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집이 이래저래 이사도 많이 하고 방 배치도 자주 바꾸다 보니까 책들이 문제가 돼서 결국 90년대 이전의 책(그러니까 말 그대로 페이지가 이미 누렇게 떴거나 뜨기 시작한 책)들은 한꺼번에 내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들 중엔 온전히 컬러임에도 '애들 보는 책'이라는 이유로, 그리고 저도 이미 내용을 외웠거나 딱히 더 볼 일이 없는 관계로 더 이상 필요가 없는 책들도 내다 버렸는데 그 중에 하나가 아직도 기억나네요. 내용이 좋아서.
중역인지 오역인지는 모르겠는데 작가 이름은 '알렉산더 마카흐'이고 제목이 '노배우'였나 '대배우'였나 '명배우'였나(…) 헷갈립니다. 아마 '노배우'가 맞을 겁니다. 오 헨리 단편집 뒤에 짜투리로 붙어 있던 단편인데 짧으면서도 희로애락이 다 들어 있어서 지금도 페이지의 삽화(기대할 건 못 됩니다. 90년대 초등학생 대상 삽화라)부터 한 줄 한 줄이 다 기억납니다. 내용은 대강 이러합니다. (이제 보니 작년 영화 '조커'도 살짝 닮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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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이름 까먹음)는 왕년에 브로드웨이에서 잘 나가던 대배우였지만, 지금은 생계를 위해 유아용 간식인 박하 캔디의 광고를 위해 박스 하나를 통째로 뒤집어쓰고 다닙니다. 전신 크기의 상자에 앞을 볼 수 있게 눈 앞의 긴 구멍과 팔 내놓을 구멍만 내놓은 광고판이죠. 당연히 길거리를 지나다닐 때마다 보행자들에게 욕이란 욕은 다 먹고 불량배에게도 시비를 당합니다만, '샌드위치맨(몸 앞뒤로 광고판을 붙이고 다니는 것)처럼 얼굴이 팔리지 않는 것만 해도 어딘가'라며 속으로 눈물을 삼키고 말없이 걸어다닙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갑자기 팔 내놓는 구멍으로 손을 쑥 들이밀더니 주인공에게 뭔가를 들이밉니다. "미크(아마 마이크 혹은 믹의 오역인 듯?), 안 받고 뭐해!"라며 다급하게 몰아붙이면서 말이죠. 주인공은 영문을 몰라 뚱하니 있다가 그 사람이 하도 보채서 마지못해 쥐어듭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건 지갑이었기에 주인공은 자기 게 아니라면서 쫓아가려 하지만, 그 사람은 "왜 쫓아와, 멍청아!"라며 욕을 하며 도망가고 보행자들도 방해가 된다며 욕을 해대서 주인공은 별 수 없이 물러섭니다. 그래서 주인공은 일단 지갑을 확인해 보기로 하는데...
놀랍게도 지갑에는 제법 많은 돈이 들어 있었고, 더 놀랍게도 거기에는 유명한 감독 A(역시 이름 까먹음. 알렉스 피시맨이었던가?)의 명함도 들어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순간적으로 과거를 돌이키는데, 몰락한 이후 그 A 감독의 사무실에 찾아가서 조연이라도 좋다며 굽실거렸지만 매번 그의 부하이자 조감독인 키람(재수없어서 너무 잘 기억나네요)이 자리가 없다며 내쫓았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주인공은 내막을 깨닫는데, 지갑을 준 사람은 소매치기였지만 한패와 주인공을 헷갈린 것입니다. 그렇다 보니 주인공은 무시당하고 굶주리던 나날이 생각나서 그 돈을 꿀꺽할까 했지만, 부당한 일은 할 수 없다며 지갑을 되찾아 주기로 합니다.
