하나 때문이야. 왜 그 말에 끌렸느냐 하면, 그냥, 엄청 수상하잖아. 같이 걸으면서 얘기를 나눠 보니까 점점 더 수상해졌고.

“비토라고 했지. 어디서 왔어?”

“성 비토의 어릿광대라니까. 룩셈부르크에서 왔어. 넌?”

“한국. 남쪽인지 북쪽인지 물어볼 거면, 북쪽 사람들은 보통 여행 안 다녀.”

“남한에서 왔으면 게임 잘 하겠네?”

국가 이미지를 이 따위로 만들어 둔 사람들이 누구야 도대체. 아무래도 게임중독 환자의 수호성인은 아직 없는 모양인데. 그건 그렇고 이 아가씨는 룩셈부르크에서 여기까지 도대체 왜 온 거람.

“웃는 얼굴 학살자를 잡아 죽이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네.”

그렇게 받아쳤더니 말도 안 되게 빛나는 얼굴로 주장하기를,

“성 비토께 계시를 받았어. 이 세상을 희극으로 바꾸라고! 세상엔 나쁜 놈들이 너무 많지 않아? 그들은 성 율리아노 자선가께서 하셨던 것처럼 회개하지도 않아. 얼마나 비극적인 일이니? 나는 폭풍우와 배우와 개와 간질 발작의 수호성인이신 성 비토의 어릿광대, 악인을 척결하는 망치,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는 사도야!”

“미쳤다는 소리를 요즘은 굉장히 길게 표현하는구나. 의학 발전이란 놀랍네, 비토.”

“미친 게 아니라 계시를 받은 거라니까. 그리고 성 비토의 어릿광대라고 말했잖아.”

“난 그렇게 긴 이름 부르는 거 싫어한단 말이야. 그래서 비토 너는 지금도 계시를 받아서 학살자를 잡으러 다니는 거야?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네 신앙은 존중하고 싶지만, 정말로 그게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아니, 그렇게까지 상세한 계시를 받은 적은 없어.”

그러면서 로브 속으로 손을 넣어서 꺼내는 건 하얀 표지의 노트 하나. 펼쳐보니까 안에는 사진이며 메모가 가득. 아, 이건 인터넷에서 본 거다. 시체 사진하고 나무에 새겨진 표식들. 메모는 전부 독일어도 아니고 룩셈부르크어라서 잘 읽히지는 않지만, 어쨌든 제대로 추리하고 있는 것 같네. 굉장히 의외야.

“세상 사람을 상대로는 세상의 지혜가 필요한 법이니까.”

“그래서 어디까지 알아냈는데?”

“음……, 전혀.”

기대한 내가 바보지. 하기야 나간 정신이 추리할 때만 돌아와 주겠냐. 웃지 마, 웃는다고 다 용서될 거면 난 천국에 갈 거라고. 그리고 멍청하게 웃고만 있을 거면 추리 노트에 이거 해석이나 해 주지 그래.

“어, 너도 추리해? 탐정이야?”

그야 탐정은 아니지만 아는 탐정이 하나 있거든. 결국 따라하는 정도지만 그래도 너보단 낫겠지. 그래, 이거라도 하면 좀 덜 지루할지도 모르고. 이유라고 하기도 불분명한 그런 희미한 생각만으로 나는 또 다시 사건에, 그것도 이렇게나 불확실한 사건에 뛰어들게 된 거야.

 

노트에 따르면 비토는 적어도 며칠 동안이나 이 숲을 돌아다니면서 미지의 살인마가 남긴 표식을 조사하고 있었던 것 같아. 그리고 조사 결과 숲의 나무 여기저기에, 그것도 주로 호숫가의 나무에 대단히 수상쩍은 표식이 있는 건 확실하고. 잔뜩 칼자국이 난 스마일하고 그 아래의 작고 단순한, 곡선 두 개로 이루어진 물고기 표시. 물고기는 어떤 나무에는 하나, 어떤 나무에는 넷, 어떤 나무에는 여섯.

물고기 표시 자체는 굉장히 익숙해. 언제 마지막으로 들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비교종교학 강의에 나온 적이 있거든. 초기 기독교도들이 박해를 피해서 비밀스럽게 사용했던 ‘익투스’ 문양이야. 그 의미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기독교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상징 중 하나지. 이 표식을 남긴 게 숨어 다니는 사이코 광신도라고 생각하면 대충 들어맞긴 하네. 마침 내가 아는 사이코 광신도가 하나 있기도 하고. 스스로는 범인을 죽이러 왔다고 자칭하지만 과연 그걸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까. 자기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아무나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있을지도 모르지.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일단 현장을 확인하고 싶은데, 이 근처에서 제일 가까운 표식이 어디지?”

“흐응ㅡ”

문제의 사이코 광신도는 뜬금없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는데, 뭐야, 설마 의심하는 걸 읽혔나. 하지만 표정을 보면 또 그건 아닌 것 같고.

“열의가 있어 보이네.”

뭐? 내가? 난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여기 온 이유조차 모른다고?

“여기에 온 이유? 그거야 간단한 거잖아!”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 그래, 네 대답이나 들어보자. 다른 방향으로 미친 사람이라면 아마 다른 방향으로 미친 대답을 내놓겠지만.

“네가 여기에 와서 지금 나랑 같이 학살자를 쫓고 있는 이유는, 네 마음속에 선한 뜻이 있기 때문이야. 선한 뜻을 가진 사람은 비록 본인은 알지 못할지라도 자연스럽게 선한 일을 향하게 되거든! 너, 나쁜 놈들을 잡으러 다닌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 난 알 수 있어. 네 눈에는 선한 빛이 어두운 밤 등불처럼 비치고 있으니까!”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미친 년. 내가 선한 의지를 가지고 행동하고 있다고? 그것 때문에 아픈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와서 범죄자를 추적하는 데에 힘을 보태고 있다고? 그거야말로 터무니없는 소리야. 난 벌써 지옥에 떨어질 만한 짓을 했다고. 그것도 여러 번. 이런 헛소리는 정말 처음 들어본다.

그리고 더 끔찍한 게 뭐냐면, 이걸 논리적으로 반박할 방법이 사실상 없다는 거야. 내 무의식 속에 선한 의지가 있다는데 그걸 어떻게 의식적으로 반박하겠어. 그래, 정말 지루하리만치 끔찍한 건 저 헛소리가 사실이 아니라고 내가 단언할 수 없다는 거야. 내가 여기에 있는 진짜 이유를 모르는 이상은. 그때까진 내 손에 쥐어진 이 칼이 성 율리아노 자선가인지 누구인지의 칼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어.

“도착했어!”

호숫가의 나무에 새겨진 저 뒤틀리고 칼자국이 난 미소. 눈은 가로로 찢어지고 입꼬리가 눈 위까지 올라와서 사진으로 볼 때보다 훨씬 기분 나쁜 모습이야. 이봐, 비웃지 말라고. 내가 정말로 선한 의지에 이끌려서 지금까지 살아왔다면 그걸 제일 비웃고 싶은 사람은 바로 나니까. 그 아래에는 물고기 표식이 두 개 있는데,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예수가 오천 명을 먹인 기적. 정말로 기독교 상징인가. 그렇다면,

“저건 뭘까.”

하루살이가 들끓는 호숫가에 누워 있는 두 사람. 중년 여성과 금발 꼬마아이. 팔은 가슴에 포갠 채 딱딱하게 굳어서 달을 쳐다보고 있어. 편안히 자는 것처럼. 비토는 그걸 보더니 깜짝 놀라서 순식간에 달려가, 맥을 짚어보고 인공호흡을 하고 하려다가 딱 멈춰버렸어.

“관자놀이에 총상이 있어.”

나도 가까이 다가갔고, 그때서야 이 사람들이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어. 아까부터 나를 졸졸 따라다니던 프랑스 꼬맹이랑, 바비큐 파티 때 과일이랑 술을 나눠줬던 그 어머니야. 저런, 물고기 괴롭히는 거 보니까 나름대로 소질이 있을 수도 있는 애였는데. 불쌍하게도 이해받기도 전에 죽었구나. 한편 본 적도 없는 사람 둘이 죽었는데 비토는 자기 엄마랑 여동생이 죽은 것처럼 난리를 치고 있네.

“호숫가에서 총에 맞았어. 학살자 자식이야.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내가 조금만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몰라! 성 비토께서 내게 자비 베푸사 주님이 나를 용서하기시를!”

“학살자가 아니야.”

그랬더니 아주 매섭게 날 쳐다보고. 와아, 무서워라. 광신도 무서워. 하지만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야. 순교자만큼이나 확실하게 주장할 수 있어.

“생각해 봐. 학살자가 죽인 사람은 어떻게 발견됐지?”

“총에 맞아서! 이 사람들도 마찬가지잖아! 게다가 물고기 두 마리에 사람이 둘, 딱 맞아 떨어진다고! 행복하고 신성한 죽음의 수호성인이신 성 요셉이시여, 이 불쌍한 어린 양들을 축복하시되 범인에게는 자비를 보이지 마옵소서!”

그래, 물고기랑 사람 수가 맞는 건 맞는데 그건 그냥 우연일 수도 있잖아. 애초에 물고기는 여기 예전부터 있던 표시잖아? 그것보다 학살자가 죽인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시체의 사진이 돌아다니고 있지. 검시 결과도 돌아다니고. 밀렵꾼이었던 문제의 희생자는 호수를 헤엄치다가 뒤에서 총에 맞았어. 그렇다면 범인은 호숫가에서 호수 한복판의 희생자를 향해 총을 쏜 거야. 물을 건너는 사냥감을 잡으려는 사냥꾼처럼. 하지만 저 두 사람은 관자놀이에 정확히 총을 맞았고, 그건 범인과 희생자들이 아주 가까이 있었다는 걸 의미해. 그런데 묶여있던 흔적이 없고, 무엇보다 흐트러지지 않은 옷차림과 가슴께에 포개진 팔. 이건 사냥이 아니야. 범인은 희생자들과 가까운 사이였고, 범행을 후회하고 있어. 그럴만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아까 바비큐 파티 도중에 얼핏 들었는데, 이 집안 바깥사람이 경제위기로 실직해서 상황이 별로 좋지 않다지?

