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딩턴 스트리트에서 걷거나 차를 타고 가기엔 미묘한 거리에 있는 에스토리아 교회는 흔히 볼 수 있는 교회였지만 규모는 제법 남달랐다. 나중에 들어보니 처음엔 일반 가정집의 지하실에서 시작되었지만, 지역민들의 헌신이 모이고 모여서 증축을 거듭한 결과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고 했다. 그렇다고 대궐이 된 것은 아니고 가정집 두 개를 이어붙인 정도의 크기였다. 아니, 실제로 바로 옆의 가정집과 이어지는 복도를 만들고 그 곳을 예배당으로 써왔다고 했던가. 어쨌든 사연이 많은 곳이라는 건 틀림이 없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좋아한다는 거죠. 보시면 알겠지만 이게 다 여기서 예배를 드린 사람들입니다."
잼프가 교회 입구의 한쪽 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찍힌 사진들이 벽에 걸려 있었는데 위에서 아래로 올수록 색감이 다양해지는 것으로 보아 지속적으로 모여서 단체사진을 찍은 것 같았다. 레스터가 그 사진들을 들여다보려는 순간, 종소리가 울리더니 예배당에서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마침 저녁식사 시간이네요. 형님이 거기서 배급을 도와주시거든요. 오신 김에 아예 식사를 하시는 건 어때요?"
"에? 그래도 됩니까?"
"괜찮아요. 늘 넉넉하니까. 다만 취재를 하시려면, 배급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셔야 할 겁니다."
"그 분의 봉사활동이 끝날 때까지요?"
"그렇죠. 역시 기자답게 눈치가 빠르시네."
잼프가 킬킬 웃고는 주먹을 내밀었다. 레스터도 얼른 주먹을 내밀어 맞댔다. 흑인 남자 청년들이 이렇게 손인사를 나누는 걸 종종 봤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일단 소개를 해드릴게요. 일단 그 쪽에 식판 챙기시고."
레스터는 잼프의 안내를 따라 배식대까지 이어진 줄에 합류했다. 식당 역시 여느 가정집을 개조한 것처럼 아늑한 분위기가 가득했고 당연하겠지만 이야기와 웃음, 그리고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가득했다. 그야말로 드라마 속의 한 장면이었다. 마침내 배식대에 도착하자 흑인 아줌마가 수프를 푸던 손을 능숙하게 계속 움직이면서도 레스터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말했다.
"이 총각은 처음 보는 얼굴인데?"
"기자 분이신데, 취재 나오셨대요."
"그래? 행색을 보아하니 일류 주간지는 아닌 모양이구만. 어디의 누구라고?"
그제서야 거기에 생각이 미쳤는지 잼프가 의심스런 눈초리로 레스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명함을 여러 개 준비해 두고 있었던지라, 레스터는 기자라고 적힌 명함을 꺼내려고 했다. 하지만 아줌마가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뭐 상관없지. 미안해요, 내가 습관이 되어서 말이야. 나이가 많아지면 쓸데없는 관심이 늘어난단 말이지."
"무슨 말씀이세요."
"아무튼 많이 자시고 가게, 총각!"
아줌마는 금세 환한 미소를 짓고는 국자로 옆을 가리켰다. 뒤에 줄이 밀렸으니 얼른 움직이라는 뜻이었다. 순간적으로 레스터는 자신이 뭔가 거대한 함정에 빠졌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생각은 다음 배식자를 만나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형 취재하러 온 기자래요. 이름은 못 들었지만."
잼프가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않고서 그 사람에게 레스터를 소개하며 말했다. 아서 W. 스콧은 흑인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백인으로, 지금은 서투르게 빵을 잘라 사람들의 식판에 올려놓고 있었다. 스콧은 들쭉날쭉한 빵 조각을 레스터의 식판에 올리고는 장갑을 벗고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아서 스콧입니다. 절 취재하러 오셨다고요?"
