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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지도로 보는 세계 18. 미국본토편

마드리갈, 2024-11-14 01:21:52

조회 수
163



2024년을 맞이하여 시작된 폴리포닉 월드 포럼의 프로젝트인 100년 전 지도로 보는 세계의 열여덟째는 미국본토편으로 결정되었어요. 이번에도 이 지도의 편집에 TheRomangOrc님께서 힘써주셨어요. 이 점에 깊이 감사드리면서 원본 및 편집된 지도를 같이 소개할께요.

원본이 일본어 사용자를 상정한 일본국내의 출판물인만큼 1924년 발행 당시의 일본의 관점을 그대로 보일 수 있도록 원문표현은 가능한 한 충실하게 번역했다는 점을 명시해 드릴께요. 해당 표현에 대해서만큼은 저의 주관이 배제되었으니 그 점을 꼭 염두에 두시길 부탁드려요.

그러면 원본을 소개할께요.
당시 표기방식은 가로쓰기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방식이예요. 게다가 현대일본어가 아닌 터라 한자 및 히라가나의 용법도 현대일본어와는 차이가 여러모로 두드러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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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TheRomangOrc님께서 편집해 주신 한글화 지도를 소개할께요.
손글씨로 표기된 것은 자연관련 사항으로 갈색은 산지, 청색은 수면, 보라색은 도시, 검은색은 기타 특기사항인 반면, 고딕체로 표기된 것은 각 지역의 특이사항이니까 참조해 주시면 좋아요.
원문자에 대해서도 이런 원칙이 있어요. 적색 테두리의 흰 원 내의 검은색 알파벳 원문자는 각 지역의 상황, 그리고 청색 테두리의 검은 원 내의 흰색 번호 원문자는 추가설명이 필요한 각 지역에 대한 표시임에 주목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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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urtesy of TheRomangOrc




여기서는 원칙적으로 미국본토(Conterminous United States)만이 해설대상이 되어요. 1924년 당시에는 이 범위를 벗어나는 북극의 알래스카(Alaska), 태평양의 하와이(Hawaii), 괌(Guam), 사이판(Saipan) 등의 군소도서와 카리브해의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 및 미국령 버진아일랜드(United States Virgin Island) 등의 지역은 영토(領土, Territory)의 지위만 가질 뿐 연방주로서의 지위를 갖지 않고 있으니까 해설대상이 아니예요. 참고로 알래스카와 하와이는 1959년에 연방주로 가입하여 미국의 연방주가 1959년 8월 21일부터 50개가 되었어요. 즉 지도의 발행시점에서 미국은 48개의 연방주와 수도인 워싱턴 컬럼비아특별구(Washington, District of Columbia) 및 이외의 영토로 구성된 상태였어요.

미국은 처음부터 공화국(共和国, Republic)으로 건국된 독특한 국가로, 유럽인들에게 무주지(無主地, Res nullius)나 다름없었던 지역을 유럽 출신자들이 개척했지만 유럽과는 또 다른 문명으로 성장한 특이성이 있고, 또한 건국의 역사는 짧긴 하지만 도시화 및 제도의 역사는 매우 깊어서 18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제도가 20세기는 물론 21세기에도 근간을 거의 유지한 채로 명맥을 이어오는 나라이기도 해요.
한편으로, 당시의 미국은 확실히 세계열강 중의 한 나라였지만 문화적으로는 유럽에 비해서는 확실히 뒤처지는 게 있었어요. 미국 발상의 음악 중 흑인영가(Spiritual Music)는 향유층이 거의 대부분의 미국 흑인들에 한정되어 있었고 기본적으로 종교음악이다 보니 외연에 한계도 있었고,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하기 시작한 새로운 음악인 재즈(Jazz)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을 필두로 유럽에도 소개되기도 했지만 대륙유럽에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게다가 이것 또한 흑인문화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보니 재즈가 유행하고 있기는 했지만 미국사회 전반으로 볼 때는 하위문화(Subculture)였고, 후술하는 뉴올리언즈(New Orleans)에서 탄생한 백인 뮤지션들이 주도한 딕시랜드 재즈(Dixieland Jazz)는 1917년에 최초의 음반이 발표되어 이 시점에서는 아직 10년도 되지 않았어요. 그렇다 보니 유럽에 대한 미국의 문화적 열등감은 꽤 뿌리깊었어요.
참고로, 후일 미국의 문화적 아이콘이 될 인물들이 이미 이 지도의 발행시점에서 살아 있었어요. 미국의 문화적 컴플렉스를 완전히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는 클래식음악 지휘자 및 작곡가인 레너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 1918-1990)은 아직 소년이었고, 미국의 또다른 지휘자 조지 셀(George Szell, 1897-1970)은 당시 독일의 베를린 시립오페라단(Staatsoper Berlin)에서 지휘자로 활동중이긴 했지만 미국에 귀화하는 것은 1939년의 일로 아직 미국인조차 아닌 상태였어요.  
미국 관현악 경음악의 3대장으로 불리는 작곡가들 중 아서 피들러(Arthur Fiedler, 1894-1979)는 당시 미국의 명문 교향악단인 보스턴 교향악단(Boston Symphony Orchestra)의 단원이었는데다 르로이 앤더슨(Leroy Anderson, 1908-1975)은 한참 음악을 공부하고 있던 청소년이었어요. 3대장 중 다른 인물이자 현재 활동중인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 1932년생)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한편, 미술 분야에서는 미국 모더니즘 미술의 어머니로 불리는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1887-1986)가 미국 최대의 도시인 뉴욕에서 활동하면서 특유의 섬세하고 인상적인 자연물 묘사 회화작품을 선보이며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어요. 특히 꽃 관련의 회화작품이 그 시대에 잘 만들어졌고 오늘날에도 미국 각지에 잘 보존되어 있어요.




적색 테두리의 흰 원 내의 검은색 알파벳 원문자 항목은 A에서 Q까지 17개가 있어요.
지도의 서쪽에서 동쪽으로 시선을 옮기시면 편리하게 읽으실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종점은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지대에 걸쳐 있고 16m(=52피트)를 넘는 세계 최대의 조차(潮差)로 유명한 펀디만(Bay of Fundy/영어, Baie de Fundy/프랑스어).
그리고, 이번에는 17편에서 사용했던 서술방식을 차용해 볼께요. 주제별로 묶어서.

일본의 대외관계 방면으로는 이렇게.

A. 캘리포니아 취업자 선생 사진결혼에 즐거워하다 (단, 지금은 금지)
E. 이곳에서 일본배척 분위기가 짙어 일본인을 폭행하고 다니는 일에 고심
J. 복신 빌리켄의 본고장
N. 애교쟁이 큐피 여기서 탄생
Q. 이 도시에서 러시아와 담판을 짓다.

이 당시에 막 폐지된 사진결혼(写真結婚)이라는 특이한 관행이 있었어요. 이 용어는 사진신부(写真花嫁, Picture Bride)라는 다른 용어로도 잘 알려져 있어요. 사실 이것은 1908년에 일본인의 미국 이민이 미국 출국후 재입국이나 가족을 불러오는 이외에 금지되는 일미신사협정(日米紳士協約, Gentlemen's Agreement of 1907)이 체결된 이후 편법적으로 시행된 이민방법. 이미 미국에 가 있는 미혼남성들이 사진을 첨부한 프로필을 일본에 보내면 그 남성들의 약력을 본 미혼여성들이 그것을 보고 결혼을 결심하여 가족으로 인정받고 미국에 도항한다는 방식이었는데 주로 서일본(西日本) 지역 출신자들이 많이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어요. 이렇게 일본인 여성이 2만명 이상,  한국인 여성도 1천명 이상 도항했지만 실상은 전혀 낭만적이지 않았고 남성들의 프로필이 가짜이거나 부풀려졌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어요. 사실 이득을 본 사람들은 그 사진결혼을 중개하여 수수료를 벌어들인 업자들 뿐이었고, 현지에서 도망친 여성들이라든지 그 여성들을 잡기 위해 남성들이 현지의 일본어판 신문 등에 광고를 낸다든지 하는 일도 횡행했어요. 물론 그보다 더한 일도 흔했고, 로스엔젤레스 시내의 일본인 정착촌인 리틀도쿄(Little Tokyo)에서는 그렇게 도항한 사진신부들이 겪는 고충을 위한 상담소까지 개설되었어요.
결국 양국 정부가 움직였어요. 우선 일본에서 1920년에 "여권발급은 부부가 동반할 경우에 한정한다" 라는 조치를 내려 사실상 폐지한데다 미국에서는 1922년에 일본인의 미국귀화를 금지학고 1924년에 이민법(Immigration Act of 1924)을 개정하여 일본인을 비롯한 모든 아시아인 이민을 전면금지했어요. 이것을 일본에서는 배일이민법(排日移民法)이라고도 부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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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칼럼 옐로우 페릴(황화론), 호세이대학 국제문화학부 스즈키 야스시 연구실 웹사이트, 일본어)

미국 서부에서의 일본인 배척은 흔히 황색공포(Yellow Peril) 내지는 황화론으로 불리는 현상으로 이것은 서구사회가 공통적으로 품은 동양인 혐오의 한 단면이자 미국 개척시대 때에 유입된 중국인들이 여러 일자리를 차지하며 생기면서 심화된 현상이었어요. 1882년에는 중국인배제법(Chinese Exclusion Act)이 통과되어 더 이상 중국인 노동자를 구하지 못하게 되자 대안으로서 일본인 노동자들을 받아들여 기피업종에 종사시켰는데 일본인 인구가 급증하자 미국은 물론 캐나다에서도 일본인의 경제적 및 사회적 지위향상을 방해하기 위한 아시아인배제연맹(Asiatic Exclusion League)이 1905년부터 결성되어 일본인들의 활동을 방해하고 1906년에는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일본인 아동은 백인과 함께 학교를 다녀서는 안된다고 법제화하기도 했어요. 결국 이듬해인 1907년에는 태평양안 인종폭동이 발생하여 캐나다의 밴쿠버(Vancouver)에서는 중국인들이,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일본인들이 린치의 타겟이 되었어요.
게다가 1913년에 제정된 캘리포니아 외국인토지법(California Alien Land Law of 1913)은 일본인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게 법제화하는 제도였고, 태평양안의 다른 주인 오리건주(State of Oregon) 및 워싱턴주(State of Washington)에서도 차차 채택되었어요. 이 법률은 1952년에야 위헌판정을 받고 4년 뒤인 1956년에 폐지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어요.

