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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그게 누구인데 그렇게 익숙하게 말하는 거야?”
지온이 그렇게 묻자, 주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연다.
“왜, H반 부반장인데, 좀 지적으로 보이고 예의도 바르게 보이는 애 있지?”
“어... 알지. 이름이...”
“박준후.”
주리의 입에서는 기다렸다는 듯 바로 그 이름이 나온다.
“맞아. 유독 다른 애들 사이에서도 눈에 띄고, 또 첫인상이 그렇게 보이니까.”
지온이 그렇게 주리의 말을 듣고 보니, 다시 생각해 봐도 모범생의 이미지가 준후에게 박혀 있어서 쉬이 떠나지 않는다. 그런 모범생이 이상한 짓을 벌인다는 건 좀처럼 쉽게 생각하기 힘들다.
그런데 또다시 들린다. 그 이상하면서도 선명한 목소리가 말이다.
“도서부같이 지루한 데를 왜 가?”
하지만 그런 선명하고도 기분나쁜 목소리에도, 지온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들으라는 듯, 큰소리로 말한다.
“에이, 뭐 이런 이상한 녀석들이 다 있는 거람.”
지온은 그렇게 혼잣말하며, 이윽고 계단을 올라가 2층에 다다른다. 주리와 헤어진 다음, 몸을 돌려 교실로 들어간다.
그리고 점심시간.
미린고등학교 도서관에 누군가가 들어와서 내부에 꽂혀 있는 책들과 서가들을 둘러보고 있다. 척 보이는 인상은, 중학교 교복을 입은 남학생. 여기에 처음 와 본 아니고, 조금 익숙하다는 듯한 걸음걸이다. 하지만 도서부원은 아니다. 그건 점심시간에도 으레 도서관에 한 명씩은 있는 도서부원들이면 알 수 있다.
“호오, 저 녀석...”
그렇게 중얼거리는 사람은 도서관 입구에 앉아서 책을 보고 있는 도서부장 리하르트다.
“뭘 저렇게 이상하게 서성이는 거야? 딱 봐도 책 보려는 게 아닌데...”
행동거지나 걸음걸이는 확실히 수상해 보인다. 저 회색 머리의 남학생은 말이다. 더군다나 요즘 초능력자가 급증하고, 리하르트 역시 거기에 잘못 엮일 뻔했기에 신경을 안 쓸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제적으로 제압하거나, 아니면 쫓아내거나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쨌거나 도서관에 온 손님이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거나 하지 않은 이상은 돌려보낼 수도 없다. 그저, 그 이상한 걸음걸이를 하고 있는 남학생을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약 10분 정도 뒤, 그 남학생은 다시 도서관을 나선다. 리하르트가 살짝 보기에, 그 남학생은 머리를 흔들고 있다.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서 말이다.
“뭐야, 뭘 했길래 저래...”
리하르트는 궁금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남학생이 있었던 자리로 가 본다. 무슨 장난을 했다거나 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데, 이상한 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지금 서 있는 서가는 그냥 사람들이 많이 다닐 만한, 만화책과 판타지 소설책 등이 죽 꽂혀 있는 곳이다. 이런 데에서 도대체 뭘 했다는 것인가...
“어엇...?”
그때, 리하르트의 귀에 어디에선가 왁자지껄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운동장 쪽인 것 같은데, 보통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소리라면 이렇게 멀리서 소리가 들리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운동장은 도서관을 등진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무슨 스피커 같은 거라도 놓고 간 건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위를 한번 둘러보지만, 역시나 그런 스피커 같은 건 찾아보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다. 아니,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라고 한다면 이 정도로까지 생생하게 소리가 들릴 리가 없다. 이건 마치, ‘소리로 가득 찬 극장’ 안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아닌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람...”
리하르트가 그 서가 한가운데에 섰을 때, 그 이상하게 증폭된 밖의 소리는 더 커진다. 마치, 이번에는 리하르트가 운동장 한가운데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어우, 이건 무슨... 도서관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소음이잖아!”
리하르트가 그렇게 한숨을 쉬고서 그 서가를 벗어나자, 신기하게도 그 소음은 사그라들어, 정상적인 밖에서 들리는 소리의 크기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 서가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다시 조금 전에 서가에 발을 들여놨을 때처럼 바깥의 소리가 증폭된다. 그 서가에서 나온 리하르트는 또 한숨을 내쉰다.
“후... 요즘 장난치는 애들이 많다는 건 알지만... 이런 장난을 쳐 놓으면 어떡하냐...”
그러고 보니 그 남학생의 얼굴을 제대로 못 본 게 마음에 걸린다. 그리고 리하르트의 걱정거리는 또 있다.