"지금 명함을 꺼내겠-"
"아, 괜찮아요. 배식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시면 제가 가겠습니다. 저 쪽에 자리가 있으니까 저기서 드시면 됩니다. 로니, 안내해 드려."
"일손 부족하지 않아?"
잼프가 계속 빵을 기묘하게 자르는 스콧을 바라보며 물었다.
"괜찮아, 내가 할 수 있-"
"됐어, 내가 할게. 형은 가서 인터뷰나 해. 혹시 알아, 엄청나게 잘 써줄지?"
레스터가 두 번이나 타이밍을 놓치는 바람에 명함을 보지도 못해 의심을 거두지 않은 잼프가 레스터를 흘겨보며 말했다.
"어유, 미안하다. 내가 어떻게든 해보려고 하는데 잘 안 되네."
"됐다니까 그러네. 아무튼 얘기 잘 나누고 와."
잼프가 스콧에게서 앞치마를 건네받아 두르며 말했다. 그리고는 레스터와 스콧이 자리를 옮긴 사이에 밀려 있던 다섯 명을 순식간에 보냈다.
"이제서야 정식으로 소개를 하는군요. 트레버 정입니다."
레스터가 수많은 가명들 중 하나를 대며 가짜 명함을 꺼냈다. 가짜 명함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작업'의 수행 여부와 상관없이 뒷세계 인맥들과의 교류를 위해 사용하는 '지속적 신분'이고, 다른 하나는 특정 '작업'에만 사용하고 그 작업이 끝나면 폐기하는 '일시적 신분'이었다. 이 경우는 당연히 일시적 신분이었다. 어짜피 목표물이 존에게 살해당하면 흔적을 지우기 위해 폐기될 신분이기도 했지만, 이번엔 존도 레스터도 두 번 다시 이 사람을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군요. 아서 스콧입니다. 뭘 취재하신다고요?"
"일단 교회에서의 봉사활동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목표물과 친분을 다지려면 공통분모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사람이 호감을 가지고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꺼내기 쉽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레스터는 스콧의 개인사에 대해 많이 듣지 못했지만, 운좋게 잼프가 봉사활동 이야기를 꺼낸 덕분에 대화를 이어갈 수 있었다. 기자가 취재 대상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올 수도 있는 법이지만, 그렇다고 처음부터 아예 무관한 얘기를 꺼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스콧은 시원시원하게 교회에서의 활동에 대해 털어놓았고, 레스터는 그 중에서 스콧이 자랑스러워하는 듯한 부분을 계속 물어봐서 그의 호감을 샀다. 하지만 대화가 너무 목표물의 뜻대로만 흘러가도 곤란했다. 더구나 교회에 들어올 때 들었던 이야기나 사진으로 보아 교회 이야기를 계속하면 몇 시간이 지날 것 같았다. 레스터는 스콧이 또 다른 에피소드를 꺼내기 전에 화제를 돌렸다.
"그렇군요. 공무원이라고 들었는데, 시청에서의 일은 어떠신가요?"
"다른 공무원들과 똑같죠, 왜요?"
스콧이 약간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공무원으로서의 비밀을 지켜야 하는 의무 때문인지, 아니면 일이 힘들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레스터는 미리 생각해 둔 이유를 꺼냈다.
"취재 대상에 대해서도 다뤄야 편집장이 갈구지 않거든요. 매번 혼납니다, 제가. 사건만 다루고 막상 그 인물에 대해서는 쓰지 않는다고요."
"아, 그러셨군요. 하지만 공무원으로서의 저에 대해선 딱히 쓸 이야기가 없으실 거에요. 공무원이 그렇잖아요. 뭐 제가 현장을 자주 돌아다녀야 하는 입장인지라 이야깃거리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딱 하나만 얘기하셔도 됩니다."
스콧이 영 마딱찮은 듯 말을 흐리자 레스터가 얼른 타협안을 제시했다. 스콧은 망설이면서도 '딱 하나'만 얘기해도 된다고 하자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별 건 아니고, 영국식 요리를 주로 다루는 가게가 있었어요. 이름은 까먹었지만. 가 봤는데 요리가..."