“거기까지 해!”

프랑스어로 들려오는 절박한, 울먹이는 고함 소리. 그리고 뒤통수에 와 닿는 차가운 권총의 감촉. 이런, 근처에 숨어있을 줄은 몰랐는데.

“왜 아무도 날 내버려두지 않는데! 끝까지, 나라고 좋아서 이런 줄 알아!”

물론 좋아서 한 건 아니겠지. 가장의 의무를 질 수 없다는 절망 때문에 가족들을 전부 죽이려고까지 했지만, 그래도 마지막만큼은 아내와 아이를 즐겁게 해 주고 싶었던 거겠지. 그래서 캠프에 데려온 거야. 하지만 가족을 죽이고 자기가 잡히는 건 아까워서, 일부러 아르덴 숲의 호숫가에 시신을 유기해 학살자의 짓으로 돌리려고 한 거지, 남자는 눈물을 펑펑 흘려대면서 이제는 알아듣기도 힘든 프랑스어로 소리를 질러댔고, 그리고 나는, 손에 칼이 들려 있는데 아직 피가 흐르고 있거든. 이거 정당방위지? 나의 사랑스러운 프로마쿠스 예소니쿠스, 이건 괜찮지? 아아, 장갑이 손을 감싸고 있지만, 그래도 뭔가 계속 꿈틀, 꿈틀 하고, 이 사람이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뭔가 할 수 없을까, 그런데 비토는,

“폭풍우와 배우와 개와 간질 발작의 수호성인이신 성 비토시여, 당신의 손이 항상 나와 함께하니 내가 두려울 것이 없나이다, 끓는 솥 속에서도 믿음 잃지 않으셨듯이 총구 앞에서도 나의 발을 빛의 길로 인도하사 오직 의를 향하게 하소서. 원수의 손길을 나를 위협할 때 나를 수호하소서. 하지만 나의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오로지 당신의 뜻대로 나를 이끄소서. 나는 성 비토의 어릿광대이니 오직 당신의 대본대로 춤추나이다.”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맛이 갔고, 그렇게 생각하려는 찰나에 로브 안에서 뭔가 꺼내나 싶더니 몸을 이쪽으로 날려서,

“나는 선한 뜻을 행하는 광대이니 원하건대 나를 지키소서!”

나는 덕분에 흙바닥에 나동그라졌고, 뭐야, 저건? 망치야?

“나는 악인을 척결하는 망치이니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영광 주소서!”

와아, 이 광경은 굉장한데. 잠깐 맛이 가려던 게 원래대로 돌아올 정도로 굉장해. 미친 것처럼 싸우는 주제에 먼저 총을 뺏고 팔다리를 부수고. 체격이 자기보다 훨씬 큰 남자랑 싸우는데도 살의는 비토가 훨씬 강해. 그러면서도 급소 먼저 때리는 게 아니라 살려두고 고통을 주려고 하고 있지. 기독교의 성인들이 순교하면서 당한 온갖 스펙터클한 고문처럼. 이건 확실히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네. 한편 나는 정신이 잠깐 돌아온 덕에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 깨달았어. 관자놀이에 총이 겨눠진 상태에서 무슨 무모한 짓을 하려고 했담. 그것보다 지금은, 좋은 생각이 났으니까 먼저 쟤를 멈추는 게 좋겠어.

“그만 해, 비토.”

“선한 뜻이 내게 있사오니 오직 의로 말미암아 나는 싸우나이다!”

“그만 하라니까. 너 눈이 맛이 갔다. 무슨 이단 심문관이냐.”

도저히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간신히 일어나서 팔을 붙잡고 나서야 겨우 비토를 진정시킬 수 있었어. 왜 이러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이지만, 이해 안 되는 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하냐.

“죽이지는 마.”

“구제할 길 죄인한테는 자비를 베푸는 게 죄야! 불과 역경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시는 사냥꾼과 고문 희생자의 수호성인이시자 가정불화의 구난성인 성 에우스따치오께서 말씀하시니 악인을 척결하는 망치는 멈추지 않나이다!”

“누가 자비를 보이랬어. 그냥 좀 멈춰 봐. 생각이 있어.”

네가 아까 한 말을 듣고 뭔가 생각난 게 있다고. 그래, 이제야 말을 듣네. 눈을 똑바로 쳐다보다가, “선한 뜻이라면.” 하면서 망치를 내리지. 선한 뜻이라는 말만 들으면 이제 가슴이 쿡쿡 쑤시는 지경이지만 그래도 일단은 할 일을 하겠어. 어이, 아저씨. 망치로 심하게 얻어맞은 건 아는데 아직 정신은 있죠? 휴대전화 좀 내놔 봐요.

“휴대전화는 왜?”

“가만있어, 비토. 탐정의 수호성인한테 기도나 해 줘.”

“성 미카엘께서 경찰의 수호성인이시긴 해.”

그건 불길하기만 하고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귀찮게 하는 것보단 옆에서 방언으로 조잘거리는 게 차라리 낫지. 여기 인터넷은……, 오! 의외로 잘 터지네. 과학기술 만세야. 이걸로 좀 찾아볼 수 있겠어.

“뭘 찾아볼 건데?”

“아까 네가 얘기했잖아. 물고기 수랑 사람 수가 똑같다고.”

“우연이라면서.”

우연이긴 우연이지만 적어도 추리를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영감을 줄 정도는 되잖아. 정말로 이 자리에서 사람이 두 명 죽었다면? 이 넓은 숲에서 오랫동안 살아 온 누군가가, 사람을 죽이고 들키지 않게 버릴 완벽한 장소도 알고 있어서 두 명이나 죽인 다음에 버렸다면? 그리고 자기가 낚시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수를 물고기 모양으로 기록해 뒀다면? 아니, 낚시꾼이 아니지, 그것보단,

“킬 마크가 아닐까.”

“킬 마크? 전쟁 영화에 나오는 거?”

“그래, 전쟁. 아르덴 숲은 2차 대전 격전지였잖아. 어디 보자, 아르덴 대공세에서 이런 일이 있었고, 어쩌면 저 스마일 마크는,”

“참전했던 부대의 마크일 수도 있겠다!”

스마일 마크를 쓴 부대는 없었겠지만, 애초에 저렇게 눈도 찢어지고 입도 커다란 걸 스마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착각일 수도 있지. 이를테면 이건 어떨까? 아르덴 대공세에 연합군으로 참전한 미국의 106 보병사단 마크. 동그라미 안에 사자 얼굴.

“이거 비슷하지 않아?”

사자를 섬세하게 새기지 못하고 대충 형태만 그렸다고 보면, 문제의 마크는 칼자국이 여기저기 난 스마일이 아니라 갈기가 돋친 수사자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의견을 말했더니 비토가 성 미카엘한테 막 기도를 하면서 폴짝폴짝 뛰었어.

“그렇구나! 범인은 2차 대전 참전자일까?”

“그렇다고 하면 나이가 너무 들었지. 아마 참전자인 아버지라든가 그런 사람한테서 들은 얘기가 일종의 정신이상 때문에 망상으로 발전했을 거야. 대공세 때 106 보병사단은 독일군한테 패배해서 항복하고 포로가 됐거든.”

“그럼 이 사람은 죽여도 돼?”

왜 갑자기 그 쪽으로 가냐. 애초에 죽이지 말라고 한 이유는 따로 있단 말이야. 지금부터 이 사람을 미끼로 써서 진짜 범인을 잡을 거야. 그래, 이게 선한 뜻이라면 그렇게 하겠어. 선한 뜻이라면 어쩔 수 없지.

 

선한 의지가 하시는 일이란 이런 거야. 불쌍하게 얻어터진 우리의 죄 지은 아버지를 묶어서 호숫가에 앉혀 놓고, 나랑 비토는 멀리 숨어서 총으로 위협하는 거야. 계속 소리를 지르도록. 그것도 이런 식으로.

“포로가 탈출했다! 포로가 탈출했다!”

덧붙이자면 전부 독일어로 말하게 했어. 처음엔 독일어를 모르는 것 같았지만 권총은 때로는 최고의 학습도구지. 만일 범인이 추리대로 전쟁의 망령에 사로잡힌 작자라면, 그것도 자신을 궤멸한 부대의 구성원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찾아올 거야. 그리고 호수를 건너 도망치는 적을 끝까지 쏘아 죽이는 저격수처럼, 망상 속 자신의 부대를 궤멸시킨 독일군을 반드시 죽이려고 할 거야.

“운이 좋을 때 얘기지만.”

적어도 비토는 내 추리에 만족하는 것 같더라. 사이코한테 반감을 사고 싶지는 않으니까 잘 된 일이지. 그렇게 풀숲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는데 비토가 갑자기 얼굴을 이쪽으로 내밀면서 말을 걸었어.

“있잖아, 아까 눈을 봤어.”

“그런 것도 보고 있었냐. 눈에 뵈는 거 없이 때리던데.”

“그 사람 말고 네 눈 말이야. 아까 붙잡혀있을 때 봤어.”

이런, 내가 맛이 갔을 때 얘기네. 별로 듣고 싶지 않아. 특히나 이렇게 자신만의 괴상한 도덕 철학으로 무장한 사람한테는 말이지.

