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주제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미디어에서 많이 통용되는 어휘 중에 알파벳 N이 사용된 것들이 꽤 있습니다. 이를테면 코로나19 판데믹 시대에 잘 쓰였던 용어인 "N차감염" 이라든지, 성착취 영상물의 배포를 위해 사이버공간에 만들어진 범죄공간인 "N번방", 고교졸업 이후에 대입시험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N수생" 등의 것들. 그리고 여러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N잡러" 라고 이렇게 말하는데, 단적으로 말하자면 참 안일하고 생각없다고밖에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예의 용어에 포함된 N은 영어의 넘버(Number) 내지는 독일어의 눔머(Nummer) 등에서 온 것이니까 어원 자체가 나쁘다고 판단할 것은 못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용어가 문제되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충분히 다르게 쓸 수 있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불필요하게 만들어야 할 정당한 이유가 없어서입니다.
한 가지 실험을 하나 해 보겠습니다. 수학용어인 다차함수를 N차함수로 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다항식은 N항식으로, 다항함수는 N항함수, 다각형은 N각형으로 써도 되겠지요. 실제로 그런 용례도 있습니다. 그러면 의견이 많은 쪽으로 결정하는 다수결(多数決)은 N수결로, 그리고 많고 적음을 의미하는 다과(多寡)도 N과, 자손을 많이 낳는 행위인 다산(多産)도 N산으로 쓸 수 있습니까? 임의의 수를 N으로 대체해서 쓰는 것이 옳다면 N수결, N과, N산으로 쓰더라도 반대하면 안됩니다. 이 실험에서 보듯, 안일하게 N을 남용한 결과는 이렇게 수용불가능한 결론의 정당화로 이어집니다. 애초에 다수결, 다과, 다산 등의 개념은 수치의 많고 적음을 말하는 상대적인 개념일 뿐 특정의 가치를 지정하는 개념 자체가 아니라서 적용될 여지 자체가 없습니다.
N수생의 경우도 문제가 있습니다. 사실 이 경우는 현역/졸업자 2분법으로도 이미 충분합니다. 현역 고교생이 졸업하기 전에 대학에의 입학을 확정짓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하고 고교를 졸업한 이후에 다시 시험을 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시험을 몇번 치든 간에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다시 대입수험에 도전하는 사람들을 졸업자나 재수생이라는 쓰면 될 것을 N수생이라고 써야 하는지는 필요성 자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개인 레벨에서는 몇 번 응시하느냐가 중요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미디어를 접하는 불특정 다수에게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잘 봐줘야 중언부언이나 동어반복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나마 위의 것들은 그래도 너그럽게 봐줄 여지가 있습니다만, "N잡러" 라는 말은 대체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겸직, 부업 등의 멀쩡한 말도 있는데다 직업의 영단어 잡(Job)을 끌어다 붙이고 게다가 행위자를 지칭하는 영어 어미를 따서 그렇게 만든 것인가 본데, 온갖 기괴한 표현으로 떡칠한 아파트단지의 이름보다 더 누더기같다고 생각하면 제 생각이 비뚤어진 것인지.
여기서 좀 아픈 소리를 해 봐야겠습니다.
자국어를 존중하지 않는다든지 국가 전체가 언어장애를 앓고 있다고 비하되는 일본의 경우, 여러 직업을 수행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일본어 어휘가 한자어는 물론 고유어도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한자어의 경우는 겸직에 해당되는 켄쇼쿠(兼職) 및 부업에 해당되는 후쿠교(副業)가 있고, 고유어로는 카케모치(かけもち)라는 말도 있습니다. 특히 카케모치라는 용어는 겸하는 대상이 반드시 직업이 아니라도 쓸 수 있어서 범용성이 매우 좋습니다. 이를테면 학교에서 교사가 부활동의 고문(顧問)을 담당하는 경우 복수의 부활동에 대해 고문을 겸임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카케모치도 사용가능하고, 겸임에 해당되는 켄닌(兼任)도 쓸 수 있습니다. 이런 일본어의 현실보다 더 나쁜 한국어의 현실은 그러면 뭐가 되겠습니까.
더 나아가서, 알파벳 N은 한글자모음이 아닙니다. 한자를 절대로 써서는 안된되는 한글전용론자들은 이럴 때면 예외없이 침묵하는군요. 침묵이 금이라서 그렇다면, 해 줄 말은 하나뿐입니다. 황금만능주의자들이라고.
11월 7일에 쓰던 글이 있었는데 아직 완성중이 아니라서 이건 휴일중에 손봐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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