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일단 그림 하나 보시죠. 이제까지 몰랐다가 일본 만화 "갤러리 페이크"를 통해 알게 된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Nighthawks"입니다. 솔직히 그림 형태의 예술이라고 하면 그냥 교과서에서 봤던 모나리자나 최후의 심판 정도만 알고 특별히 주의를 기울인 적은 없었고 그나마 관심을 가진 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이었습니다. 음모론 소설 다빈치 코드나 게임 어쌔신 크리드 2 등의 영향도 있지만 그림에 특별히 의미를 부여했던 점이 마음에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저 그림에 끌리게 되었냐면, 저것이 제가 소설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바와 굉장히 밀접하게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의 도시 이야기에선 살기 팍팍해도 막연하게나마 환상과 희망을 품었던 일화나 그런 내용을 다룬 작품들을 주로 다뤘습니다만, 현실이 항상 그렇게 희망차지만은 않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요. 실제로 제 일상이 음울하게 흘러가다보니 소설에도 그런 기미가 언뜻언뜻 묻어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지금 이 대목을 쓰고 있는 것도 그렇고)
그래서 저 그림을 보았을 때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얼핏 보면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휴식을 즐기는 것 같지만, 너무 먼 곳에서 쳐다보며 인물들을 구석에 몰아넣어서 그런지 불안감이 느껴집니다. 그래서인지 몇몇 리뷰에서는 현대인의 고독(#1)이나 무정함(#2)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보고 있으며, 실제로 호퍼는 진주만 습격이 벌어진 직후에 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전인 1929년에 세계 대공황까지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거리에도 수많은 의자에도 사람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점에서 무언가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들 어디 있는 걸까요?
지금 제 소설에 범죄적인 요소가 가득한 것은 (예전부터 계속 말했듯이) GTA 팬픽의 영향도 있지만, 이렇게 불안한 상황을 불법적인 수단으로나마 타개하려는 제 심리가 은연중에 나타나는 것도 아닐까 합니다. 예전에 영화 "조커(2019)"의 짤막한 리뷰에서도 그랬듯이 사람이란 궁지에 몰리면 극적인 행동을 취하기 마련이니까요. 물론 저는 그 '경거망동'의 결과와 대가를 잘 알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주인공 일행이 곤란한 사람들 대신 손을 더럽히는 쪽으로 쓰고 있지만 말이죠.
하지만 어느 쪽으로 문제를 해결하든 망설여지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를 해결했으니 불법적인 해결사가 있다고 해서 정당화될 수 있는지? 나도 모르게 로빈 후드 놀이에 취해서 그 쪽으로 흘러가진 않을지? 뭐 그에 대한 대책으로, 무책임하긴 하지만 '양쪽 모두의 의견을 쓰고 독자에게 해석을 맡긴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꼭 독자의 해석이 아니더라도, 이거 아니면 저거 식으로 딱 부러지게 나눌 수 없는게 사람 사는 세상이 아닌가 싶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묘미'라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네요. 누군가에겐 굉장히 곤란하거나 괴로운 상황일 수도 있는데 그것을 '묘미'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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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너무 범죄물이나 블록버스터급 액션신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사람들의 일상 같은 에피소드에도 초점을 맞추고 싶은데, 유감스럽게도 인간관계가 넓지 않거나 사회생활을 많이 해보지 않은 탓인지 '살다보면 이럴 수도 있는 거지' 같은 소재가 잘 생각나지 않는다는 게 문제입니다. 오 헨리의 단편들처럼 이름은 아무래도 좋을 일반인들의 사건사고를 다루고 싶은데, 너무 시시할 거라는 편견 탓인지 극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탓인지 그나마 잡은 소재도 놓쳐버립니다.