“ㅡ네 잘못이 아니야.”

뭐가?

“눈을 보면 알아. 악마 같은 눈. 너도 죄를 지었구나?”

잠깐, 잠깐. 그래서 뭘 어쩌려고? 내 눈에 일렁이는 광기를 봤으니까 이제 나도 망치로 때려죽이려고? 난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죽지는 않을 거야. 아무것도 모르고 죽을 수는 없단 말이야. 하지만 각오를 굳혔을 때 나온 말은 내 생각보다 훨씬 터무니없었어.

“어쩜 이렇게 성 율리아노 자선가랑 똑같을까…….”

뭐라는 거야, 도대체.

“너도 마찬가지야. 악마의 눈이지만 선한 뜻이 분명히 있잖니. 성 율리아노 자선가께서는 저주에 걸려서 자기 부모를 살해하셨지만, 그 후 회개와 선행을 통해 용서를 받으셨지. 선한 뜻을 가진 사람은 전부 그래. 아무리 과거에 죄를 지었더라도 언젠가는 빛의 길로 돌아오게 되어 있어.”

선한 뜻 같은 소리 작작 해라.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데?

“너, 나랑 같이 일하지 않을래?”

아니, 그런 소리였으면 안 해도 됐는데. 비토는 이제 내 손을 꼭 붙잡고 눈을 반짝이면서 정말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어.

“내가 도와줄게. 네 마음속의 악을 정의로운 곳에 쓰도록. 나랑 같이 이 세상의 비극을 희극으로 바꿔가자. 악인을 척결하는 망치가 되자. 분명 굉장히 은혜로울 거야!”

그러니까 그런 헛소리는……, 아까는 내가 선한 뜻에 이끌려서 여기에 왔다더니, 이젠 같이 나쁜 놈들 때려잡자고? 내 마음 속에 선한 뜻이 있으니까? 아직도 부정할 수 없는 건 지금 머리가 너무 아파서 그런 걸까, 아니면, 어차피 난 답을 모르잖아? 확실히 이 녀석 말대로라면 앞으로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사람을 죽여도 되긴 하겠지. 그건 정당방위는 아니지만 어쨌든 그 애도 이해는 해줄 거야. 그래, 분명히 나쁜 방법은 아니야. 틀렸다고 증명할 수도 없어.

“아, 왔다!”

내가 있는 곳으로부터 왼쪽으로 몇 십 미터 떨어진 호숫가에서 기어 나오는, 온 몸에 나뭇가지를 꽂은 괴물과도 같은 누군가. 손에 든 건 라이플인가. 그걸 눈치 채지 못하고 우리의 미끼는 계속 독일어를 외치다가, 또 외치다가, 탕! 하는 소리와 함께 풀썩 쓰러지고,

“지금이야!”

저런 총이라면 장전해서 조준하기 전에 달려드는 수밖에! 비토는 빛처럼 빠르게 날아서, 정말 놀라운 속도로 로브 안에서 망치를 꺼내들고, 성 비토 어쩌고 외치면서 문제의 범인에게 달려들었어. 총이 하늘로 날아가고 망치가 빛나고, 오, 저런. 범인도 나이프를 들고 있네. 엉망으로 자란 머리카락이랑 수염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눈에는 분명 광인 특유의 독기가 서려 있겠지. 짐승이 싸우는 것처럼 치열한 싸움이었고 나는 그저 바라보면서,

응, 열정적이야. 인정해. 저 비토라는 사람은 분명히 진심으로 싸우고 있어. 자기가 믿는 선한 뜻에 따라서. 그렇다면 정말로 두려울 게 없겠지. 나처럼 고민할 일도 없을 거야. 선한 뜻에 따라 악인을 벌하는 삶, 그걸 인정한다면, 내가 선한 뜻에 이끌리고 있다는 걸 받아들인다면 확실히 편하겠지,

다만,

다만,

호숫가 덤불 사이에 가만히 앉아서 나는 고개를 저었어. 분명히 나는 고민했지. 나아질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걸까? 그리고 비토의 말이 하나의 답인 것 또한 분명해. 다만, 그건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게 아닌 것 같아. 뭘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적어도 저런 눈부신 일은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난 덤불에서 뛰쳐나왔어. 소리를 지르면서.

총을 놓친 상태에서 한명이 더 튀어나오면 범인은 어떻게 반응할까? 내 예상대로였지. 범인은 숲속으로 도망치고 비토는 나를 홱 돌아봤어. 와아, 저 광기에 찬 눈.

“일단 쫓아가자!”

이렇게 말하면 안 들어 줄 사람은 아닌 것 같지만. 나와 비토는 범인을 쫓아 숲 속을 달렸어. 힘들긴 하지만 전부 계획대로야. 왜냐면 나는 이 자리에서 범인을 죽이는 건 별로 원하지 않았으니까.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게 있잖아. 범인의 은신처는 어디지? 왜 킬 마크가 하필이면 물고기였지? 그리고 왜 지금 도망치면서 혼잣말을 하는 것 같지? 어쩌면 범인을 따라가면 그 의문을 풀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탐정이 아니지만, 그래도 왠지 이건 알아야 할 것 같아.

 

그래서 도착한 곳은 깊은 숲 속의 작고 낡은 텐트. 범인은 은신처에 도착하자마자 뒤돌아서서 나이프를 휘두르려고 했지만 비토의 로브를 스쳤을 뿐이고, 망치는 제대로 내리꽂혔어. 죽었을까, 아니면 기절한 걸까. 별로 상관없게 됐네. 왜냐면 지금 안 죽었더라도 비토가 완전히 박살을 낼 테니까. 쟤는 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고 나는 이 은신처를 조금 더 둘러봐야겠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텐트 옆의 커다란 나무였어. 껍질이 반쯤 벗겨져 있고 물고기 표시가 엄청나게 많았거든. 여기서 이렇게 많이 죽였다는 뜻은 아닐 거고, 아마도 지금까지 죽인 사람의 수를 따로 기록해둔 거겠지. 그런데 이 물고기들은 왜 이렇게 새겨져 있지? 쭉 늘어놓은 게 아니라 두 개, 세 개, 네 개, 여섯 개, 두 개, 세 개 하는 식으로……,

그 순간 왜 내가 휘파람을 불 생각을 했는지는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 같아. 물고기 모양이 쭉 늘어선 게 악보처럼 보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물고기를 보니까 낚시터가 떠올라서 휘파람 부는 여자애가 떠올랐기 때문일 수도 있지. 중요한 건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거야. 이렇게 불고, 저렇게 불고, 박자를 조금씩 바꾸다가, 그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었어. 어쩌면 방금 망치로 박살난 사람은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내가 방금 범인에 대해서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고.

“무슨 소리야?”

고문을 마치고 근처 나무에 기대서서 안경에 튄 피를 닦던 비토가 물었어. 와아, 저 천진난만한 얼굴 좀 봐라.

“아까부터 좀 이상해. 건강이 안 좋은 건 알겠지만, 갑자기 튀어나와서 도망가게 하고.”

이건 좀 뜨끔했지만, 그래도 지금은 얘기하지 말자.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니까. 이 물고기들을 봐. 이건,

“그래도 난 널 믿어. 뭔가 생각이 있는 거지? 선한 뜻으로 말하는 거지?”

갑자기 그렇게 눈부시게 웃지 마. 선한 뜻 같은 건 집어 치우고 물고기나 보란 말이야. 이 개수들은 단순한 킬 마크가 아니었다니까? 무슨 소리냐는 표정 지을 거면 설명이나 들으라고.

“둘 셋 넷 여섯 둘, 이건 그냥 죽인 사람의 수가 아니야. 악보라고!”

“무슨 악보?”

“물고기가 나오는 노래의 악보. 낚시꾼이 물을 흐리게 해서 송어를 잡고, 그 광경을 화자가 씁쓸하게 바라본다는 내용의 시를 가지고 슈베르트가 만든 음악의 악보. 『송어』의 악보에 나오는 마디 하나당 음표의 수였어.”

“그래서? 어차피 죽었잖아.”

“그게 아니니까 그렇지. 아까 막 혼잣말하고 있었잖아! 품 안을 뒤져 봐!”

비토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박살난 남자의 품을 뒤졌는데, 젠장, 역시 예상대로였어! 반쯤 으깨진 무전기가 품에서 데구르르 굴러 떨어졌어. 그리고 텐트를 확 열어젖혀 보면 거기에는 불법 무선용 장비가 잔뜩.

“이 사람은 그냥 군인이었어. 사령부는 따로 있었던 거야.”

“무슨 사령부? 누군지 알아?”

“알 것 같아. 아까 낮에ㅡ”

 

그 순간 들려오는 소리.

 

익숙한 휘파람 소리.

둘 셋 넷 여섯 둘.

거울 같은 강물에 송어가 뛰노네, 살보다도 더 빨리 헤엄쳐 뛰노네,

 

그 소리의 의미를 알아채고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비토가 서 있는 나무 뒤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두 손. 가죽장갑을 낀 손에서는 뭔가 반짝반짝 빛나고, 홱 당겨지고, 비토의 눈이 동그랗게 됐다가 입을 벌리면서 헐떡이고, 손발을 버둥거리고, 안경이 떨어져 나무뿌리에 부딪히며 망가지고, 아하, 저건 낚싯줄이네. 낚싯줄로 목을 조르고 있어. 그렇다면 역시 내 추리가 맞았던 거네.

