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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덩크를 젠더박스 운운하는 평론의 자기모순

마드리갈, 2023-02-04 20:01:29

조회 수
135

슬램덩크라는 농구만화 및 그 원작에 기반한 애니는 본 적이 없어서 사실 미지의 영역이예요.

제가 아는 건 그저 그게 남자농구에 관한 것이고 과거 애니에서 ZARD의 노래가 주제가로 사용되었다는 것. 그 정도까지밖에 모르니까 슬램덩크가 젠더박스인지 뭔지는 사실 관심밖인데다 애초에 농구를 싫어하는 제가 농구애니를 볼 리도 만무하니까 그에 대한 평론 자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미리 밝혀둬야겠어요.


그러면 이제 젠더박스 운운하는 평론에 대해서.

[김지학의 미리미리] 젠더박스에 갇힌 슬램덩크를 어떻게 소환할까, 2023년 1월 28일 미디어오늘 기사


이 평론에 등장하는 쟁점을 볼께요.

여성 등장인물의 수가 매우 적다.

운동선수는 남성이고 여성은 매니저라는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이분법적인 성역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운동선수 캐릭터들은 맨박스에 들어간 캐릭터들이다.

여성 등장인물에서는 입체적인 인물상이 없다.

많이 등장하는 여성들에 대해서는 개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1985년에 여성 만화가 앨리슨 벡델(Alison Bechdel)이 고안한 테스트를 통과하는 작품이 거의 없다.


물론 생각은 다양하고 이런 생각이 없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도 않지만 이 평론은 자기모순을 범하고 있어요. 굳이 슬램덩크의 내용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쟁점 그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자기모순으로 반박이 가능한 것 투성이.


첫째 쟁점인 "여성 등장인물의 수가 매우 적다" 에 대해서.

그럼 반문해 보죠. 그럼 그게 어쨌다는 건가요?

비슷한 논리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어요. 이미 2017년에 미국의 신문 USA 투데이에서 영화 덩케르크에 대해서 여성이나 흑인의 부재를 불편하게 여긴다는 논조의 평론을 낸 적이 있거든요(기사 바로가기, 영어).

그럼 대안이 있어요. 흔히 "미소녀 동물원" 이라는 멸칭으로 불리는 다른 애니가 있고 그것이야말로 젠더박스 탈출이죠.


둘째 쟁점인 "운동선수는 남성이고 여성은 매니저..." 운운에 대해서.

성별로 선수와 매니저가 나누어진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진심으로?

선수와 매니저가 다 같은 성별인 경우도 있고 다른 경우도 있어요. 애초에 성별이 역할의 결정이유가 아닌 것에 대해서 성별이 역할의 결정이유인양 전개하는 논지가 바를 리가 없는 것. 게다가 직접 성과를 내는 것은 선수이지만 그 선수들이 제 기량을 발휘하기 위해서 같이 활동하는 사람들이 매니저인데 매니저의 역할이 가볍다고 여기는 것일까요. 한 팀의 사람들을 누구는 선수고 누구는 매니저니까 차등적으로 봐야 한다는 의식은 괜찮을지.


셋째 쟁점인 "맨박스" 에 대해서.

스포츠는 신체활동이고 키가 크고 근육량이 많아야 유리한 게 당연하죠. 그러면 그렇게 장신의 근육질의 남성이 맨박스에 들어간다면 그건가요. 장신의 근육질의 여성 운동선수는 자진해서 맨박스에 들어간 것이네요. 폭력을 미화하는지 그건 슬램덩크를 안 봤으니 아예 비판할 수도 없지만 적어도 언론보도에 나온 범죄자가 슬램덩크에 나오는 사고방식을 동경해서 그렇게 행동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요.


넷째 쟁점인 "여성 등장인물에서는 입체적인 인물상이 없다" 에 대해서.

이것도 슬램덩크를 본 적 없으니 직접 평가는 할 수 없지만 이렇게 반문할 수는 있어요.

많이 다루어지는 캐릭터라도 일일이 그 캐릭터의 속성을 모두 작품 내에 담을 수가 없어요. 그보다 비중이 낮은 캐릭터라면 더더욱. 그게 성별을 이유로 결정된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믿는 근거가 뭔지 궁금하네요. 그럼 캐릭터가 나올 때마다 신상정보 데이터베이스를 공개해야 되는 걸까요?