마침 그 소매치기는 도망가다 경찰에게 붙잡혔는데,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닌지 경관이 소매치기 이름까지 알고 있었지만 소매치기는 절대 아니라며 능글맞게 잡아뗍니다. 그 옆에는 피해자인 A 감독도 있었는데, 감독은 돈은 다 가져도 좋지만 중요한 편지가 들어 있으니 그것만은 돌려주면 좋겠다고 합니다. 주인공은 그렇게 세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던 걸 지켜보며 다시금 갈등하지만, 역시 나쁜 짓은 안 된다며 결심하고 끼어들어서 그 지갑이 여기 있음을 밝힙니다. 소매치기는 당황하지만 주인공과 똑같이 광고상자를 뒤집어쓴 사람이 저 멀리서 걸어다니는 걸 보자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순순히 잡혀갑니다.
감독은 주인공이 광고상자를 벗는 걸 도와주고 주인공에게 돌려받은 지갑에서 그 편지를 되찾고 기뻐합니다. 그 답례로 감독이 너무 기분이 좋았는지 지갑에 있던 돈을 다 주려고 하자, 주인공은 끝끝내 거부하고 다른 것을 부탁합니다. 바로 몇 번이고 거절당했던, 연기자의 길로 돌아가는 것이죠. 감독이 주인공을 살피듯 안색이 달라지는 동안 주인공은 자신의 사연을 천천히 풀어놓는데, 고생하던 지난날이 낱낱이 떠올라 저절로 고개를 떨어트리고 눈물까지 흘립니다. 그렇게 침묵이 감돌다가 마침내 감독이 입을 여는데...
"그 얼굴은 조연도 아니고 주연감입니다. 그 슬픔이 얼굴에 제대로 새겨져 있어요. 아니, 제가 부탁하겠습니다. 저에게 꼭 오십시오!" 감독은 주인공에게 감동하고는 약간의 사례비와 명함을 주고 돌아가고, 주인공은 오랜만에 고급 식당에서 맛난 식사를 하고는 '요즘 유명하다는 그 박하 캔디란 것 좀 가져와!'라며 호기도 부립니다. 그리고 한때는 찬사를 받았던,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걸었던 밤거리를 당당하게 걸으면서 이야기가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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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그러니까 아마 중학교 때쯤)에는 엄청 감동하면서 읽었던 이야기인데, 지금 와서 약간 '삐딱하게' 보니 좀 묘한 구석도 있네요. 감독이 주인공의 인생역정을 듣고 감동하는 부분에서 그 이야기 자체에 감동한 것인지, 아니면 그 모든 걸 연기라고 받아들인 것인지, 그도 아니면 초췌해진 얼굴 자체(…)를 보고 감동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기억에 혼동이 생긴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맥락상 1번이 맞다고 봅니다. 언제 쓰여진 단편인지는 모르겠지만 샌드위치맨이 언급되고 사람들이 잘 사는 것처럼 묘사되는 걸 보면 대공황 이후, 아마 2차 대전 이후인 것 같습니다.
문제는 아무리 검색을 해도 이 단편이 안 나온다는 겁니다. 그나마 오 헨리 단편집에 붙어 있던 것과 표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직 기억하고 있어서 검색을 했더니 바로 튀어나오는데(역시 진리의 구글), 나오라는 책 내용은 안 나오고 대신 '사실 표지가 좌우반전을 통한 표절이었다'는 척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반전이 나오네요(…). 하지만 해당 사이트에서 원판, 즉 일본판도 오 헨리 단편집이라고 나오는 걸 보면 아마 해당 제목으로 검색하면 좀 더 뭔가가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p.s. 소학관이 아직도 건재해서 그런지 도통 검색이 안 되네요. 포기해야 할 듯)
어쨌든 주제는 표절이 아니고 노배우라는 단편 이야기였고, 혹시나 그 단편도 일본 단편에 가짜로 미국 작가 이름을 붙이고 편집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이야기의 출처(?)는 계속 파 봐야겠지만, 그래도 나중에 다 잊어버리기 전에 어딘가에 써 두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이야기 자체는 언제 읽어도 감동적이니까.
그거 알아? 혼자 있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유야 어쨌든 고독을 즐겨서 그러는 게 아니야. 사람들한테 계속 실망해서 먼저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는 거야. - 조디 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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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0-12-04 13:05:54
상당히 인상적인 단편소설이예요.