“그 서가, 하필이면 만화부 애들이 가장 좋아할 서가인데, 왜 하필 그런 데다가... 에휴!”
그리고 리하르트의 그 푸념을 들은 누군가가 리하르트에게 다가온다.
“어, 형, 왜 그래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세훈을 보자, 리하르트는 잘 왔다는 듯, 그 문제의 서가를 가리킨다.
“혹시... 궁금하면 저기 한번 들어가 볼래?”
“어? 제가요?”
세훈은 반신반의하며 그 서가로 들어가 본다. 잠시 후, 세훈은 머리를 흔들고는 그 서가에서 나온다.
“저기 선배님, 설마 저 서가 안에, 그 ‘보이스북’ 같은 이상한 물건 들어온 거 아니죠?”
“아니야.”
리하르트는 거기서 뭔가 더 말하려다가, 고개를 흔들고는, 다시 입을 연다.
“내가 아까 그 녀석 얼굴이라도 봐 놨어야 하는 건데.”
그리고 그 시간, 미린중학교 운동장이 보이는 분수대의 한 벤치에는 두 사람이 앉아서 무언가를 하고 있고, 그 주위로 구경꾼 몇 명이 모여 있다. 남학생, 여학생 각 한 명씩 앉아 있는데, 남학생은 미소를 짓고 있고 여학생은 울상이다.
“이야, 로빈이 웬일이래? 이런 게임은 한번도 빼놓지 않고 이기더니, 오늘은 졌어?”
주위에 모인 구경꾼들이 한마디씩 한다. 다들 지금 나온 결과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이다. 그 놀라움은, 남학생이 이겼다는 것보다, ‘로빈’이라는 이름의 여학생이 졌다는 것에 더 쏠려 있다. 그리고 그런 구경꾼들의 반응이 못내 재미있었는지, 소리로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아 가며 웃는다.
“히, 히히히... 나대다가 당해 보니까 어떠냐? 꼴 좋네. 그나저나, 다들 이렇게 내 능력에 무릎을 꿇으니까, 다음에는 누구하고 해 보라고 하지?”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그 로빈이라는 여학생이 어지간히 열을 받기라도 한 건지, 그 남학생의 앞에서 확 일어나더니, 이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듯, 큰 소리로 말한다.
“야! 루카스, 다시 해. 아까 그건 내 실력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그래. 다시 하면 내 실력이 100% 발휘될 수 있을 테니!”
“호오, 그래?”
그리고 루카스는, 어느새, 온몸에서 묘한 기운을 발산하고 있다. 마치 이 로빈이라는 여학생 정도라면 얼마라도 다시 이겨 줄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한 자세다. 그리고 로빈의 다음 대답을 유도할 심산으로, 한마디 더 한다.
“해봐. 나하고 하자고. 그러면 확실히 승부를 정할 수 있잖아?”
마침, 그 광경이 근처를 지나가던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인다.
“어, 저 녀석, 루카스잖아?”
“그러니까요, 선배님.”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광경을 보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들은 안젤로와 아이란이다. 두 사람은 한참 열을 올리는 로빈보다도, 음침한 웃음을 지으며 로빈의 반응을 즐기는 루카스에게 시선이 더 간다.
“그런데, 루카스는 무슨 초능력이라도 얻은 건가? 딱히 그런 게 있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데...”
“그러니까요. 설마 저 녀석도, 무슨 물리적인 힘을 가하는 게 아닌, 다른 능력이 있는 건가...”
막 루카스가 로빈의 답을 기다리고, 로빈이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안젤로와 아이란이 그 앞에 끼어든다.
“오, 루카스! 즐거운 점심시간이야.”
“음?”
루카스는 막 분위기를 내려다가 그게 끊겨서 조금 기분이 상하기라도 한 건지, 썩어 버린 것 같은 얼굴을 안젤로에게 내밀며 말한다.
“선배님, 지금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는데, 이렇게 낄 데 안 낄데 가리지도 않고 오면 안 되죠. 안 그래요?”
하지만 그렇게 겉으로 말하는 것과는 달리 루카스의 속내는 따로 있다. 루카스는 지금 안젤로가 끼어 들어온 이 상황이 반갑다. 다름 아닌, 자신의 ‘게임 상대’가 하나 더 생겼기 때문이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서, 루카스는 안젤로를 특정한 반응으로 유도한다.
“선배님, 여기에 온 이상, 제 부탁을 한번 들어주셔야겠는데요.”
“부탁? 무슨 부탁?”
하지만 안젤로도 그냥 순순히 당할 것만은 아니다. 안젤로는 애당초 그냥 지나가려고만 했을 뿐, 루카스와 뭔가 게임을 한다든가 할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너한테 들어 주거나 할 부탁은 없는데. 왜 긁어 부스럼을 만들려고?”
