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졌나?’
나의 패배를 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어느새 의식을 되찾은 내 눈앞에 경기장도 보어헤스 백작도 보이질 않았다. 그저 보이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천장.
어떻게 된 거……?
“큭!”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고 시도했지만, 믿을 수 없는 격통에 다시 반강제로 자리에 눕는 수밖에 없었다.
마치 전신이 부서진 것처럼 강렬한 통증.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진짜로 부서졌었나?’
갑주의 색이 변한 보어헤스 백작의 공격은 모두 치명적이기 그지없어, 한 방만으로 사도로 변한 내 갑옷을 꿰뚫고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기 충분했다.
그리고 내게 가해진 공격은 적어도 수백 회 이상.
아마 사도의 재생력이 없었다면 잘해야 반신불수, 높은 확률로 사망이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겨울철 호숫물처럼 차갑게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건 대체 뭐였지?’
보어헤스 백작의 그 능력은 분명 권능이었다. 그가 본질적으로 필멸자인 이상 마법으로 그처럼 극적인 효과를 보일 수 없다. 그러니 그 외의 경우의 수는 떠올릴 가치조차 없으리라.
‘하지만 권능을 그렇게 빨리 발동시킬 수 있다고?’
불가능하다.
머릿속으로 질문을 내놓는 동시에 답변이 돌아왔다.
아무리 보어헤스 백작이 나보다 권능 사용에 숙달되었다 해도 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권능은 마법과는 다르다.
마법이란 자신의 힘. 능력이 출중한 마법사라면 술식의 중간 과정을 생략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같은 주문을 얼마나 빠르게 발동할 수 있느냐는 마법사의 능력을 평가할 때 굉장히 중요한 척도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권능은 본질적으로 신의 능력을 대여해 사용한다. 신의 능력은 신계의 것. 내가 사용한 환염처럼 단순히 감각으로 휘두르는 것이 아닌, 구체적인 형태로 가공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시간은 절대적인 척도. 뛰어난 농부가 많이 모인다고 해도 밀이 한 달 만에 자라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일어난 일을 부정만 할 수는 없는 노릇.
‘고유 권능이라고 했었지?’
일반적인 권능과 뭐가 다른 거지?
의문은 폐가에 숨은 바퀴벌레처럼 끊임없이 쏟아졌지만, 정답을 도출하기에는 지나치게 정보가 한정적이다.
‘나중에 물어봐야겠군.’
지금은 그것보다 상황 파악이 먼저다.
차가운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온기 하나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석벽. 조명 역시 초를 사용한 구식 등잔 하나밖에 없어 전체적으로 방은 어두침침하기 그지없었다. 여기에 더해 벽에는 창문 하나 없어서 밖이 보이질 않으니, 지금 시간을 유추하는 것조차 불가능.
‘감옥……이라고 확답할 수는 없겠군.’
여기가 다른 귀족 저택이라면 그 외에는 가능성이 없겠지만, 지금껏 보아온 소여 백작가의 환경을 생각하면 그저 평범한 객실일지도 모른다.
‘거기에 문도 평범하고.’
금속제이긴 하지만 딱히 잠금장치 같은 건 보이지 않는 게 감금을 위한 시설은 아닌 게 분명하다.
다행히 내 의문을 해결해줄 사람은 그리 오래지 않아 도착했다.
끼익.
기름칠해달라고 시위하는 것처럼 낡은 경첩의 비명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내게 익숙한 얼굴.
“생각보다 회복이 빠르군요. 과연 사도의 재생력은 불가해합니다.”
로즈마리.
메이드 복을 입은 그녀는 한 손에 작은 약병을 들고 있었는데, 포장을 보아 상처를 치유하는 비약이라 추론할 수 있었다.
“그건 제 건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뭐, 지금 쓸 필요는 없습니다만.”
뭔 소리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니, 무슨 선문답도 아니고.