별의 별 일이 다 일어나기도 하고, 자신과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사건과 부딪치기도 하지만 그래도 단 하나 올곧게 지킨 것 덕분에 보답받게 되었다는 이야기...그 자체가 감동적이예요. 레스터님께서 생각하신 감독이 감동한 이유, 저도 1번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다른 이유는 필요없을 거라고.
저희집도 비슷한 이유로 없어진 것들이 있는데, 지금 와서 원망할 수도 없고...
아쉬운 마음이 가득 남아 있어요. 그 심정, 저도 이해할 수 있어요.
Lester
2020-12-04 20:28:22
선행은 보답을 받는다는 뻔한(?) 전개도 그렇지만, 왕년에 배우였다는 점과 길거리에서 벌어지는 일이 또 하나의 연극 같아서 더더욱 극적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제가 오 헨리를 좋아하는 이유도 대다수의 단편에서 이렇게 짧지만 극적인 전개가 자주 등장하고, 씁쓸한 결말도 없잖아 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교훈을 주거든요.
그나저나 본문에 링크한 글 중에 '좌우반전이므로 표절이다'라는 사이트를 들어가보니 한일간에 온갖 표절문제에 대해 DB를 만들긴 했으나, 이제와서 보니 약간 악의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네요. 분명히 만화의 대표절시대(?) 같은 우리나라의 잘못도 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다른 부분은 무조건 우리나라 잘못으로 몰아가는 것 같아서 말이죠. 저만 그렇게 느낀 건가요?
(추가) 메인 사이트에 보니 온갖 통계며 증거자료를 가져오긴 했는데 압도적으로 한국만 까대고 있네요. 정말 가관인게 통계자료는 일본은 좋은 것만 가져오고 한국은 무슨 '호주 남녀가 동아시아 4개국을 봤을 때 반응' 이런 지엽적인 것만 가져오지 않나, 사이트 곳곳에 '한국인들은 일본이 지배한 것만 운운하면서 막상 일본을 통해 온갖 서양의 지식을 습득한 건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이 가장 강력범죄 비율이 많다...' 한일중 3개를 분야별로 서술했다곤 하지만 국가별 길이만 봐도 중국은 눈치보이니까 안까고 우리나라만 줄줄이 늘어놓은 게 보이네요.
(사실 저렇게 악의적으로 편집한 걸 구태여 관심을 줄 필요가 있나 싶고 그게 또 사실이지만, 다른 의견도 들어봐야겠다 싶어서 써 봅니다)
SiteOwner
2020-12-13 17:44:53
소개해 주신 단편은 사회의 어두운 곳, 그늘진 인생을 다루면서도 그 소설에서 빛이 나서 세상을 비춰 주는 것 같습니다.
이 추운 겨울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소개에 감사드립니다.
그러고 보니, 1980-1990년대에 나온 문고에 그런 형태의 책이 많았습니다. 장편소설 뒤에 단편소설을 싣는. 물론 그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의 작자가 반드시 같다는 보장은 없었습니다만, 그렇게 만들어진 책을 읽는 재미가 꽤 있었던 게 기억납니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책이라서 그때의 안타까움도 다시 밀려오는 게 느껴집니다.
Lester
2021-01-07 06:21:15
시티헌터처럼 대도시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마음 따뜻한 이야기라서 더더욱 기억에 남았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작가를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게 가장 비극이군요. 작가를 알면 그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볼 텐데 굉장히 아쉽습니다.
사실 해당 책에는 "안개 속의 얼굴(작가는 까먹음)"이라는 단편도 있었는데, 이 쪽은 제목 그대로 아버지와 딸만 사는 외딴집에 안개가 낀 어느 날 형사와 죄수가 찾아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그만한 반전이 일품이더랬죠. 하지만 같은 책에서 반전을 따지라면 책 앞부분에 가득히 실린 오 헨리가 압도적 승리인 관계로(...) 기억엔 별로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