“에이, 선배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하죠. 안 그래요?”
안젤로도 루카스가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한다는 것 정도는 안다. 그래서 넘어가지 않으려고 그냥 자리를 벗어나려고 한다. 하지만...
“엇? 뭐야?”
루카스가, 안젤로를 잡아 버린다. 그것도, 꽤 억센 손힘이다.
“야, 무슨 짓이야? 이거 안 놔?”
“그러니까 하자니까요? 자존심을 걸고 말이죠.”
순간, 안젤로의 표정이 변하려고 하는 것을, 루카스는 놓치지 않는다.
‘좋아, 지금이다! 한다고 하라고! 그러면 내기는 성립되고, 절대로 나한테 이길 수는 없으니까! 한다고 해, 한다고!’
이윽고, 루카스의 바람이 통한 덕분인지, 안젤로의 입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루카스의 바람대로 말이다.
“야, 도서관에 무슨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그게 말이 되냐?”
한편, 그 시간, 미린초등학교 5학년 H반 교실. 수업이 막 시작하려는 떄인데도, 아주 신기한 말을 들은 것 때문인지, 그 소리를 들은 동급생들의 관심이 일순간 그쪽으로 쏠린다.
“도서관은 조용한 곳일 텐데, 거기서 마치 바로 옆에서 경기라도 하듯 소리가 크게 들렸다고? 그게 말이 돼?”
“어... 그러니까 그게 이상하다고 내가 말하는 거잖아! 마치 거기만 장소를 운동장 같은 데로 옮겨 놓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지!”
지금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H반 부반장이자 도서부원 마야. 민도 잘 알고 있다. 이른바 ‘문학 꿈나무’로 소문이 꽤 났다. 벌써 교내 문예지에도 글이 단골로 실리고 있고, 그 덕분에 인근에 사는 주수영 작가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이기도 하다.
“무슨 일이길래 그래?”
민이 마야가 하는 말을 듣고 그쪽으로 다가오자마자, 마야는 그걸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민의 팔을 잡고 옆에 앉힌다.
“너 마침 잘 됐다! 이따가 우리 도서부하고 교류활동 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하려는 말은...”
“이따가 도서관에 그 소리가 나는 곳에 가서 소리 좀 들어 봐달라고?”
“아...”
마야는 뭔가 말하려다가, 바로 말할 수는 없었는지, 한숨만 크게 쉰다. 하지만 민은 벌써 그 마야의 표정만 보고도 귀찮다는 듯 얼굴이 저절로 바뀐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마드리갈
2023-02-28 22:04:25
역시 문제의 인물은 전작에서도 등장한 적이 있었네요.
그리고 그는 모범생같은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빌런이었던 그 박준후네요. 실체가 드러난 이후로 이미 이미지가 크게 손상된 그 박준후가 여전히 뭔가 흉계를 꾸미고 있는 것인지, 참 고약한 재등장이네요. 그리고 토마의 구름 생성이 자취를 감춘 뒤로는 이제 박준후의 소리장난이...정말 평온한 날이 없어요.
이상한 사건이 공연히 일어난 이상 그것에 대한 반응이 전혀 없을 수도 없겠네요. 그리고 그것들은 떠돌면서 계속 살을 붙여가며 눈덩이 굴리듯 커질 것이고, 곤란하네요.
시어하트어택
2023-03-05 20:55:32
미련이 좀 크게 남아 있는 거죠. 무언가를 이루고 싶었는데 이루지 못한 준후로서는 신경질이 날 수도 있는 부분입니다만...
그 소리 능력은, 준후의 능력은 아닙니다. 관련이 없지는 않습니다만.
SiteOwner
2023-03-09 23:41:08
결국 그런 것이었습니까. 전작에도 이미 등장했고, 이미지와는 다르게 빌런이었던 그 박준후가...
그리고, 도서관에 소음이 가득 차게 하다니 정말 저질이군요.
대학생 때가 생각납니다. 대학본부와 도서관 사이에 대형 음향장비를 설치해두고 늘 정치운동을 하던 그 운동권들의 패악. 나중에 정권교체가 되고 나니까 그것에 더해 아침에 열람실 책상 위에 정치선전물을 덮어두고 그러던 그 행태가 일상 중의 하나였는데...
루카스는 타인에게 그의 생각을 입밖에 내도록 유도하는 능력이라도 있는 것인지...확실히 무섭습니다.
시어하트어택
2023-03-18 09:22:56
도서관의 소음의 주범은 따로 있기는 합니다만, 결국에는 연관이 없지는 않죠. 준후의 능력은 생각과는 달리 잘 제어가 된다든가 하는 게 아니라서 말이죠...
오너님이 말씀하신 그 대학생들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