"맛이 없던가요?"
"맛은 원래 없었죠."
"하긴 그렇겠네요."
두 사람은 영국 요리의 유명한 '특징'을 거론하며 잠시 함께 웃었다. 스콧이 다시 말했다.
"맛은 원래 없다고 쳐도, 가게 꼴이 말이 아니었어요. 무슨 전쟁 중에 만든 벙커처럼, 음침한 걸 넘어서...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이걸? 더러운 것은 아니지만, 엄청 뒤죽박죽이었어요. 제딴에는 그걸 테마라고 삼은 모양이더군요. 그것 자체는 불법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부엌으로 들어서니까, 바로 답이 나오더군요."
"어땠길래요?"
"위생 상태가 최악이었죠. 순간적으로 영국 요리라는 건 핑계가 아닌가 싶더라고요. 아니, 반대인가?"
"그래서 어떻게 하셨죠?"
"규정대로 몇몇 조건을 확인해 보니까, 도저히 영업을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위생상태가 정상이 될 때까지라는 조건하에 영업을 중지해야 한다고 말하자, 주인이 막 난장판을 피우더라고요."
"난장판이요?"
"막 식칼을 들고 휘두르고, 장난이 아니었어요. 결국 동료랑 도망나오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손님들도 질겁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시청으로 돌아가서 규정대로 해당 업체에 영업정지 명령을 내리고, 결재까지 마쳤습니다."
"흐음, 식칼을 들고 휘두르다니..."
스콧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뭐, 가게를 닫으라는데 순순히 응할 사장이 어디 있겠어요.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그 가게 관리며 위생상태는 도저히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어요. 게다가 나중에 동료한테 듣기로는, 사람도 죽였다던데요."
"네? 그 사장이요?"
"아뇨, 요리로요. 사실 저도 돌아가자마자 중지 명령을 내린 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시청으로 찾아와서 사정사정하길래, 며칠의 유예를 주기로 했어요. 그래서 3일 만에 위생상태가 좋아졌길래, 중지 명령은 너무했구나 싶었죠. 그런데 그러고 2주일 뒤에 거기서 요리를 먹고 사람이 죽었다지 뭡니까, 식중독으로. 다시 찾아가보니까 처음 갔을 때 그대로가 되었더군요. 사람도 죽었으니 이젠 안 되겠다 싶어서 바로 중지 명령을 내린 겁니다."
"그렇군요."
존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역시 사람의 이야기란 한 쪽만 듣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물론 스콧의 이야기도 나중에 확인을 해봐야겠지만, 적어도 이 경우엔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 레스터는 짐짓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충분히 들은 것 같습니다. 바쁘신데도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유, 저야말로. 다만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말씀하세요."
"그 영국 요리집 이야기는 짧게 써 주세요. 어짜피 가게나 사장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안 좋은 인식을 줄까봐 걱정이 되거든요."
절대 그럴 일은 없었다. 코제니오프스키는 지금도 그대로고, 뭣보다 그 이야기는 기사로 나가지도 않을 테니까. 하지만 레스터는 스콧과 악수를 하며 웃으면서 말했다.
"그 점은 제가 편집장이랑 잘 얘기해 보겠습니다."
---------------------------------
실제 공무원이 저렇게 활동하는지는 잘 모르겠고... 어쨌든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편이라고 할까요.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번 화에서 스콧과의 이야기는 짧게 끝나고 그 다음 장면으로 존이 코제니오프스키를 찾아가는 내용을 쓰려고 했는데, 분량 조절에 실패하다 보니 흐름이 길어졌네요. 이제 더 숨길 것도 없으니, 노숙까마귀님의 의뢰는 다음 화에서 마무리가 될 것 같습니다.
그거 알아? 혼자 있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유야 어쨌든 고독을 즐겨서 그러는 게 아니야. 사람들한테 계속 실망해서 먼저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는 거야. - 조디 피코
4 댓글
마드리갈
2018-05-16 09:15:58
이번 회차에서는 냄새가 많이 지배하는 감각이 많이 느껴지고 있어요.
