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이며, 일기 형식으로 쓴 소설입니다.
참고로, 제 세계관(공작창 참조)을 공유하는 소설입니다.
벌써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른다. 꿈만 같았던 휴가에서 복귀하는 길이라니... 저녁이라 해는 저물어 가고, 뉴스에서는 안 좋은 소식만 흘러나오고 있다. 걱정스럽다. 요즘 돌아가는 걸 보면 참 어떻게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이제 내가 휴가에서 있었던 일을 간단히 써 보고자 한다.
1일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는 것이 실감이 난다. 얼마 만에 와 보는 집인가! 하긴, 그 동안 휴가를 안 나온 지 꽤 됐지. 2달이나 됐으니까. 매번 오가는 길이기는 하지만, 전철을 타고 1시간 반여 동안 집에 갈 때의 풍경이 새삼 기억에 남는다. 환승역의 사람들 지나가는 풍경도 그렇고... 모두 변함없이 그대로다.
역에 도착해서도 평소처럼 빨리 걷지 않고 좀 천천히 걸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집에 갈 생각을 하니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역을 막 나서는데, 익숙한 얼굴이 하나 보이는 것이 아닌가. 누군가 했더니 옆동네 농장 주인인 스틸 씨였다. 한 1년 만에 보는 얼굴이라 반갑게 인사했다. 스틸 씨는 인사하자마자 자랑할 게 그리도 많았는지 말부터 꺼냈다. 스틸 씨네 농장은 요즘 새 품종 바나나가 잘 나간단다. 물론 스틸 씨네 딸이 대학에 합격했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이름이... 로라 스틸이었지. 주말마다 역 근처에서 같이 놀던 생각이 난다. 나를 잘 따랐는데. 로라 동생인 사라도 그렇고...
뭐 아무튼, 스틸 씨하고 헤어진 뒤, 역 앞의 버스정류장으로 가기 전에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 먹었다. 직장에서도 자주 사 먹는 건데, 집에 가는 길에 먹으니까 왜 그렇게도 맛있는지... 버스는 내가 정류장에 가자마자 금방 왔다. 평소 같으면 30분마다 오는 버스인데, 아무래도 운이 좋았던 모양이다.
한 15분 정도 달렸을까. 집 근처의 정류장에 도착했다. 내려서 시계를 보니 11시가 다 되었다. 정류장에서 집까지의 거리는 별로 멀지 않다. 천천히 걸어가도 3분 정도 걸리니까. 그렇게 집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없었다! 문은 열려 있고, 그렇다고 사라진 것도 아닌데... 짐을 내려놓고 집 안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봤지만 아무도 나오지를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궁금해하고 있었는데, 현관문이 열리더니 들어오는 사람은... 다름아닌 바네사였다. 지금 마트 안 하냐고 물어 봤더니, 오늘은 자기 쉬는 날이란다. 부모님은 뭐 하냐고 물어 봤더니, 밭에 나가서 일하고 계신단다. 그럼 그렇지...
좀 있다 보니까, 부모님이 들어오셨다. 역시, 부모님뿐이다. 나를 보고 반겨 주시는 모습은 언제 봐도 마음이 놓인다. 다른 말은 필요없고 그냥 한 마디 했다. 잘 계셨냐고. 언제나 대답은 같으시다. 때가 되어 점심식사를 하는데 오랜만에 가족들이 다 모여서 먹으니 얼마나 좋던지... 오랜만에 보는 바네사와 안젤라도 보기 좋았다. 안젤라는 이제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는데...
그 외에 더 쓸 건 많기는 하지만 이만 줄여야겠다. 아까 밭일을 도와주고 오느라 피곤하다. 자야겠다. 내일 써야지.
