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40, 50년 정도 이전에 만들어진 국내 학원물 미디어에서는 거짓자백이 미덕으로 여겨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지요. 학교 안에서 어느 학생이 창문을 파손했습니다. 과거에는 물자가 귀했다 보니까 비싼 유리창의 손실은 학교측에 상당히 뼈아픈 것이었고, 학생 입장에서도 들키면 학교 당국으로부터도 부모로부터도 거의 초죽음이 될만큼 혼나는 사안인 터라 필사적으로 숨기기에 바쁜 것이었습니다. 이 상황하에서 교사가 학생들을 모아놓고 양심에 묻겠다느니 등등 압박을 가하는데, 누군가가 손을 들고는 "제가 그랬습니다!!" 라고 용기를 내서 고백합니다. 그런데 그는 진범이 아니었고, 진범은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합니다.
이미 유년기인 1980년대에도, 그런 미디어가 내세우는 "미덕" 에 전혀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자체로도 이상했고, 게다가 권리는커녕 이름만의 직위가 주어지지도 않으면서 양보를 강요당했던 경험이 비일비재했던 터라 거부감을 느껴서입니다. 저지르지 않은 잘못을 뒤집어 써서 무슨 화를 자초할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인생을 낭비할 수도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제는 감시카메라같은 첨단기기도 많아졌으니까 진범을 잡아낼 확률도 비약적으로 높아졌으니 그런 거짓자백 따위는 설 자리를 급격히 잃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래된 학원물 미디어가 미화하는 괴이한 상황이 현실로 등장했으니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요.
경기도 평택시 소재 해군 2함대 기지내에서 일어난 경계실패사태에 대해서, 간부가 병사들을 모아놓고 허위자수를 요구했음이 밝혀졌습니다(간부가 병사 모아놓고 "누가 자수해주면 편하게 상황종료", 2019년 7월 13일 조선닷컴 기사)
이게 나름대로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작은 묘수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사안을 은폐하기 위한 속임수로 더 큰 여파를 일으키며 더 이상 내부문제로 치부될 수 없는 해군 내부의 구조적인 문제가 아닌가 하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어 큰 실책임이 증명된 것입니다. 크든 작든 이 사건을 적당히 둘러대서 은폐하려 했던 간부들은 인사상 불이익을 받을 것이고, 그렇게 허위자백한 병사도 결과적으로는 어떻게든 책임을 져야 할 것 같습니다. 어느 한 사람만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다가 결국 연대책임이 되는 꼴입니다.
중요한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지, 미덕으로 간주되지만 사실을 호도하는 그런 거짓자백이 아닙니다.
게다가, 아직도 이런 악관행이 과거의 미디어에 나왔던 그 시대의 한계가 아니라 여전히 살아 숨쉬는 실체있는 것이라는 것에서 새삼 무서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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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Lester
2019-07-14 15:35:15
제 기억이 맞다면, 그러한 '미덕'은 아마 어려운(그러니까 이유가 있어서 그런 잘못을 저질렀거나,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 형편이 안 되는 경우) 사람을 감싸야 한다는 의(義)로움에서 출발했을 것입니다. 저도 그런 자료를 주로 교과서나 학습만화 같은 곳에서 많이 접했고, 거기서도 추가 설명으로 잘못한 사람이 뒤늦게 자백한다거나, 거짓 자백한 사람에게 감복하여 친구가 된다는 등의 '의도'가 분명히 나와 있었습니다.
문제는 역시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한다고 해야 하나, 의도는 좋았는데 뒤틀려 버렸다고 해야 하나... 그것이 잘못된 사람을 감싸는 의로움이 아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할 줄 알아야 하는 왜곡된 공동체 의식'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죠. 비슷한 맥락으로 (예전에도 언급하셨던) 연대책임 같은 게 있습니다. 이것도 분명히 당사자가 있음에도 주변 사람들도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다같이 끌어들여서는, 오히려 공동체 의식을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아버렸죠. 협동은커녕 오히려 서로를 증오하게 만들었으니...
SiteOwner
2019-07-14 16:37:24
근원에 대해서는 저도 대략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발상이 전근대 향촌사회나 협객집단 정도에서는 어느 정도 통할 여지가 있더라도 합리에 의해 지배되는 현대사회에는 적합하지 않으니까 더 이상 유효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고 봅니다. 동양사상의 방식으로 풀어내자면 소인배적인 작은 의리로 큰 올바름을 해치는 것이고, 서양사상의 방식으로 풀어내자면 소영웅주의의 발현으로 합리적 사고의 근간을 훼손하는 것으로 귀결되어서입니다.
또한, 인간은 주어진 룰대로만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고, 끝없이 자기합리화에 노력하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거짓자백 강요는 악행에 책임지지 않는 자의 이익을 만족시킬 도구로 얼마든지 활용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조직폭력배나 운동권들의 행태. 신참 조직원에게 사람을 죽여봐라, 분신해서 열사가 되어봐라, 뒷일은 책임지겠다 하고 부추기지만, 결국 그것을 행동에 옮기는 사람은 영어의 몸이 되거나 타 죽은 시신이 된 후이고 그 이후에는 오불관언입니다.
공동책임은 무책임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지요. 결국 서로를 증오하게 되면 그런 공동체는 언제든지 붕괴되어도 이상하지 않고 아예 존속해야 할 가치도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