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흑의 장막이 하늘을 뒤덮고, 태양의 불꽃은 사그라드는 심야. 본디 만상이 잠드는 시간이건만, 거리는 평소보다 활기가 넘쳤다.
가뜩이나 흉흉한 카다스의 밤을 생각하면 실로 기이한 현상.
하지만 그 이유를 듣게 된다면 시민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터이다.
오늘부터 닷새 동안은 일 년에 한 번뿐인 야시장이 개최된다.
물론 여전히 외인이 보기에는 기이할 수 있다. 당장 신임 영주 역시 처음에는 치안 유지라는 명목하에 야시장 개최를 막으려고 했으니까.
하나, 야시장의 주인이 누군지 안 이후, 그는 뜻을 접었다. 아니, 접을 수밖에 없었다.
카다스 야시장의 소유주는 단순한 상인 따위가 아니니까.
크루거 가문.
카다스 4대 귀족 중 하나이자 카다스 재계의 지배자.
소여가 무력을, 보어헤스가 혈통을 중시한다면, 그들에겐 금력이 있었다.
돈은 항상 옳다.
그것이 크루거 가문의 가훈.
그리고 크루거 가문의 젊은이들은 이 가훈에 따라 자신들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야시장은 그런 크루거 가문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한 황금의 전장.
이걸 영주가 막는다?
그 순간, 영주의 모든 자금줄이 막힐 것이다.
노회한 대귀족이라면 이에 대한 대책 역시 마련해 놓았겠지. 하지만 미숙한 현 영주에게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다.
?
‘거기에 시민들도 손해 볼 게 없기도 하고.’
?
조금 위험하다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야시장은 시민들에게 있어서도 최고의 장소다.
연인에게는 즐거운 밀회 장소.
소비자에게는 싼값에 진귀한 물품을 살 기회의 장.
그 뒷면에 숨겨진 모습이 추할 수도 있겠지만, 손님으로서는 그저 즐길 수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물론 업무 시간을 제외하고는 방구석 폐인이었을뿐더러, 평생 여자친구가 없던 나에게 있어서는 연이 없는 장소였지만…….
?
‘솔직히 이런 이유로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
나는 한숨을 내쉬며 눈 앞에 펼쳐진 화려한 광경에서 눈을 돌렸다.
본다고 해봐야 어차피 할 일 때문에 마음대로 놀 수도 없으니까.
마음을 다잡고 다시 눈을 감자 이내 청력을 포함한 다른 감각들이 날카로워진다. 그와 함께 뇌리를 파고드는 작은 ‘친구’들이 전해주는 정보.
바퀴벌레, 파리, 쥐와 같은 작은 해수가 으슥한 곳을 감시한다.
고양이와 개와 같은 애완동물이 사람들이 몰려있는 장소를 살핀다.
닭과 생선 같은 살아있는 식자재들은 내가 들어갈 수 없는 장소의 상황을 알린다.
그리고 그렇게 모인 정보는, 뇌 속에서 하나의 퍼즐로 완성된다.
?
‘준비 완료.’
?
이렇게 되면 어디서 녀석이 나타나더라도 금방 찾아낼 수 있겠지.
빈민가의 사도.
또 다른 이름은 천사.
나는 녀석에 대한 정보를 다시 되짚어 보았다.
최초로 녀석에 대한 정보를 얻은 곳은 빈민가의 보육원이었다.
보육원생들은 이상할 정도로 녀석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모두 녀석을 만나보았다.
하지만…….
?
‘그리 대단한 정보는 못 얻었지.’
?
아이들이 말해준 것은 그저 대동소이한 경험담뿐.
자신들이 위기에 빠졌을 때 천사가 나타나 구해줬다는 단순한 이야기.
하지만 그 덕에 오히려 아이들의 증언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 또한 확신할 수 있었다.
일관성.
아이들의 그것만으로도 조사할 가치가 있었다.
이후, 나는 아이들의 증언을 토대로 그 ‘천사’ 녀석의 행동 패턴을 손쉽게 정리할 수 있었다.
첫째, 아이가 위기에 빠진 순간 나타난다.
둘째, 순식간에 아이를 구해낸다.
셋째, 그렇게 구해낸 아이는 즉시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킨다.
당연한 행동이지만, 빈민가의 아이들은 보통 평생 겪지 못하는 호의.
?
‘천사라고 믿어도 이상할 건 없지.’
?
적어도 아이들에게 있어서 녀석은 진짜 ‘천사’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들의 말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다.
한쪽 의견만을 참고한 정보는 그 가치를 잃을 터.