다섯째 쟁점인 "많이 등장하는 여성들에 대해서는 개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는 사실 반문해야 할 가치도 못 느껴져요.

제한된 지면이나 방영시간 내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작가의 주제의식 및 스토리라인의 진행의 장치로서 필요한만큼 등장하기 마련인데 그걸 도외시한 이런 쟁점이 과연 그 자체로 존재가치를 지니는지는 의문스러워요.


여섯째 쟁점인 앨리슨 벡델의 테스트에 대해서.

그 만화가의 테스트가 진리를 담는다는 보장도 없고 그건 그 만화가의 자의적인 기준일 뿐.

그 테스트의 내용을 받아들인다고 할 경우 일본의 많은 애니, 특히 위에서 언급한 "미소녀 동물원" 들은 그 1985년의 테스트를 아주 훌륭하게 통과하는 게 많은데다 2020년에 업데이트한 테스트 기준도 아주 훌륭하게 통과하죠.



젠더박스다 뭐다 하는 논리전개도 좋은데, 그 이전에 자기모순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네요.

또 인용해야겠어요. 2017년에 쓴 글인 여류와 여류의 끝맺음 문장을.

여성이고 남성이고 이전에 인간임을 인식하는 게 그리도 힘들고 어렵고 싫은 것일까요.

마드리갈

Co-founder and administrator of Polyphonic World

4 댓글

마키

2023-02-04 22:33:55

사실 저도 슬램덩크는 이름만 아는 정도지만 그 정도 지식으로도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만 나오는 내용이에요.


극중에서 거의 유일한 비중있는 여성 조역 캐릭터라고 해봐야 강백호가 농구에 인생을 매진하는 이유였던 채소연이나 북산고의 농구부 매니저인 이한나, 고정 출연 게스트인 서태웅 팬클럽 정도이긴 합니다.


다만 전자는 본래 슬램덩크의 시작부터가 단순히 채소연에게 잘 보이기 위해 강백호가 빈말로 농구를 좋아한다고 하면서 농구부에 입부하는 계기가 되었고, 극의 마지막에서 모두가 인정하는 바스켓맨이 된 강백호가 거짓이 아닌 진심으로 "(농구)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라는 굴지의 명장면을 만들어 냈을 정도로 강백호의 농구인생, 나아가 슬램덩크 자체가 채소연이 있기 때문에 성립한 것인데 어찌 비중이 없다고 할 수 있다는건지...


후자의 경우에는 일본어판에서는 3학년 선배를 이라고 부르는 깡패에, 한국어판에서조차 호칭만 선배, 감독님이라고 불러줄 뿐인 예의범절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그 안하무인 강백호가 꼬박꼬박 존댓말로 정중하게 대하고 한나의 지시는 군말없이 따를 정도로 강백호에게 있어 중요한 사람으로 인식되고 있죠.


이게 입체적인 인물상으로 안보일 정도의 안목과는 말을 섞는게 시간낭비일 뿐이에요.

마드리갈

2023-02-05 15:37:36

결국 평론가는 작품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건 물론이고 이해력도 처참하네요.

저래서 무슨 평론을...평론은커녕 일상생활조차 될지 의문이예요.


이런 생각마저 드네요. 요즘 화제인 슬램덩크 극장판인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인기에 편승해서 뭔가 좀 벌어보려 한 건지...

Lester

2023-02-05 02:38:10

슬램덩크 만화를 정주행하고 내용을 대강 꿰고 있는 사람으로서 반박해 보겠습니다.


1. 원래 학원폭력물로 시작하려던 걸 작가가 마침 농구에 대해 잘 알고 있기도 해서 농구만화로 바꾼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 만화는 남성 중심의 일반 고교생 농구를 다루고 있지, 여자프로농구가 아닙니다. 작품을 보기는 했는지 의문이며, 스크린쿼터나 요즘 PC들의 주장처럼 '의무적으로 여캐를 넣어라' 류의 원작파괴성 요구에 가깝습니다.