일본 제2의 도시 오사카(大阪)의 명물인 빌리켄(Billiken)의 본고장은 의외로 미국으로, 미주리주 캔자스시티(Kansas City)의 교사 겸 화가인 플로렌스 프레츠(Florence Pretz, 1885-1969)가 꿈에서 본 신비한 존재를 형상화하여 블리스 카먼(Bliss Carman, 1861-1929)의 시에서 그 이름을 따와서 1908년에 의장등록했다고 알려져 있어요. 이 빌리켄은 세인트루이스대학(Saint Louis University) 및 세인트루이스고등학교(Saint Louis High School)의 공식 마스코트. 
여기서 잠깐 교통정리를. 캔자스시티라고 불리는 도시는 미주리주의 것과 캔자스주(State of Kansas)의 것이 따로 있고 인접해 있어요. 규모는 미주리주의 것이 더 크지만 주도의 지위를 지닌 것은 캔자스주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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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The Billiken Doll’s Racist History, 2022년 2월 17일 The Strong National Museum of Play 기사, 영어

일본에 빌리켄이 전래된 것은 1909년의 일인데, 여기에는 원작자인 프레츠가 쟈포네스크(Japonesque) 성향이 있어서 일본의 복식을 좋아한다든지 전생이 일본인이었다든지 하고 진술한 등의 사정이 있어요. 그리고 1911년에 현재의 타무라코마(田村駒)의 전신인 칸다야타무라상점(神田屋田村商店)이라는 섬유상사가 상표권을 취득하여 빌리켄 상품을 발매하였고 공전의 히트를 쳤어요.
현재 오사카에 있는 빌리켄 조형물은 3대째의 것으로 초대는 1912년에 설치되었지만 1923년에 행방불명되었고, 2대째는 1949년에 제작되어 1979년 오사카 통천각에 통천각 만남의 광장(通天閣ふれあい広場)이 조성된 1979년부터 2012년까지 전시되었고, 지금의 것은 2012년 통천각 100주년을 기념하여 새로이 만들어진 것으로 2대째보다 더욱 커졌음은 물론 내부에 금으로 제작된 작은 빌리켄을 품고도 있어요.

빌리켄에 대해서는 후일담이 있어요. 
첫째는 씁쓸한 이야기. 프레츠가 계약상 문제로 월 30달러(=현재가치 956달러)의 저작권료를 받지 못하게 되자 상품이 잘 팔렸는데도 불구하고 프레츠 본인이 크게 실망하여 1909년말쯤에는 빌리켄은 꼴도 보기 싫어졌다고 토로하는 등 "원작자 빼고 모두가 행복해졌다" 라는 기사까지 나왔어요.
둘째는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 1859-1919). 빌리켄과 닮았다고 해서 빌리켄재상(ビリケン宰相)이라는 별명이 붙은 그는 제7대 육군대신, 제3대 한국통감, 초대 조선총독, 제18대 내각총리대신 및 제19대 대장대신 등을 역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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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테라우치 마사타케, 근대일본인의 초상 웹사이트, 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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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Rose O'Neill Kewpie" Exhibition, TOKYO ART BEAT 웹사이트, 영어

애교쟁이 큐피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아기 모양의 인형인 큐피(キューピー, Kewpie) 또한 본고장은 미국으로, 화가이자 미국 최초의 여성 만확가이기도 한 로즈 오닐(Rose O'Neill, 1874-1944)이 1903년부터 발표한 큐피드(Cupid)를 모티브로 한 유아체형의 캐릭터. 큐피는 작가 본인이 비공식적으로 부르다가 1909년에 여성지 레이디스홈저널(Ladies' Home Journal)에 기고한 기사 및 일러스트에서 그 이름이 공식화된 것이었어요. 이 캐리터는 1913년에 의장등록된 이후 전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지만 정작 1912년부터 제조된 실물 인형은 독일에서 제작된 비스크돌(Bisque Doll). 당시에 독일 마르크화가 약세였다 보니 미국내보다는 독일내에서 제조하는 게 더욱 싼 값에 제공가능해서였어요. 
그리고 이 큐피는 원작자의 요청으로 1913년에 일본에서도 제조되기 시작하여 전세계로 판매되었고, 이후 1919년에 일본에서 설립된 식품회사 나카지마토상점(中島董商店)이 1922년에 상표권을 취득하여 카타카나 표기가 미묘히 다른 큐피(キユーピー)라는 브랜드를 내세워 일본 최초의 마요네즈 제조사를 세웠고 그 회사가 1957년에 큐피 주식회사로 개명한 데 이어 2010년에는 사명의 영어명칭도 Kewpie Corporation으로 변경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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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Rose O'Neill: Kewpies and Monsters, 2020년 10월 21일 Gurney Journal 기사, 영어

큐피의 인기는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어요.
독일의 유태인 소녀 안네 프랑크(Anne Frank, 1929-1945)가 남긴 "안네의 일기" 에서는 나치독일의 유태인탄압을 피해 숨어 지내던 초기인 1942년 12월 5일에 큐피 인형을 선물받았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어요. 또한 1958년에는 미국에서 큐피돌(Kewpie Doll)이라는 노래가 대유행했어요. 특히 유명한 것이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 1915-1998)와 쌍벽을 이룬 거물 엔터테이너인 페리 코모(Perry Como, 1912-2001)가 부른 것.


그런데 큐피가 앞서 언급한 빌리켄과 혼동되는 일이 있는가 보네요. 미국의 두 여성화가가 각각 창안했다는 이외에는 접점이 없지만...

1905년의 포츠머스 강화조약(Treaty of Portsmouth)은 일본을 극동의 변방에서 세계의 열강으로 변모시킨 세기의 대사건이었어요.
1904년에 발발하여 1905년에 일본이 승리한 러일전쟁(日露戦争, Russo-Japanese War)은 전통의 열강이었던 제정러시아의 몰락에 대한 공개선언이자 일본이 아시아 유일의 강대국으로서 서구열강과 비견될 수 있게 지위가 급상승한 계기였어요. 
이 강화조약의 체결지는 후술하는 뉴햄프셔주 포츠머스에 인접한 메인주(State of Maine) 소재의 포츠머스 해군공작창(Portsmouth Naval Shipyard). 1800년 이래 운영중이고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된 이 보안구역의 제86동 건물에서 1905년 8월 9일에서 8월 30일까지 12차례에 걸쳐 협상이 진행되었어요. 8차 세션까지 합의된 사항이 정전, 일본의 한국에 대한 권리 인정, 만주에서의 러시아군 철수, 여순(旅順) 및 대련(大連)의 일본으로의 조차, 남만주철도(南満州鉄道)의 일본으로의 할양 및 채굴권 확보 및 러시아의 동청철도(東清鉄道) 권리보유였어요. 그 이후의 상황은 교착상태였지만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 당시 대통령의 제안으로 카라후토(樺太, 사할린(Сахалин))의 분할안이 나왔지만 당시 제정러시아의 특명전권대사인 세르게이 비테(Сергей Витте, 1849-1915)가 일본이 카라후토 남부를 할양받되 금전배상은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일본의 특명전권대사인 코무라 쥬타로(小村壽太郎, 1855-1911)가 반대했지만 비테가 일본이 전쟁을 재개할 여력이 없음을 알고 회담장을 나가려고 했어요. 결국 코무라는 그런 비테의 행동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카라후토 남부를 취득하되 금전배상을 포기하는 방식으로 타협하여 이렇게 마지막 세션까지 모두 종료되었어요. 이것이 당시에 포츠머스 드라마(The Portsmouth Drama)라고 대대적으로 기념되어 엽서가 발행되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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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이 포츠머스 강화조약은 1905년 9월 5일에 조인되어 일본에서는 같은 해 10월 10일에, 제정러시아에서는 같은 해 10월 14일에 비준되었어요. 그리고 루즈벨트 대통령은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06년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미국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기록되었어요.
그런데 사실 이 강화조약 이전에는 그 유명한 태프트-카츠라협정(Taft-Katsura Agreement)이라는 것이 있었어요. 1905년 7월 27일에 당시 미국 전쟁장관이었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1857-1930)와 일본 내각총리대신 카츠라 타로(桂太郎, 1848-1913)가 미국의 필리핀 지배 및 일본의 한국 지배를 교차승인하기로 합의한 이 협정은 비밀이 아니었음에도 1924년까지 어떤 학자들도 그 협정의 존재를 알지 못하다가 미국의 역사학자 타일러 데넷(Tyler Dennett, 1883-1949)이 처음으로 발견했어요.

그렇게 정리된 20세기 태동기의 동북아시아 상황은 이 지도로 손쉽게 파악가능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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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August 29, Tuesday: Peace, Portsmouth Peace Treaty, 1905-2005Japan-America Society of New Hampshire 웹사이트, 영어


세계의 신흥열강에서 제일의 강대국으로 그 입지를 다져가는 미국 사회의 발전상은 이렇게 묶어봤어요.

B. 세계최대의 무선전신국. 일본의 이와키무선국과 마주본다.
C. 일본 출발 9일째에 빨리도 도착.
G. 활동사진의 본고장
H. 석유가 솟아나온다
M. 쇠고기의 본고장. 버터도 많이 생산된다.
P. 자유의 여신상이 높이 솟아 마천루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다. 그야말로 긍지가 높도다.

지도의 발행시점 당시의 최신기술, 산업동향 및 도시의 발전상황은 오늘날의 것에 비하면 별것 아니게 보일 수도 있지만, 이미 현대문명의 근간이 1세기 전에 다 잡혔다는 것이 읽히니 놀라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어요. 이미 실시간 통신이 가능했고, 대양을 건너는 정기교통편이 실용화된 것은 물론 영상물, 석유, 기업화된 낙농업 등은 오늘날에도 현대상활의 근간 그 자체인데다 고층건물들이 도시화의 상징인 것도 이미 이 시대에도 실현중인 사안이었다는 것이죠.

20세기의 여명기에 샌프란시스코에 해안무선전신국이 개설되어 하와이로도 무선전신을 보낼 수 있을만큼 기술이 발전했지만 1906년의 대지진 및 화재로 그 무선국도 다른 곳으로 이전하였고, 1920년대에는 새로이 지어진 아르데코 스타일의 건물에 입주했어요. 그리고 1923년 9월 1일, 이미 2편에서 언급된 칸토대지진(関東大震災) 속보를 발신한 일본 이와키무선국의 전신을 받아 미국 전토에 그 뉴스를 알릴 수 있게 되었어요.

