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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대의 모순 탓" 담론이 생각납니다

SiteOwner, 2023-01-29 17:39:11

조회 수
164

1998년쯤으로 기억합니다.

그 이전에는 아침일찍 대학에 등교해서 도서관에 가면 열람실의 책상에는 누군가가 사용중이면 그가 사용중인 책이나 필기구나 드물게 노트북 컴퓨터 등이 놓여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비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해부터 좀 다른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일단 누군가가 사용하지 않는 책상 위에도 무엇인가 인쇄물이 놓여 있었습니다. 1997년말을 강타한 외환위기 및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게 된 그 일련의 사태에 대해서 "이전 시대의 모순의 결론이 경제위기다" 라는 담론이 쓰여진 인쇄물이 아주 흔히 놓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학구내만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그때보다는 이후의 일이었습니다만 어쩌다 장거리 열차를 타면 좌석 앞의 그물주머니에 소책자 형태의 정부간행물이 있기도 했습니다. 43시간만에 사임한 장관이라든지 옷로비 사건이라든지 하는 비리가 연발하자 내놓은 정부간행물의 요지는 대략 이런 것이었습니다. 깨끗한 세상이 되었으니까 전에 보이지 않은 비리가 새로이 보이게 되어서 논란이 많은 거라고.


이전 시대의 모순이 누적되어서 위기가 타졌고 세상이 깨끗해진 덕에 전에 안 보였던 비리가 새로이 보였다는 담론은 굳이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상당부분은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그 시기를 보낸 사람들이 유독 요즘에는 그런 논리를 구사하지 않습니다. 특히 저와 동년배들이거나 대학에서 바로 만났던 후배들 그리고 선배들을 포함한 40-50대 사람들의 다수가 그 시기를 거쳤지만 이상하게 그때의 담론을 부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때는 틀렸고 지금은 맞다는 것일까요. 무엇이 그렇게 그들의 신념의 기축을 바꾸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확언할 수 있는 건 하나 남아 있습니다. 그때는 과거 시대 탓, 지금은 현재 탓을 하고 탓할 게 없으면 자신을 탓해야 한다는 것. 그런데 그렇게 신념을 쉽게 뒤집은 자들이 내탓이오(Mea culpa)를 말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세대에 떠넘기면 편할테니까요.

SiteOwner

Founder and Owner of Polyphonic World

4 댓글

시어하트어택

2023-01-29 23:56:14

확실히 예전에는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들이 지금은 당연하지 않게 여겨지게 되어 개선이 이루어진다는 점은 세상이 조금씩 나아진다고 볼 수 있겠으나... 아마도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상향'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것도 과거 시점에 말이죠.


우리가 '일제 잔재'라느니 '구시대의 유물'이라느니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 시점이 오래되지 않았다든가 그것을 외치는 세력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면 '그럴 만도 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기회도 주어지고 추진력도 주어졌는데 그 상태로 방치하고 있었다면 그건 그 사람들의 책임이죠. 아니, 그걸 해결하면 소위 자기네 '밥줄'이 없어지니 해결을 안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를 일입니다.

SiteOwner

2023-02-01 21:53:30

사실 그들의 이상향은 이런 것입니다. 그들이 지주가 되고 다른 사람들이 소작인이 되는.

1990년대 후반 대학가에서는 학생들이 대학가의 카페며 레스토랑이며 패스트푸드점이며 할 것 없이 일상생활 속에서 잘 이용하면서 대학가가 상업화되어 가느니 그러고 특히 미국계 패스트푸드점에 대해서는 거대자본의 침탈 운운하고..차라리 도쿄 모처의 패스트푸드점을 거점으로 해서 성공하겠다는 내용의 라이트노벨 알바 뛰는 마왕님이 더 현실적입니다.


그렇습니다. 과거 탓을 하면서도 실제로 그 과거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안 하는 건 실제로 그게 자기들의 이득에 도움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몇몇 시민단체들이 보여준 행태가 바로 그것입니다.

Lester

2023-01-30 01:39:21

전반적인 정책결정권을 중노년층이 잡은 상황에서 '이전 시대의 모순 탓' 운운했다간 똑같은 논리로 반박당하기 쉬우니, 오월동주 격으로 합심해서 '젊은 것들은 근성이 없다'라며 희생을 종용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불과 몇년 전에 여러가지 의미로 화제가 되었던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서적 및 구호들이 그랬죠. 지금은 또 MZ세대라는 한국에서만 쓰이며 출처조차도 불분명한 단어로 젊은이들을 멋대로 묶어서 평가하려고 들던데(다만 해외에서 Z세대라는 명칭이 있는 것은 사실), "A라는 문제를 이제부터는 B라고 부르기로 했으니, A라는 문제는 없는 것이다" 같은 기적의 논리를 펼치는 것 같아서 환장할 노릇입니다.

SiteOwner

2023-02-01 21:58:25

충분히 그럴만합니다. 그렇게 해서 책임은 회피가능했고 또한 현실적인 성공은 구가할 수 있었겠지만 결국 따지고 보면 비겁하게 도망가고 그들이 져야 할 책임을 다른 누군가에 떠넘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전과 같은 논리를 구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 정권교체 직후에는 이전 시대의 모순을 잘 주장해도 지금 와서는 그 논리를 견지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그 뒤의 진보정권들이 결국 나아진 게 아무것도 없다고 자인하는 것밖에 안되는 그런 것이지요.


앞으로 더 기막힌 기적의 논리가 나올 것입니다. 아직 여기에서 다 말하기는 힘들겠지만, 적어도 2월 3일에 있을 판결 하나로 그게 표면화될 것입니다. 불공정의 핵심에 있는 자가 어떻게 미화될지. 이제 이틀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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