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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2일 토요일 오전, 주리의 집. 한 줄기 밝은 햇살이 거실 안쪽 깊숙이까지 들어오고 있다. 햇빛을 듬뿍 받아서인지 베란다에 놓인 색색의 화초들은 한층 더 빛나 보인다.
주리는 하늘색 바탕에 색색 도형 무늬의 잠옷을 입고 소파에 앉아 있다. 오른손으로는 AI폰을 들고 뭔가를 열심히 보고 있고, 왼손으로는 고양이 ‘에이미’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지금 보는 건 인기 만화 ‘멋진 그녀의 하루’. 주로 10대, 20대 여성 독자들이 많고, 연재일인 토요일에는 연재사이트 ‘데일리 툰즈’의 조회수 2~3위를 차지할 정도다.
“히야, 역시 이래서 재미있다니깐. 벌써 몇 시야. 처음 볼 때는 9시가 좀 지났는데, 벌써 10시잖아.”
주리가 한참 만화에 빠져 있던 그때.
“주리야.”
주리의 아버지, 수현의 목소리가 들린다. 주리가 돌아보니, 수현은 운동복 차림으로 안방에서 막 나오고 있다.
“왜, 아빠?”
“오늘 오랜만에 엄마하고 너하고 같이, 한 점심 때쯤에 함께 밖에 나가서 뭐라도 좀 먹을까 하는데, 어떠니?”
부모님과 밖에 나가서 하는 외식이라... 그러고 보니 어머니와 둘이서 나가 식사를 한 적은 좀 많았지만, 아버지와의 외식은 좀 오랜만이다. 안 그래도 수현은 회사 일 때문에 바빠서 온 가족이 함께할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는데, 작년에 수현이 부사장으로 승진하고 나서부터는 가족들과 함께 외식할 기회를 얻기 더욱 어려워졌다. 그랬기에, 오늘은 실로 몇 개월 만에 얻은 기회다.
“점심 말고 저녁은 어때?”
주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한다.
“어... 점심은 왜?”
“어, 아빠 근데 꼭 점심에 가야 되는 거야?”
“아니, 꼭 점심에 식사하자는 건 아니고, 무슨 이유인지 알고 싶어서.”
“점심시간에는 누구 좀 만날 일이 있어서.”
“음... 알았다. 그럼, 이따가 모임 끝나면 전화하거라.”
수현은 현관문으로 향하며 말한다.
“어? 아빠는 어디 또 가?”
“아, 공원 가서 운동 좀 하고 오려고.”
말을 마치고 수현은 집을 나선다. 주리의 어머니 선아 역시 집에 없다. 집 안에는 주리 혼자다. 주리는 소파에 털썩하고 앉는다.
“아... 이제 뭘 하지...”
“너...”
AI폰에서 *하나의 목소리가 들린다.
“세훈이한테 전화는 해 봤어?”
“아, 세훈이? 어제 했지.”
“아니, 그건 어제 ‘그 일’ 때문인 거고... 오늘 만날 장소를 어디로 할지 정했냐고?”
“아! 그래... 장소를 정해야지.”
주리는 곧장 세훈에게 전화를 건다.
“어... 여보세요?”
세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세훈아, 지금 뭐 해?”
“아... 우리가 몇 시에 만나려고 했지?”
“어... 그거? 한 11시쯤에 만나자고 하지 않았나?”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세훈의 목소리는 마치 막 일어난 사람인 듯 매우 부스스하다. 심지어 듣고 있는 주리도 저절로 졸음이 밀려올 정도로.
“뭐 그렇게 성의 없이 말해? 어제 만나자고 한 건 너 아니었어?”
“아... 그렇기는 한데... 알았어. 11시에 우리 학교 옆에 있는 그 부촌 있지?”
“부촌? 아, 정원 딸린 큰 저택 많은 거기?”
“맞아. 거기 카페거리 하나 있잖아? 거기서 보자고.”
“알았어. 그럼 그때 봐.”