도쿄-샌프란시스코 항로의 거리는 길게 잡아서 대략 9,000km(=5,593마일/4,860해리) 정도. 이 거리를 216시간에 주파한다면 여객선의 표정속도는 41.67km/h(=25.89mph/22.50노트) 정도가 되어요. 이게 뭐가 대단한가 싶겠지만, 오늘날의 여객선은 경제성을 중요시하다 보니 순항속도가 20노트 정도. 사실 이 시대의 여객선의 순항속도는 지금의 것보다 더 빨라서 30노트 수준의 것이 일반적이었어요. 즉 지금의 군함 정도로 빨랐어요. 사실 출항과 입항을 자정에 하는 것도 아니고 주간에 실시하니까 실제로 여객선이 연속으로 항해중인 시간은 192시간 정도이고 이 경우 여객선의 표정속도는 46.875km/h(=29.13mph/25.31노트) 정도. 영국에서 발명된 새로운 선박추진기관인 증기터빈(Steam Turbine)이 이미 이 시기에는 대양을 항해하는 대형선박의 대세로 정착한데다 연료 또한 석탄(石炭, Coal)에서 중유(重油, Heavy Fuel Oil)로 대체되면서 출력도 효율도 비약적으로 향상되어 이렇게 고속순항이 가능해진 것이었어요. 참고로 이 속도는 영국의 큐나드(Cunard) 소속 여객선인 1906년에 취역한 모리타니아(RMS Mauretania)의 대서양횡단 서항 최속기록인 1909년의 26.06노트 및 동항 최속기록인 1924년의 26.25노트에 버금가는 것으로, 당시 일본과 미국을 오가는 정기여객선이 얼마나 빠른 것이었는지를 실감하게 해 주는 지표이기도 해요.

당시 도쿄-샌프란시스코 항로에 사용되었던 화객선의 사진이 남아 있어요. 1920년에 미국에서 만들어진 이 수송선은 울버린 스테이트(SS Wolverine State), 프레지던트 해리스(SS President Harrison) 등의 이름으로 미국의 해운회사에서 운용되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개전하자 일본에 나포되어 카치도키마루(勝鬨丸)로 개칭되어 운용된 끝에 1944년 9월 12일에 미군의 어뢰에 격침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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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해운이나 항공에서는 왜 거리를 해리(海里, Nautical Mile)로 나타내고 속도를 노트(Knot)로 나타내는 것일까요? 잠깐 짚고 넘어갈께요.
구형(球形)인 지구 표면의 거리는 방위각으로 표시하면 상당히 간단하게 나타낼 수 있어요. 그렇게 적도반지름의 1도의 1/60인 1분(=1,852m)을 1해리로 정하고 그 거리를 1시간에 이동하면 1노트로 표현하는 식으로 정의하면, 지도상에서 자신의 위치와 이동상태를 파악하는 데에 가장 능률적이예요. 그래서 해운에서, 그리고 나아가서 항공에서도 이렇게 해리와 노트가 기본적으로 쓰이고 있어요. 

영화를 지칭하는 말인 활동사진(活動写真, Motion Picture)이라는 말이 상당히 낡아보이긴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만도 않아요. 영화에 대한 영어표현 중 무비(Movie)는 활동사진 중 "활동" 에 중점을 둔 약어이고, 오늘날의 영화제작사의 이름에는 픽쳐스(Pictures)라는 표현이 여전히 쓰인다는 점에서 "사진" 이 살아 있다는 것만 봐도 예의 용어가 결코 사어(死語)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해져요. 
특히 미국 영화산업 하면 서부 최대도시인 로스엔젤레스(Los Angeles)의 헐리우드(Hollywood)가 대표적이죠. 반면 동부 최대도시인 뉴욕(New York)은 브로드웨이(Broadway)로 상징되는 대중적인 음악연극인 뮤지컬(Musical)의 본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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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Raising the Curtain: Hollywood and American Politics, 1920-60, 2020년 11월 29일 Retrospect Journal. 기사, 영어

미국은 세계적인 산유국으로도 명성이 높은데다 우물을 파듯이 굴착하지 않고 드릴로 석유층을 파들어가는 현대식 유정(油井, Oil Well)으로 상업생산을 이루어낸 나라이기도 해요. 그리고 그 역사는 1859년에 발명가 에드윈 드레이크(Edwin Drake, 1819-1880)가 펜실베이니아주 체리트리타운쉽(Cherrytree Township, Pennsylvania)에서 미국 최초로 현대식 유정으로 상업적 석유생산에 성공한 것에서 유래하고 있어요.
석유 생산이 가능한 지역은 여럿 있지만, 특히 석유가 집중된 곳이 텍사스(Texas) 및 뉴멕시코(New Mexico)의 두 주에 걸친 페름기분지(Permian Basin). 1920년에 발견되기 시작하여 지금도 매일 420만 배럴(=572,987톤) 이상의 고품질의 경질원유를 생산해 내고 있는 미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명성이 높은 유전이기도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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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20th Century Lumber and Oil Boom Companies, TEXASHISTORY.com 웹사이트, 영어

미국의 석유산업 하면 역시 "록펠러" 라는 통칭으로 잘 알려진 석유왕 존 데이비드슨 라커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1937)도 빼놓을 수 없어요. 그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세계사 최강의 성공적인 사업가이자 부자로 한때 미국의 국내총생산(Gross Domestic Product, GDP)의 3% 정도를 차지했다고도 알려져 있을 정도로 자수성가의 신화를 실현시킨 인물인 동시에, 이 지도의 발행시점인 1924년에는 이미 85세였고 결국 97세까지 장수하는 것은 물론 자손도 많았고 현재도 미국의 명문가 중의 하나로 자리잡은 등 가정사적으로도 매우 유복한 결말을 이루어낼 수 있었어요. 그뿐만이 아니라 설립 직후 파산위기에 몰렸던 시카고대학(Chicago University)을 인수하여 세계적인 명문대학으로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설립한 록펠러대학(Rockefeller University) 또한 28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명문대이자 여성이 과학분야에 많이 진출할 수 있게 플랫폼을 조성하는 대학으로도 성장했어요. 그러나 그가 1882년에 세웠던 석유회사 스탠다드오일컴퍼니(Standard Oil Company)는 반독점(Anti-trust) 규제의 대상으로 지목되어 1911년에 해산되어 39개의 회사로 쪼개졌어요. 그 대표적인 후계회사들이 엑손모빌(ExxonMobile), 셰브론(Chevron), 사우디아람코(Saudi Aramco), 마라톤오일(Marathon Oil) 및 코노코코필립스(ConocoPhillips) 등. 또한 1913-1914년에 걸친 콜로라도주 각지의 여러 탄광에서 벌어진 콜로라도탄광전쟁(Colorado Coalfield War)에서 주방위군이 노조원들을 기관총으로 학살한 1914년 루들로 학살(Ludlow Massacre)에 대해서도 탄광의 소유자인 록펠러 가문의 책임에 대한 공방이 있었던 등의 어두운 단면도 여전히 있어요. 참고로 그 루들로 학살의 마지막 생존자로 당시 시위현장에서 발생한 기관총사격을 피해 어머니의 품에 안긴 채로 탈출했던 당시 생후 3개월의 아기였던 어미니아 마리 패딜라 데일리(Ermenia "Marie" Padilla Daley, 1914-2019)는 2019년에 105세로 타계했어요.

미국은 기업형 농업으로도 유명한 나라. 그리고 세계 주요국가 중 본토에서만 식량자급이 확실히 되고 수출조차 가능한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아요. 게다가 미국은 이미 19세기 전반에 거대한 빵바구니(Great Breadbasket)으로 불렸을만큼 평원을 대규모로 개간하여 농업과 목축업을 발달시켜 인구부양력을 극적으로 끌어올렸어요. 카우보이(Cowboy)로 통칭되는, 말을 타고 다니며 목축업에 종사하는 남성들의 강건한 이미지는 특히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 유역 등지에서 형성되었어요. 그리고 냉장 및 냉동기술의 발달로 미국의 쇠고기와 버터는 전세계로 수출되었어요. 물론 그 이전에 미국산 밀가루가 일본에 수출되면서 일본에서 고급 밀가루의 상징으로서 "미국의 가루" 라는 의미의 메리켄코(メリケン粉)라는 말이 대유행하기도 했지만요(동 관련으로 몇 가지 참조).

그런데 저 지도의 작성자들은 자유의 여신상을 직접적으로든 사진이나 영상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도 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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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tue of Liberty, World Atlas 웹사이트, 영어


스포츠 관련으로는 이렇게.

D. 야구는 국민스포츠
K. 야구 다음으로 테니스가 유행
L. 쿠마가이 이치야 명성을 떨치다.
O. 권투가 인기있음

미국은 스포츠의 나라. 그런데 1924년의 스포츠 선호경향은 2024년과는 사뭇 다른 점이 많아요.
현재는 미국 발상의 미식축구(American Football), 농구(Basketball) 및 야구(Baseball)가 인기있는 스포츠이고 최근에는 유럽 및 남미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축구(Soccer)도 인기있지만 1세기 전에는 야구가 부동의 국민스포츠의 위상을 지녔고 그 다음으로 테니스(Tennis)가 인기를 구가했어요. 테니스의 4대 대회인 전미, 전영, 전불 및 전호주 대회를 한 선수가 모두 석권한 경우를 오늘날에도 그랜드슬램(Grand Slam)으로 부르는 것에서도 미국에서의 테니스 붐을 추측할 수 있기는 해요.
1885년경에 로드아일랜드주(State of Rhode Islands)의 뉴포트(Newport)에서 촬영된 사진에서도 테니스의 인기가 엿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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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Tennis in Newport: 1880 – 1920Redwood Library 웹사이트, 영어

야구는 미국 발상의 스포츠 중 미식축구 다음으로 미국 밖에서의 인기가 적은 것이기도 해요.
사실 프로야구리그가 있는 국가 자체가 많지 않아요. 북미에서는 미국과 캐나다, 남미에서는 콜롬비아, 도미니카공화국 등, 아시아에서는 일본, 한국, 호주, 대만 정도. 그래도 미식축구 프로리그는 북미를 벗어나면 그 존재조차 의심스러운 수준이니 그것보다는 더욱 많이 보급되어 있기도 해요. 그리고 그 중에서도 야구의 본고장 미국을 대표하는 야구는 역시 메이저리그야구(Major League Baseball, MLB)로 그 역사는 1876년에 창설된 내셔널리그(National League, NL)로까지 소급되고 그 라이벌 격인 아메리칸리그(American League, AL)는 20세기가 시작한 해인 1901년에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라이벌로 정착한 게 1903년부터였으니 이 지도의 제작시점에서는 메이저리그의 본격적인 역사는 21년이라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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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Babe Ruth Smashing 1920 Poster, Photos.com 웹사이트, 영어

그리고 이 시대는 1900년에서 1919년까지 이어졌던 데드볼시대(Dead-ball Era)가 종식되고 나서 라이브볼시대(Live-ball Era)가 열려 인기가 급상승하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어요. 데드볼시대에는 점수를 내기가 지극히 어렵고 경기는 투수가 지배하는 그런 식이었는데다 투수가 공에 별별 이상한 짓을 많이 해서 마구(魔球)가 가능하기도 했어요. 이를테면 공에다 침을 바르는 스핏볼(Spitball)이라든지, 사포나 칼 등으로 표면을 손상시킨다든지 하는 일도 횡행했어요. 이것도 모자라서 1918년에는 시카고 화이트삭스(Chicago White Sox)와 신시내티 레즈(Cincinnati Reds)가 대전한 1919년 월드시리즈(World Series)에서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선수 8명이 상대팀에게 고의로 져 줄 것을 약속하고 금품을 수수하는 방식으로 조직적으로 승부조작을 저지른 블랙삭스 스캔들(Black Sox Scandal)이 발각되어 가담한 선수 전원이 메이저리그에서 영구추방되었어요. 그 조치는 그들이 무죄판결을 받은 이후에도 8명 중 마지막 생존자였던 스위드 리스버그(Swede Risberg, 1894-1975)가 타계한 이후에도 지속중이예요. 그리고, 데드볼시대는 1920년에 규정이 바뀌면서 급격히 끝나 버렸고 그 해에 뉴욕양키스(New York Yankees)로 이적한 베이브 루스(Babe Ruth, 1895-1948)가 단일시즌 54홈런이라는 대기록을 세우는 한편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즈(St. Louis Browns, 현재의 볼티모어 오리올즈(Baltimore Orioles))의 조지 시슬러(George Sisler, 1893-1973)가 타율 .407 및 257안타를 기록하는 등 여러모로 환골탈태하는 모습이 나왔어요. 반면 단일시즌 30승 투수는 데드볼시대의 마지막 해인 1919년에는 8명이었지만 그 이후 1921년에는 3명으로 급감했어요.

