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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가자고. 출발한다.”
발레리오가 저택 앞에 선 현애, 시저, 마르코, 그리고 메이링을 부른다.
“시간을 지체하면 장 박사가 또 어디론가 갈지 몰라. 빨리 가자.”
발레리오가 그렇게 말하고서 막 차에 올라타려는데...
“저, 발레리오 씨!”
누군가가 발레리오를 부른다.
“저희도 같이 가요!”
돌아보니, 조제와 외제니가 막 저택 대문에서 나오고 있다. 아직도 숨은 고르지 못하지만, 뛰어다니고 큰소리를 지를 수 있을 정도로, 많이 회복되었다.
“자네들, 안에 도로 들어가! 나으려면 아직 좀 있어야 한다고!”
“아니요, 가야겠어요! 저희도 그 녀석이 싹싹 비는 꼴을 봐야겠다고요!”
“맞아요, 저희도 좀...”
“하, 왜 이리 가겠다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지.”
발레리오는 마지 못해 조제와 외제니도 끼어 준다.
“자, 그럼 뒤에 타게. 대신 어떤 신체적, 정신적 피해가 있어도 나는 책임지지 않겠어.”
“네. 지금 가나요?”
“그럼. 지금 가야지. 지금이 아니면 녀석을 잡을 시간은 없어.”
발레리오는 단호히 말한다.
“저기, 그러면 저희 학교는...”
“만약에 문제가 생기면 내 이름을 대. 그러면 될 거야.”
장 박사의 별장.
장 박사의 바로 앞에서 ‘휘이이-’ 하고 공기가 빨려들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그게 뭡니까, 보스?”
찜찜한 표정으로 가만히 보고 있던 라자가 문득 말을 꺼낸다.
“보면 모르나? 함정을 깔아두려는 거야. 이 저택에 누가 들어오거나 하면, 이걸 터뜨려 버릴 거란 말이지. 이걸로도 녀석들에게는 충분히 위협적이야.”
“그건 그렇고, 보스...”
“왜 그러나?”
“이 주변에 깔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VP재단 요원들의 교신을 도청했습니다.”
“뭔데?”
“보스가 어디 어디에 있다는 내용이 들리는데, 자세한 건 좀 더 들어봐야 압니다.”
“그래? 계속 들어봐.”
장 박사는 겉으로는 제법 자신 있다는 듯, 팔짱을 끼고 발까지 까딱거린다. 헤드셋으로 요원들의 교신 내용을 듣는 라자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하다. 약 1분 정도 들은 후...
“보스, 녀석들이 작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 작전? 무슨 작전을 말하던가?”
“보스가 여기서 농성할 거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 저택의 숨겨진 출입문 같은 곳을 통해 진입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 녀석들, 속임수를 쓰려 하고 있군. 어디 감히 이 장주원을 속이려 들어.”
장 박사는 가소롭다는 듯한 웃음을 흘린다.
“어디 한번 해 보라고 해. 나는 녀석들의 뜻대로 하지는 않을 테니.”
“보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장 박사는 조금 고민하는 듯 턱을 손에 괴더니 입을 연다.
“기다려 봐라. 일단은 자네가 주의를 좀 끌어 줘야 할 것 같은데...”
“제가요?”
“그래. 자네도 거짓 교신을 내보내며 녀석들의 주의를 끄는 거다.”
“하지만, 어떻게...”
“녀석들의 시선을 크게 끌 정도면 되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해 보겠습니다...”
라자는 찜찜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장 박사의 앞에서 떠난다.
그 시간, 엘더 경위와 진언이 탄 순찰차.
“자네 들었나?”
엘더 경위와 진언이 탄 순찰차. 엘더 경위가 초조하게 말한다.
“그 VP재단 이사장이 우리보고 오라더군. 그 장 박사를 이제 잡으려고 하는 모양이야.”
엘더 경위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린다. 그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눈, 입술, 그리고 손끝 모두. 떨리지 않는 곳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도 떨리는군. 드디어 내 가족을 죽인 그 녀석을 대면할 수 있게 되었어.”
“어떻게 하시려고요?”
“일단은, 물어보고 싶어. 왜 그랬는지.”
“그렇군요...”
진언은 침울하게 말한다. 한숨도 푹 내쉰다.
“그건 그렇고, 우리도 뭔가 해야 하지 않나?”
엘더 경위의 목소리가 다시 굵어진다.
“우리도 우리 나름의 방법을 쓰죠, 팀장님.”
“어떻게 말인가?”
“일단 뒤에 저 녀석 있죠?”
진언이 뒤에 앉아 있는 남자를 가리킨다. 그 남자는 하얗게 얼굴이 질린 채, 수갑이 채워진 두 손을 어떻게 하지 못하고 벌벌 떨기만 하고 있다.
