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주제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생활의 영역에서는 약어(略語) 및 약칭(略称)이 많이 쓰입니다. 여러모로 편리한 점이 많다 보니 그 자체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기술분야의 용어인 레이저(Laser)라든지 레이더(Radar) 같은 것들도 축약어인데다 꼭 언어의 영역이 아니더라도 각종 도안으로 이루어진 안내인 픽토그램(Pictogram)이라든지 군인의 정복에 각종 훈장 그대로를 패용하기보다는 약장(略章)을 착용하는 경우처럼 비언어의 영역에서도 약칭은 꽤 있습니다. 그러니 줄이는 자체가 나쁘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하지만, 그러한 약칭이 편의나 경제성을 추구할 의도로 만들어졌다고 하더라도 역효과가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정어휘에 대한 축약에 합의가 없는 경우를 하나 만들어 보겠습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는 음료는 흔히 "아아" 라고 약칭됩니다만, 누군가에게는 이 약칭이 반드시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해당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아마추어 아이돌" 일 수도 있고 "아웃 아님" 일 수도 있습니다. 만일 이것이 사전에 합의되어 있지 않다면 혼선은 필연적이고 그 혼선을 막기 위해서 설명이 필요해집니다. 결국 문제의 "아아" 를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약칭으로 아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을 위해서 약칭을 해설해야 하고 다른 것의 약칭으로 알던 사람도 자신의 입장을 타인에게 설명시켜야 해서 불경제가 발생해 버립니다. 이 시점에서 남은 편의는 없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그냥 말이 더 많고 말겠지만, 그거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야구에서는 스트라이크 아웃 낫아웃(Strikeout not out)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보다 공식적으로는 안 잡힌 3번째 스트라이크(Uncaught third strike)라는 용어로 지칭되는데, 타자가 공을 헛쳐서 스트라이크를 3번 맞더라도 포수가 제대로 그 공을 못 잡았다면 타자는 출루할 수 있게 됩니다. 그 상황에서는 보통 타자를 확실히 아웃시키기 위해서 포수가 놓친 공을 주워서 타자에 태그하면서 그런 상황을 해소시키는데, 만일 누가 그 상황을 "아웃 아님" 이라는 의미로 줄여서 "아아" 라고 말했다고 하면 그 약어가 타당했다고 자신있게 선언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한 상황에서 "못 알아들은 네놈들이 나쁘다!!" 라고 자신있게 일갈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런 문제가 있으니까 말을 막 줄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사실 공식적인 글로서리(Glossary)에 포함된 약어가 아니면 해당분야의 사람들이 아니면 알아듣는다는 전제는 안 하는 게 좋습니다.
한참 전의 일이지만, 직원 중에 이런 사람이 있었습니다.
서류나 자료의 이름을 임의로 3자 내지는 4자로 줄여 말하고 보고하는 직원이 있는데, 하필이면 다른 중요한 그리고 대외유출되면 안되는 자료를 공개발행하는 문서에 포함시키려는 실수를 저질러서 그걸 제가 잡아냈습니다. 자꾸 자의적으로 줄여 부르다가 혼동이 발생할 경우에는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는데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리가 없으니 안심하라고 말했던 그 직원은 제 앞에서 어떠한 변명도 하지 못했습니다.
검수는 상급자인 저의 일이고 결과적으로 업무처리에 악영향은 없었으니 그것으로 된 것이었지만, 직원에게 할 말은 해 둬야 해서 이렇게 말을 건넸습니다.
당시의 대화를 요약하면 대체로 이렇습니다.
"자네, 아이스 아메리카노 좋아하지?"
"예, 아아 좋아하죠."
"그렇군, 나는 커피를 안 마시니 모르겠는데, 그럼 아아는 어떻게 줄일 거지?"
그 직원은 순간 사고가 정지되었는지 놀란 눈으로 저를 수초간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에이, 아아를 어떻게 줄여요. 아아는 아아잖아요."
"야구팀 이름은 한 글자로도 얼마든지 줄이는데? 8글자를 2글자로 줄였는데 2글자를 1글자로 못 줄일 일이 어디 있다고. 그리고 "아아" 라는 말은 다른 분야에서는 다른 의미로도 쓰이는데, 이를테면 용암의 두 종류인 아아 용암과 파호에호에 용암 같은 것."
그 이후 그 직원은 문제의 실수를 더 이상 반복하지 않고 업무를 잘 수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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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대왕고래
2024-03-01 21:31:29
용어 제대로 쓰는 건 중요하죠.
어제도 서류 작성해서 메일 보내고 퇴근했는데, 집에 가서 확인해보니 용어 하나를 잘못 썼다는 걸 깨달았어요. 고생해서 일 다 해놓고 욕 먹게 생긴거죠. 그게 당연한거고요.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라고 하니, 함부로 줄여쓰는 건 좋지 않고, 엔간하면 정확한 명칭을 쓰는 게 맞지 않을까 싶어요.
SiteOwner
2024-03-02 10:05:11
그렇습니다. 용어가 혼란해지면 모든 것이 꼬여 버리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사회는 말과 글을 제대로 바로잡으려 하고, 불순한 목적을 추구하는 자는 용어혼란전술을 쓰기 마련입니다. 그깟 단어 한두개가 뭐 대수냐 싶겠지만 실제로 그 단어 한두개를 잘못 쓰는 바람에 계약이 성사직전에 깨지거나 위증으로 오인받아서 유죄판결을 받거나 하는 사례가 여전히 많습니다.
대왕고래님께서 겪은 사안은 조기에 발견할 수 있어서 천만다행입니다.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