또한 이 시대에 미국에서 활약하여 큰 인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이기도 한 쿠마가이 이치야(熊谷一弥, 1890-1968)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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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영광과 드라마가 태어나다 케이오의숙과 올림픽, 2016년 7월 7일 케이오타임즈 기사, 일본어)

당시 미국에서 이치야 쿠마가에(Ichiya Kumagae)로 잘 알려진 그는 케이오의숙대학(慶應義塾大学)에 입학해서 테니스를 접했지만 당시에는 테니스 기자재의 자급이 곤란한 일본의 사정상 장난감용 고무공을 사용했던 연식테니스가 널리 보급된 실정이었어요. 그러다가 1913년에 케이오의숙대학 정구부에서 본격적인 경식테니스로의 전환을 선언한 뒤에 일본 최초로 본격적인 경식테니스를 접해서 그 해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동양대회선수권(東洋選手権大会)에 진출하여 일본인 테니스선수로는 첫 해외경기를 경험했지만 단식 및 복식 결승전에서는 전미 2위의 빌 존스턴(Bill Johnston, 1894-1946)에 지고 말았어요. 그 이후 쿠마가이의 도전은 1915년 중국 상해(上海)에서 단식 및 복식 우승, 1916년 마닐라에서 단식 우승 및 복식 준우승, 1916년 미국 진출 후 과거 그를 결승전에서 패배시킨 존스턴에의 설욕 성공 등으로 신화를 만들어 결국 그 해의 전미선수권에서 쿠마가이 및 같이 출전한 미카미 하치시로(三神八四郎, 1887-1919)와 같이 세계 4대대회에 모두 출전할 수 있었음은 물론 쿠마가이가 전미 5위까지 랭킹을 올리는 등 놀라운 실적으로 전세계를 놀라게 했어요. 이후 대학졸업 후 미츠비시재벌(三菱財閥) 산하의 미츠비시합자회사은행부(三菱合資会社銀行部)에 취업하여 미국 뉴욕 주재원으로서 미국 생활을 시작한 그넌 1919년에 전미랭킹 3위를 기록함은 물론 1920년 벨기에 앤트워프 올림픽에서는 단식 및 복식경기에서 모두 은메달을 획득하여 일본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되었어요. 이후 일본인 선수가 다시 테니스에서 올림픽 메달을 따게 된 것은 96년 뒤의 니시코리 케이(錦織圭, 1989년)가 브라질 리오데자네이로(Rio de Janeiro) 대회에서 은메달을 딴 것인데, 쿠마가이도 니시코리도 모두 왼손잡이라는 게 상당히 인상적이예요.
이 쿠마가이 이치야가 미국을 다시 찾은 것은 1951년. 그때는 지도자로서였어요. 비록 그가 이끈 팀은 전패했지만, 미국의 언론에서는 그가 미국에 돌아온 것을 기억하고 대서특필하기도 했어요.

미국은 권투(Boxing)의 나라이기도 해요. 실제로 유명 권투선수에 미국인도 많은데다 프로페셔널 복싱의 세계적인 4대조직 중 가장 역사가 오랜 세계복싱협회(World Boxing Association, WBA)는 1921년에 미국에서 결성되었고 현재는 파나마에 있어요. 이후에 결성된 세계복싱평의회(World Boxing Council, WBC)는 1963년에 멕시코에서, 국제복싱연맹(International Boxing Federation, IBF)은 1983년 미국에서, 세계복싱기구(World Boxing Organization, WBO)는 1988년 미국령 푸에르토리코에서 결성되어 있는 등 WBC를 제외하면 모두 미국에서 창설되었는데다 WBC의 창립멤버에 미국이 들어가 있다 보니 역시 미국의 스포츠에서 권투가 차지하는 비중 또한 굉장할 수밖에 없어요. 게다가 기자재가 많이 필요하지 않다 보니 진입장벽도 그리 높지 않은 이점도 있어요.
미국에서는 여러모로 권투가 대중적이었는데다 심지어 여성도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권투를 하는 경우가 꽤 있었다고 알려져 있어요. 기록상으로 나타난 최초의 여성 권투경기가 1888년에 뉴욕에 있었다고. 이 해에 아마추어 선수연합(Amateur Athletic Union)이 결성되어 권투 선수권대회도 열렸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권투는 인기스포츠였다는 게 분명해져요. 단 프로페셔널 복싱은 1920년에야 허용되어 스포츠 사업가 텍스 리카드(Tex Rickard, 1870-1929)가 복싱 프로모터로서 대활약했고 1923년에는 뉴욕에 매드슨 스퀘어 가든(Madison Square Garden)이라는 전설의 권투경기장 및 같은 이름의 스포츠 매니지먼트 회사를 설립하여 흥행에 성공했고, 특히 잭 뎀프시(Jack Dempsey, 1895-1983)가 1920년대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부상하였는데다 프로페셔널 복서로서는 세계최초로 당시 10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어요. 1924년의 100만 달러는 오늘날로는 1846만 달러(=257억원) 정도 되는 거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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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is Day: Jack Dempsey bankrupted a town, 2019년 7월 4일 BOXING NEWS 기사, 영어


미국의 이상한 습속에 대해서는 이렇게 모아볼 수 있겠어요.

F. 모르몬교의 본산 일부다처제로 자녀들이 많이 늘어난다
I. 술은 절대로 허용못해 주당은 말이 없다

미국의 연방주 중 유타(Utah)는 미국본토 내에서 모종의 종교해방구같은 역할을 했고, 모르몬교(Mormonism)가 절대적으로 우세한데다 일부다처제가 횡행해 있었어요. 하지만 1896년에는 중혼(重婚, Polygamy)을 전격 폐지하고 나서 1896년에 미국의 45번째 연방주로 가입할 수 있었어요. 즉 이 지도의 발행시점인 1924년 당시에는 이미 중혼이 폐지된 지 28년이 지났지만, 행정력이 주내의 어디에나 골고루 닿는 것은 아니라서 벽지의 촌락에서는 여전히 일부다처제가 유지되는 곳도 있었어요. 당시 사람들의 눈에도 중혼은 여전히 기괴함 그 자체로 여겨지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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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의 무리가 그려진 것은 유타주가 양계산업의 주요거점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예요. 수탉이 1마리이고 다른 닭들이 암탉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 바로 일부다처제를 보여주는 것. 실제로 닭을 자연교배시키는 방식으로 수탉 1마리에 암컷 여러마리를 할당하는 단웅교배(単雄交配)라는 방식도 암탉 무리에 수탉을 복수로 집어넣는 군웅교배(群雄交配)라는 방식도 있어요. 예의 일러스트는 단웅교배의 방식으로 일부다처제와 일치해요.

이 시기의 미국의 가장 기괴한 습속은 술을 완전히 사회에서 배제하자는 취지로 법제화된 금주법(禁酒法, Prohibition). 당연히 성공적이지 못했는데다 사회기풍을 바로잡는다는 고결한 이상 뒤에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적국 독일에 대한 복수의 의미를 담아 양조업에 많이 종사하던 독일계 이주민 사회를 붕괴시키는 인종차별의 함의가 담겨 있었고, 상류층은 금주법을 전혀 지키지 않아 영해 밖에서 내지는 아예 비행기를 타고 쿠바 등지의 가까운 외국에서 주연(酒宴)을 즐기고 돌아오는 등 위선의 극치를 달렸어요. 이 금주법은 이 지도의 발행시점에서 9년이 지난 1933년에, 처음부터 시작하지도 않은 것보다 더 못한 부작용만을 잔뜩 남가고 나서야 겨우 폐지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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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hundred years ago today, Prohibition began, 2020년 1월 17일 CNN 기사, 영어

본문에는 오늘날에 잘 쓰이지 않는 좌당(左党, 일본어 발음 사토)이라는 표현이 나와요. 이것은 주당을 뜻하는 당시의 용어로,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은 좌당과 반대쪽인 우당(右党, 일본어 발음 우토)으로 쓰는 경우가 있어요. 오늘날에는 전자의 경우를 죠고(上戸), 후자의 경우를 게코(下戸)로 부르는 방식이 일반적이죠. 특히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을 가리킬 때 자칭이든 타칭이든 "게코" 라는 말을 쓰는 것은 아주 흔한 용례. 테레비도쿄(テレビ東京)의 인기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孤独のグルメ)의 주인공 이노가시라 고로(井之頭五郎) 또한, 식당에서 점주나 종업원에게 자신을 "게코" 라고 말하면 듣는 사람들이 그렇게 안 보인다고 놀라는 장면이 자주 나오고 있기도 해요.




청색 테두리의 검은 원 내의 흰색 번호 원문자 항목은 1부터 15까지 15개가 있어요.
이것은 미국의 동부해안, 플로리다반도 및 남부해안을 따라 읽다가 미시시피강에서 오대호로, 그리고 록키산맥을 넘어 태평양 연안을 남북으로 종단한다는 감각으로 읽어 가시면 이해하기 쉬워요.