나무 뒤에서 슬쩍 모습을 보이는 얼굴은 역시 익숙했어. 인상적이던 동그란 안경을 안 끼고 있었지만 어깨까지 오는 풍성한 갈색 머리는 그대로 느긋하게 흔들면서, 휘파람으로는 슈베르트의 《송어》를 즐거이 불면서, 낮에 호숫가에서 낚싯줄로 생선의 목을 조르던 낚시꾼이 밤의 숲 속에서 같은 낚싯줄로 비토의 목을 조르고 있었어. 한 곡이 끝나고 팔다리가 축 늘어지고, 나무 뒤의 얼굴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어. 타오르는 광기와 선명한 놀람을 눈에 담고서.

“와아, 아까 물에 빠졌던 애잖아.”

그리고 기이하리만치 친근한 울림을 목소리에 담고서.

“저렇게 멋진 눈을 하고 있을 줄이야.”

 

누군가는 내 눈에서 악마와 싸우는 선한 뜻을 봤지만, 또 누군가는 전혀 다른 것을 보더라고. 하기야 다른 걸 읽어낸 사람들도 있지. 자기 예전 아내를 본 사람도 있고, 뭘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기 영혼을 팔아먹다시피 한 사람도 있고. 그리고 지금 나무 뒤에서 실실 웃고 있는 사람이 내 눈을 통해서 본 건 아마도 활활 타오르는 지옥의 광경인 것 같네.

“불타고 있잖아. 방금 전까지 같이 있던 사람이 죽는데도 태연하게 불타오르고 있잖아. 멋져, 아주 멋져.”

왜 내 눈을 보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 되는 걸까. 아니, 절반 정도는 처음부터 이상한 사람들이었지만. 미친 사람을 끌어당기는 파장이라도 나오는 모양이지.

“원래는 송사리 둘 다 죽일 생각이었지만, 이건 깜짝 놀랐는데. 너 마음에 들었어. 이름이 뭐야?”

죽일 생각이었다면서 별 걸 다 물어보네. 난 적어도 내 사랑하는 플레시아 네아르티카의 부모님을 죽일 때 이름을 먼저 묻는 짓은 안 했다고. 그러면 진짜 미친 것 같잖아. 게다가 난 여기 사람들한테 이름 말하는 걸 싫어해. 엄청 웃기게 발음하거든. 내 발음을 비웃는 웃기는 별명을 쓰는 게 차라리 나을 정도라고.

“푸파.”

“이상한 이름이네.”

“꼬치꼬치 캐묻지 말고 그냥 그렇게 불러.”

그렇게 말해도 불만족스러운 표정. 낚싯줄을 풀고, 비토의 차가워진 몸이 풀썩 쓰러지고, 이상한 여자애는 나무 뒤에서 나와서 가볍게 앞으로 걸어 나왔어. 소풍이라도 하는 것처럼 사뿐사뿐. 미소도 전혀 사라지지 않았고. 그래, 조금 더 가까이 와라, 조금만 더. 오늘은 헛소리 복용량을 다 채워서 더 들으면 곤란하거든, 한 발짝 더, 좋아,

“이상한 이름이란 건 그런 뜻이 아니라,”

지금이야. 지루한 말을 더 내뱉기 전에, 아직 손에 칼은 들려 있으니까ㅡ

“아, 그 전에.”

그렇게 말하면서 녀석이 갑자기 고개를 숙이고, 어라, 하는 사이에 칼은 허공을 갈랐어. 뭐야? 피했다고? 이걸 피했어? 라고 생각하려는 순간 손목에 감기는 차갑고 단단한 촉감. 순식간에 팔을 뒤로 돌려서 묶어버리고. 어이없을 정도로 빨리 제압당해 고꾸라진 내 앞에 녀석은 자신만만하게도 서 있어.

“혹시라도 이상한 마음 품지 마. 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 다 읽히니까.”

“광신도 다음엔 초능력자냐.”

“초능력자? 그럴 리가.”

뭐가 재미있다고 웃어. 난 지금 하나도 재미없거든. 묶여 있는 건 정말 싫어한단 말이야. 앞으로의 지루함을 보장하니까. 센서는 죽어라고 삑삑 울리는데 브레이크의 나사가 엄청나게 세게 조여져서 아예 움직이질 않는다고 생각해 보라고. 그렇게 되면, 정말, 정말로 나중에는 참을 수 없게 되어 버린다니까, 그래, 지금처럼,

“너 방금 무서운 생각 했지.”

어, 뭐야. 정말 초능력자냐.

“초능력자 아니라니까. 그저 네 마음이……, 이해가 갈 뿐인 걸.”

헛소리. 차라리 초능력자라고 해라. 도대체 누가 누굴 이해한다는 거야.

“하는 짓만 봐도 알 수 있어. 너, 사람 죽인 적 있지? 거짓말할 생각은 하지도 마. 네가 하는 거 보면 딱 나오니까. 충동을 참을 수가 없지? 방금 표정만 봐도 답이 나온다니까.”

이해는 무슨, 이해할 리가 없잖아. 엄마도 아빠도 교수도 누구도, 단 한 명 빼고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리고 결국엔 나조차도 이해를 할 수가 없는데.

“널 이해해주는 사람을 찾고 있었지? 그런 사람이 없어서 외로웠지? 다 알아. 왜냐면 나도 그랬거든!”

웃기고 있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네. 하지만 녀석은 말을 멈추지 않았어. 그저 계속 말했어. 난 듣기 싫은데, 말이 되는 이야기일 리가 없는데, 그런데 단지 그 말들이, 그 헛소리들이 지나치게, 정말로 지나치게 정확할 뿐인데.

“있잖아, 푸파? 네가 지금까지 겪은 고통, 그 모든 고민들,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 태어나서 살아가는 걸까, 왜 아무도 날 이해해주지 않는 걸까, 살의로 가득한 괴물인 나를 왜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까, 그런 것들 있잖아?”

정확해. 불가능하리만치 정확해. 말도 안 돼. 설마, 그럴 리가,

“ㅡ그런 건 전부 살인마의 성장통 같은 거야. 우리 같은 살인마가 커가면서 불행하게도 한 번씩은 겪는 아픔이지. 하지만 이젠 끝났어. 걱정할 필요 없어.”

정말로 날 이해하고 있다고? 나를 내려다보면서 저렇게나 자신만만하게, 모든 걸 이해한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고? 그 애 말고도 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그런 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데, 이건 환각인가, 아니, 이게 현실이야?

 

“오딜 그라이프라고 해. 앞으로 잘 해보자.”

 

전부 현실이었어.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어야 했어. 이 녀석은, 오딜 그라이프라는 여자애는 나와 닮았어. 선천적인 살인마야.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끔찍한 충동에 시달리는 아이야. 단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녀석은 충동을 결코 잠재우려고 하지 않을 뿐이야.

충동을 멈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문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장갑을 끼고, 조금이나마 덜 지루하도록 속옷 위에 그대로 가운을 걸치는 나와는 다르게 최고의 유희를 더 효과적으로 즐기기 위한 청바지와 아웃도어용 재킷을 입어. 겉으로는 웃으면서도 속으로는 지루함에 몸부림치는 나와 반대로 녀석은 정말로, 속으로도 한껏 즐거워하면서 웃고 있어. 참을 필요가 없으니까. 얼마든지 즐거워할 수 있으니까.

“그건 그렇고, 푸파라고 했지.”

나를 나무에 묶어놓고 자기는 그 옆에서 빈둥대면서, 오딜은 뭔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어.

“이상한 이름이라고 한 거, 그냥 이상하단 의미는 아니었어.”

대답하기엔 너무 머리가 복잡해. 오딜은 잠시 기다리다가 자기 맘대로 떠들기 시작하고.

“푸파, 곤충의 고치 또는 번데기.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인형이나 소녀의 의미도 있고. 확실히 인형처럼 예쁘게 생기긴 했네.”

또 저 소리야. 다들 나한테는 똑같이 말하지. 하지만 그 다음까지 말하는 사람은 없었어. 적어도 지금까지는.

“하지만, 곤충의 고치 또는 번데기잖아. 그 안에는 뭔가 숨 쉬고 있어. 깨어나기를 바라면서 조금씩 몸을 만들어가고 있어. 가끔씩 참을 수가 없지? 어떻게든 억제해보려고 해도 결국에는 아까처럼 칼을 쥐게 되지? 무의식적으로? 모든 살인마는 어릴 때는 하나의 번데기야. 작은 동물을 먹이로 하고 마을에 불을 놓으면서 조금씩 성장해가지만, 언젠가는 우화할 때가 와.”

그래, 이젠 정확하다는 말조차 지겨워. 전부 옳아. 오딜은 전부 이해하고 있어. 살아있는 심리검사 결과 같아. 내가 이대로 변하지 않으리라는 걸, 아니, 이대로 성장하리라는 걸 명확히 보여주는 것만 같아. 저 두 눈으로 나를 전부 관찰하고 전부 이해하는 것만 같아. 정말로 두려운 눈이야. 두려운 이유는 심리검사 결과서와 닮았기 때문만은 아니야. 내가 나아지지 않을 거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만도 아니고, 내가 돌아갈 수 없으리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만은 아니야. 더 끔찍한 질문을 던지고 있기 때문이야.

만일에 오딜이 날 전부 이해한다면, 그래, 내 사랑하는, 내 사랑하는 풀고라 란테르나리아처럼 나를 전부 이해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 애가 내 모든 걸 이해했기 때문에 나는 지금까지 그 애의 말대로 나아지려고 노력하고 있었어. 하지만 그 애가 할 수 있는 일을 오딜도 똑같이 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왜 돌아가야 하지? 왜 한국에 돌아가야 하고, 왜 그 애한테로 돌아가야 해?

“있잖니, 푸파?”

그 전부 이해하는 두려운 눈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어. 묶여서 숨을 헐떡대는 나를. 오래도록 만나지 못했던 가족을 보는 것처럼.

