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주제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유럽이나 미주의 오래된 도시에만 몇몇 남아 있는 가스등 관련으로 몇 가지를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가스등을 한자로 쓰면 瓦斯燈. 즉 와사등입니다.
국문학 작품 중에도 와사등이 있지요. 김광균(金光均, 1914-1993)의 시의 제목으로도 유명한 바로 그 와사등이 가스등을 가리키는 말. 이 한자는 과거는 물론 현재의 기업명에도 쓰이고 있습니다. 과거의 기업으로는 1910년에 부산에 설립된 한국와사전기(韓?瓦斯電?, 1914년 조선와사전기로 개명 후 1937년에 남선합동전기주식회사로 통합되어 소멸), 현재의 기업으로는 일본 도쿄의 기업인 일본가스(日本瓦斯, 통칭 니치가스) 등이 있습니다.
가스등의 마지막 전성기였던 19세기 후반을 배경으로 하는 판타지 장르의 문학도 있습니다.
이른바 가스등 판타지, 가스라이트 판타지(Gaslight Fantasy, Gaslamp Fantasy)라고 불리는 것들.
대체로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재임기 쯤이 시대적 배경이 되는, 근대와 전근대가 섞여 있는 시대상과 과학적인 명쾌한 설명이 곤란하거나 불가능한 괴현상이 잘 등장하는 가스등 판타지의 대표작은 아일랜드의 작가 브램 스토커(Bram Stoker, 1847-1912)의 소설 드라큘라(Dracula)입니다. 또한 포럼에서도 잘 언급되고 있는 죠죠의 기묘한 모험 중 1부 팬텀블러드가 가스등 판타지에 부합합니다. 정작 가스등 판타지라는 용어 자체는 21세기에 들어서야 등장했고, 그것도 원래의 용어는 가스램프 판타지(Gaslamp Fantasy)입니다.
어제부터인가 뉴스에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1939년에 발표된 영국의 작가 패트릭 해밀턴(Patrick Hamilton, 1904-1962)의 희곡 가스라이트(Gas Light)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대중적으로는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 1915-1982) 주연의 동명의 1944년작 미국 영화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상대방을 계속 거짓말 등으로 혼란시켜서 그 상대가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심리조작을 의미하는 것인데, 언급된 작품에서는 벨라가 가스등이 어둠침침해져 있다고 하자 그의 남편 잭이 그런 벨라가 착각을 하고 있다고 윽박질러 버리는 등의 장면이 연출됩니다. 그런 것이 가스라이팅.
이미 현대의 문물은 아니게 되었지만, 가스등이라는 말이 오늘날에도 이렇게 쓰이고, 막 실용화되었을 때에는 분명 근대문명의 축복이었을 물건이 오늘날에는 혼란스러운 시대, 알 수 없는 공포, 심리적 폭력 등의 어두운 단면의 묘사에 주로 쓰이는 점이 기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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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ter
2020-01-31 18:55:49
러브크래프트 선생 왈 "최고의 공포는 미지에 대한 공포"라 했으니, 가스등의 흔들리는 불꽃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변화하는 그림자를 만들어 내면서 은연중에 혼란과 공포를 안겨주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영상물의 취조씬에서도 천장에 매달린 전기등을 가만히 두지 않고 약간 흔들듯이요. 다른 예로는 연출에 따라 아늑하거나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모닥불이 있겠네요. (전자는 만화 원피스의 대잔치, 후자는 원시인들의 의식이나 식인종들의 파티)
제가 좋아하는 셜록 홈즈는 가스등 판타지는 아니지만 딱 그 시절에 부합하는 작품입니다. 현장을 수사할 때는 가스등, 하숙집에 돌아와 추리할 때는 벽난로. 특히 후기 시리즈 중에 "악마의 발"은 가스등(정확히는 정체불명의 독초를 가스등에 태운 것)이 무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 일품이죠.
SiteOwner
2020-02-02 13:30:12
그렇습니다. 불, 그리고 빛이란 참 묘한 것입니다. 부족해서도 모자라서도 안되는 한편, 밝음과 어두움의 차이를 극대화하기에 여러모로 복잡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장치로 잘 기능하는 듯합니다.
가스등의 불꽃은 불안정한데다, 실내에서 사용할 경우에는 산소를 대량으로 소모하고 실온을 올리다 보니 장시간 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근대문명의 소산이면서 전근대의 속성도 동시에 갖고 있는 양면적인 존재이다 보니 역시 과도기의 불안정성을 전제하는 작품들의 배경에 많이 적합한 듯 합니다.
좋은 말씀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