1. 포츠머스
뉴햄프셔주(State of New Hampshire)의 소도시 포츠머스(Portsmouth)는 인구 2만을 겨우 넘는 소도시이자 1800년 설립 이래 지금도 운영중인 포츠머스 해군공작창이 인접해 있어요. 영국의 해군장교이자 식민지개척자인 존 메이슨(John Mason, 1586-1635)이 영국 햄프셔의 포츠머스의 이름을 따서 이 곳에 붙인 것이 지금의 지명의 유래가 되어 있어요.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도시는 미국 독립후 영국 및 캐나다와의 무역을 방해하기 위한 거점으로도 이용되었는데다 1812년의 미영전쟁에서는 사략선(私略船, Privateer)의 거점이 되는 등 영국에 대한 최전선이 되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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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smouth, New Hampshire, World Atlas 웹사이트, 영어

산업혁명의 수혜자가 되고 한때 미국 최고의 조선업거점이었던 이 도시가 이렇게 지도에 수록된 이유는 그뿐만은 아니예요. 사실 여기는 앞에서도 언급했듯 일본이 제정러시아에 대승을 거둔 러일전쟁의 종결을 규정한 1905년의 포츠머스 강화조약(Treaty of Portsmouth)의 체결지인 포츠머스 해군공작창의 바로 옆이라는 역사적인 중요성이 있으니까요. 이 조약에서 일본은 북위 50도 이남의 카라후토(樺太, 사할린(Сахалин)) 및 치시마열도(千島列島, 쿠릴열도(Курильские острова))를 자국령으로 편입할 수 있었어요. 이 조약체제는 이후 40년간 지속되었어요. 소련이 1945년 8월에 돌연 대일 선전포고를 하여 전격전을 벌이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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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smouth To Mark Anniversary Of Hosting 1905 Peace Talks For Russo-Japanese War, 2020년 9월 4일 New Hampshire Public Radio 기사, 영어


2. 보스턴
매사추세츠주(Commonwealth of Massachusetts)의 주도이자 최대의 도시인 보스턴(Boston)은 미국 역사를 밝힌 등불이자 개척자인 도시 그리고 세계최강을 자랑하는 미국의 대학교육의 거점으로 세계적으로 빛나는 도시로 잘 알려져 있어요.
미국 역사에서는 영국군이 민간인을 살상한 1770년의 보스턴 학살사건(Boston Massacre) 및 1773년에 고율의 세금에 분노한 보스턴 시민들이 영국의 화물선에 난입하여 적재화물인 홍차를 바다에 던져버린 무력시위인 보스턴 차사건(Boston Tea Party)으로 잘 알려져 있고, 그 사건 이후 13개 식민지(Thirteen Colonies)의 대표들은 1776년에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영국에 맞서 싸우기로 결의하죠. 미국의 역사의 시작은 역시 이 보스턴에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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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ston Tea Party, Britannica 웹사이트, 영어

보스턴 하면 역시 대학. 미국 최고의 학원도시라고 불러도 이의없을 정도로 세계의 명문대학이 포진해 있어요.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으로 1636년에 설립된 하버드대학(Harvard University) 및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원이 있는 터프츠대학(Tufts University)이 보스턴 광역권에 있고, 시내에는 세계최강의 공과대학을 말하면 늘 손꼽히는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MIT)이라든지 실용음악 관련의 세계적인 명문대학인 버클리 음악대학(Berklee College of Music) 등의 여러 대학의 백가쟁명의 현장이 되어 있어요. 아래의 사진은 하버드대학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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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에서도 보스턴은 미국을 대표하는 도시 중의 하나로, 1901년에 창단된 보스턴 레드삭스(Boston Red Sox)가 이 도시를 연고로 하고 있고, 지금의 홈그라운드인 펜웨이파크(Fenway Park)는 1912년에 개장했어요. 야구의 전설 베이브 루스(Babe Ruth, 1895-1948) 또한 1914년에 입단하여 1919년까지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활동했지만 라이벌 팀인 뉴욕양키스(New York Yankees)로 트레이드된 1920년 이후로는 그 팀에서 대활약하여 1923년이는 뉴욕양키스의 첫 그리고 20세기 최초의 월드시리즈(World Series) 우승의 주역으로 되어요. 참고로 베이브 루스는 1918년에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20세기 마지막 월드시리즈 우승을 경험하기도 했어요.


3. 뉴욕
뉴욕(New York)은 다른 설명이 필요없는 미국 최대의 도시이자 뉴욕주(State of New York)의 주도.
그 시작은 이 지도의 제작시점에서 정확히 300년 전인 1624년에 네덜란드인들이 정착해서 세운 암스테르담 요새(Fort Amsterdam)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이후 1664년에 영국인들이 점령하면서 당시의 영국 왕 찰스 2세(Charles II of England, 1630-1685)가 자신의 남동생으로 후일 제임스 2세(James II of England, 1633-1701)가 되는 당시 요크공작(Duke of York)에 그 토지를 수여하면서 임시로 뉴욕이라는 지명도 지어졌고, 1674년부터는 지금의 이름으로 완전히 굳어졌어요.
사실 뉴욕이 잠깐이나마 미국의 수도였던 적도 있어요. 1785년 1월 11일부터 1790년 12월 5일까지의 미국 초기의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 그 이후로는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Philadelphia, Pennsylvania)가 수도로 지정되었다가 1800년 11월 17일부터 워싱턴 DC가 미국의 수도로 지정되었어요.

뉴욕 하면 역시 세계 금융의 중심지인 월스트리트(Wall Steet), 뮤지컬의 본산 브로드웨이(Broadway), 단단한 암반 덕택에 하중도임에도 고층빌딩이 많이 들어서 있고 "맨하탄" 이라는 표기로도 익숙한 맨해튼(Manhattan), 1886년에 프랑스로부터 증정되어 뉴욕항을 지키고 있는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 및 영국 및 대륙유럽과 이어지는 대서양항로의 기종점인 뉴욕항(Port of New York)에 이르기까지, 뉴욕은 소개할 것이 정말 풍부해요.
또한 뉴욕의 혁신 하면 브루클린브리지(Brooklyn Bridge). 이것은 현대적인 와이어로프(Wire Rope)가 적용된 첫 교량으로 1883년부터 운용되어 1915년부터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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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최고 인기스포츠인 야구 또한 뉴욕이 본산이었어요.
당시 있었던 팀 중 지금도 뉴욕을 연고지로 하는 곳은 아메리칸리그의 뉴욕양키스(New York Yankees). 1883년에 창단한 내셔널리그의 뉴욕자이언츠(New York Giants)는 1957년을 끝으로 뉴욕시대를 마치고 1958년부터는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San Francisco Giants)로 재편되었어요. 또한 1883년 창단 이래 수차례의 개명을 거쳐 1890년부터 내셔널리그에 가입한 브루클린 다저스(Brooklyn Dodgers) 또한 1957년에 뉴욕을 떠나 1959년에 로스엔젤레스 다저스(Los Angeles Dodgers)로 재편되었어요.


4, 리치먼드
버지니아주(Commonwealth of Virginia)의 주도 리치먼드(Richmond)는 영국의 수도 런던의 리치먼드에서 그 이름이 유래하는 도시로, 1775년에 연설가 패트릭 헨리(Patrick Henry, 1736-1799)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Give me liberty or give me death!!)" 연설을 한 도시로서 독립여론을 고취한 장소이기도 해요. 그리고 19세기 후반 미국의 대분열 상태에서 남부의 연방주가 이탈하여 아메리카연합국(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을 조직하고 이로 인해 1861년에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이 발발하자 단 이틀뿐이었지만 1865년 4월 2일 및 4월 3일에는 남부의 수도이기도 했어요. 그렇게 18세기에 그리고 19세기에 불탔지만 리치먼드는 번번이 부활했어요. 특히 흑인 인구가 많았는데다 1903년에는 사업가인 매기 워커(Maggie Walker, 1864-1934)가 흑인여성으로서는 미국 최초의 은행장에 취임하고 찰스 러셀(Charles Russell, 1875-1952)이 흑인 최초의 건축가가 되면서 리치먼드 시내의 신축건물의 설계를 담당하는 한편 흑인 언론인 존 미첼 주니어(John Mitchell Jr., 1863-1929) 또한 언론인 및 사회운동가로서 대활약하게 되어요. 특히 리치먼드 시내의 잭슨워드(Jackson Ward)는 "미국의 검은 월스트리트(Black Wall Street of America)" 및 "남부의 할렘(Harlem of the South)" 이라는 칭호도 얻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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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Reconnect Jackson Ward aims to make residents whole again, 2022년 10월 14일 VPM News 기사, 영어

지금은 노면전차가 별로 없는 미국이지만, 이 시대에는 미국의 여러 도시에 노면전차가 많았어요. 게다가 리치먼드의 노면전차는 미국 최초로 성공적으로 운영된 노면전차 네트워크로 유명했어요.


5. 찰스턴
사우스캐롤라이나주(South Carolina)의 최대의 도시인 찰스턴(Charleston)은 영국의 왕 찰스 1세(Charles I of England, 1600-1649)의 이름이 주의 이름에도 도시의 이름에도 모두 남아 있는 독특한 사례. 사실 캐롤라이나라는 지명 자체가 찰스의 라틴어 표기인 카롤루스(Carolus)에서 파생된 "찰스의 땅" 이라는 의미이고 찰스턴은 "찰스의 마을" 이라는 의미.
이 찰스턴은 주도인 컬럼비아(Columbia)에 비하면 대략 인구가 1만명 정도 많은 15만명 규모라서 뭐가 대단한가 싶겠지만, 사실 미국사에서 찰스턴의 위상은 의외로 중요해요. 미국의 카리브해방면 향신료 및 담배 등의 각종 상품작물의 무역의 거점인데다 노예무역의 거점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리고 거래된 노예들은 카리브해 도서지역에서 납치된 원주민들이라든지 아프리카대륙에서 납치된 흑인들이 미국 건국 이전부터 많아서 찰스턴 시내의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했어요. 또한 남북전쟁에서 철저히 파괴되었고 재건 이후인 1886년에는 대지진으로 다시 파괴되었는데다 1919년에는 미 해군의 수병들이 흑인 주민들을 공격하여 살해하는 인종폭동까지 일어난 등 크고 작은 사고가 끊이지 않기도 했어요. 한때 미국에서 유태인들을 포함한 유럽 각국 출신 이민지달이 대거 유입되어 다양성의 상징이었던 이 도시가. 

아래의 사진에 나온 석조건물은 한때 미국 최대의 노예시장이었던 라이언즈 슬레이브마트(Ryan's Slave Mart). 남북전쟁 직전인 1859년에 지어 가장 마지막까지 존속한 이 노예시장은 1865년에 북군이 점령하면서 강제로 폐쇄되었고, 1975년에 국가사적으로 지정되어 현재는 올드슬레이브마트 박물관(Old Slave Mart Museum)으로 재편되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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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In Charleston, Black history is being told through a new lens, 2021년 6월 25일 National Geographic 기사, 영어


이 지도의 발행시점에는 찰스턴 출신의 유명 운동선수였던 해리 볼릭(Harry Bolick, 1912-1999)이 12세의 소년이었어요. 그리고 1931년에는 권투, 1932년에는 미식축구, 농구 및 야구에 데뷔했고 1935년부터 1947년까지는 그렇게 종사했던 스포츠 분야의 지도자로서 활약하기도 했어요. 