“여자 둘이서 사람을 죽이고 다니면 센세이션이 일어나지 않을까? 나랑 너랑 둘이서. 하나는 독일에서, 또 하나는 먼 동방에서 온 두 악마가 세상을 새빨갛게 칠하는 거야. 재밌을 것 같지 않아? 두근거리지? 난 다 알고 있어.”

이건 유혹이야. 악마의 유혹이고 고백이야. 앞으로도 계속 함께하자는 강한 압력.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나한테 있을까? 분명히 오딜과 함께하는 삶은 지금보다 훨씬 덜 지루할 거야. 조금 빨리 죽거나 잡힐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훨씬 덜 지루한 삶일 거라고. 무엇보다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곁에 있으니까 말이야. 어쩌면 운이 좋게 잡히지 않을지도 몰라. 보아하니 오딜은 다른 사람을 교묘하게 조종해서 자기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도 능한 것 같잖아. 그렇다면 어쩌면, 어쩌면 정말로 오래도록 즐거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내게 이 주장을 거절할 이유는 없어.

“기분 나쁘니까 저리 꺼져.”

나는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었어.

 

어째서일까.

 

분명히 즐거울 거야. 왜 좋다고 하지 않았어? 왜 너처럼 지루해하는 애가, 매일같이 지루함에 몸부림치면서 물건을 수십 개씩 깨먹는 애가 저렇게나 즐거워 보이는 제안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어?

 

모르겠어.

 

저 애는 너를 이해해 주잖아. 저런 애를 필요로 했잖아. 그걸 부정할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저런 애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내 생각엔 아닌데. 지금이라도 좋다고 해. 오케이라고 하라고. 너를 이해해주는 평생의 친구, 평생의 반려자, 평생의 연인을 얻을 수 있어. 도대체 뭘 우물쭈물하는 거야?

 

모르겠다고.

 

아하, 그 애 때문이야? ‘나의 사랑하는 (적당한 단어를 넣으세요)’ 때문이야? 정신 차려, 이 자식아. 잘 생각해 봐. 냉정해져야지. 합리적이 되라고. 그 애는 물론 너를 꽤 많이 이해했어. 하지만 그 다음엔 어떻게 했지. 네가 그 애를 끔찍한 집안에서 구해줬더니 어떻게 했지? 널 벨기에에 처박았잖아! 그게 네가 좋아서 그런 거 같아? 널 위해서 그런 것 같아? 진짜로 그렇게 믿는다면 너 같은 호구도 없을 거다! 상식적으로, 너처럼 미치지도 않은 애가, 아무리 나쁜 놈들이었다고 해도 자기 부모를 죽이고 집까지 홀랑 태워먹은 정신병자를 위해서 뭘 해주겠냐! 그 애는 네가 치료가 불가능한 인간 말종이란 걸 알았어. 그래서 다시는 볼 일이 없도록 벨기에에 처박아버린 거라고. 그걸 아직도 몰랐냐?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방금은 농담이었어! 하, 하, 하! 이젠 좀 어때? 오딜하고 같이 세계를 뒤집어엎을 마음의 준비는 됐어?

 

아니, 전혀 이해 못 하겠어!

 

“푸파? 푸파, 뭐라고 했어?”

저 얼굴, 거의 달라붙다시피 얼굴을 가까이 하고서는 조금 놀란 얼굴로, 내가 분명히 대답했는데 뻔뻔하게 다시 물어보고 있지. 놀랄 만도 해. 왜냐면 나도 내 입에서 그런 대답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으니까. 왜 그런 대답이 나왔는지 스스로도 영문을 모르겠으니까. 그래도 하나는 확실해. 내 대답은 내 심리검사 결과만큼이나 바뀌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엄청 싫어하니까.”

“흐응,”

몸을 멀찍이 떼면서 오딜은 탐탁찮은 표정을 지었지만, 곧 미소를 되찾았어. 그러고서 이런 불길한 소리를 했지.

“뭐, 좋아. 방금 전까지 번데기였던 애가 갑자기 성충이 될 수는 없는 법이지. 하지만 나도 오래 기다릴 수는 없으니까……,”

무슨 제안을 해도 내 대답은 정해져 있어. 지루하게 하지 마. 오딜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낚싯줄을 풀어주고, 꿈틀거리는 나를 순식간에 제압하면서,

“아까 낚시터에서 같이 있던 여자 있지? 굉장히 친해 보이던데,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널 이해해줄 수는 없어. 너한테는 필요 없는 사람이라고. 그래도 혹시 맛은 좋을지도 모르니까, 내일 저녁 시간쯤 우리가 만났던 낚시터로 데려오도록 해. 환영회 열어줄게! 기대되지 않아?”

땅바닥에 처박힌 채로 이런 제안을 들었어. 음, 쿨도어를 데려가는 건 간단한 일이야. 내가 같이 가자고만 하면 무슨 일인지도 안 묻고 쫄래쫄래 따라올 거 아냐. 그렇게만 하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적어도 쿨도어랑 비엔나 봉봉이랑 캠핑이나 하고 있는 것보다는 훨씬 덜 지루하겠지. 머리는 여전히 아프지만 그 정도로 냉정하게 생각할 수는 있어. 그런데 지금은 정상참작을 좀 받고 싶네. 아프니까 냉정하게 굴지 못해도 이해해 달라고.

“안 데려가면?”

“그러지 않을 거라고 믿지만, 그래도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너라면 어떻게 할 것 같아?”

소름끼치는 목소리로 그렇게 답하고 다시 《송어》를 불면서, 오딜은 조용히 숲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어. 나를 홀로 남겨놓은 채로,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다시 아무도 없는 채로. 시간은 하루도 채 남지 않았고 그 전까지 뭔가 해결책을, 대답을 내놓아야만 해.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좋아, 질문은 충분히 쌓였어.

이제는 정말로 답을 듣고 싶어.

 

비토가 남긴 랜턴이랑 품 안에 있던 지도 하나를 가지고 숲에서 간신히 빠져나왔을 때는 이미 해가 뜨고 있었어. 그렇다고 해도 다들 자는 중이어서 내가 나간 건 눈치를 못 챈 것 같지만, 정작 돌아온 내 꼴을 보더니 쿨도어는 아주 기겁을 하더라.

“그냥 일이 좀 있었어.”

“일이 좀 있었던 수준이 아니잖아! 이 긁힌 상처 좀 봐. 구급상자 가져왔으니까 잠깐만 기다려!”

“그 전에 잠깐만.”

“뭔데?”

“둘이서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저쪽 낚시터가 좋겠다.”

이 말 한 마디에 따라오는 건 계획대로야. 나무 아래 앉아서 구급상자를 펼치고, 약을 발라주네 밴드를 붙이네 하지만 놀라울 정도로 손을 떠는 것도 전부 예상했던 그대로. 그래, 이럴 줄 알았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정말로 알기 쉽다고.

“무, 무슨 얘기 하려고 불렀어, 푸파?”

뭘 기대하고 앉았어. 그냥 뭣 좀 물어보려는 거야. 나보다 똑똑하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내가 어떤 앤지에 대해서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고 그럴 생각도 없겠지만, 그래도 당장 물어볼 사람이 생각이 안 나니까. 뭐 적어도 나보다 오래 살긴 했잖아. 뭔가 도움을 줄 수는 있겠지.

그래서 말했어. 전부 말하지는 않았어. 하지만 간략하게는,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 애를 좋아했는데 여기서 다른 애를 만났다고, 나를 이해해주는 건 똑같고 아마 나랑도 더 비슷한 사람이라서 함께 있으면 즐거울 것 같다고 머리로는 생각을 하는데,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번에 만난 애한테는 전혀 끌리지 않는다고.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이 얘기를 왜 굳이 쿨도어한테 했냐고? 표정이 볼만하거든. 내가 다른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할 때의 저 화려한 표정 변화란! 뭐어, 그래도 어른은 어른이더라. 상처를 딛고 나를 빤히 바라보면서, 내가 찢어놓은 눈 아래의 상처가 아직 그대로 있는데도 내 무릎의 긁힌 상처에 밴드를 붙여 주면서 쿨도어는 입을 열었어.

“으음, 어려운 얘기네.”

그건 알아. 내가 듣고 싶은 건 대답이라고. 대답을 내놓을 수 없으면 난 내 이성이 내리는 판단에 따라버릴 거야. 내 저녁식사나 되라지. 그건 나도 원하는 결말이 아니니까 빨리 대답을,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어떻게?”

“네가 한국에 있는 그 애를 좋아하는 이유가, 과연 널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까?”

뭐 하자는 거야, 지금. 그건 확실하잖아. 그게 아니라면 뭐겠어?

“시작은 그랬을지도 모르지. 그것 때문에 처음 좋아하게 되었을 거야. 하지만 그 이후에는? 서로 이해하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안 했어? 시시한 얘기도 하고, 추억도 쌓고, 그러지 않았니?

그야 그렇지만, 그래도,

“만약, 만약의 얘기야. 그 애가 널 더는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해 봐. 갑자기 머리에 문제가 생겼을 수도 있고, 사고를 당해서 기억을 잃었을 수도 있고, 뭔가 심경에 변화가 생겼을 수도 있어. 아니면 처음부터 널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고. 그렇다면 너는 어떻게 할래? 그 애를 그만 좋아할 수 있겠어?”

또 질문이네. 그것도 아주 어려울 것 같은, 칠판에 빽빽한 수학 공식처럼 보기만 해도 머리가 아찔해지는 질문이야. 하지만 뭔가 이걸 풀면 진리가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뉴턴의 법칙처럼, 아인슈타인의 법칙처럼 멋진 우주의 방정식이 빛나는 모습을 드러낼 거라는 느낌이야. 그러니까 일단은 눈을 감고, 이렇게 말한 다음에,

“잠깐 생각 좀 해 볼게.”

