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 집을 비우셔서 오랜만에 혼자서 주말을 만끽하다가, 한숨 푹 자고 일어나 머리가 맑아진 틈을 타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쓰는 소설에서 왜 저도 모르게 주인공 레스터는 착하게 만들려고 하는지, 왜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 은근히 답답하게 느껴지는지... 확인해 보지 않았으니 깨달음이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은근히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흔히 "나무를 보면 숲을 보지 못하고, 숲을 보면 나무를 보지 못한다"라고들 말하는데, 지금 연재하는 것이 그렇다고 할까요? 현재는 (3인칭 시점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카메라, 즉 상황을 지켜보고 서술하는 시점이 항상 주인공 레스터의 곁을 따라다니는데, 생각해보면 이건 3인칭 시점으로 진행되는 일반 액션 게임과 굉장히 흡사합니다. GTA와 속칭 'GTA 클론'으로 불리는 오픈월드 게임들 대부분이 그렇더군요. 아무래도 게임을 기반으로 팬픽을 쓰기 시작해서 그런지 이런 시점도 저도 모르게 따라하게 된 모양입니다.
문제는 이 경향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주인공과 거리가 멀수록 상황을 설명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지금이 딱 그 꼴인데 크게는 세계관부터 작게는 각 에피소드의 배경에 대해 간단히 서술하는 것도 설명역 캐릭터의 입을 빌리지 않으면 안 될 정도니까요. 실제로 GTA를 비롯한 해당 게임들은 에피소드에 해당하는 미션 등을 시작하려면 어딘가로 이동해야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데, 소설에서 이를 따라하다 보니 딱히 필요가 없음에도 이동하는 장면을 넣고 중간에 주절거리는 것입니다.
그나마 예전에 정말 공들여서 썼던 GTA 팬픽 스칼렛 캐논Scarlet Canon에서는 당시에 즐겨 읽던 삼국지연의와 최대한 비슷하게 써서 그런지, 상황의 흐름이 제법 자유로웠습니다. 이제 기억나는데, 해당 작품을 쓰면서 좌우명처럼 되뇌었던 게 '역사책처럼 쓰자'였습니다. 어쨌든 상황의 서술이 비교적 자유로워졌는데, 게임이라면 주인공이 하나부터 열까지 해야겠지만, 부하에게 맡기고 시점도 그 부하를 따라가서 결과적으론 목적을 이룬다거나 하는 식이죠. 그런가하면 당시에 즐겨 읽던 논픽션 갬비노패밀리Gangland(FBI가 마피아 조직을 수사하며 수많은 노력을 들인 끝에 마피아 보스의 체포 및 기소에 성공한다는 내용입니다)의 영향을 받아 중간중간에 몇몇 캐릭터가 현재 시점(소설을 쓰던 2010~2011년)에서 당시(게임 배경이니까 1986년)를 회상하거나 기록을 남겼다는 식으로 나름대로 현실성을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정확히는 삼국지연의나 기전체처럼 서술자가 당시 상황과 주변인들의 증언/기록을 같이 서술하면서 나름대로의 논평을 남기는 것이죠. 생각해보면 당시에 제가 쓸 수 있는 서술 기법은 전부 갈아넣은 작품이 아닌가 합니다. GTA4가 나온 지 2년이나 지난데다 옛날 작품에 연연하는 모양새라 큰 반향은 얻지 못했지만요.
아무튼 그 좋은 시절(?)이 생각이 나서 그런지, 당시에 써먹었던 기법을 이번 소설에서 써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야 세계관도 자연스럽게 풀어내면서 여러 인간군상들을 쉽게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일단 예전에 썼던 스칼렛 캐논의 연재 과정이나 방법 등을 대략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후술하겠지만 이번에 예전에 잠깐 언급했던 신작(?)을 써보면서 아래 내용을 연습해 볼 생각이기도 합니다.
?- 대략적인 줄거리는 GTA3 시리즈 기반으로 하되, 내 식대로 재해석할 것.
?- 상황 서술은 가급적 삼국지연의처럼, 특정 인물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 것.
?- 게임의 시대배경인 1986년의 분위기를 내도록 노력하되, 정 모르겠으면 적당히 짚고 넘어갈 것.
?- 가능하다면 중간중간에 각 캐릭터의 입장을 풀어내서, 역사책처럼 보이게 할 것.
?- (당시 연재분 기준으로) 글 하나엔 최소 2개의 장소를 넣어서 시공간의 변화를 묘사할 것.