2일
오늘은 하루종일 과수원과 밭에 나가 있었다. 물론 밭에만 있었다는 건 아니지만... 키위는 잘 자라더라. 망고도 그렇고. 밭에 있는 동안은, 정말로 시간이 굉장히 빨리 간 것 같다. 언제나, 밭에 나가서 밭일을 할 때는 언제나 그랬지만. 밭에 있느라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부모님과 오랜만에 같이 일하니 뭔가 말할 수 없는 힘이 솟는 것 같았다.
바네사는 오늘도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온다. 마트 일이 요즘 많이 바쁘단다. 물건도 많이 들어왔다 나가고... 편하지는 않지만 자기 돈이 생기니까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단다. 안젤라는... 이제 방학 시작이라 어디든 가고 싶단다. 내일은 친구들하고 시내에 놀러갈 모양이다. 그 먼 도시까지 놀러 간다라... 뭐 거기는 엄청난 번화가이기는 하지만.
저녁에 식사를 하는데, 부모님이 TV를 켜고는 바로 뉴스로 돌리시는 게 아닌가. 세상 돌아가는 건 잠시 잊고 싶어서 무례를 감수하고 오락 채널로 돌렸다. 아버지는 내가 채널을 돌리자마자 발끈하시는 듯했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마자 즐거워했다. 내가 좋은 채널 골라 줬다며 칭찬까지 하시는 걸 보면 역시... 요즘 바깥세상이 너무 안 좋은 일들만 일어나서 그런 건가. 아니, 내가 왜 이걸 여기 썼지... 잊어버려야 하는데.
3일
새로운 한 주의 시작인 월요일이다. 오늘도 하루 종일 과수원과 밭에 나가 있었다. 뭐 농사일은 여기 쓸 필요도 없을 정도다. 하지만 점점 커져 가는 과일들을 보고 있자면 내 마음도 점점 부풀어오르는 듯하다. 자주 와서 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 색의 과일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런 느낌이 저절로 든다.
오늘은 집이 좀 넓어졌다는 느낌이 든다. 하루종일 안젤라가 나가 있으니까, 허전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만큼 시원한 것 같기도 하다. 오늘 본 안젤라는 한결같이 들떠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방학도 맞고, 하루 종일 친구들과 놀러 가고 하니까. 집을 나서기 전에 아침식사를 같이 하는데 웃음이 떠나지를 않았다. 뭐, 보기는 좋았다. 내 동생이니까.
오늘은 하루종일 TV에 오락프로그램만 틀어 놨다. 아침에 핸드폰을 꺼내고 인터넷을 켜는데, 첫 뉴스에 정치 기사가 뜨는 게 영 찜찜했다. 그런 걸 잊자고 휴가를 온 건데, 휴가를 와서도 그런 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니... 어쨌든 잊자, 잊는 거야.
저녁에 내 친구 레온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는데, 내일은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 한조 시내에서 보자고 한다. 친구들이라면... 바로 생각나는 친구로는 페시, 지우, 유토... 뭐 그렇다. 이름이 바로 생각나지 않는 친구들도 많고. 무슨 이야기를 할까. 그건 내일 생각해 보자. 아무튼, 오늘은 이만 줄여야겠다.
4일
오늘 아침은... 딱히 다른 날과 다르지 않은 아침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씻고, TV 보고, 누워 있고. 당연히, 아침에 밭일도 해 주러 갔다. 오늘은 이상하게 땀도 안 났다. 안개도 껴 있고, 서늘하고... 부모님이 좋아하실 만한 날씨였다. 나도 신나서 일을 더 빨리 했던 것 같다.
오전 시간은 그렇게 보냈고, 오후에는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한조 시내까지는 집에서 역까지 약 20분, 그리고 다시 전철을 타고 25분. 생각보다는 조금 많이 걸렸다. 그래도... 내가 친구들보다는 일찍 왔다. 역 앞에 있는 음반가게에서 시간을 보냈다. 주리 신곡앨범은 잘 팔리는 듯하다. 포스터도 걸어 놓고...