잠깐 환각의 세계에 다녀올게.

 

환각 속에서 나는 불타는 집 앞에 서 있어. 장갑도 없고 가운도 없어. 자주색 트레이닝복에 하얀 외투에 야구모자. 키도 지금보다 작아. 방금 샤워를 하고 나와서 머리카락엔 아직도 물방울이 맺혀 있지만 그것도 열기에 날아가고 있어. 나는 그 앞에서 나의 사랑하는 로드니우스 프롤릭수스, 너에게 막 같이 벨기에로 떠나자고 제안한 참이야. 하지만 방금 본 광경에 심하게 충격을 받은 너는 이렇게 대답하고 말지.

“너, 너 뭘 한 거야? 이런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넌 미쳤어! 이해 못 하겠어!”

ㅡ아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파. 이런 말은 도저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장갑도 없어. 충동을 이길 수가 없어. 그 애는 계속 나를 비난하고, 그래, 이 광경은 언젠가 본 적이 있는데. 나를 이해할 수 없다면서 끝까지 비난하고 나는 결국 그 애마저도, 한때 나를 이해한다고 믿었던 사람마저도 내 손으로 직접, 오랜 시간에 걸쳐서, 쉬지 않고, 고통스럽게. 분명히 본 적이 있어. 환각 속에서. 이것과는 다른, 더욱 생생하고 소름끼치는 환각 속에서. 그 약을 먹었을 때.

그때 난 분명 그 애를 죽였어. 지금처럼, 지금 보고 있는 환각처럼. 옷을 벗기고 살을 찢고 피를 흩뿌리면서 가능한 한 끔찍하게 죽였어. 맞아, 그 애가 날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이 장갑 없이는 난 도저히 충동을 참을 수 없을 거야. 그게 내 진심이고 본성이야. 나는 그렇게 태어났고 전혀 바뀌지 않았어. 이것이 하나의 정답이야. 이걸로 끝일까? 그 애가 날 이해해주지 못한다면 나도 그 애를 사랑할 수 없을까? 이 질문은 답이 아주 간단하네.

‘절대로 아니다.’

날로 먹는 문제였어.

풀이과정을 쓰라고 하면 쓸 수 있어. 증명을 요구한다면 보여줄 수도 있고. 간단하니까 잘 보라고. 지금 내 아래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너도 잘 들어. 내가 비록 환각 속에서 나를 비난하는 널 죽이긴 했지만, 그것도 정말 잔혹하게 죽이긴 했지만, 그 다음엔 어떻게 했지? 다시는 그 환각을 보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어? 약에는 손도 안 대고?

아니잖아.

나는 다시 약을 집어삼켰어. 장갑으로 충동을 봉인한 채로 네 분노에 스스로를 무력하게 내버려뒀어. 네가 화내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것도 내겐 없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화를 내고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면서 소리치는 너를 보기 위해서 다시 약을 먹었다고. 그래,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으니 단지 너를 보기 위해서. 이거야말로 간결한 증명이지, 그래, 증명 끝.

 

수학의 역사에서 흔히 그랬듯이, 하나의 증명은 다음 증명의 힌트가 되고,

 

나는 왜 아르덴에 와 있는 걸까? 왜 몽롱한 정신 속에서, 정체조차 불분명했던 살인자에 이끌려 여기까지 온 걸까? 이젠 여기에 대한 답도 내놓을 수 있어. 나는 매우 우울했고, 그 이유는 심리검사 결과 때문에 다시는 그 애를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야. 그 상황에서 나는 뭘 하고 싶었던 걸까? 그야 당연히 조금이나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겠지.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 모르는 그 애에게로, 나의 사랑하는 드리오코셀루스 아우스트랄리스에게로. 그래서 수수께끼의 범죄자에게 이끌렸던 거야. 왜냐하면, 나는 결코 탐정이 아니지만, 탐정을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 애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였어. 그래서 탐정놀이를 시작했고, 쉽게 질려버렸는데도 기회만 있으면 추리에 달려들었고, 선한 뜻 따위가 아니라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이 나를 여기로 인도했던 거야. 증명 끝.

 

그리고 작은 증명이 모여 더 커다란 명제를 향해 흐르고,

 

나는 왜 벨기에에 와 있는 걸까? 이 벨기에에서, 그 애하고는 이렇게나 멀리 떨어져서, 나는 과연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 아니, 바뀔 수는 있을까? 이건 정말 어려운 문제야. 지금까지의 증명 방법으로는 풀 수 없을지도 몰라. 왜냐면 검사 결과는 내가 정말로 바뀌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거든. 그래, 아마 난 바뀌지 않을 거야. 뇌를 갈아치우지 않는 이상 나는 죽을 때까지 죄책감도 없이 가학적이고 잔인하고 범죄적으로, 병적이고 이기적이고 반사회적으로, 나르시시즘이랑 마키아벨리즘 정도도 이 상태로, 심지어 뇌 영상 촬영 결과도 거의 변하지 않은 채로 살아갈 거야. 이 사실을 인정하고서도 증명을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을까?

 

나는 눈을 뜨고, 환각이 녹아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서서히 곁을 돌아봐. 쿨도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어. 미안한 일이지. 날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증명을 마치려면 아무래도 한 번 더 고통을 줘야 할 것 같으니까.

“쿨도어, 나 좋아해?”

표정만으로도 알 수 있어. 훨씬 어린 애 앞에서 새빨갛게 돼서는, 어른스럽지 못하게.

“내 생각엔, 나는 결코 쿨도어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아.”

나는 이기적이고 가학적이니까. 그리고 이미 마음에 정한 상대가 있으니까. 하나 덧붙이자면 쿨도어가 어떻게 나올지 알 것 같으니까.

“나, 나는, 할 수 있는 일에는 최, 최선을 다할 거야.”

좋아, 그렇게 나와야지. 계속 최선을 다해 달라고. 넌 내 사랑을 받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니까. 그럼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어. 시간은 잔인하게 흐르고, 지난 2년이 지루함 속에서도 순식간에 지나갔듯이 저녁까지도 시간은 쏜살같이 날아가. 그 동안 나는 쿨도어에게 몇 마디 해 두고, 그 다음엔 그저 기다릴 뿐. 지루해? 그래, 물론 지루하지. 그건 내 뇌의 문제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다면, 그래, 지루함 끝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안다면야.

 

새는 알을 뚫고 나오기 위해 싸운다고들 하지. 좋은 말이야. 얼마나 멋져?

하지만 불만이 있다면, 왜 하필 새만 알을 뚫고 나오기 위해 싸운다고 생각하느냐는 거야. 파충류 양서류 조류 곤충 갑각류, 수많은 생물들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알을 뚫고 나와야 한다고. 작고 털이 난, 꿈틀꿈틀 움직이고 치명적인 독을 가진 애벌레도 마찬가지야. 알을 뚫고 나오기 위해 애벌레는 싸워. 그렇게 세상을 만나.

하지만 새와는 달라서 애벌레의 싸움은 끝나지 않아. 시간이 흐른 뒤에 애벌레는 어째서인지 스스로를 다시 고치 속에 가둬. 헤르만 헤세가 이 사실을 깨달았다면 아마 질겁했을 거야. 왜 그렇게 힘들게 싸워서 손에 넣은 세계를 포기하고 다시 갇히는 길을 선택하는 걸까? 헤세는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건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나는 이해할 수 있어. 애벌레는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천적을 격퇴할 수 있지만, 할 수 없는 게 하나 있으니까. 비행? 재미없는 얘기 하지 마. 사람들은 단지 날아다니고 날개가 예쁜 곤충이 번데기에서 나오는 걸 경이롭게 지켜보지만, 걔네들이 고작 날아다니면서 날개 자랑이나 하려고 그 고생을 할 것 같아? 절대로 아니지. 그럼 무엇을 위해서 곤충들은 고치를 만드는 걸까?

그걸 알기 위해서는 고치에서 나온 곤충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관찰해야 하겠지. 그 지루한 데에 처박혀서 스스로를 그저 녹이고 다시 짜 맞추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마침내 밖으로 나오고 나서는 뭘 하지? 그냥 날아다니나? 싸우고 먹이를 먹고 잠을 자? 그럴 거면 그냥 애벌레로 있을 수도 있었잖아? 하지만 애벌레는 할 수 없는데 성충은 할 수 있는 일이 딱 하나 있어. 그래, 성충은 애벌레와는 달라서 사랑을 할 수 있어.

나비도 나방도 개미도 벌도 풍뎅이도 파리도 어릴 때는 사랑을 할 수 없어. 하지만 성충이 되면 한 쌍의 파리로부터 수백만과 수십억의 자손이 뿜어져 나오는 법! 그래, 알은 세계지만 그것을 부수는 건 고작해야 하나의 세계를 부수는 것에 불과해. 고치야말로 세계야. 나 하나만을 가두는 내 마음 속의 자그마한 세계가 아니라, 나와 나의 사랑과 수백만과 수십억의 사랑의 결실들이 뚫고 나아가야 할 진짜 세계야. 사랑하려는 자는 반드시 그 세계를 깨뜨려야 해. 알을 뚫고 나온 벌레의 군세는 신에게로, 잔혹한 물리법칙과 차가운 방정식으로 그 무엇보다도 지루하고 끔찍한 고문도구를 자아내 피조물들을 한껏 괴롭히는 고문장치의 신에게로 날아가. 그 신은 고문장치의 신이지만, 생명체가 태초에 탄생할 때 세상은 잔혹했고 모든 것이 고통스럽게 끓는 수프였으나 그럼에도 생명체는 둘로 나눠지고 넷으로 나눠지고 여덟로 열여섯으로 서른둘로 나눠져 자손을 남겼으니 이것이 사랑의 기원으로서, 따라서 고통과 사랑은 태초부터 있었으니 그 신의 이름이야말로 사랑이라. 그러니까 이 증명 방법이야말로 신의 증명인 셈이지. 어릴 때 동생이 보던 만화에서 그렇게 주인공이 외쳤던 것처럼, 그래, 사랑의 힘으로.