6. 탈라파시
플로리다주(State of Florida)의 주도인 탈라하시(Tallahassee)는 정확한 발음은 "탤러해시" 에 근접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지도에서는 "탈라파시" 로 기재되어 있어요. 그 이유는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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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St. Marks Lighthouse, Tripadvisor 웹사이트, 스페인어

아무튼 이 탈라하시는 이 지도의 발행시점에서 정확히 100년 전인 1824년에 플로리다영토(Florida Territory)의 중심지로 지정된 이래 플로리다영토가 1845년에 미국의 연방주로 승격된 이후로는 계속 주도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어요.
이 도시는 미국 남부의 주력농업을 대표하는 면화로도 유명하여 코튼벨트(Cotton Belt)의 중심이자 플로리다 노예무역의 허브였고, 남북전쟁 당시에 북군에 점령당하지 않은 미시시피강 이동(以東)의 유일한 도시이자 방화피해를 당하지 않은 유일한 도시였어요. 그러나 노예제 폐지 및 면화의 수익성 악화를 거치면서 발전은 둔화되었어요.
탈라하시는 플로리다 제일의 학원도시로, 이미 1843년에 여자대학인 탈라하시 여학원(Tallahassee Female Academy)이 설립되었을 정도로 시대를 앞섰고 이것은 이후 1851년에 설립된 종합대학인 플로리다주립대학(Florida State University)으로 계승되어 현재는 물리학, 화학, 해양학, 범죄학, 문헌정보학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미국 유수의 명문대학으로 자리잡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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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라하시 근처의 강인 수와니강(Suwannee River)은 스와니강(Swanee River)이라는 이름으로도 통해요. 여기서 생각나는 노래가 있지 않나요? 맞아요. 미국 민요의 왕으로 불리는 스티븐 포스터(Stephen Foster, 1826-1864)가 1851년에 쓴 노래인 스와니강(원제 Old Folks at Home). 이 노래는 플로리다주의 공식주가(公式州歌, Official State Song)로도 지정되어 있고 지금 가사는 2008년에 수정된 것.



7. 뉴올리언즈
미국에서 유일하게 법정단위가 미터법(Metric System)인 루이지애나주(State of Louisiana/영어, État de Louisiane/프랑스어)의 최대도시인 뉴올리언즈(New Orleans)는 태양왕 루이 14세(Louis XV, 1710-1774)의 섭정(Le Régent)이었던 필리프 드 오를레앙 공작(Philippe d'Orléans, 1674-1723)을 기념한 이름으로, 프랑스인 개척자들이 붙인 지명인 라 누벨 오를레앙(La Nouvelle-Orléans)을 영역한 것이 그 이름의 유래. 이후 1763년에는 7년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가 스페인에 양도하여 스페인령 누에바 오를레안스(Nueva Orleans)가 되었다가 미국이 루이지애나 구입으로 미국령으로 편입하자 그 이름이 영어로 번역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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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New Orleans. 2016년 2월 2일 AFA기사, 영어

미시시피강 하구의 이 뉴올리언즈는 케이준(Cajun)으로 불리는 프랑스계 이주민들이 프랑스적인 정체성을 유지하는 도시임은 물론 1860년 당시에는 미국의 5대 도시이자 남부 최대의 도시이기도 했지만 인종차별로 얼룩져 흑인 탄압이 횡행했고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s)으로 불리는 악명높은 인종차별 악법이 통과된 이후로는 흑인추방 및 분리주의 정당화가 법제화되어 짐 크로우 법이 공식적으로 종료되는 1965년까지 "분리하지만 평등한(Separate but equal)" 법리가 통용되기도 했고, 이탈리아인 차별도 끊이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동시에 뉴올리언즈는 재즈(Jazz) 음악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기도 해요. 특히 백인 뮤지션들이 주도한 딕시랜드 재즈(Dixieland Jazz)의 본산이 바로 이 뉴올리언즈로, 1916년에 결성된 오리지널 딕시랜드 재즈밴드(Original Dixieland Jass Band)가 데뷔 다음해인 1917년에 처음으로 음반을 내면서 이 명칭이 알려져요. 주의할 점은 밴드의 이름에서 재즈의 철자가 "Jass" 로 되어 있는 것.
뉴올리언즈는 요리문화도 매우 독특하여 앞에서 언급한 케이준 요리는 물론 크리올(Creole) 요리문화도 융합되어 매우 다양한 것이 특징. 그 이외에도 이탈리아, 중국, 쿠바 등의 요리문화의 영향도 받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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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24 Must-Try Cajun Classics, Food. 웹사이트, 영어


8. 세인트루이스
미주리주(State of Missouri) 최대의 연담도시권의 중핵도시인 세인트루이스(St. Louis) 하면 역시 1914년에 발표된 "블루스의 아버지" 윌리엄 크리스토퍼 핸디(William Christopher Handy, 1873-1958) 작곡의 세인트루이스 블루스(Saint Louis Blues)라는 재즈 악곡이 생각나기 마련이죠. 그럼 이 음악부터 들어볼께요.


미주리주(State of Missouri) 최대의 연담도시권의 중핵도시인 세인트루이스(St. Louis) 하면 역시 1914년에 발표된 "블루스의 아버지" 윌리엄 크리스토퍼 핸디(William Christopher Handy, 1873-1958) 작곡의 세인트루이스 블루스(Saint Louis Blues)라는 재즈 악곡이 생각나기 마련이죠. 그럼 이 음악부터 들어볼께요.
도시의 철자에서 느껴지듯, 이 도시의 이름의 유래는 프랑스. 성스러운 루이로도 잘 알려져 있는 프랑스의 왕 루이 9세(Louis IX, 1214-1270)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1764년에 프랑스인 무역상들이 세운 이 도시는 일리노이군(Pays des Illinois)이라는 지역거점이 되어 북부의 오대호와 남부의 멕시코만을 잇는 미시시피강(Mississippi River) 유역의 도시로 발전했고 1804년에 미국이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Lousiana)를 매입함에 따라 미국의 영토가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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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루이스는 음악 이외에도 세계의 트렌드를 선도한 글로벌 도시로 도약했어요. 1904년에는 루이지애나 매입 100주년을 맞이하여 루이지애나 매입 박람회(Louisiana Purchase Exposition)가 개최되었음은 물론 그 해에 제3회 하계올림픽도 열렸어요. 스포츠에서도 1882년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St. Louis Cardinals) 야구팀이 창단되었고 지도의 발행시점 이후인 1967년에는 위의 세인트루이스 블루스의 이름을 채택한 미식축구팀도 창단되었어요.
또한 연방으로서도 매우 중요하여 미국 전역에 12개소 있는 연방준비은행 중 하나인 세인트루이스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 of St. Louis)이 소재해 있고 그 밖에도 농무성(United States Department of Agriculture, USDA) 등의 연방기관 및 각종 정보기관의 거점도 이 도시에 입지하고 있어요. 또한 군용항공기의 명가였던 맥도넬항공기회사(McDonnell Aircraft Corporation)가 1939년에 세인트루이스에서 창업하여 이후 맥도넬 더글라스(McDonnell Douglas)가 되고 1997년에 보잉(Boeing)으로 합병된 이후 세인트루이스 공장은 보잉의 군용항공기의 개발 및 제조거점으로 변모했어요. 일본에서 운용했던 F-4 팬텀 전폭기의 초기생산분 및 현재 운용중인 F-15J 제공전투기의 초기생산분도, 우리나라에서 운용했던 F-4 팬텀(Phantom) 전폭기 및 현재 운용중인 F-15K 슬램이글(Slam Eagle) 또한 이 도시에 소재한 보잉 방산우주보안(Boeing Defense, Space & Security)의 공장에서 생산되었어요.

위에서 언급된 빌리켄 또한 세인트루이스의 몇몇 교육기관에서 공식 마스코트로 채택하고 있어요.


9. 시카고
오대호 연안의 대도시 시카고(Chicago)는 미국 중부지방을 대표하는 도시로 육상교통의 내륙거점이자 캐나다와의 선박교통도 활발한 요충지(要衝地) 중의 하나. 그리고 미국대륙을 종횡하는 많은 철도노선 또한 시카고를 중심으로 방사상(放射状)으로 뻗어있는 것으로도 유명해요.
이 도시의 어원으로 유력한 것은 1697년에 프랑스의 탐험가 로베르 드 라살(Robert de La Salle, 1643-1687)이 1679년에 남긴 기록에 등장하는 양파를 가리키는 어휘인 시카고(Checagou). 이것이 이 지역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남아 있어요. 이외에도 시카고는 바람이 많이 불어 윈디시티(Windy City)라든지 뉴욕 다음 가는 도시라는 세컨드시티(Second City), 프레리에 세워진 파리(Paris on the Prairie), 호반의 도시(City by the Lake), 일하는 도시(The City that Works), 미국의 심장(Heart of America)의 많은 별칭이 있는, 미국의 발전의 역사를 견인한 도시이기도 해요.
시카고는 장래의 위험에 대비하는 거래가 이루어지는 선물시장(先物市場, Futures Market)으로서 세계최초로 표준화되어 설립되어 지금도 영업중으로 이 분야의 세계표준인 시카고 상품거래소(Chicago Board of Trade, CBOT)가 1848년애 세워진 상업도시이기도 하고 1860년에는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이 공화당 대선후보로 선정되기도 했어요. 1893년에는 시카고 세계박람회라는 명칭으로도 유명한 세계 컬럼비안박람회(World's Columbian Exposition)의 개최도시로서 46개국이 참가하고 2730만명이 방문하는 등 신흥국 미국이 이제 세계적인 강국임을 보여주는 현장이기도 했어요. 
또한 1910년 이후로는 흑인 인구가 급증하는가 하면 1918년부터는 뉴니그로 무브먼트(New Negro Movement) 또는 할렘 르네상스(Harlem Renaissance)라고 불리는 흑인주도의 각종 예술도 시카고에서 융성하여 이 현상이 시카고 흑인 르네상스(Chicago Black Renaissance)로 불리기도 했어요. 이밖에도, 지도의 발행시점인 1924년에는 비록 1년만에 해산되긴 했지만 미국 최초의 동성애자 조직인 인권학회(Society for Human Rights)가 설립되기도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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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40 reasons why you should visit Chicago, 2024년 1월 23일 CHOOSE CHICAGO 기사, 영어