야시장이 개최되기 전까지, 나는 온종일 빈민가를 방황했다.
찾고자 하는 건 녀석과 마주한 빈민가의 악인들.
?
‘솔직히 찾지 못할 줄 알았지.’
?
녀석이 아이들에게 친절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악인들에게까지 친절할까?
?
‘당장 에스텔만 해도 악인에게는 자비가 없고.’
?
그렇기에 결국 아무도 만나지 못할 것 역시 각오했건만……. 의외로 그리 오래지 않아서 목격자들을 찾을 수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녀석은 악인 역시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으니까.
물론 아이들을 위협한 자들을 건물 외벽에 매달아 놓긴 했다고 하지만, 사도가 지닌 힘을 떠올리면 이는 애교 수준이다.
?
‘대체 뭐가 목적이지?’
?
솔직히 행적만 보면 답은 간단했다.
녀석은 악인이 아니다.
진심으로 빈민가의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의도가 있으리라고 가정하는 순간, 녀석이 대체 뭘 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
‘일단 만나야 해.’
?
그것이 내가 야시장을 찾은 이유.
?
“내일은 야시장에 갈 거예요!”
?
그날 보육원의 아이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이동하는 이상, 수호자인 녀석 역시 움직인다.
?
‘반드시 온다.’
?
확신과 함께 눈을 뜨자 다시 야시장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가게들. 그리고 그 점포 사이의 도로를 많은 사람이 오고 간다.
하지만 이는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움일 뿐. 실상은 범죄의 온상이나 다름없는 장소다.
?
‘오늘 하루만 해도 범죄 한두 건으로 끝나진 않겠지.’
?
작게는 폭력 사건이나 실종.
심하게는 납치, 강간, 살인.
이런 환경에서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놈이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놈이 나타난다면.
?
‘어떻게 해야 하지?’
?
순간 사고가 멈췄다.
놈을 찾아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악인이라면 미리 처리해두는 것이 옳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녀석이 정말로 숨은 의도 없이 아이들을 지켜주고 있는 거라면?
?
‘정말 놈을 쓰러뜨려도 되는 건가?’
?
하지만 그러면 아이들은? 다시 빈민가에서 하루하루 걱정 속에서 살아야 하는 건가?
?
‘동맹을 맺기도 쉽지는 않겠지.’
?
녀석이 왜 아이들을 지키는지 알 수 없는 이상, 협상할 수 있는 방도 자체도 제한적이다.
거기에 놈이 다른 사도에게 호의적일지도 확인되지 않은 상황.
?
“모르겠네.”
?
머리를 벅벅 긁으며 생각에 잠겨보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
“어쩔 수 없지.”
?
생각해봤자 답이 나오질 않는다면, 계속 끙끙대봤자 아무 의미도 없다. 오히려 자신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결과만 가져올 터.
그것이 내가 사도야행에 참가한 이후 깨달은 교훈.
가끔은 행동하고 나서 생각하는 것 역시 필요한 법이다.
?
‘자, 다시 시작해볼까?’
?
그렇게 다시 눈을 감고 동물들이 전해주는 정보에 집중하려는 순간.
?
[음?]
“뭔가 찾으신 거라도 있나요?”
?
갑작스럽게 들려온 이드라 님의 목소리에 나는 다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조금 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평범한 야시장 거리.
하지만 단 하나, 여태까지 보지 못하던 사람이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등에 멘 커다란 포대. 어지간한 사람 하나는 쉽게 들어갈 정도로 큼지막한 자루와 함께 상대는 낑낑거리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상대방의 특이한 외모.
가슴까지 오는 부스스한 은발과 그와는 대조적인 구릿빛 피부색이 상대가 남부 혈통이라는 사실을 광고하는 것만 같았다.
성별은 아마도 여성. 중성적이지만 골격 구조상 여성일 가능성이 크다.
나이는 겉으로 보기에는 소녀라기에는 많고, 여인이라기에는 어린 중간지점.
복식은 배와 허벅지, 어깨가 그대로 드러나는 노출이 심한 옷이긴 하지만, 마른 체형 덕에 그리 야해 보이지는 않는다.
?
“흠.”
?
외모가 조금 개성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수상하지는 않은데……. 커다란 등짐이야 여기가 야시장이란 걸 고려하면 이상한 것도 아니고.
?
“뭔가 감지하셨나요?”
?
혹여나 내가 놓친 것이 있나 이드라 님께 다시 질문을 던져보지만, 대답이 돌아오질 않았다.
그 순간.
?
“응, 뭐야? 나한테 볼일 있어, 형씨?”