 

시간이 가까워. 쿨도어는 내가 시킨 일을 모두 마치고 쉬고 있어. 내가 시키는 대로 낚시터에서 준비를 해 두고, 그 다음엔 캠프장 관리사무소 건물 안을 그렇게 뒤지고 다니면서 고생을 했으니 힘들 만도 하지.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는 성격 덕분에 준비는 아주 완벽해. 낚시터 쪽은 물론 준비 만전이지. 그리고 관리사무소 안의 CCTV와 인선은 전부 파악했고, 어느 화장실에 가장 사람이 없을지, 어떻게 해야 할지, 그것도 전부 알고 있어. 그게 왜 필요하냐고?

오딜은 분명히 내 생각을 전부 읽고 있었어. 날 전부 이해하고 있었지. 하지만 그렇다면 그 반대도 성립하잖아? 난 오딜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다고. 낚시를 하고 물고기를 내팽개치고, 그건 아마도 오딜 나름대로의 충동 해소 방법일 거야. 동물 학대는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는 흔한 습관이지. 그리고 또 하나가 있잖아? 내가 만일 쿨도어를 데려가지 않으면, 녀석은 나머지 하나를 할 생각인 거야. 이 아르덴 숲에, 이 캠프장을 둘러싸고 있는 온 숲에 말이야. 그걸 알고 있다면 계획을 망치는 것도 간단하지.

“그럼, 슬슬 다녀올게.”

“혼자 괜찮겠어? 몸도 안 좋은데”

뭐, 쿨도어 말이 맞아. 이런 상태로 혼자 어떻게 하기엔 분명 까다로운 상대지. 그래도 이 일은 혼자 책임지고 싶어. 이건 나와 내 사랑에 대한 일이고 다른 사람이 끼어들 여지는 없으니까. 바꿔 말하자면 이 얘기야.

“나도 다 컸거든. 비엔나 봉봉이 호들갑 안 떨게 잘 지켜봐 주기나 해.”

쿨도어는 뭐라고 말하려는 것 같았지만, 반박하려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결국에 나온 말은 내가 기대하던 그대로였어. 전부 계획한 대로였어.

“최선을 다할게.”

 

그렇게 나는 낚시터로, 타오르는 석양 때문에 불길이 뒤덮은 것처럼 보이는 호수로 향했어. 거기에 서 있는 것은 동그란 안경, 아웃도어용 재킷에 청바지, 풍성한 갈색 머리를 흔들면서 능숙하게 휘파람을 부는 낚시꾼. 오딜 그라이프가 이쪽을 돌아보면서 생긋 웃었어. 어젯밤 숲에서와는 다르게 광기의 파편조차 보이지 않는, 엄청나게 상냥해 보이는 모습으로.

“올 줄 알았어.”

“뭐, 어쩔 수 없잖아.”

나도 기다리는 사람한테 말 한 마디 안 하고 도망갈 정도로 매정한 사람은 아니라고. 오히려 너무 일찍 온 게 아닌가 걱정하고 있단 말이야.

“만일 네가 안 왔다면 캠프장 주변에 불을 질렀을 거야. 아무도 도망가지 못하게. 다 같이 타죽을 수 있게. 나, 무선전신이나 플라이 낚시보다 훨씬 더 폭발적인 것도 할 줄 알거든? 순식간에 여길 지옥으로 만들 수 있다고.”

“불 지르는 거 좋지.”

“역시 이해하는구나! 네가 오면 안 하겠다고 했지만 이런 분위기에서는 어쩔 수 없네! 파티 끝나고 초대형 캠프파이어라도 하는 게……, 그런데 그 여자는 어디 있어? 데려온 거 아니었어?”

정말 너무 일찍 왔나, 하고 생각할 무렵, 쾅! 관리사무소에 불길이 치솟고 연기가 피어오르고, 비명소리가 들리고, 가스를 열어놓을 수는 없었지만 창고에 쌓여 있던 연료 젤이랑 소독용 알코올을 이용하면 비슷하게는 할 수 있지! 그래, 불길은 언제 봐도 엄청 지루하지는 않다니까. 그것보다 더 즐거운 게 있다면, 불길을 보고 깜짝 놀라는 여자애의 얼굴 정도일까. 좋아, 조금 더 놀려 줘야지.

“어머나, 불이 났네.”

그래, 표정 좋고. 이렇게 보니까 나름대로 귀여운 면이 있잖아. 마음에 드는데.

“소방차가 오려나? 아니면 소방헬기?

이 말을 들음과 동시에 귀여운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고,

“뭐가 됐든, 지금이라면 숲에 불을 지르든 폭탄을 터뜨리든 별로 피해가 없을 것 같지 않아?”

“뭐 하는 짓이야!”

오케이, 오케이! 그런 표정이야! 모든 게 무너질 때, 모든 것이 절망적일 때는 그런 표정을 지어야지!

“난 널 이해한다고! 널 이해해준다고 말했잖아! 그런데 왜 날 방해하는 거야? 왜 이런 짓을 했어? 왜 넌 날 이해해주지 못하는 건데!”

“왜 이해해야 되는데?”

이젠 내가 질문을 던질 시간이야, 오딜. 답할 수 있으면 답해보라고. 아마 못 할 거야. 왜냐면 난 이미 증명을 완벽하게 끝내 뒀거든. 자아, 멍청한 얼굴로 똑똑히 보라고.

“나한테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그 애를 정말로 사랑해. 처음엔 그저, 그 애가 날 이해해준 최초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였어. 하지만 그걸로 끝나지 않았어. 내 사랑은 점점 더 성숙해가고, 더듬이와 날개와 다리를 기르면서 지금에 이르렀어. 그래, 나의 사랑하는 밀라브리스 팔레라타, 만일 네가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다고 해도 그건 아무래도 좋아! 날 이해하지 못해도 좋아, 날 매도해도 좋아, 날 죽이려고 한다면 그것도 좋아! 그래도 사랑해! 치명적인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네가 나를 아프게 하더라도 난 널 무한히 사랑해, 이젠 돌이킬 수 없어. 너랑 같이 있고 싶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너와 함께 있고 싶어, 이해할 때까지 말하고 싶어, 이해할 때까지 감금하고 싶어, 이해할 때까지 아프게 하고 싶어, 가능하다면 억지로 내 아이를 낳게 하고 싶어, 방법은 많아, 사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야, 하지만 애벌레가 나비가 되더라도 유전자는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본질은 하나야. 네가 나를 영원히 이해해주지 못하더라도 그저 같이 있고 싶어! 그런데 오딜 네가 날 이해해줄 수 있다고? 필요 없거든! 이제야 깨달았어. 나한테 필요한 건 이해가 아니었어, 그저, 그저 그 애만 있으면 돼!”

하아, 하아, 숨을 몰아쉬고, 앞을 보면 녀석은 그저 멍하니 있고. 생각해보면 내가 저 상황이었어도 엄청 어이가 없었을 것 같긴 하다. 이렇게나 부끄러운 외침을 듣다니 말이야. 으으, 이런 부끄러운 사랑 고백을 다른 사람 앞에서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다니, 제 정신이 아니었지, 내가 미쳤지. 방금 이거 농담! 하, 하, 하!

“푸파 너……,”

그래, 감상을 들려줘. 엄청 로맨틱하지 않았어? 영화 같지 않았어?

“내가 생각했던 거랑은, 전혀 다른 게 깨어나 버렸구나.”

그건 별로 로맨틱한 감상이 아니잖아. 뭐어, 감상에 불만만 가지면 발전이 없는 법이니까 실전에서는 이것보다 더 잘 해야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오딜은 안경을 벗었어. 아주 천천히. 중얼거리면서.

“아빠는 항상 말했어. 난 눈빛이 소름끼친다고. 마귀의 눈이라고.”

안경알 아래에서 드러나는 건, 와아, 안경 벗으니까 완전히 인상이 다르잖아. 인상이 완전 다르다 싶었는데 저게 비밀이었나.

“그래서 너랑 같이 있고 싶었는데.”

“무슨 소린지 모르겠거든.”

“죽어.”

“그건 이해할 수 있겠ㅡ”

 

빨라.

내가 느려진 걸 수도 있지. 몸이 안 좋으니까. 하지만 그걸 고려해도 빨라. 커리큘럼을 무시한 내 무리한 운동의 성과는 이 녀석 앞에서는 별로 빛을 발하지 못해.

게다가 다 읽히고 있어.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공격하려는지, 칼을 어떻게 꺼내서 휘두르려는지 전부 알고 있다는 느낌이야. 감으로 피하는 걸까, 오랜 살인 경험 때문에 나랑은 넘어설 수 없는 차이가 생긴 걸까. 돌이켜보면 난 어린애 아니면 묶여 있는 사람한테만 칼을 댔으니까. 이런 면에서는 어쩔 수 없겠지. 앞으론 스타일을 좀 바꿔볼까?

살아남을 수 있다면.

쉽지는 않아, 응, 확실히 어려워. 저쪽이 쓰는 흉기라고 해 봐야 낚싯줄 정도지만, 난 어느새 칼을 놓쳤고 몇 번이나 목을 졸렸다가 간신히 탈출했어. 이대로라면 나도 희생자가 되고 말 거야. 뭔가 변수를 만들어보는 방법밖에는 없겠는데, 그래, 그 방법뿐이네. 도망치는 척, 후퇴하는 척 호수 쪽으로 뒷걸음질을 치다가, 젠장, 젖는 건 싫은데, 하고 풍덩.