혹시나 그녀 나름의 유머 감각이 아닐까 봐 표정을 읽어보려고 했지만, 여전히 무표정한 상태다.
‘뭐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
상황 파악이나 하자.
“여긴 어디입니까?”
“저희가 쓰는 휴게실입니다.”
“……네?”
“휴게실입니다.”
이런 살풍경한 곳이 진짜로 휴게실이라고?
길드 숙직실만 해도 사람이 살기에는 영 좋지 못한 상황이건만, 여긴 그 이상이다.
‘이런 곳에서 살았으니 에스텔이 내 방에서도 멀쩡히 지낸 거겠지.’
처음 만났을 때는 너무나 스스럼없던 그녀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지금 보니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갔다.
잠깐, 에스텔?
“에스텔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가장 중요한 질문을 이제야 떠올렸다는 사실에 자책하면서 나는 로즈마리에게 질문을 건넸다.
“…….”
잠시간의 침묵.
로즈마리는 그저 묵묵히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에 담긴 너무나 많은 것이 담겨 있어서 도저히 읽어낼 수 없었다.
“사흘.”
사흘이 뭐 어쨌다는 거지?
“아가씨의 결혼식까지 남은 날짜입니다.”
“뭐?”
거짓말이지?
“제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죠?”
“세 시간입니다.”
혹시나 내가 예상보다 오래 잠들어 있던 게 아닌가 확인해보았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모양이다.
‘사흘이라고?’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속도야?
귀족 가문 사이의 결혼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린다. 당장 하객에게 청첩장을 돌리는 데만 해도 최소 주 단위의 일정이 요구되고, 예식 준비는 그 이상. 거기에 자잘한 정치적 합의까지 생각하면 못해도 개월 단위는 소비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사흘?
“어떻게 된 겁니까?”
“양 측 백작님께서는 일을 서둘러 진행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식 역시 최소한의 인원만 초청하기로 했지요.”
“……에스텔은 거기에 동의한 건가요?”
“그게 중요했을 것 같습니까?”
그럴 리 없다.
그녀의 반문에 곧바로 대답이 떠올랐다.
소여 백작은 에스텔을 자신을 위해 움직일 장기 말로 밖에 여기질 않고, 보어헤스 백작은 그걸 넘어 그녀를 애 낳는 기계로 취급한다.
그 둘에게 에스텔의 의견 따위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겠지.
“젠장!”
내가 지는 바람에!
마음 같아서는 분노로 어딘가 들이받고 싶지만, 그런다고 해도 득 볼 것 하나 없으리라. 애초에 지금 상황은 온전히 내 잘못. 내가 이겼다면 이런 상황이 오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동시에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었다.
‘어째서 에스텔은 이 상황에 움직이지 않는 거지?’
당장 심부름꾼 길드에 있을 때 자주 받던 의뢰 중 집 나간 귀족 영애 수색 임무가 있었다. 그저 평범한 귀족 영애만 해도 사소한 이유로 가출하는 일 정도는 구설수조차 되지 못한다.
하물며 에스텔은 마도기사.
가출은 해도 가문을 버릴 순 없는 다른 영애들과는 달리, 당장 경호원 일만 해도 어디 가서 먹고살 걱정은 없다. 에스텔의 성격상 그럴 리는 없겠지만, 범죄에 손을 댄다면 뒷골목을 평정하기도 그리 어렵진 않겠지.
하지만 왜 에스텔은 조금도 그럴 생각은 하지 않지?
“에스텔은 왜 소여 백작에게 조금도 반항하질 않는 겁니까?”
“…….”
“귀족 영애로서도 기사로서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무조건적인 충성이 기사의 덕목은 아닐 텐데요?’