2. 1번과 마찬가지로 남성 중심의 일반 고교생 농구이며, 비단 슬램덩크만이 아니라 스포츠계 만화는 여캐가 매니저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습니다(ex. 아이실드 21, 다이아몬드 에이스...). 게다가 슬램덩크에서는 실제 경기에 나갈 일이 거의 없는 '남자' 후보선수나 다른 '남자' 비주전 선수들 또한 경기에는 참여하지 못할지언정 응원이라도 열심히 해야 한다는 태도로 팀워크를 중시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포인트를 잘못 잡은 질문입니다.


3. 글쎄요. 최소한 슬램덩크의 주인공 강백호와 같은 북산팀 선수이자 비슷한 성향(불량학생 전과, 여자에게 헬렐레함, 그러고도 여러번 차임, 하지만 여자 말은 잘 들음 등)을 지닌 송태섭은 딱히 여자 캐릭터에 대해서 뭐라고 까내리는 장면은 없으며, 다른 캐릭터들 역시 '남자라면 자고로' 이런 말은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후반부에 가면 박하진 기자라는 여성이 최종보스 팀인 산왕공업의 강함에 대한 서술자로 등장하여 할 말은 다 하며 여자라고 무시당하지도 않습니다. 최소한 여성 캐릭터들에 대해 '탄압'은 없다는 소리입니다. (서태웅 팬클럽이 있긴 하지만 서태웅의 농구일변도인 캐릭터성을 강조하기 위한 설정이므로 역시 의미 없습니다)


4. 입체적인 인물상이라는 건 해당 캐릭터가 중심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강백호 같은 경우에는 처음에는 그냥 농구 좀 좋아하는 풋내기이지만 완결 즈음에서는 "영감님(안한수 감독)의 영광의 시기는 언제였죠? 국가대표 때였나요? 전 지금입니다!" 같은 명대사를 통해 농구를 위해서라면 부상까지도 불사하는 모습을 보여주죠. 여성 캐릭터가 입체적이려면 이러한 비중을 가져야 하는데, 앞서 말했듯이 남자 농구계인 이상 여캐가 활약할 장면은 극히 드뭅니다. 그런 사례를 찾으려면 여성이 중심인 스포츠 만화나 기타 장르의 만화를 찾으시면 됩니다. 거듭 말하지만 슬램덩크에서 '여캐가 입체적이지 않다는' 질문 자체가 작품에 대해 무지하다는 증거입니다.


5. 최소한 이름이 있는 여성 캐릭터들은 누가 누군지 분간할 수 있게 묘사되어 있으며 이름까지 불러주는 장면도 있습니다. 이건 오히려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더러 '묘사력이 약하다' 같은 얘기인데, 실사풍 그림체를 보고도 이런 소리가 나오는 걸 보니 역시 작품을 보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6. 위키백과의 벡델 테스트(링크) 중 비평 문단에 "the Bechdel test has been criticized for not taking into account the quality of the works (벡델 테스트는 (검사받는) 작품들의 품질은 고려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는 문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안격인 다른 테스트들이 같이 설명되어 있고요. 얼핏 봐도 '여캐가 등장하는가'에만 집중하는데, 뒤집어 말하면 "여캐만 등장한다면 작품으로서 성립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소리입니다. 작품으로 성립하지 못한다면, 그걸 굳이 찾아볼 이유가 있나요? 대체 무엇을 위한 테스트입니까?


총평. '억지'입니다. 전문자료랍시고 든 벡델 테스트도 그렇고, 이 기사 자체가 그냥 젠더갈등을 이용해 조회수를 올리기 위한 얄팍한 수작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하필 슬램덩크인 이유는 최근에 극장판인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화제니까 이용한 거고요.

마드리갈

2023-02-05 15:45:51

역시 원작의 내용을 잘 아시니까 보다 효과적인 비판이 가능하네요. 확실히 크게 도움이 되어요.

결국 그거네요. 저 평론가는 슬램덩크 자체를 모르는 상태에서 미리 내놓은 결론을 정당화하려 무리수를 두었다는 것. 하긴 저런 부류의 자들은 진짜 심각한 여성혐오 범죄인 이란의 히잡 착용강제와 여성에 대한 온갖 잔인한 폭력과 여성은 물론 남성도 마구잡이로 살해하는 만행이라든지 여성인권 따위는 애초에 없다는 듯 태연히 자행되는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인 여성에 대한 성폭력 및 살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고, 진짜 저열해요. 정말 그럴 것 같네요. 트렌드에 편승한 바이럴마케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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