한 10분쯤 기다리니, 레온이 먼저 왔다. 손을 흔들었다. 오랜만에 보니 얼마나 반갑던지! 레온은 요즘 일자리를 구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다들 취업이 어렵다고 했지. 그러고 보면, 비록 휴학했기는 하지만 돈을 벌고 있는 나는 다행인 거다. 뒤이어서 오는 지우나 유토를 봐도, 나를 부러워하는 눈빛이었다. 다들 돈은 잘 버냐고 그랬다. 당연한 거지만...
오후에는 이렇게 다른 친구들을 기다리며 보내다가, 저녁 6시쯤 되어서, 한조 시내에 있는, 역에서 조금 걸어가야 나오는 유명한 바비큐 식당 ‘T.Ms'에 갔다. 우리가 식당에 자리를 잡자마자, 어떻게 들은 건지 친구들이 더 많이 왔다. 그 중에 토니는 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왔다. 오자마자 내가 마중 나와서 인사해 줬다. 토니는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하는데, 생각보다 장사가 잘 된다고 했다. 자기 차까지 샀을 정도니 뭐 더 말이 필요하겠는가. 아무튼 신나게 놀았던 것 같다. 밥도 먹고, 이야기도 하고.
다만,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검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것도, 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선글라스를 썼지만 금방이라도 노려볼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다른 친구들은 그냥 봐도 모른 척하거나, 슬금슬금 시선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그 동안 잊고 지내려 하던 게 다시 내 머릿속으로 돌아오는 느낌이었으니까. 지금 이 일기를 쓰는 동안에도 잊히지 않는다. 그 검은 유니폼, 선글라스 너머의 눈매. 오늘은 좋았던 기억에도 불구하고 왠지 편히 못 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5일
과연, 오늘은 잠에서 일어나도 어째 이렇게 자리가 뒤숭숭한지. 시계를 보니 아침 8시가 넘어 있었다. 평소 같으면 7시 조금 넘은 시간에 일어났는데, 어머니가 핀잔을 줄 정도니 뭐... 아무리 봐도 내가 잠이 못 든 것 같다.
어쨌든 오늘도 여느 날들과 다르지 않은 하루였다. 어째 나는 밭일을 나가면 처음 보는 게 사과다. 그 외의 과일들도 보고, 논에도 가서 비료도 주고 하기는 하지만... 그런데, 일하는 내내 어제 본 검은 유니폼의 남자들이 계속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그저, 악몽일 뿐인 걸까? 아니면... 모르겠다.
식사하는 동안에도, 가족들과 앉아서 TV를 보거나 책을 읽는 동안에도 그 생각은 좀처럼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평소에는 전공서적을 펼쳐도 한 번에 30페이지 정도는 술술 읽는데, 오늘은 소설책을 읽어도 10페이지도 못 읽을 정도다. 대체 그 기억은 왜 떠나지를 않을까. 악몽을 꾸는 기분이 이런 걸까. 그것도 잠에서 깨어서 꾸는 악몽이라니... 무의식 속의 각인이라는 걸까. 예전에는 잠이 안 들 때는 도시 이름들을 하나씩 되뇌곤 했는데, 몇 년 전부터 안 해 온 것 같다. 하지만... 오늘은 왠지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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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마드리갈
2014-11-05 22:07:41
이게 공작창에 공개해 두신 Half Billion World 프로젝트에 기반한 소설이군요.
그리고 이번 회차는 그 첫부분...잘 읽고 있어요.
그런데 이 일기의 1인칭 화자는 어떤 사람인가요?
휴가, 그리고 복귀 하니까 군인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구체적으로 화자의 상태를 알기가 좀 어렵다는 생각이 들고 있어요. 주변 인물 및 가족에 대한 설명이 있어서 그걸 토대로 대략적인 것을 유추해 보고 있긴 해요.
데하카
2014-11-06 00:00:38
전에 아트홀에 보여 드렸던 '조지 브라운'이라는 캐릭터입니다.
위에서도 알 수 있듯 집안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설정이 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