로즈마리를 향해 쏘아붙이듯 말을 해보았지만, 그녀는 내 말에 대답할 생각을 하질 않았다. 그저 ‘그럴 줄 알았다’란 의미가 담긴 시선을 나에게 보내올 뿐. 나 역시 무언의 압박으로 그녀에게 대답을 종용하자, 결국 가뜩이나 어두운 방은 침묵에 잠겨버렸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침묵의 눈싸움에서 승리한 것은 결국 나였다.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등잔의 초가 반쯤 녹아내렸을 무렵, 로즈마리는 그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은,
‘응?’
“무, 무슨?!”
당황한 나는 서둘러 고개를 틀어 로즈마리를 시선 밖으로 두기 위해 노력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녀가 갑작스럽게 상의 단추를 풀어버렸으니까.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야?!’
문득 로즈마리를 아내로 맞는 것이 어떠냐는 소여 백작의 제안이 떠올랐다.
설마 인제 와서 그 제안을 실행하기 위해 저런 행동을 하는 건가?
“저, 저는 아직 준비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겁니까? 그런 의미가 아니니 발정 난 개처럼 굴지 말고 이쪽이나 보시죠.”
아무래도 내 헛된 망상이었나 보다.
그녀의 요청에 나는 고개를 돌려 다시 로즈마리의 모습을 바라보았고,
“아!”
내 시야에 그녀의 모습이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입에서 탄식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있는 건, 그야말로 흉터 박물관이었으니까.
로즈마리가 메이드인 동시에 소여 가의 은밀기동부대의 대장이란 것을 들었을 때, 그녀가 험한 생활을 보냈으리라는 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라니?
자상, 열상, 창상, 파열상, 화상, 동상…….
내가 치유술사는 아니다 보니 모든 상처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런 나조차 각기 다른 이유로 이 흉터들이 생겼다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추하지요?”
그런 내 탄식을 그리 이해한 것일까?
그렇게 말하는 로즈마리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냉정하기 그지없었지만, 어쩐지 조금 슬프게 느껴졌다.
“아뇨! 절대로 아니에요. 그저 조금 걱정되어서.”
“……쓸데없는 걱정이군요. 저는 당신처럼 정말로 온몸이 박살 날 때까지 얻어맞은 적은 없습니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저도 할 말이 없는데 말이죠.
그녀의 대답에 일순 헛웃음이 나왔으니, 다행히 로즈마리의 기분은 조금 풀린 것 같았다.
“저기 그런데 흉터는 왜?”
설마 로즈마리를 이렇게 만든 게 소여 백작이란 소리인가?
‘하지만 전에 에스텔이 알몸으로 사로잡힌 걸 봤을 때 이런 흉터는 없었던 것 같은데?’
“똑바로 보도록 하세요.”
문득 머릿속에 에스텔의 알몸이 떠올라 다시 얼굴이 붉어졌지만, 로즈마리의 목소리 덕에 망상의 폭주를 멈출 수 있었다.
그녀는 내 시선이 자신에게 고정된 것을 느꼈는지 잠시 한숨을 쉬고는,
“제드 소여는 소여 백작의 자격이 없는 자다.”
갑자기 소여 백작에 대한 폭언을 입에 담았다.
‘뭐지?’
왜 갑자기 그런 말을?
내가 그녀에게 다시 질문을 건네기도 전에, 나는 갑작스럽게 이어진 상황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주륵.
시작은 작은 상처였다.
분명 흉터로 가득하긴 했으나 출혈 하나 없던 로즈마리의 피부에 어느새 작은 틈새가 벌어지며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것은 고작해야 시작.
“크윽!”
그녀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오는 것과 동시에 그녀의 구릿빛 피부가 산화된 철처럼 붉게 물들어 갔다. 그와 동시에 마치 시간을 되돌리기라도 한 것처럼, 터져 나가기 시작하는 무수한 흉터들.
“로즈마리!”
내가 기겁해서 그녀에게 다가갔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어 내 접근을 막았다.
“이드라 님께……부탁해주세요…….”
“네?”
“’발언을……허한다고…….”
그 목소리는 신음에 묻힐 정도로 가늘었지만 무슨 의미인지 알아듣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드라 님!”