“저 녀석을 어떻게 하게?”
“일단은 어떻게 하냐면 말입니다...”
진언이 엘더 경위의 귀에 입을 가까이 가져가고는, 뭐라고 속삭이기 시작한다. 진언의 말을 들은 엘더 경위는 고개를 끄덕인다.
“알겠네. 일단은 저 녀석을 조사한 다음에 데려가 보자고.”
“저 녀석, 이름이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이브라힘 파차치.”
“그렇군요...”
“다들 잘 들어.”
발레리오가 뒤에 앉은 현애, 조제, 외제니에게 굳은 얼굴로 말한다.
“머리를 특히 조심해. 녀석은 머리를 노릴 거야.”
“머... 머리라니요?”
“맞아. 아까도 일어서지 못하게 하고 숨을 못 쉬게 했지? 그게 장 박사의 수법이야.”
“그런데 말이죠...”
현애가 의심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한다.
“왜 하필이면, 머리를 노릴까요?”
“맞아요.”
조제도 맞장구를 친다.
“저희를 공격했을 때는 딱히 머리를 특정해서 노린다든가 그러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사실은 장 박사보다는 그와 연계된 그 녀석이 주로 그런 부위를 노리고 있다고 하는 게 맞지. 아무래도 그 녀석은 나와도 오랜 악연이 있고, 그래서 나를 공격할 수법도 많이 알고 있을 테니까.”
“그 녀석이라는 건... 도대체 누구죠?”
현애의 말을 듣자마자 발레리오의 얼굴이 순간 다시 굳어진다.
“어? 왜 그러세요?”
“아... 아니야. 그냥 옛날 생각이 나서.”
“옛날이라면...”
발레리오는 입을 다물고는, 더 말을 하려 하지 않는다. 그의 얼굴이 침울해진다.
“이사장님.”
운전석에 앉은 요원이 입을 연다.
“거의 다 왔습니다. 장 박사의 은신처까지 약 500m 남았습니다.”
“알겠네. 일단 차를 세우게.”
“참, 그리고 이사장님.”
“왜 그러나?”
“장주원 박사의 손녀가, 메이링 씨가 탄 차에 동승했다고 합니다.”
“그래... 어떻게 같이 탔는지는 모르겠지만...”
발레리오는 착잡하다는 목소리로 읊조린다.
한편 장 박사의 별장.
장 박사는 후드를 뒤집어쓰고서, 홀로그램 모니터를 가만히 응시한다. 아까 전까지 별장 주변에 몇 개 있던 빨간 점들이, 어느새 수십 개로 불어났다. 점들은 장 박사의 별장을 두고 정확히 둘러싸고 있기는 하지만, 거기서 큰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이 녀석들, 이 별장의 위치, 그리고 내가 생각했던 작전까지 다 알고 있는 모양인데...”
화면을 보던 장 박사가 주먹을 꽉 쥔다.
“내가 너희들 뜻대로 할 줄 알았냐!”
장 박사는 소리를 지르고서도 잠시 동안 씩씩거리다가, 잠시 후 ‘후’ 하고 심호흡을 한다.
“절대 그렇게는 안 할 거다. 절대!”
주위를 한 번 둘러본다. 오로지 혼자다. 그의 부하였던 동면인들은 모두 죽었거나 잡혔다. 고용인들 중 알레한드로나 곤트, 파차치는 모조리 잡혔다. 남은 한 명의 고용인인 라자도 그의 명을 받아 별장을 나섰다. 이제 정말 혼자다. 침을 한번 삼키고 잠시 생각에 잠기려던 차. 장 박사는 고개를 강하게 젓는다. 지금 그런 감상에 젖을 시간은 없다. 한시가 급할 때다. 행동해야 할 때다! 다시 한번 모니터를 본다. 빨간 점 중 몇 개가 어느새, 별장의 대문 앞까지 와 있다. 그는 가만히 읊조린다.
“편견은... 나를 가두는 감옥인 법이지.”
약 5분쯤 후.
장 박사는 별장 앞에 나와서 후드를 쓴 채로 배회하고 있다. 주위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요원은커녕, 산책하는 나이 지긋한 사람도 안 보이고, 로봇 같은 것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정말이지,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모든 것들이 ‘소거되었다’고 해도 될 정도로, 너무나도 조용하다.
“그래서 더 이상하단 말이야... 조금 전까지 서성거리던 놈들도 모두 어디로 가 버리고...”
장 박사가 이를 갈며 말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나를 어떻게든 속여넘겨 보려던 모양인데, 너희들 뜻대로는 안 된다!”
이어 장 박사는 더욱 크게 소리 지른다.
“봐라! 나는 이렇게 나왔다! 너희 같은 놈들이 나를 잡을 수 있을 것 같냐!”