주리는 전화를 끊는다. 그러고 보니, 세훈은 왜 그렇게 졸린 소리를 낸 건지, 아무래도 어제 좀 격렬하게 싸웠다니까, 그것 때문에 그런 거겠지, 하고 생각해 본다. 별로 신경쓸 건 아닐 것이다... 그건 그렇고, 슬슬 나갈 준비를 하게 옷을 좀 갈아입어 볼까... 아니, 그 전에, 멋진 그녀의 하루 조금만 더 봐야겠다.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아무래도 거기 나오는 남자 주인공 중 ‘강우’라는 캐릭터는 작가의 그림 실력까지 더해져, 출중한 외모에다가 성격, 능력, 거기에다가 운동 실력, 연주 실력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캐릭터라 독자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다. 수백 년 간 냉동되었다가 깨어났다는 걸 빼면 뻔하디뻔한 캐릭터지만, 작가가 이야기를 재미있게 만들어 주니 독자들이 안 모일 수가 있나. 주리는 한 회차를 다 볼 때까지 손에서 AI폰을 놓지를 못한다.
어느덧, 스크롤이 맨 밑에까지 내려오자, 주리는 한숨을 한 번 쉰다. 이렇게 오늘도 주리의 눈을 즐겁게 한 한 회차가 끝난다. 시계를 보니 10시 15분. 이제는 정말로 나갈 준비를 해야 할 시간. 주리는 에이미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는다.
“언니 갔다 온다. 아빠 올 때까지 잘 놀고 있어. 알았지?”
에이미는 ‘야옹’하는 울음소리를 내며 소파에 드러눕는다. 주리는 에이미를 보고 한 번 웃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약 10분 후. 주리가 방에서 나온다. 파란 바탕의 체크무늬 티셔츠에 흰 미니스커트를 입고, 머리에는 검은 반다나를 둘렀다. 항상 그렇기는 하지만, 귀걸이 역시 늘 끼던 게 아닌 새로운 것을 끼고 나왔다.
“언니 어때? 멋있지?”
주리는 에이미를 보며 말한다.
“그럼, 언니 진짜로 갔다 온다. 잘 놀고 있어!”
에이미는 주리의 말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딸랑이 공을 가지고 놀며 소파에서 뒹굴기만 할 뿐이고, 주리는 그런 에이미를 보고 웃으며 집을 나선다.
시간은 오전 11시. 메이링, 앨런, 레아, 그리고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이렇게 네 명이 미린역 남쪽의 카페거리를 걷고 있다. 메이링은 푸른 바탕에 물방울무늬의 티셔츠와 핫팬츠를 입고 있고, 머리에는 검은 반다나를 두르고 있다. 앨런은 남방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캐주얼 차림이다. 레아는 수수한 원피스 차림이고 베레모를 쓰고 있다. 또 한 명의 남학생은 파란 티셔츠를 입고 있다.
“이렇게 밖에 나오기 좋은 날도 없지. 안 그래?”
“그렇죠, 변호사님. 꼭 주말이면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 흐리고 그랬는데, 오늘은 굉장히 맑네요. 마침 오늘은 소송 업무도 없고... 주말에 이런 날씨는 한 달 만에 처음이죠, 아마?”
앨런의 말에 메이링과 레아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메이링이 레아를 보고 말한다.
“네가 원래 살던 데는 어떠니?”
“제가 살던 데요? 카라미아 말이죠?”
레아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고 나서, 다시 메이링을 보며 말한다.
“하, 카라미아도 여기만큼 더워요. 확실히 습도는 거기가 더 낮고요... 대신에 뜨거운 바람이 좀 불어요. 라메주 행성 전체가 다 그런 건 아니지만요.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저는 은근히 좀 시원한 게 좋더라고요. 아버지는 저하고 반대이신데, 그 뜨거운 바람을 어찌 그리도 좋아하시는지 늘 그것 때문에 집에서 다퉜죠.”
“너희 아버지, 대신관이라고 하셨나?”
“네, 맞아요. 대대로 대신관을 하는데, 저희 아버지는 46대인가, 48대인가 그럴 거예요.”
“48대 정도면 평균 얼마나 하는 거지?”
“짧으면 100년 정도에서 길면 700년 정도 할걸요. 우리 이레시아인들 수명은 ‘마카란’들의 10배 정도 되잖아요.”
“혹시 너 나이가 어떻게 된다고 했지?”
