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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서 생각났던 1988년 6월과 9월의 어느 날

SiteOwner, 2017-09-11 15:04:13

조회 수
345

오늘은 병원에 갔다오고 나서 일찍 돌아와 있습니다.
특별히 어디서 아파서가 아니라 예정된 정기검진 일정이니 걱정하시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병원에서 문득 1988년 6월과 9월의 어느 날이 생각났습니다.
날짜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최소한 무슨 일이 있었고 누가 관여되었는지만큼은 확실히 기억나는군요.

당시 국민학교 5학년이었던 저는 학생회 차원에서 같은 반 학생의 병문안을 가야 했었습니다.
저의 직책은 서기였고, 이전의 글인 단신의 두 남학생에 등장하는 K군이 반장, L양이 부반장, S양이 총무였습니다. 그렇게 저를 포함한 네 학생은 선생님의 승용차를 타고, 그 학생의 입원장소인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통칭 동산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대구경북 이외의 지역에 거주중이신 분들을 위해 조금 부연하자면, 동산병원은 대구시내의 유명 대형병원으로 손꼽히는 곳입니다.

입원한 학생은 교통사고를 당해 골절상을 입은 N양.
그 N양과 저는 접점이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는 4학년 1학기 때에 다른 지역에서 전학온 아이였고, 4학년 때에는 N양과 같은 반도 아니다가 5학년에 들어서야 겨우 같은 반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친분도 없었습니다. 그 N양은 위에서 말한 총무 S양과 특별히 친해서 거의 그림자같이 따라다니고 타인과는 조금도 접점을 두지 않았기에 친분조차 생길 리가 만무했지요. 딱 하나 그 N양에 대해서 알고 있었던 것은, 4학년 때 교실에서 똥을 쌌다는 해프닝 하나였습니다.

그렇게 동산병원에 도착했고, 선생님의 인솔하에 문병을 가게 되었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간호사가 저와 K군은 들어가지 말라고 막았습니다. 왜 그런고 하니 어린애가 출입하면 안된다나요. 둘 다 키가 꽤 작은 편이었다 보니 그냥 어린애로 봤는가 봅니다. 그리고 선생님과 중학생 누나들만 들어갈 수 있다고도 하네요.
"같은 국민학교 5학년생인데요?" 라고 항변해도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하긴 L양과 S양은 키가 꽤 큰 편이어서 160cm를 좀 넘겼고, 저는 당시 145cm도 안되었으니까 그렇게 보이더라도 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는 중학생과 고등학생에 교복착용이 의무화된 것도 아니라서, 여자아이가 키가 좀 크고 가슴이 좀 나왔고 옷을 좀 어른스럽게 입으면 국민학생도 중학생으로 보이고 그랬습니다.

저와 K군만 들어가지 못한 문병이 끝나고,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그날 일정은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해 9월.
N양이 다시 학교에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뜸 저를 보고 화를 내네요. 어떻게 학생회 사람이라면서 다쳤는데 문병도 안왔느냐고 다짜고짜로 화를 내고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퍼붓고 그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병실에 안 가고 싶어서 안 간 것도 아니고, 병원측에서 막는데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 않습니까. 그걸 이야기하니까 한다는 말이 남자답지 못하네, 그러면 억지로라도 들어가서 와야 하는 거 아니냐, 그렇게 남자답지 못하면 그걸 떼내버리라니 키도 작은 게 어쩌고 하는 온갖 인신공격을 늘어놓다가 혼자 주저앉고 울어버리기까지 합니다.

한동안 멍하게 있다가, 이전에 들었던 소문이 생각나길래 한마디 해줬습니다.
"왜, 똥 한번 더 싸려고?"

그렇게 저를 욕하다가 도리어 1년 전의 사건이 들춰져서 공개망신당한 N양은 그 뒤로는 저에 대해서만큼은 아무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중학교에 진학하기도 했지만, 중학교 2학년 즈음부터 키가 갑자기 크기 시작한 저와 마주치면 무서워하면서 피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게다가 각자 다른 고등학교로 진학한 후에는 두 번 다시 마주칠 일도 생기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의 그 일은 씁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 N양이 꼭 저에게 그렇게 그런 몹쓸 소리를 했어야 했는지, 그리고 당시 동산병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선생님과 L양과 S양 중 누구도 정황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았거나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은 것인지, 그리고 그 K군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고 저에게만 온갖 패악질을 부렸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나쁘게 이야기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도 필요없다는 것을 아주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성악설을 지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SiteOwner

Founder and Owner of Polyphonic World

6 댓글

HNRY

2017-09-11 20:40:47

인간의 본성은 후천적인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만 요즘들어 원래부터 더러운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이미 더러워서 거기에 물드는 건지 혼란이 오더군요. 흐음...?