[발언을 허하노라.]
다행히 내가 부른 것과 동시에 대답이 돌아왔고, 로즈마리의 몸은 서서히 안정되어갔다. 물론, 그렇다고 그녀의 온몸을 뒤덮은 상처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이곳에는 그녀가 가지고 온 비약이 있다.
치익!
“크윽!”
그리 고급 비약은 아닌지 로즈마리는 고통에 몸부림쳤지만, 오래지 상처가 아물며 로즈마리의 호흡이 안정되었다.
나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가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기다렸다.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심한 상처를 입은 사람의 입을 억지로 열고 싶지는 않으니.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추태를 보였군요.”
비틀거리면서 몸을 일으킨 로즈마리는 다시 주섬주섬 옷을 걸쳤다. 아직 온몸이 피로 뒤덮여 있어서 그리 옷을 입기 좋은 상태는 아니지만, 검은색이 대부분인 그녀의 메이드 복은 다행히 피로 물든 티가 나지 않았다. 그녀의 직업상 이렇게 피가 튈 것을 전제로 만들어진 옷이리라.
“방금 건 뭐지요?”
나는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저주입니다.”
저주.
나도 마법사인 만큼 그게 무엇인지는 굉장히 잘 알고 있다. 아마도 조금 전 로즈마리를 덮친 저주는 백작에 대해 험담을 하거나 역심을 품으면 발동하는 형식일 터.
‘백작이나 그 상위자에게 허가를 받으면 해제되는 건가?’
그렇다면 왜 이드라에게 그런 부탁을 했는지 이해가 간다. 일단 소여 가문에서 가장 높은 존재인 건 아직은 이드라일 테니.
“이상하다고 생각하진 않으셨습니까?”
“뭐가 말이죠?”
“백작님은 아무것도 믿지 않으십니다. 계약서도, 신앙도, 사랑도……. 그분에게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쓰레기나 다름없죠. 한데 그분께서는 혈통만큼은 믿고 계십니다.”
“…….”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설마……!
[혈연을 통해 이어진 저주인가……. 호오. 본녀가 기억하는 소여는 이런 음습한 수와는 연이 없었을 터인데?]
“현 백작님께서 즉위하신 직후 시행하신 것이니까요. 그리 오래되진 않았을 겁니다.”
“그 미친 자식이!”
마음 같아서는 당장 소여 백작을 찾아가 머리통을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지금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애꿎은 석벽에 주먹을 갈겨 분노를 표출하곤 한숨을 쉬며 다시 로즈마리를 바라보았다.
“에스텔도 마찬가지입니까?”
“아가씨에게 걸린 저주는 제가 걸린 것과는 다릅니다. 그분은 본디 사도가 되기 위해 길러지신 분. 저와 같은 저주가 걸려있으면 이드라 님이 곧장 눈치를 채셨겠지요.”
[그 말대로이니라. 타인이라면 모를까, 본녀가 사도에게 걸린 저주를 파악하지 못할 리가 없으니.]
“아가씨에게 걸린 것은 훨씬 간단합니다. 무의식적인 거부감과 공포. 그저 백작님께 무조건 복종하고자 하는 심리.”
그래서였나…….
백작을 앞두고 에스텔이 보이던 이상 증세가 인제야 이해가 갔다. 처음에는 단지 백작이 무섭거나 어려워서 보이는 증세라고 이해했건만, 그게 아닌 모양이다.
“물론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렇기에 에스텔 아가씨는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되도록’ 키워졌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죠?”
“글쎄요.”
로즈마리는 잠시 말을 끊고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전에 확답을 듣고 싶군요.”
확답?
“무슨 말씀입니까?”
“당신은 다시 에스텔 아가씨를 구하려고 하실 겁니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이전에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던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저는 사실 당신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도라고는 하나 평민. 거기에 사도가 되기 전 전투 경험 한번 없던 애송이. 신뢰가 가는 게 이상하겠지요.”