시카고에는 어두운 단면도 있었어요. 
1871년의 대화재로 크게 파괴된 이후 도시가 재건되고 도시계획 및 보건정책도 면밀히 수립되어 안정을 급속히 되찾아갔지만 1886년과 1894년에 발생한 대규모 파업은 무정부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들이 가담한 유혈참극이었고 이미 1900년 당시에 중부유럽 및 동유럽 출신 이민자들이 시카고 시내의 전인구의 3/4 이상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들의 각기 다른 성향과 계층분화는 항상 폭풍전야같은 상태였어요. 1919년에는 흑백 인종갈등에 의한 폭동도 발생했어요.
1900년의 대규모 수질오염 문제가 대두되는가 하면 1920년에서 1921년에 걸쳐서는 높은 임대료를 견디지 못한 세입자들이 임대료 납부를 거부하는 렌트스트라이크(Rent Strike)가 벌어지기도 했고, 금주법 시대부터는 시카고가 갱단의 근거지로 악명을 떨쳐 알 카포네(Al Capone, 1899-1947)를 필두로 하는 갱스터들이 밤의 세계를 지배하는 상황이 횡행했어요. 미 육군의 존 T. 톰슨(John T. Thompson, 1860-1940) 소장이 발명한 톰슨 기관단총(Thompson Submachine Gun)은 제1차 세계대전의 교착상태를 뚫기 위해 발명된 혁명적인 보병화기였지만 그 갱단들이 대거 구매하여 적대세력 살상에 쓰는 일이 횡행하는 데에 쓰여 시카고 타이프라이터(Chicago Typewriter)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도 붙어 버렸어요.

시카고 갱단의 악명은 이후 만들어진 일본의 군가 팔굉일우(八紘一宇)에서도 잠깐 언급되어요.


이 군가에는 세계통일을 말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차례로 옮겨 보자면, 만리장성에서 오줌을 누면 고비사막에 무지개가 생긴다든지, 갱단이 근절된 시카고에 세워진 충혼비에 손자들이 참배하러 온다든지, 히말라야의 눈 녹은 물이 흐르는 갠지스강에서 일본의 사나이들이 악어 낚시를 한다든지, 안개가 걷힌 런던에 잉어 모양의 깃발인 코이노보리(鯉のぼり)가 휘날린다든지, 죽고 나면 삼도천 강가에서 귀신을 모아서 스모를 하겠다는 등의.

참고로, 시카고는 일리노이주(State of Illinois)의 최대도시이긴 하지만 주도는 아니예요. 주도는 스프링필드(Springfield).


10. 솔트레이크시티
유타주(State of Utah)의 주도이자 최대도시인 솔트레이크시티(Salt Lake City)는 이름 그대로 소금호수의 주변에 세워진 도시로, 미국 서부내륙의 그레이트베이슨(Great Basin)이라 불리는 내륙유역(内陸流域, Endorheic Basin)에 위치하는 인구 20만명 이상의 두 도시 중의 하나예요. 참고로 다른 도시는 네바다주(State of Nevada)의 리노(Re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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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Utahs Hauptstadt ist hipper als gedacht, 2024년 1월 11일 fvw TravelTalk  기사, 독일어

내륙유역의 특성상 지표면을 흐르는 물은 증발하지 않는 한은 바다로 흘러들어가지 못하고 지면의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기 마련이죠. 그렇게 형성된 대염호(大塩湖, Great Salt Lake)는 흘러들어온 물에 녹은 이온을 다량으로 축적한 결과 짠물이 가득찬 호수가 되었어요. 마치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국경에 있는 사해(死海, Dead Sea)같아서 이 그레이트솔트레이크는 미국의 사해라고도 불려요. 그러나 그 크기가 최소 2,500평방km에서 최대 8,500평방km에 달해서 갈수기일지라도 도쿄도(東京都, Tokyo Metropolis) 전체가 다 들어가고도 남을 정도이다 보니 그 막대한 크기가 짐작이 될 거예요. 참고로 이 호수는 서반구(西半球, Western Hemisphere)에서 가장 큰 염호인 동시에 소금 생산지로서도 유명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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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The Great Salt Lake, Utah.com 웹사이트, 영어

이미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유타주는 모르몬교도 위주의 사회이고 솔트레이크시티는 모르몬교를 비롯한 각종 교회가 들어서서 성공회, 가톨릭, 그리스정교 등은 물론 유태인의 시나고그나 기독교도 일본인 이주자의 교회나 사찰도 설립될 정도였어요. 한때 중혼이 사회문제가 되자 1857년 당시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 1791-1868) 대통령이 그 중혼관행을 뿌리뽑기 위해 현지의 모르몬교도들을 토벌하는 유타전쟁(Utah War)까지 벌였지만  모르몬교도들이 주변의 인디언들과 연합하여 맞서 싸우면서 교착상태에 빠져 이듬해인 1858년에 뷰캐넌 대통령이 조건부 사면령을 발휘하는 것으로 대충 봉합되어버린 일도 있었어요. 한편으로 솔트레이크시티 시내에서는 매춘도 매우 성행해서 1911년에 홍등가가 강제폐쇄될 때까지는 매춘부도 300여명 규모로 고용되어 있었다는 어두운 측면도 있어요.


11. 샌디에고
캘리포니아주(State of California)는 특히 4개의 도시가 언급되고 있어요. 1848년에 시작된 캘리포니아 골드러시(California Gold Rush)로 인해 골든스테이트(Golden State)라는 별명도 지닌 이 주의 도시 중 첫번째로 소개되는 곳은 멕시코의 국경도시 티후아나(Tijuana)와 인접한 샌디에고(San Diego)가 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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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는 스페인 식민제국의 일부였다 보니 스페인어로 지어진 것을 영어로 다시 읽은 경우가 많아요. 샌디에고 또한 그러해서, 도시명의 기원은 스페인이 새로이 발견하여 복속시킨 카나리아제도(San Diego)에 기독교를 전파한 성인인 산디에고 데 알칼라(San Diego de Alcalá, 1400-1463). 이후 1821년에 멕시코의 독립으로 스페인 식민제국이 해체되면서 샌디에고는 알타캘리포니아(Alta California)에 속하게 되었지만 1846년에 발발한 미국-멕시코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한 1847년에는 캘리포니아 공화국이 설립되고 1850년에 그 공화국이 미국에 가입하면서 샌디에고는 도시의 지위를 얻게 되었어요. 또한 1857년에서 1860년 사이에는 텍사스주 샌안토니오(San Antonio, Texas)와 샌디에고를 잇는 우편마차편도 개설되어 30일 이내에 우편물 도달도 가능해진 한편 1878년에는 철도가 연결되는 등 교통의 요지로도 급성장했어요. 1915년부터 1917년까지는 파나마-캘리포니아 만국박람회(Panama-California Exposition)도 개최되었어요.
사실 미국 항공의 역사 하면 1903년에 키티호크(Kitty Hawk) 해변에서 성공한 라이트형제(Wright Brothers)의 동력비행기 실험 성공을 연상하기 마련이지만, 의외로 1884년에서 1886년에 걸쳐 이 샌디에고에서 존 조셉 몽고메리(John Joseph Montgomery, 1858-1911)가 무동력 글라이더 조종비행에 성공한 일도 있었어요. 

그러나 샌디에고에는 폭력사태가 심각하게 많았어요. 시민불복종운동, 자경단, 경찰폭력, 납치, 폭동 등이 빈발했고 1912년에는 샌디에고 자유연설전(San Diego Free Speech Fight)이라는 이름의 계층갈등 연설회와 이것을 기화로 각지에서 벌어진 폭력사태가 횡행했고 그 폭력양상에는 강간이나 반대자들을 잡아 옷을 벗겨 때리거나 오물을 바르는 등으로 고문하는 일도 흔했어요. 1916년에는 아예 샌디에고 시내의 첫 차이나타운도 헐렸어요.


12. 로스엔젤레스
흔히 LA라고도 약칭되고 일본에서는 간단히 로스(ロス)로도 불리는 로스엔젤레스(Los Angeles)는 캘리포니아주 제1의 도시이자 미국 제2의 도시로, "천사의 도시" 라는 의미로 스페인 식민제국 당시에는 "로스 앙헬레스" 라는 발음으로 불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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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로스엔젤레스, Visit California 웹사이트, 일본어)

로스엔젤레스 하면 역시 떠오르는 것이 몇 가지 있어요. 다인종사회, 다채로운 문화,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 아름다운 태평양안 및 영화의 본고장 헐리우드(Hollywood) 등. 그런데 본격적으로 대도시가 된 역사는 의외로 별로 길지 않아요. 고질적인 물 부족 문제가 있어서 19세기의 마지막 해였던 1900년에 인구가 겨우 10만명을 넘을 정도였지만, 1913년에 로스엔젤레스 수로(Los Angeles Aqueduct)가 개설되어 시에라네바다산맥(Sierra Nevada) 너머의 오웬스강(Owens River)의 물을 끌어올 수 있게 되자 인구가 폭증할 수 있었어요. 1920년에 인구가 57만명을 넘어선 것은 물론 이 지도의 발행시점에서 5년 뒤인 1929년에는 드디어 120만명을 넘어 명실상부한 대도시로서의 성장 또한 달성되었어요. 이 수로를 설계한 토목공학 엔지니어인 윌리엄 말로란드(William Mulholland, 1855-1935)는 아일랜드의 벨파스트(Belfast)에서 태어나 선원으로서 영국 및 북중미를 전전하다 사고로 장애를 입고 다시 항해에 나섰다가 해난사고까지 당하는 불상사 끝에 1877년에 로스엔젤레스에 정착하여 우물을 파는 일에 종사하며 독학으로 토목공학을 익혔고 시내의 수도관 공사에 참여하면서 그 공로로 1886년에는 미국 시민이 되는 데에 성공했어요. 비록 선원으로서의 생활은 포기해야 했지만 토목공학 엔지니어로서의 살길도 얻고 미국으로의 귀화도 성공한 그는 LA를 대도시로 키워야겠다는 야심을 품었고, 당시의 시장이었던 프레드릭 이튼(Frederick Eaton, 1856-1934) 또한 공감하여 1902년부터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했어요. 그 11년간의 집념 끝에 164개의 터널구간을 포함한 길이 233마일(=375km)의 로스엔젤레스 수로가 3년의 공삭기간을 거친 후 개통되었어요. 이 터널의 구조적 복잡성은 파나마운하(Panama Canal)에 비교될 정도로 복잡한 것으로, 오웬스강의 물을 끌어다 증발량이 매우 적은 산페르난도계곡(San Fernando Valley)에 저장한다는 매우 담대한 계획이었어요. 이 수로가 용량이 부족해져서 제2수로를 건설하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인 1965년이었고 그때는 말로란드도 이튼도 이미 고인이 된 지 수십년이 지난 뒤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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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A Deep Dive on L.A.’s Water Future, 2020년 3월 9일 LACOUNTY.GOV 기사, 영어

또한 LA는 미국 최초의 도시계획이 적용된 도시이기도 해요. 1908년부터 주거구역 및 산업단지의 구분이 시도되었고 그 시도가 8년 뒤인 1916년에는 뉴욕에서도 시작해 있었어요.