“올해로 94살이네요. 마카란들 나이로 환산하면 13살 정도죠. 영아기가 짧은 대신 유년기가 좀 길거든요.”
“아, 그래? 그러면 수십 년 뒤에 나하고 만나면, 못 알아보는 거 아니야?”
“에이, 설마 그럴 리가요.”
“저... 변호사님.”
메이링과 레아의 사이에 앨런이 끼어들며 말한다.
“왜, 앨런?”
“세훈이하고 주리에게서 연락이 왔는데, 카페 안에 들어왔으니까 들어오기만 하면 된다는군요.”
“어느 카페?”
“‘쿠쿠스 가든’이요.”
“쿠쿠스 가든? 거기가... 어디였지?.”
“여기서 20m 정도만 가면 나와요.”
“아, 그래? 바로 이 근처잖아. 가자.”
카페거리 한복판에 있는 카페 쿠쿠스 가든. 나무가 주가 된 외관과 현관 및 창가의 풍성한 화초가 눈길을 끄는 곳이다. 일행은 카운터에서 주문을 하고 나서, 창가에 있는 테이블 하나를 잡아놓고 앉는다. 메이링은 창밖을 한 번 내다보고, 또 가게 안쪽을 둘러보더니, 세훈과 주리에게 묻는다.
“여기 누가 오자고 한 거야?”
“아, 주리인데요.”
“어, 그래?”
“혹시, 뭐 불편한 거라도...”
“아니, 잘 선택했다고.”
주리는 세훈을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짓는다. ‘거봐, 내가 뭐라 그랬어’ 하고 말하기라도 하는 듯.
“왜 그래?”
“아, 저는 공원 앞에 있는 ‘카페 비스타’ 체인점을 가려고 했거든요.”
“에이, 거기는 매일 사람들로 북적이잖아. 평일에도 자리가 꽉꽉 차 있지. 잘한 선택이야.”
“그런데, 저희는 모두 6명인데, 7잔을 주문했네요?”
“아, 또 한 명이 올 거거든.”
“또 한 명이요?”
어느새, 테이블의 벨이 울리고, 앨런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카운터로 가서 잔 7개가 올려진 쟁반을 가져온다. 2개는 아메리카노 커피, 2개는 카페라테, 1개는 에스프레소, 1개는 파인애플셰이크, 1개는 딸기스무디. 메이링은 딸기스무디를 가져가고, 주리는 파인애플셰이크를 가져간다. 앨런은 에스프레소를 가져가고, 남학생은 카페라테, 세훈과 레아가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카페라테 한 잔은 주인 없는 자리에 놓여 있다.
다들 한 모금씩 마시고 나자, 세훈은 주위를 한 번 돌아본다. 혹시나 누군가 엿듣지는 않을까, 클라인 패거리가 있지는 않을까, 유심히 본다. 한 번 주위를 돌아본 세훈은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사실은... 이걸 말하려던 건데...”
“음, 뭔데?”
“어제... 공격을 받았어요.”
“공격을... 받았다고? 누구한테?”
세훈을 제외한, 테이블에 둘러앉은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묻는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2 댓글
마드리갈
2020-02-17 23:48:27
상황이 정리된 다음날의 일인데, 이상하게도 먼 과거같이 보이네요.
그래서 코멘트를 작성하면서 시간감각이 이상해진 건가 싶어 다시 본문을 확인했어요.
이렇게, 세훈이 그 급박했던 위기상황을 말하는데, 역시 좌중이 놀라지 않는 게 이상하겠죠. 결론적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멀쩡하게 일상으로 돌아왔으니까 이렇게 세훈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고...
지구인과 이레시아인의 수명 비교는 대략 1:7 정도 되는군요.
그래서, 개의 수명도 같이 생각나네요.SiteOwner
2020-02-20 21:22:02
역시 평온함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특히, 세훈처럼 직전에 절체절명의 위기를 무사히 넘긴 다음의 평온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함입니다.
레아가 지구인들에게 쓰는 표현인 "마카란" 은 "닮은 인간" 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만 있는가 봅니다. 여러 용어가 날이 멀다하고 차별의 용도로 쓰이는 현실세계보다는 확실히 나은 것 같습니다. 그 점이 다행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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