?
너무 대놓고 바라봤나?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어느새 소녀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향하고 있었다.
?
“역시 보고 있었네.”
?
약간 사납게 들리는 목소리와 함께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오는 상대.
?
‘사과해야 하나?’
?
가끔 자신을 바라보는 것에 크게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
‘하지만 표정은 그렇게까지 화난 것처럼 보이진 않고…….’
?
좀 더 고민해보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어느새 코앞에 다가온 상대.
?
‘뭐라고 해야 하지?’
?
당황한 상태로 눈을 굴리며 주변을 살피다 보니, 상대의 등짐에 그려진 문양이 시야에 들어왔다.
?
‘응, 저건?’
“혹시 아이린 수녀님을 아니?”
?
제대로 골랐나?
그저 찔러본 질문이었건만, 상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
“원장님을 알아?”
?
정답이었군.
나는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고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저건 보육원 간판에도 그려져 있던 문양이었지?
저게 새겨진 자루를 들고 다니는 이상, 보육원에 악감정은 없을 터.
?
“어제 보육원에 가서 애들이랑 놀아주는 일을 했었거든.”
“아, 그게 형씨였구나!”
?
내가 친절한 어투로 어제 이야기를 하자, 상대의 표정이 눈에 띌 정도로 밝아졌다.
?
“어제는 고마웠어. 애들이 진짜 좋아하더라.”
“그리 대단한 건 아니야. 그보다 저 문양은 혹시…….”
“응. 나도 거기 소속이거든.”
?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씩 웃어 보였다.
?
“내 이름은 빅토리아! 만나서 반가워, 형씨!”
?
쾌활한 목소리와 함께 그녀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
?
*** ***
?
?
빅토리아와 만난 이후 내 계획은 완전히 틀어졌다.
그동안 대화할 상대가 없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지금 할 일이 없어서일까?
그녀는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내 주변을 계속 맴돌았다.
그것만이라면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겠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입은 쉬는 법을 몰랐다.
?
“저기 형씨 그건 뭐야?”
“주변 정보를 파악한다고? 혹시 마법이야?”
“둔갑술? 그건 또 무슨 마법인데?”
?
도저히 끝을 보이지 않는 질문의 연쇄.
마음 같아서는 그냥 되돌려 보내고 싶었지만, 원인 제공을 한 건 나라는 생각에 억지로 성실히 대답해 주었다.
?
“하하! 재미있네! 형씨.”
?
그런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계속 쾌활하게 웃어대는 빅토리아.
나는 그 웃음에 그저 쓴웃음으로 화답할 뿐이다.
그건 그렇고 형씨라…….
?
‘설마 여자가 아닌가?’
?
아무리 살펴봐도 살짝 중성적인 여성으로만 보인다.
?
‘뭔가 사정이라도 있는 건가?’
“저기, 왜 형씨라고 부르는 거야?”
“오빠라고 부르는 건 왠지 낯간지러워서 말이지. 형씨면 돼, 형씨면.”
?
조금 창피한 질문이었나?
끝으로 갈수록 그녀의 목소리는 왠지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팡! 팡!
이윽고 무안했는지 괜히 자신의 등짐을 손바닥으로 내려치는 그녀.
?
‘그런데 저 짐에는 뭐가 들어 있는 거지?’
?
단순히 외출용 가방이라기에는 지나치게 큰데…….
?
“그건?”
“오, 형씨도 궁금한 게 생긴 거야?”
?
질문 하나 없던 내가 먼저 말을 건 것이 신기했던 것일까? 빅토리아는 환하게 웃으며 자루를 열어 보였다.
?
“원래는 비밀이지만……, 까짓거 형씨에게는 보여줄게!”
?
그 말과 함께 그녀가 자루에서 꺼낸 것은 조그맣고 부드러운 형체.
?
“인형?”
“어때, 제법 잘 만들지 않았어? 내가 직접 만든 거라고!”
“……제법 잘 만들었네.”
?
이건 단순한 빈말이 아닌 진심이었다.
심부름꾼으로 일하면서 인형 역시 볼 일이 많았는데, 솔직히 저 인형은 어지간한 시판 제품보다는 잘 만든 축에 속했다.
티가 나지 않는 바느질 자국과 윤기가 가득한 털.
만약 인형 장인이 이 물건을 본다면 그녀를 제자로 데려가겠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
‘어째서 흰 고릴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
일반적으로 토끼나 곰이 더 인기 있지 않나?
?
‘뭐 그냥 자기 취향이겠지.’
“제법 많네. 왜 이런 걸 들고 다니는 거야?”