SiteOwner

2017-09-11 21:00:36

정말 혼란스럽지요. 말씀하신대로 뭐가 앞이고 뭐가 뒤인지 알기 힘든...


그때의 학습효과가 정말 크기는 컸는지, 그때 좋은 선생님이라고 생각했던 그 선생님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고, 딱히 싫지는 않았던 L양과 S양에 대해서도 그 다음부터는 시선이 결코 고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더욱 씁쓸해집니다. 그 N양은 저를 욕해서 무엇을 얻었을지...

Papillon

2017-09-11 23:38:57

전 인간에 대해서 토마스 홉스랑 비슷한 관점인지라 역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타인을 나쁘게 말하는데 이유가 필요한 게 아니라 타인을 좋게 말하는데 이유가 필요한 것이라고요. 요컨대 타인을 향한 배신과 공격이 디폴트이고 신뢰와 보호가 특수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협동상대가 배신한다는 것을 전제로 행동합니다. 예를 들어, 조별과제를 할 때 팀원 모두 참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조원 전체 분량을 미리 짜둔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이런 삶의 태도는 제가 배신을 당하거나 공격을 당할 때 당황하지 않을 수 있게 해주지만 저를 항상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피곤하게 만든다는 것이 단점입니다.

SiteOwner

2017-09-11 23:54:25

1988년의 그날의 기억에서 배운 것도 말씀하신 것과 일맥상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홉스의 관점을 잘 요약하는 어구인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 살벌하긴 하지만 외면할 수는 없겠지요. 실제로 이상은 멀고 폭력은 가까운 것이 역사 속에서도 증명되어 있다 보니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선의를 믿고 무방비로 있다가 당해서 극단적인 인간불신에 빠지기보다는 오히려 배신을 전제로 행동하는 게 결과적으로 더 나을 것입니다.

콘스탄티노스XI

2017-09-12 05:20:55

뭐...야생의 인간이란건 결국 짐승일 뿐인데 짐승에 선악을 따질 수 있겠습니까... 


그거랑 별개로 그 여학생은 참 이상한 사람이었군요.

그런데 보통 그렇게 중학생 이상인데 어린이로 오해를 받는 상황이면 일행인 어른이 이아이는 중학생이라고 얘기를 하지 않나요? 왜 선생님들이나 다른 여학생들은 도우려하지 않은건지 궁금하군요.

SiteOwner

2017-09-12 20:09:26

그때 상황이 이랬습니다.

L양과 S양과 선생님이 저와 K군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먼저 들어갔고, 그걸 뒤늦게야 안 뒤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간호사가 막아선 것이었습니다. 그 점에서 모종의 배신감을 느꼈고, 이후 그 N양이 저에게 헛소리를 늘어놓은 데에서 혹시 불순한 저의가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습니다. 후일담이고 뭐고 들을 기회 자체가 없어서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요.


반 내에 이런 역학관계도 있었습니다.

4학년 때에는 L양과 S양과 N양 모두 저와 같은 반이 아니었고, L양과 S양은 학교 내에서 수재로 칭송받는 존재였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도 L양이 최고의 수재로 여겨졌지요(10대 때 겪었던 더블 스탠다드 - 여자에게 진다? 참조). 그런데 4학년 때에 학과성적에서 제가 학급내 1위를 하는 이변이 벌어지고, 5학년 들어서 L양과 S양과 같은 반이 되었는데 학급내 성적에서 S양을 앞서고 뒤이어 L양까지 앞지르게 되어 확실히 전교 1위를 굳히게 되었습니다. N양은 여러모로 공부와는 거리가 멀긴 했는데 같은 동네에 사는 S양과 유독 친했고, S양이 저에게 뒤처지게 되니까 저에 대해서 적의를 품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K군같이 잘생기고 인망이 좋은 남학생에게 헛소리를 하면 여러 사람을 적으로 돌리게 되지만, 저같이 별로 인기없는 남학생을 공격하면 최소한 손해볼 일은 없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친구를 위해서, 저를 타도하겠다고 머리를 쓴 것 같았는데, 저는 그 N양의 흑역사였던 교실 내에서 똥을 쌌던 사건을 알고 있어서 그 한마디로 역공한 것입니다.


남아 있는 자료를 다시 읽어 보니까 본문에 사실관계가 미묘하게 뒤틀린 게 있어서, 바로잡았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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