“뭐, 그렇죠?”
기분 나쁘긴 하지만 사실이긴 하니까.
“하지만 이전 싸움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네?”
거기서 생각이 바뀔 만한 전개가 있던가?
초반에는 그럭저럭 우세이긴 했지만, 나중에는 실컷 얻어맞기만 했을 텐데.
“아가씨가 당신을 구하려고 했으니까요.”
“그게 무슨?”
“저주를 보고도 그렇게 생각이 드십니까?”
“…….”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
그 당시 에스텔은 소여 백작과 함께 있었다. 아무리 갑작스럽게 난입했다 해도 소여 백작이 반대했을 텐데, 그걸 무시했다고?
“그게 어째서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아가씨는 당신을 구할 때 공포를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그건 다시 말하자면 당신이야말로 아가씨가 저주를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란 겁니다.”
“…….”
“그러니 대답해주시길. 아가씨를 구할 것인가요? 아니면 그냥 포기할 것인가요?”
로즈마리의 간절한 목소리에 나는 조용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보이는 건 여전히 무감정한 냉정하기 그지없는 표정.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지금만큼은 그녀의 감정을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이 감정에 제대로 답해야만 하겠지.’
“구할 겁니다.”
차가운 석벽으로 둘러싸인 방에 확신으로 가득 찬 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즈마리가 부탁하지 않더라도 에스텔을 구할 예정이었지만, 이제는 그 외에도 에스텔을 도울 이유가 생겼다.
“이야기해 주시겠습니까? 에스텔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조금 긴 이야기가 되겠군요.”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는 흘러나온 소여 가의 비사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4 댓글
마드리갈
2020-11-14 01:09:03
마법과 권능의 차이는 정말 크네요.
마법은 자력본원(自力本願), 권능은 타력본원(他力本願). 근원이 다르니 원리도 다를 수밖에 없겠네요.
소여 가의 저택의 살풍경함은 휴게실도 예외가 아니었네요. 에스텔이 주인공 그레고르가 있는 환경에 아무 위화감 없이 적응할 수 있었던 것도 이미 이런 데에서 단련된 것...이해했어요.
소여 백작의 행태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로즈마리의 행적이 밝혀지면 드러날 것 같네요. 그레고르의 경악도 그래서 발생하는 것일테고...
로즈마리의 상체의 흉터를 상상하면서 그 아픔이 몸에도 전달되는 것 같은 느낌이...
Papillon
2020-11-16 02:33:18
마법과 권능은 똑같은 결과를 내더라도 내용물은 완전히 다른 경우라서 사실 그레고르가 이해한 것도 일부에 불과합니다.
사실 소여 백작 자체가 저렇게 된 이유가 있긴 한데 길게 풀진 않을 것 같습니다. 아예 그의 입장을 담은 외전을 쓴다면 모르겠습니다만.
SiteOwner
2020-12-26 22:16:11
순치(馴致)라는 단어가 참으로 무섭게 여겨집니다.
물론 사회적 존재인 인간인 이상 사회화는 필수사항이지만, 에스텔이 소여 가에 태어나 길러지면서 갖게 된 마음 속 속박은 공포로 인한 순치의 결과물로 여겨집니다. 사실 저 정도면 보통 사람들 같으면 멘탈이 붕괴되어서 답없는 상황이 될 것 같은데, 에스텔은 최소한 자신을 온전하게 지켜낼 수는 있습니다. 그것만 해도 사실 기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소여 가의 비사, 대체 어떤 것일지 걱정이 앞서고 있습니다.
Papillon
2020-12-31 23:08:58
소여 가는 보어헤스 백작가와는 다른 방향으로 미쳐있는 가문이죠. 사실 4대 귀족 전원이 어느 정도 뒤틀린 집안인지라, 가문 구성원들 중 선한 이는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에스텔이 그 성격인 건 로즈마리의 노력이 있기도 했지만 정말 기적에 가깝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