뭐 그 때야 지금보다 시간(야간자율학습 시간마다 혼자 미술실에서 컴퓨터로 써댔으니...)과 상상력이 풍부해서 가능했지만 지금은 이래저래 무리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This is the Vice를 연습삼아 추가로 연재해 볼 생각입니다. 그나마 지금 쓰는 코스모폴리턴Cosmopolitan에 비하면 주연급들이 죄다 악당이라 눈치볼 필요가 없고 인물/사건/배경이 모두 마련되어 있다는 장점이 있긴 한데, 실제로는 어떨지 까 봐야 알겠네요. 적어도 이전에 썼던 내용을 절대로 붙여넣기하지는 않을 거고 새롭게 쓸 겁니다. 그래서 더더욱 고민입니다. 예전처럼 술술 풀어낼 수 있을지...
그거 알아? 혼자 있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유야 어쨌든 고독을 즐겨서 그러는 게 아니야. 사람들한테 계속 실망해서 먼저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는 거야. - 조디 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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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갈
2019-10-22 23:19:21
특정 인물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는 서술방식, 이런 것이 여러 인간군상을 입체적으로 서술하는 데에 꽤 좋겠네요.
그리고, 이렇게 도출하신 결론도 그리고 그 결론도출의 과정 또한 여러모로 참고가 되기도 하네요.
사람은 늘 같지만은 않고, 그래서 예전과 같은 감각으로 다시 글을 쓸 수 있을지는 보장할 수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보다 원숙해진 기법으로 글을 쓴다면 그 결과는 신선식품에서는 맛볼 수 없는 발효식품의 깊은 풍미같이 되리라 믿어요.
신연재작도 기대되어요.
Lester
2019-10-23 18:50:17
정말 새삼스러운 게, 그 때는 대체 어떻게 저런 걸 생각해내고 저렇게 열성적으로 썼는지 항상 궁금해집니다. 제 손으로 했는데도 제가 하긴 한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너무 옛날 일이기도 하지만 그냥 요즘 들어 자신감이 광장히 없어졌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그나저나 공들인 작품은 망하고 대충 만든 작품은 흥한다는 말이 정말이네요. 그렇다보니 지금 쓰고 있는 Cosmopolitan은 당분간 연재를 중단해야겠는데... 언제 연재를 재개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뭐, 시간이 해결해 주려나요? 농담 안 하고 썩지 말고 발효식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SiteOwner
2019-10-24 19:16:09
저도 소설 습작을 하면서 시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고민해 왔는데, 이렇게 Lester님께서 써 주신 글을 읽으면서 생각을 보다 세련되게 가다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좋은 글에의 감사의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대사만으로는 관점이 제한될 위험이 있고, 해설만으로는 진부해지기 쉽고, 그렇다 보니 그것을 어떻게 맞추는가가 중요합니다. 소설같이 텍스트로만 된 것도, 극적인 장면은 아리아로, 대사는 운율있는 언어인 레치타티보로 구사되는 음악극인 오페라 같은 것도 그렇게 밸런싱이 가해지기에 창작자의 입장에서도 감상자의 입장에서도 완급이 조절되면서 여러모로 최적화가 달성됩니다. 명심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최고보다는 최적입니다.
Lester
2019-10-26 14:57:43
정확히 말하자면 각 시점마다 일장일단이 있습니다만, 1인칭과 3인칭 및 전지적 중 어느 시점을 선택하여 '필요에 따라 정보를 적당히 제공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봅니다. 습작으로 쓰시는 소설이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겠으나 보통 인물에 초점을 맞춘다면 1인칭을, 배경이나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면 전지적이 많이 쓰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신작을 통해 전지적으로 다시 회귀(?)해 볼까 하는 생각이고요.
생각해보면 예전에 썼던 팬픽들이 묘사나 설명이 부족한데도 큰 무리없이 받아들여졌던 건 역시 원작의 배경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팬픽이기 때문에 쓰는 것도 읽는 것도 쉬웠던 것 같습니다. 특히 저처럼 원작을 최대한 중시하는 사람으로서는 나름대로 조사하여 내용을 쓰다 보니, 게임을 해 본 사람이라면 바로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작품이 오래될수록 그에 대한 관심도 식기 때문에 서서히 팬픽을 그만두고 독자적인 세계관을 꾸려나가고는 있지만, 이쪽은 이쪽대로 사전에 설명이 필요하다 보니 한 얘기를 또 하거나 빼먹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은근히 피곤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