극약처방으로 가가탐정사무소나 ARIA, 바텐더, 마인탐정 네우로(?!) 같은 작품들에서 개성적인 요소(각각 홈즈 매니아, 뱃사공, 칵테일, S(…))를 빼고 스토리라인만 가져다 쓰면 되긴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으니까요. 더구나 미국의 일상생활이 어떤지 몰라서 급한 김에 '트와일라이트 시티는 미국에서 가장 동양적/다문화적인 도시다'라는 설정까지 만들어 넣고 대다수의 설정은 상술했던 일본계 작품으로 때우는 중입니다. 그러면서도 약간 생활양식의 차이(미국에는 코타츠가 없다든가...)만 빼면 그런 특이한 일들을 일본인만 겪으란 법은 없다며 위안으로 삼으면서 계속 소재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늘 그렇듯이 중언부언하며 이야기를 하다 말았습니다만, 오늘의 핵심은 그 정도가 되겠네요. '세상에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다'라는 것. 여기서 '그러니 인생 별 거 없다'로 끝맺을지 '그렇다고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다'로 끝맺을지가 관건인데, 지금도 굉장히 망설여집니다. 독자도 작품도 아닌, 요즈음 제 심신 상태가 말이 아니라서요.
그거 알아? 혼자 있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유야 어쨌든 고독을 즐겨서 그러는 게 아니야. 사람들한테 계속 실망해서 먼저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는 거야. - 조디 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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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댓글
마드리갈
2019-11-12 23:51:10
유리창 내에는 소수의 손님 및 그들을 응대하는 직원만 있고 유리창 밖에는 아무도 사람들이 다니지 않고, 게다가 그림의 시점은 이상하게 멀고 굳이 저 시점을 택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을 가져다주네요. 그래서 역시 일상같이 보이더라도 상황은 결코 묵과할 수 없는 범상치않은 점이 있는 듯하고...저도 역시 저 그림에서, 설명하기 힘든 모종의 위화감이나 공포를 느끼고 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위법한 행위가 정당화될 수도 없고, 합법적인 행위라고 해서 비난가능성이 면제되지도 않죠. 그래서 인간의 행위는 정말 판단하기 어려워요. 게다가 마냥 회피할 수도 없고...
Lester
2019-11-13 12:58:40
에드워드 호퍼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보니 인물보다는 공간에 초점을 더 맞추고 있더군요. 뭐라고 해야 하나, 드넓은 공간에서 인간은 얼마나 사소한 존재인가 하는 생각이 드러난다고 해야 하나? 또한 시점이 멀어질수록 사람들의 행색이나 표정이 뭉개져서 판단을 흐리게 하는 요소도 있죠. 마음만 먹으면 자세히 묘사할 수 있으면서도 일부러 저런 관점을 고집한다는 점에서 여러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보니 어쩌면 죠죠 시리즈나 졸프 킴블리 식의 '자신의 의지를 밀어붙여 관철시키는 것'이야말로 진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가장 이상적인 건 역시 죠죠 시리즈의 죠죠들이겠지만요.
앨매리
2019-11-13 16:26:55
도시 특유의 삭막함과 적적함, 냉락함이 잘 전해지는 그림이네요. 그림을 보고 가장 먼저 받은 느낌은 '차갑다'는 감상이었습니다.
Lester
2019-11-14 02:15:55
윗 댓글에서도 링크를 걸었지만, 다른 작품들도 의도적으로 여백 아닌 여백을 넣어둔 것을 보면 차가움이나 공허함을 표현하려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의도적으로 불안한 구도를 만든 것이 인상적이죠.
SiteOwner
2019-11-14 23:05:38
소개해 주신 그림을 보고 있으니까, 살짝 두려워집니다.
1층에 저렇게 큰 유리창은 보기는 좋을지 모르지만 안전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저 유리창이 방탄이라는 보장이 없는데다, 저렇게 창을 등지고 있는 상황에서는 돌발사태에 대처하기가 상당히 어렵습니다. 게다가 우중충한 바깥 거리의 색깔과 적막감이 감도는 풍경은 대놓고 적대적이지는 않지만, 최소한 우호적으로 여겨지지도 않습니다.
여러모로 생각할 여지가 많은 작품을 소개해 주신 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Lester
2019-11-17 21:53:11
이런 미묘한 불안감을 안겨주려는 게 호퍼의 목적인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작품에서도 지나치게 넓은 시야나 공허함을 보면 그런 것 같다는 생각도 느껴집니다. 이렇게 생각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 마음에 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