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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교사법 - 당한 사람이 나쁘다는 논리

마드리갈, 2023-09-03 19:58:36

조회 수
151

당한 사람이 나쁘다는 논리가 여전히 횡행하고 있어요.

그나마 하나는 관철되지 못하지만 다른 하나는 관철되어요.


첫째는 흉기를 휘두른 취객에게 다리를 찔렸다가 그 취객을 발로 차서 제압하고 흉기를 뺏은 편의점주에 대해 경찰이 그 편의점주를 기소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한 사건이었어요. 이것에 대해서 검찰은 편의점주에 대해서는 정당방위가 성립된다고 봐서 불기소처분을 내렸고 취객에 대해서는 특수상해 혐의로 기소했어요. 자세한 것은 소개하는 기사를 참조해 보시면 되어요.

흉기 휘두른 취객 폭행한 편의점주…우여곡절 끝 ‘정당방위’ 인정, 2023년 9월 1일 KBS 뉴스 기사


둘째는 성인과 동석했거나 위조된 신분증을 사용한 청소년에 대해 그들이 미성년자인지 모르고 술을 판매한 업주에 대해 음식점의 영업정지가 정당하는 판결로 서울행정법원의 판결사항이 그러해요. 자세한 것은 아래에 소개된 기사를 참조해 보시면 되어요.

‘위조신분증에 짙은화장’ 미성년에 술 판 업주…법원 “영업정지 정당”, 2023년 9월 3일 서울신문 기사


참 대단한 기교사법이라고밖에 할 수 없어요.

그리고 이 판결이 낳을 부작용은 그리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어요.


형법(국가법령정보센터 바로가기)에서 말하는 위법성(違法性)의 조각(阻却)이라는 개념이 있어요. 즉 어떠한 행동이 위법이긴 하더라도 위법성을 물을 수 없게 되어 범죄로서 성립하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대체로 이렇게 요약되어요. 정당행위, 정당방위, 긴급피난, 자구행위, 피해자의 승낙 및 명예훼손의 행위가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로. 앞의 5개 항목은 제20조에서 제24조에서, 맨 마지막의 명예훼손 관련은 제310조에서 규정되어 있으니까 참조를 부탁드릴께요.


이것을 토대로 두 사건을 판단하면 참 무서운 논리가 성립하고 있어요.

첫째 사건에서는 만일 검찰의 불기소처분이 불가능했다면 그 편의점주는 꼼짝없이 상해사건의 가해자가 되어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해요. 취객이 휘두른 큰 가위에 자상을 입고 죄인이 되고, 이렇게 되면 범죄피해자는 죽어야 죄인이 아니게 되는 상황이 제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죠. 그리고 그 대단한 검수완박 어쩌고가 왜 문제가 있는지도 이렇게 드러나는 것이기도 하죠.

둘째 사건은 더 심각해요. 당한 사람이 잘못되었다는 논리가 성립한 것은 당연한데다 적극적인 기망행위에 대해서 법원이 공식적으로 루프홀을 만들어준 것이거든요. 작정하고 속이는 자에 당한 것이 영업정지로 이어지는 그런 상황은 이제 바꿀 수 없으니까 다른 영역이라고 해서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결국 개인의 운명은 어디에 있을지도 모르는 괴한에 희생당해도 어쩔 수 없다는 결론밖에 날 것이 없어요.



이런 기교사법이 얼마나 유익할지는 저는 법조인도 아니고 법학도도 아니었다 보니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적어도 하나 있네요. 국민의 삶을 지켜야 할 각종 법령과 제도도 충분히 빌런일 수 있다는 것.

마드리갈

Co-founder and administrator of Polyphonic World

4 댓글

Lester

2023-09-03 21:31:19

판사부터 인공지능으로 바꿔라, 판사 가족이 당한다면 판결이 달라질 것이다 하는 감정적인 여론이 댓글창을 장악한 이유이기도 하죠. 특히나 후자는 실제로 판사의 감정이 작용한 판결이 국내에 있었던 걸로 알아서 더욱 심각한 문제죠. '과거의 판례에 비추어~'라는 말이 분명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재량을 발휘하여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는 사건에서도 판례 운운하며 넘어가는 것은 실질적까지는 아니지만 도의적은 책임이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첫 번째 사건의 경우 비록 취객이 흉기(부엌칼, 일설에 의하면 옆집에서 '쓸 데가 있다'며 손쉽게 빌린 것)를 소지해 책임이 더 커졌다고는 하나, 편의점주 또한 (기사 영상에서는 편집됐지만 각도상) 얼굴을 걷어찼다는 이유로 쌍방과실이 성립될 수도 있었죠. '살해 의사가 확실히 있었던 것도 아닌데 심한 폭행을 가했다' 운운하면서요. 물론 (일설이 사실이라면) 어디서든 부엌칼을 준비한 것 자체가 살해 의사로 충분히 해석될 수 있었기에 정당방위라고 판단했겠지만요.

마드리갈

2023-09-04 00:14:00

사실 책임회피죠. 판례에 비추어 판단할 게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고, 판례라는 것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도 아니거든요. 즉 이후에 판례가 바뀌는 경우도 있어요. 법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자체를 무시한 저런 판단들이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은 사실 이미 법조문이나 도덕의 영역에서도 분명한데 참 뻔히 보이는 변명을 잘도 한다는 것이죠.


판사의 감정이 작용한 판결 하면 최근의 것으로는 이게 있어요.

[단독] 박병곤 판사 명예훼손 판결 35건 중 실형은 ‘정진석 사건’이 유일, 2023년 8월 26일 조선일보 기사

마드리갈

2023-09-08 13:30:04

2023년 9월 8일 업데이트


경기도 군포시의 한 콩나물국밥집이 미성년자에게 술을 팔았다는 이유로 영업정지를 당한 것에 대해 업주가 점포 전면에 내건 글이 화제가 되고 있어요. 그 글에는 앞으로 신분증검사를 철저히 할 것과 2022년 11월에 거짓말을 하고도 처벌받지 않은 미성년자들을 성토하는 내용이 담겨 있고, 여러모로 공감을 얻고 있어요.

작정하고 위조된 신분증을 제시한 경우에도 결국 불이익을 입는 쪽은 식당업주이고 적극적인 기망행위를 한 청소년은 청소년이라고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제도화된 부조리는 언제까지 지속되어야 할까요. 사법개혁 운운하는 사람들은 이런 때만 한없이 조용하네요.


관련보도를 하나 소개할께요.

“철없는 너희 탓에 생계 잃어”…국밥집 영업정지 안내문에 공감 쏟아졌다, 2023년 9월 8일 조선일보 기사

마드리갈

2023-09-20 23:05:07

2023년 9월 20일 업데이트


서울남부지법 민사합의51부에서는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죽음을 다룬 다큐멘터리영화 첫변론의 상영에 대해 서울특별시 및 성범죄 피해자가 제작위원회 박원순을 믿는 사람들과 김대현 감독을 상대로 낸 상영금지가처분이 인용되었어요. 이것은 내용에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고 국가기관 및 사법부가 인정한 범죄내용을 정면부정하는 효과를 가진다는 판단에서 내려진 것이었어요. 이에 따라 영화관에서의 상영은 불가능해졌어요.

이 경우에서는 당한 사람이 나쁘다는 논리는 동원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예요.


관련보도를 하나 소개할께요.

법원, ‘박원순 다큐’ 상영금지 결정... “진실로 보기 어렵고 피해자 명예훼손”, 2023년 9월 20일 조선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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