?
별생각 없이 이어진 질문.
?
“팔 거야!”
?
하지만 내 말에 그녀는 처음으로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응?”
“팔 거라고! 그래서 돈을 많이 벌 거야!”
?
그렇게 말하는 빅토리아의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
“지금 보육원 상황이 좀 힘들어. 원장 수녀님이 어떻게든 운영하고 있긴 하지만 솔직히 이젠 한계야.”
“…….”
“그러니까 내가 돈을 벌어서 해결해야 해! 아니, 단순히 해결이 아니야! 아이들은 나랑 다르게 좋은 학교에 보내고 마법도 가르칠 거라고!”
“돈이 많이 들겠네…….”
“그렇겠지. 아마 하루 이틀로는 힘들 거야. 하지만 몇 년 동안 인형을 많이 판다면 분명 할 수 있어! 아니, 하고 말 거야! 어때 내 웅대한 계획이?”
“음……좋은 계획이 아닐까?”
“그렇지!”
?
솔직히 현실성은 없어 보이지만 굳이 초를 칠 필요는 없겠지.
거기다가 인생이라는 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고 하고.
?
‘당장 나만 해도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역시 알아주는구나, 형씨! 그 말대로야!”
?
그녀는 호탕하게 웃으며 내 등을 두드렸다.
?
“지금은 보육원 살림을 조금 보태는 수준이지만, 곧 커질 거라고! 천사도 있으니 이제는……,”
“천사?”
?
그게 왜 여기서 나와?
내가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자, 오히려 그녀가 당황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애들한테 못 들었어?”
“그건 아닌데…….”
?
설마 이 녀석도 천사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
생각해보니 말이 안 될 것도 없었다.
빅토리아 역시 보육원의 아이. 나이가 많기는 하지만 분명 천사가 지켜줘야 하는 대상에 포함된다.
그리고 그렇다면 천사를 직접 목격한 적이 있을지도 모를 터.
?
‘예상외의 기회다.’
?
어쩌면 여태까지 내가 들은 것 이상으로 구체적인 증언을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
‘물어봐야 해.’
“저기 천사에 대해……,”
“앗! 이런 늦었네!”
?
하지만 내가 입을 열기 무섭게 빅토리아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자리를 파했다.
?
“아직 질문이……!”
“미안, 형씨! 빨리 가지 않으면 자리를 뺏기거든! 노점은 선착순이라서 말이야!”
?
뭐가 이렇게 빨라?
고작해야 잠깐 차이인데도 눈에 뜨일 정도로 거리가 벌어졌다.
?
‘조금 석연치 않은데.’
?
왠지 꺼림칙한 기분이 든다.
설마 뭔가 숨겨진 일이라도 있는 것일까?
?
[역시 저 아이…….]
?
그런 내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주기 위함일까? 이드라 님 역시 무언가를 느꼈는지 조용히 중얼거렸다.
?
“역시 따라가 봐야 하나?”
?
그렇게 다시 빅토리아가 있는 장소를 바라보았지만.
?
“그레고르!”
?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온 반가운 목소리에 나는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
‘그러고 보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
거리에 있는 시계를 보니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
‘뭐 다음 기회로 미룰까?’
?
어차피 이번만 기회는 아니니까.
?
“에스텔, 잘 지냈……!”
?
그렇게 고개를 돌려 에스텔을 바라본 나는.
?
“그, 잘 어울리는가?”
?
에스텔의 예상 밖의 모습에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
?
*** ***
?
?
“위험했네. 자칫하면 들킬 뻔했어.”
?
야시장 끝 노점상 밀집 구역. 빅토리아는 자리에 앉아 식은땀을 훔쳤다.
?
“너무 즐거웠나? 실수할 뻔했네.”
?
아이들과 대화하던 버릇 때문일까? 아니면 오랜만에 즐거운 대화 상대가 생겼기 때문일까?
?
‘어느 쪽이든 반성해야겠지.’
?
어쩌면 뭔가 이상한 것을 눈치챘을지도 모르지만,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닐 것이다.
?
‘뭐 특별한 일이야 있겠어?’
“그럼 오늘도 장사를 시작해볼까!”
?
오래지 않아 걱정을 마친 그녀는 힘차게 외치며 자리에 앉았고,
?
[갸하하하하! 힘내보자고 파트너! 이 일도 이따가 본업도 말이야!]
?
그런 그녀를 향해 ‘무언가’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기겁할만한 상황.
?
“그래, 힘내자고!”
?
하지만 빅토리아는 놀라지 않고 오히려 쾌활하게 웃어 보였다.