 

그래, 이것도 계획에 있긴 했어.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계획이란 그런 거니까.

첫째로 고려한 건, 지금쯤이면 하루살이가 또 우르르 우화할 거라는 거야. 그걸로 뭐 시간을 벌 생각은 없어. 단순히 수면에 하루살이가 들끓게 만들어서 시야를 가리면 되는 거야. 그건 계획대로 잘 됐어. 나도 바깥이 안 보이거든.

두 번째로 고려한 건, 사실 아주 의도적인 건 아니었는데, 그래도 활용할 수 있는 건 최대한 활용해야지. 이쯤이었는데? 여긴가? 이거다!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는 것이야말로 진짜 능력이지.

그리고 세 번째로 고려해야 되는 건……, 녀석은 내 생각을 대충은 읽었을 거야. 그러니까 이를테면 내가 이 낚싯대를, 어제 떨어뜨린 이걸 쥐고 녀석이 있을만한 곳을 향해 힘차게 내뻗는다면,

“말했잖아! 난 널 전부 이해한다고! 넌 절대로 날 못 죽여!”

제대로 찔러보기도 전에 이렇게 붙잡히는 거야. 아아, 하지만 교활한 토끼는 세 개의 굴을 파고 살아남고픈 파리는 수억의 자손을 남기는 법. 무슨 말이냐 하면, 낚싯대가 붙잡히자마자 난 이걸 힘껏 잡아당기고, 녀석이 균형을 잃고 호수 안으로 떨어지는 순간 나는 아까 쿨도어가 호수 안에 던져 둔 두 번째 칼을 가지고,

“아무래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한 것 같네.”

살인마의 희생자가 되는 살인마, 둘 다 여자애, 이게 진짜 센세이션이지. 봐, 너도 엄청 놀랐잖아. 최고로 좋은 표정이야. 흠뻑 젖을 만한 가치는 있었어.

 

내가 호숫가로 간신히 기어 올라왔을 때, 오딜은 비참한 몰골로 얕은 물가에서 헐떡이고 있었어. 깊이 베인 가슴과 배의 상처는 아마 치료하기 힘들 거야. 피가 새빨갛게 호수를 물들이면서 하루살이의 우화를 더욱 드라마틱하게 만들고, 나는 그 광경을 웃으며 지켜보고. 아아, 오랜만에 제대로 몸을 움직였네. 역시 사람은 운동을 해야 돼.

“왜, 왜 이러는, 거야”

뭐야, 죽을 거면 깔끔하게 죽으라고. 좋은 살인마일지는 몰라도 희생자로서는 완전 빵점이잖아.

“우리는 달라, 다른 사람들하고는, 다르단 말이야. 우리 둘이 있으면 분명히, 행복해질 수 있어, 난 항상, 나 같은 애를, 날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길 바랐는데, 어째서 이런,”

그 정도 얘기라면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지만. 어릴 때 나도 똑같은 고민을 했으니까. 하지만 이젠 아니야. 왜냐면, 그래, 레오폴트 브리에르가 말했었지.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그 다음 구절은 건너뛰고, 그 다음 구절을 보자고.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러니까 이해받고 싶다는 어린애의 소망 따위, 내 사랑보다 덜 중요한 게 당연하잖아.”

“그런, 치사해…….”

“어른스럽다고 해 줘.”

죽어가는 몸이 하루살이 떼에 파묻히고, 팔다리를 허우적대는 힘도 조금씩 줄어들고, 오딜은 슬픈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어. 어른스럽다고 말하지는 않았어. 대신,

“푸파, 푸파,”

“이상한 별명인 거 안다니까.”

“그 어원은 인형, 사람의 형체, 그것으로부터 인형을 뜻하는 ‘퍼핏’, 그리고, ‘눈 속에 비치는 사람의 모습’에서……, 눈동자를 뜻하는 ‘퓨필’도,”

“갈 때가 돼서 정신이 혼미해?”

“그래, 그랬구나, 난 그랬던 거구나,”

“마지막까지 궁금증 남기고 가면 저주할 거야. 무슨 말 하고 싶은 건데?”

“그 눈, 눈동자에, 반한 것 같아, 아무래도,”

“뭐, 뭐야 갑자기. 안 살려줄 거거든.”

오딜은 마지막 숨을 토해냈어. 피가 섞여 나오고, 고통스러운 단어들이 섞여 나와. 마지막으로, 흐린 정신으로 남기는 마지막 이야기.

“홀려 버렸던 거야. 너무 예뻐서, 너무 아름다워서, 내가 원하는 모습만을, 보게, 되어 버려, 그래서 눈치 채지 못했어. 그 안에, 그 안에 뭐가 잠들어 있는지, 바보 같네, 나…….”

그리고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에, 에, 에? 그러니까, 음, 돌이켜보면 브리에르도 내 눈이 귀엽다고 했고, 쿨도어는 맛이 갔고, 고빌라는 자기 옛날 아내 닮았다고 그랬고, 비토는 선한 뜻을 보았다고 했고, 그리고 이젠 오딜 너도? 그리고 그게,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눈동자가 너무 예뻐서 다 자기 멋대로 이상적인 모습을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라고? 정말로? 좀 더 돌이켜보면 엄마도 그랬고 아빠도 그러긴 했어. 우리 사랑스러운 딸, 눈이 어쩜 이렇게 예쁘니, 누굴 닮아서 이렇게 예쁠까, 하고. 내가 여동생을 죽인 날에도 그렇게 말씀하셨던 게 기억나. 어라, 어라라라,

“설마 이것 때문에?”

이, 이 눈 때문에 아무도 날 제대로 봐 주지 않았던 거야? 눈이 너무 예뻐서? 그래서 내가 사람을 죽여도 살인마로 보이지 않았던 거라고? 와아, 와아 와아 와아, 나 지금 얼굴 완전 새빨갛겠다, 이건 진짜 부끄럽거든! 응, 정신 차리자. 냉정해져야지. 문제 해결법을 찾아보자고. 난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인데, 아무나 내 눈에 반하게 둘 수는 없잖아? 방법이, 방법이, 아까 싸우다가 오딜이 떨어뜨린 안경이,

“이러면 어때?”

마귀의 눈을 감추기 위해 썼던 안경이지만, 그렇게나 인상을 바꿔 주는 물건이라면 이걸로 불필요한 오해도 막을 수 있지 않으려나. 도수는 없지만 코랑 귀가 조금 간지럽네. 뭐 나중엔 익숙해지겠지ㅡ하고 생각하는데 별안간 오딜이 웃음을 터뜨렸어. 아하, 아하하하하, 하하하, 하면서 다 죽어가는 소리로.

“왜 그래!”

“아니 아니야, 그냥,”

아, 진짜 부끄럽게! 마지막까지 짜증나게 하기는!

“너무, 너무 웃겨서, 눈부셔……,”

그래도, 그게 마지막이었어. 오딜은 죽었고, 축 늘어진 시체는, 뭐 어떻게든 낚싯줄을 가지고 통나무에 묶어서 가라앉혀 뒀어. 언젠가는 떠오르겠지만 그래봐야 또 다른 학살자 전설이 시작될 뿐이겠지. 마침 통나무에 스마일이랑 물고기 표시도 해 뒀으니까 말이야.

 

곧 소방차가 도착했어. 모든 게 끝났어. 화재도, 웃는 얼굴 학살자도, 뒤틀린 아버지의 불쌍한 가족도, 성 비토의 어릿광대도, 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사람도, 그리고 짧지만 길었고 지루했지만 마냥 지루하지만은 않았던 캠프도. 근처에서 쿨도어가 기다리고 있었고, 참 애매하게 웃으면서 “절대 포기 안 해. 최선을 다할 거야.” 이렇게 중얼대면서도 몸을 닦아 줬으니까, 그렇게 피 묻은 옷이랑 흉기는 쿨도어의 배낭에 처박혔어. 전부 내가 계획했던 그대로야.

여전히 몸은 아파. 죽지 않았으니까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지. 그리고 여전히 지루해. 내 뇌는 결국 바뀌지 않으니까. 당장 한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고 당장 그 애를 안을 수도 없으니까. 그래서 살아있다는 건 결국 고통스럽고 지루한 거야. 하지만ㅡ떠나는 버스로 가는 동안 뒤를 돌아보았더니 아지랑이 같은 게 호수 위를 덮고 있었어. 그래, 저건 하루살이의 춤추는 구름이야. 찰나의, 덧없는 죽음을 향해서 물이라는 세계를 깨고 나와,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단 한 번 사랑으로 가득한 삶을 불태우는 하루살이들의 죽음의 무도. 그 한 번을 위한 물속에서의 삶이니까……, 그렇게 고통스럽고 지루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네.

그래, 저 벌레들처럼 나는 결코 바뀌지 않을 거야. 고치(푸파)에서 벗어나더라도 유전자는 변하지 않아. 이런 뇌와 이런 정신을 가지고 죽을 때까지 살아가는 게 유전자에 새겨진 내 운명이야.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 깊은 곳에, 이중나선의 뿌리에는 분명 사랑하라는 운명이 잠들어 있어. 그러니까 바뀌지 않더라도 사랑은 할 거야. 반드시 돌아갈 거야. 그 애의 예상을 뛰어넘는 방법으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반드시 돌아가 주겠어. 앞으로는 그것만을 위해 살아가, 그래, 이것도 어쩌면 그렇게 지루하지만은 않을지도 몰라.

 

-----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푸파가 귀엽죠. 나라면 귀엽다고 말하겠어요.

 

로크네스

Queerer than we can suppose

1 댓글

마드리갈

2021-01-13 21:5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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