1910년에 헐리우드가 LA에 편입되면서 이 도시는 세계 영화의 본고장이 되었어요. 그리고 시내에 영화제작사가 10여개 이상 있었고 1920년대는 전세계 영화산업의 80%가 LA 시내에 몰려 있었을 정도였어요. 물론 영화뿐만이 아니죠. LA는 세계적인 대학으로 정평있는 UCLA가 있는 도시이기도 해요. 풀네임은 캘리포니아대학 로스엔젤레스(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게다가 영화의 본고장답게 영화 전문 교육기관인 AFI 콘서바토리(AFI Conservatory)의 소재지이기도 해요. 이 교육기관은 지도의 발행시점 당시에는 없었고 1969년에 개설되었지만.


13. 새크라멘토
캘리포니아의 주도는 바로 이 새크라멘토(Sacramento). 신의 은총을 의미하는 스페인어에서 온 이 지명의 도시는 언급되는 다른 세 도시에 비하면 위상이 낮다고 생각되기 쉽지만, 그래도 단독으로도 인구 50만이 넘는 대도시이자 캘리포니아주에서 성장이 가장 빠른 도시임을 잊어서는 안될 거예요.
멕시코 지배하에서 캘리포니아의 수도는 몬테레이(Monterey)였지만, 캘리포니아의 미국 가입 이후 몇번 이전되다 1854년에 새크라멘토로 정해진 이후에 변동없이 지금도 이어지는 것이 바로 새크라멘토가 주도가 된 사연. 그리고 특단의 사정이 없는 한 앞으로도 캘리포니아의 주도는 새크라멘토로 남아 있을 예정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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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Downtown Sacramento - California's State Capital, 2023년 11월 27일 West Coast Aerial Photography 기사, 영어

이 도시는 1862년부터 1870년대에 이르기까지 지반을 높이는 공사를 지속한 결과 이전의 건물 1층이 지하가 되는 등의 일이 발생했고 그 이후 여러 재개발을 거치면서 그렇게 형성된 지하공간이 대거 사라졌어요. 현재는 새크라멘토 언더그라운드(Sacramento Underground)라고 불리는 19세기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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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Old Sacramento Underground Tours, Old Sacramento Waterfront 웹사이트, 영어

새크라멘토 또한 유수의 교육도시이고 대표적인 대학으로는 캘리포니아대학 데이비스(University of California, Davis)를 거명할 수 있어요.

새크라멘토에 정착한 유명한 일본인이라면 이시자카 마사츠구(石坂公歴, 1868-1944)가 대표적이예요. 그의 이름은 간혹 "이시자카 코레키" 로도 전해지고, 같이 미국행을 택한 미나미타마(南多摩) 출신의 일본인 50명이 새크라멘토 델타에 정착하여 맥주의 원료 중의 하나인 홉(Hop)의 재배농장을 개설하려 했지만 실패하는 등 여러모로 시행착오가 많았지만 이시자카가 현지 일본어신문인 신일본(新日本)의 편집장이 되는 등 다른 삶을 영위해 나가기도 했어요.


14. 샌프란시스코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는 역시 천혜의 미항(美港)으로서 잘 알려져 있는데다 태평양안을 대표하는 항구도시로, 지도에서 언급된 것처럼 일본과의 국제항로가 개설되어 있기도 했어요. 양국간의 정기항로는 이미 1870년대부터 있었지만 그때는 27일 가량 걸린 데 반해 지도의 발행시점인 1924년에는 그 소요일시가 9일로 줄었으니 반세기동안 시간이 1/3로 줄어 그야말로 교통혁명이라고 할만했어요. 

이 도시의 이름의 유래는 이탈리아의 가톨릭사제인 지오반니 디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Giovanni di Pietro di Bernardone, 1181-1226). 그는 프란치스코 교단(Franciscans)의 설립자로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Franciscus Assisiensis)로 불렸고, 이후 성인으로 추대되어 성인 프란치스코가 되었고, 그 이름의 스페인어 표기가 영어식으로 발음된 것이 지금의 지명으로 정착되어 있어요.
샌프란시스코 하면 역시 구릉지대에 입지한 시가지, 1873년에 등장한 명물 케이블카(Cable Car), 알카트라즈 연방형무소(Alcatraz Federal Penitentiary), 차이나타운 등이 있어요. 단 샌프란시스코 하면 떠오르는 다리로 금문교(金門橋)라는 역어로도 익숙한 골든게이트브리지(Golden Gate Bridge)는 아직 개설되지 않은 상태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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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San Francisco, Travel Talks by eSky.pl 웹사이트, 폴란드어

샌프란시스코는 골드러시, 1873년의 경제위기와 시내 최고의 경제거물로 캘리포니아은행(Bank of California)의 창업주였던 윌리엄 채프먼 랠스턴(William Chapman Ralston, 1826-1875)의 몰락, 1900년에서 1904년에 걸친 미국 최초의 판데믹이었던 샌프란시스코 림프절페스트(Bubonic plague) 대유행 및 1906년의 대지진과 화재로 몰락하고 말았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었어요. 여기에는 이탈리아계의 은행가 아마데오 지아니니(Amadeo Giannini, 1870-1949)의 조력이 절대적이었고, 이후 그가 설립한 뱅크 오브 이탤리(Bank of Italy)는 현재의 세계적인 금융기업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로 재편되었어요.
그 지아니니의 금융지원에 힘입어 샌프란시스코의 재건은 매우 신속히 이루어졌고 1915년에는 도시의 재건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파나마-태평양 국제박람회(Panama-Pacific International Exposition)가 개최되어 1800만명 이상이 방문하는 대성황을 기록했어요. 그뿐만이 아니라 1912년부터는 이미 아일랜드의 토목공학 엔지니어인 마이클 오쇼네시(Michael O'Shaughnessy, 1864-1934)가 수석엔지니어로 기용되어 도시철도, 도로터널 및 수리시설이 1915년에서 1927년에 걸쳐 완비되었어요. 그때 건설된 댐, 저수지 및 수로는 지금도 여전히 샌프란시스코의 상하수도시스템의 근간으로 잘 쓰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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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샌프란시스코는 미디어의 도시이기도 하죠. 특히 1887년에 창업된 허스트 커뮤니케이션즈(Hearst Communications)는 지금도 세계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미디어그룹으로, 대표적인 것이 남성지 에스콰이어(Esquire), 여성지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 자동차저널 카앤드라이버(Car and Diver) 및 로드앤트랙(Road & Track), 과학저널 파퓰러메카닉스(Popular Mechanics) 등의 것들. 그리고 세계 3대 신용평가사인 피치레이팅즈(Fitch Ratings) 또한 허스트 산하의 회사예요. 또한 현재는 월트디즈니 컴퍼니(The Walt Disney Company)와의 제휴로 설립한 세계최고의 스포츠 전문채널인 ESPN이 바로 그것들. 참고로 허스트는 이미 당시에 거대미디어그룹이었지만, 만화가 월트 디즈니(Walt Disney, 1901-1966)는 그의 형 로이 올리버 디즈니(Roy O. Disney, 1893-1971)와 1923년에 같은 주내의 버뱅크(Burbank)에서 디즈니형제 카툰스튜디오(Disney Brothers Cartoon Studio)를 창업한 상태였어요. 그 두 회사가 이후 같이 사업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허스트 일가도 디즈니 일가도 예상하지 못했겠지만...


15. 타코마
북서부의 워싱턴주(State of Washington)에 위치한 도시인 타코마(Tacoma)는 "철도가 범선들을 만날 때(When rails meet sails)" 라는 문구로도 잘 알려진 도시로, 내륙 깊숙히 있어 거친 외해의 영향에서 자유롭고 수심이 깊은 커멘스먼트만(Commencement Bay)과 오대호 연안까지 닿는 북대서양철도(Northern Pacific Railway)가 만나는 교통의 요지인 동시에 도시의 배후에는 타호마(Tahoma)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진 해발고도 4,392m(=14,410피트)의 아름다운 레이니어화산(Mount Rainier)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한 아름다운 도시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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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20 Best Things to Do in Tacoma, Washington, 2023년 4월 6일 Rovology 기사, 영어

이 도시의 건설은 군인 출신의 개척자 모튼 매튜 맥카버(Morton Matthew McCarver, 1807-1875)의 복안대로 이루어져 그의 생존중에 도시건설이 완료되고 이름 또한 배후의 그 화산의 인디언식 명칭으로 지어졌어요. 그리고 그는 1875년 4월 17일에 타계하였고, 그가 1874년에 설립한 타코마 묘지(Tacoma Cemetery)에 성인(成人)으로서는 처음으로 안장되었어요.

타코마에서는 1885년에 평화롭게 살던 중국인 이주민들을 내쫓는 대사건이 벌어졌어요. 당시의 시장인 독일 출신의 야콥 바이스바흐(Jacob Weisbach)는 공권력을 동원학고 백인 및 인디언 주민들도 가담시켜 중국인 거주지를 급습하고 중국인들을 수백명 붙잡은 뒤에 오리건주 포틀랜드(Portland, Oregon)로 가는 열차에 강제로 태워 내쫓은 후 중국인 거주지는 완전히 불타 없어졌어요. 이런 방식은 이후 타코마메소드(Tacoma Method)라고 불리며 미국 각지에서 동양인 차별방식으로 애용되었고, 중국인 이민이 금지되자 일본인이 대안으로 선택되는 계기로도 이어졌어요. 대륙횡단철도의 건설노동자로서 여러모로 활약했던 중국인 이주민들은 이렇게 미국 각지에서 밀려났어요.

타코마는 1915년에서 1922년 사이에는 자동차경주의 인기가 급상승하기도 했고, 지도의 발행시점인 1924년에는 영화제작사가 설립되는 등 번영을 구가하기도 했어요. 재미있는 것은 1995년에 일본의 토요타에서 미국시장용 중형픽업트럭인 토요타 타코마(Toyota Tacoma)를 출시하여 2018년 이후에는 매년 20만대 이상 팔리는 인기차종이 되었다는 것. 이 지도의 편찬자들은 일본기업의 미국에서의 약진을 예측이라도 했던 것일까요?



이렇게 미국본토편을 마쳤어요.
다음에는 북쪽으로 이동해서 캐나다 및 북극으로 가 볼께요.
마드리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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