마치 자신의 파트너를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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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갈
2021-01-31 13:46:40
역시 시장은 중요한 장소. 답없는 신임 영주조차도 결국은 야시장을 막을 수 없네요. 시장의 순기능에 눈을 떠서라기보다는, 역시 크루거 가문의 위상이 엄청나다 보니 더 이상 과욕을 부리다가는 무사하지 못할 게 뻔할테니...
4대 가문 중에서 크루거 가문의 행동양식이 현실세계의 사회지도층의 것에 가장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레고르와 빅토리아가 이렇게 만났군요.
그리고, 초면이라고 하기에는 정말 많은 것을 이야기해서, 저렇게까지 이야기해도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이것 또한 1년에 5일만 허락된 야시장이 조성하는 특수한 상황이 아닐까 싶어요. 아무튼 빅토리아의 일에 인형을 파는 것 말고도 뭔가 다른 것이 있는 것과 문제의 파트너가 결코 범상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어요. 불빛이 밝을수록 그림자가 더욱 긴 것처럼, 그래서 화려하고 붐비는 야시장의 분위기가 더욱 무섭게 느껴지네요.
대체 에스텔은 어떻게 입었길래...이전과는 전혀 다른, 미소녀같은 패션일까요?
Papillon
2021-02-01 00:59:07
카다스의 영주가 무능한 것은 맞습니다만, 이건 경우가 다릅니다. 아직 시장경제나 자본주의 같은 개념이 나오기 이전이다 보니 세계관 내 귀족들의 평균 마인드가 저 수준이었거든요. 그나마 경험 많은 일부 귀족들 정도가 '시장이 발달하면 세금이 늘어나는구나'하고 이해하는 정도입니다. 시장의 가치를 이해하고, 이를 이용할 줄 아는 크루거 가문이 별종에 가깝죠.
크루거 가문의 성향은 현실의 지배층과 가장 유사하긴 합니다. 다만, 현대의 자본가 계층과는 제법 차이가 있어요. 굳이 비유하자면 록펠러나 카네기 같은 19세기 자본가+메디치나 로스차일드 같은 대부호 가문이랄까요? 부유한 귀족과 초기 자본가의 혼종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도덕성 역시 현대를 기준으로 하면 막장에 가깝고요. 다만, 가문 자체가 타 4대 귀족보다 자유주의(정확하게 말하면 금전만능주의) 성향이 강하다 보니, 특이한 개성을 지닌 인물도 많습니다. 자세한 것은 크루거 가문이 메인으로 나오는 에피소드에 밝혀질 예정입니다.
야시장이라는 환경 때문인지 빅토리아도 그레고르도 서로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줘버렸지요. 빅토리아의 진실은 44~45화쯤에 밝혀질 예정입니다.
다음 화는 에스텔의 옷차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할 예정입니다. 기대해주시길.
SiteOwner
2021-03-06 20:24:45
시장이란 물자만이 오가는 게 아니라 정보도 오가는 장소라는 게 잘 느껴집니다.
게다가 카다스의 야시장은 연중에 딱 한번 5일동안 열리는 게 전부니까 역시 들뜰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인공 그레고르도, 에스텔도, 그리고 문제의 빅토리아도.
갑자기 이드라의 목소리가 들렸다가 반문해도 대답이 없다는 게 꽤 무섭게 느껴집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신의 영역이 아니라 인간의 영역이라는 암시인지, 아직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만...
빅토리아가 그레고르를 보고 형씨라고 부르는 게 재미있군요. 제 대학생 때는 아니고 한참 선배들인 80년대-90년대 전반 학번에서 잘 보였던 일부 여대생들이 오빠/언니 등의 호칭을 쓰지 않고 형/누나 등의 호칭을 썼던 것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벌써 이것도 꽤 오래전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만...
에스텔이 대체 어떻게 입었길래 그레고르가 굳어 버렸는지...
이것 또한 재미있겠군요.
그나저나 빅토리아, 뭔가 정체를 숨기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이드라가 반응하려다 말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읽으면서 생각났던 음악을 한 곡 첨부합니다.
일본의 가수 이노우에 쇼코(井上昌己, 1969년생)의 1995년 발표곡 토요야시장(土曜夜市). 야시장에서의 밀회가 주된 내용입니다.
Papillon
2021-03-15 02:05:24
빅토리아는 조금 보이시한 느낌으로 설정해놓은 캐릭터라서 형씨라는 2인칭을 사용하도록 해보았습니다. 그녀의 정체는 아직 비밀입니다만, 머지않아 밝혀질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