교회에서의 저녁식사에서의 음식 냄새는, 비록 고급 레스토랑의 요리에는 미치지는 못하겠지만, 이런 게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게 잘 느껴지고 있기도 하고 그러네요.
언급된 그 위생상태 파탄의 식당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악취가 느껴지는 것 같은데다 배까지 아파질 것같은 기분이 들어요. 요즘 슬럼가 관련으로 찾아보면서 간혹 보는 도쿄 산야, 오사카 아이린지구 등의 슬럼가에 입지한 식당이 차라리 낫다 싶을 정도의 불쾌함이...게다가 식중독으로 인명사고까지 냈다니 아이고 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기도 하네요.
Lester
2018-05-17 12:04:31
생각해 보니 음식으로 시작해서 음식으로 끝나네요. 의도하고 쓴 것은 아니지만... 저 대목은 예전에 동네 교회를 다녔을 때 식당에서 다같이 식사를 하던 경험을 살려서 써봤는데, 미국도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사실 저 정도의 위생상태라면 사건이 수백번은 벌어지고도 남았어야 하는데, 일반인이 보기엔 큰 문제가 없었지만 전문가의 눈에는 심각해 보였다 - 그렇게 바꿔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고든 램지 시리즈도 몇몇 케이스의 경우는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구석이 많으니까요. 결론적으론 그렇게 묵묵히 '먹어주는' 손님들이 막장사장의 기를 살려줘서 더 문제라지만...
SiteOwner
2018-05-20 16:41:32
천국과 지옥이 따로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다지 풍족하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인정이 가득한 사교장이기도 한 교회에서의 식사 풍경, 그리고 이야기 속의 위생상태가 목불인견인 식당의 참상이 대조되면서, 같은 하늘 아래에 이렇게 다른 것들이 있나 싶은 생각마저 들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그냥 식중독 사고도 아니고 사망으로 이어진 것이라니, 상상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서울에서 살 때 용산전자상가 관광터미널 및 상가 이곳저곳에 산재하던 허름한 식당들이 같이 떠올랐습니다. 묘사하신 영국식 식당만큼 위생상태가 파멸적인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별로 매력적이지는 않았던 것만은 분명했고, 음식 또한 별로 먹고 싶지 않았습니다. 요즘은 용산에 갈 일 자체가 별로 없다 보니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가명이 들어간 명함에서 생각이 났는데, "정" 이라는 성씨가 미국에서는 신분을 세탁하기 좋겠다는 것도 떠오르겠습니다. Chung이라고 표기할 경우에는 중국계를 먼저 떠올리겠고, 한국계라고 추정할 사람은 적습니다. Jung이라고 표기하면 독일계 주민들은 독일 쪽이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이외의 다른 표기라면 익명성은 확연히 떨어지겠지요.
Lester
2018-05-21 02:23:26
흔히 종교에서 그러죠, 천국이건 지옥이건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좋아하는 작품 "도박마"에서는 '기어오를 수 있는 곳은 지옥이라고 할 수 없다'는 묘한 표현도 나오고요. 앞으로도 제 세계관에는 이렇게 대조적인 매체들이 자주 등장할 것 같습니다.
그런 누추한 상가는 제가 사는 지방으로 갈수록 많죠. 특히 쇠락한 시장가의 건물에 가면 엄청 많습니다. 같은 시장인데도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곳엔 깔끔한 가게가 있고, 거기서 두 번만 꺾어서 들어가면 바로 누추한 가게가 나오더군요. 유동인구가 많을수록 가치가 올라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 정도로 극과 극을 달리는 걸 보니 정말 묘하더군요. 빈부격차가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생각해 보니까 그렇네요. 그래도 독일계라고 하면 절대 안 속을 것 같아요. 딱 봐도 동양인인데 융씨라니... 뭐 입양됐다고 하면 속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