그래도 아무 반응이 없다. 아니, 스산할 정도의 찬 바람만이 장 박사의 뺨을 때린다.
“숨지 말고 나와라! 나를 감시하고 있다는 건 이미 다 알고 있단 말이다!”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누구도 보이지 않는다.
“좋아, 아무도 안 나온단 말이지...”
장 박사는 라자와 연락을 시도한다. 귀에 헤드셋을 끼고는 버튼을 눌러서 연락을 시도한다. 그리고 기다려 본다. 하지만 어떤 신호도 오지 않는다. 아무 신호도 그에게 닿는 건 없다.
“왜냐, 왜 라자가 연락을 안 하는 거지...”
초조함에 장 박사는 다시 한번 신호를 보내 본다. 그렇게 1분 넘게 기다려 봤는데, 그래도 아무 연락이 없다. 지직거리는 잡음만 들릴 뿐.
“왜, 왜 연락이 없는 거냐... 왜...”
기다리던 장 박사는 결국 라자로부터의 연락을 포기하고 헤드셋을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그의 머리가 띵해질 정도다. 마음은 굳게 먹었지만, 막상 이렇게 혼자가 되어 버리니, 막막해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래도 주저앉을 수는 없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설마 포위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당당히 맞서야 한다. 지금 같은 상황에, 그런 용기는 더 필요하다...
주먹을 꽉 쥔다. 다시 한번 의지를 다진다. 절대 도망가지 않으리라. 절대.
그렇게 다짐하고서, 장 박사는 투명한 고글을 끼고, 홀로그램을 켠다. 과연, 빨간 점의 위치는 아까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5분 전만 해도 별장 앞에 있었던 점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대신 50m 앞의 거리에 몇 개의 빨간 점들이 보인다.
“이 녀석들, 하다못해 지도까지 조작하기냐...”
?장 박사는 부득부득 이를 간다.
“나보고 비겁하다고 할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속이는 게 비겁하다는 거다... 그렇게 속인다고 해도, 내가 못 알아차릴까 보냐!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라. 당당하게!”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다. 또다시 적막이 흐른다.
“이 비겁한 자식들! 나와라! 나와서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잔 말이다!”
잠시 흐르는 정적.
장 박사는 다시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주먹을 꽉 쥔다.
그때...
“왜, 여기 있다.”
웬 여자의 목소리. 장 박사는 두리번거린다. 뭐지? 지금까지 포착되지 않은 곳에서 나오다니... 도대체 누구지? 분명히 요원들의 위치는 다 파악해 놨을 텐데... 그건 그렇고 VP재단 요원이 ‘나 여기 있소’ 하고 나온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
“또다시 만났네.”
골목 한쪽에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온다.
“이... 이 자식...”
장 박사의 눈에, 보인다. 그 여자가.
“남궁현애... 너...”
“도망가도 좋아. 하지만 반드시 내 시체를 밟고 가야 할걸.”
장 박사가 현애를 돌아본다.
살의를 가득 품은 눈을 하고서.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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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1-02-08 21:40:48
장주원 박사는 혼자가 되었군요. 아직은 그의 부하인 라자도 현재 상황으로서는 즉전력이 될 수 없고...
그리고 상대를 파악하는 것에도 한계가 왔네요.
그러다 불쑥 나타나서 정체를 밝히는 남궁현애의 존재는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일지도...
“만약에 문제가 생기면 내 이름을 대. 그러면 될 거야.” 라고 말하는 발레리오에게서 굉장한 카리스마가 느껴졌어요.
시어하트어택
2021-02-11 23:10:06
사실 저렇게 좀 '센 척'을 하더라도 장 박사의 내면에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죠. 그 두려움의 근원이 뭔지는 계속되는 싸움에서 밝혀질 예정입니다.
SiteOwner
2021-03-12 21:27:29
생면부지의 적을 상대하는 것도 힘들지만, 어제의 동지를 오늘의 적으로 맞아야 하는 것도 결코 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발레리오의 복잡한 심정이 여러모로 이해됩니다.
정정당당 운운하는 것은, 때로는 불의한 목적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내세우는 레토릭에 불과한 경우도 있습니다. 장주원 박사가 외치는 정정당당이 그렇게 보입니다. 어릴 때 일인데, 저에게 도전해 온 또래 애들이 저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게 되면 비겁하느니 운운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애초에 싸움을 거는 것 자체가 뭐가 그렇게 옳은 짓이라고...
다음 회차도 기대됩니다.시어하트어택
2021-03-14 23:10:17
제가 어렸을 때도, 꼭 남을 괴롭히던 사람들이 정작 자신이 당하면 감성에 많이들 호소하더군요. 그런 사람들이 제게 했던 걸 생각하면서 썼던 거라 저도 꽤 실감이 많이 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