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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그건 그렇고...”
세훈이 문득 걱정스럽게 뒤를 돌아본다.
“다른 사람들은요? 10분 넘게 지연되면, 다들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궁금할 거 아니에요? 안 그래요?”
“아, 그건 걱정하지 마.”
“네... 네?”
가브리엘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세훈은 적잖이 놀랐는지 눈이 휘둥그레진다.
“걱정하지 말라니요?”
“한 20분 정도 재웠어. 조금 있다 깨어나면 최대한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주위를 인식할 거고.”
“그걸... 믿을 수 있어요?”
“그럼. 그게 내 능력이거든.”
“어... 정말 괜찮은 건가요?”
“그래. 걱정 말라고.”
가브리엘은 사람들이 잠든 뒤쪽을 한번 돌아본다.
“그건 그렇고 지체하면 안 되잖아. 빨리 가 보자고.”
“아니죠. 가브리엘 씨가 남으세요. 제가 가 볼게요.”
“음...”
가브리엘은 잠시 고민하다가, AI폰을 잠시 보고 말한다.
“잠깐, 누가 미켈 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은데.”
“누가요?”
“우리 크루 중 하나.”
한편, 아래쪽 통로.
“이걸... 이걸 놓지 못하겠냐...”
미켈은 어떻게든 나오미의 주의를 끌어 보기 위해, 일부러 큰 소리로 나오미를 보고 힘껏 버둥거리며 말한다. 웬일인지 초능력은 쓰지 못한다. 미켈 스스로도, 뭔가에 손과 발이 얽혀 있다는 걸 강하게 느낀다. 아까까지만 해도 느끼지 못했던 강한 실들의 연결... 그리고 뜻대로 안 움직이는 손발.
생각난다.
어제의 기억이. 어제의 그 짧은 시간이었지만 잊지 못할 안 좋은 기억이.
“너... 너는 설마...”
“그래. 좀 기억이 나나 보네?”
“혹시... 그 아즈탄이라는 이레시아인하고 같이 다녔냐?”
“그래!”
나오미의 목소리가 점점 올라간다.
“나는 지금을 기다렸단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냐!”
“하, 그래. 네가 그 아즈탄하고 얼마나 각별한 사이였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이건 말해 줄 수 있지. 절대 너희들은 너희들이 원하는 걸 얻을 수 없다.”
“좋아, 정 그렇다면...”
나오미가 막 미켈을 노려보고 공격의 태세를 갖추려는데...
“음?”
나오미의 발 앞이, 차갑다.
내려다본다.
빙판 같은 것이, 금세 나오미의 발 앞까지 뻗어 있다.
“하, 하, 하하하...”
나오미가 자신의 앞에까지 뻗어온 그 빙판을 보고 가소롭다는 듯 웃는다.
“얕은수는 잘 알겠어. 내 주의를 흐트러뜨린 다음 뭐라도 해 볼 생각이었나 본데, 그렇게는 안 되겠거든?”
“하...”
나오미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현애는 다시 나오미의 바로 앞에까지 뻗쳤던 냉기를 더욱 넓게 펼친다. 어제 사적 공원의 무대에서 있었던 그 일을 생각해 보니, 지금 여기에는 나오미가 설치해 놓은 빨간 줄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빙판을 넓게 깔아 놓으면, 그 빨간 줄들이 좀더 선명하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거라면, 움직임을 조종하는 빨간 줄들을 전부 찾아내고, 나오미의 능력을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오미는 오히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낄낄댄다.
“그렇게는 안 되지. 미안하지만, 내 센서는 단순히 타인의 움직임을 억제하고 조종하기만 하는 게 아니거든?”
“그건 또 무슨 이야기냐?”
“미안하지만 그 빙판은 이제 쓸모가 없지. 적어도 나를 공격하는 데 있어서는 말이야!”
“호오, 그래? 그럼 좋아. 나도 나름대로 방법을 쓰는 수밖에...”
현애는 허세를 반 섞어서 말하지만, 나오미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무슨 방법? 내 센서는 다 읽는다니까? 그리고 있으면 벌써 쓰고도 남을 시간일 텐데?”
“......”
“하하, 그럼 없나 보네, 그 ‘방법’이라는 건? 좋아. 네가 우리의 업계 사정에 어쩌다가 휘말리게 된 건 유감이지만, 이제 어쩔 수 없지. 너도 이제...”
나오미가 막 뭐라고 몇 마디 더 하려던 찰나.
쿵-
별안간 나오미의 뒤쪽에서 굉음이 울린다. 그리고...
“야! 여기!”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자루에 온몸이 둘러싸여 있던 미켈의 표정이 밝아진다. 나오미의 뒤쪽에 보이는 반삭 머리의 사파리 복장을 한 남자를 보니, 그건 확신으로 변한다.
“야, 자라! 웬일이야?”
미켈이 보고 반갑게 말한 사람은 다름아닌 자라. 꽤 헐레벌떡 와서 숨이 찼는지, 숨을 가쁘게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하고 있다.
“하... 후... 하도 가브리엘이 닦달을 하길래 와 봤지.”
“가브리엘? 가브리엘도 여기 있었어?”
“맞아. 너 없어지자마자 너 찾으라고 우리한테 아주 귀찮게 연락했다고.”
나오미는 눈앞의 현애, 자루에 묶인 미켈, 그리고 뒤에 서 있는 자라를 번갈아 보다가, 분했는지 바닥을 몇 번 발로 구르고는, 애써 차분해진 척하며 말한다.
“너희들,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아서 가는데, 또 만날 일이 있을 거다. 내가 아니더라도 우리 슈뢰딩거 그룹은 항상 준비되어 있으니, 그렇게 알라고!”
말을 마치자마자, 나오미는 뭐라고 대꾸할 새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나오미가 모습을 감추는 그 순간, 미켈의 손발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던 줄 같은 게 풀린 게 느껴진다. 그 다음은 간단하다. 미켈의 능력을 사용하면 자루 정도는 금방 흐물흐물하게 변한다. 미켈은 연하게 변한 자루를 타고 가볍게 바닥에 발을 디딘다.
“하, 하루는 지난 것 같네.”
“너 과장이 심한 거 아니야? 네 고객들을 생각하면 그런 말은 못 하지.”
“와 줘서 고맙기는 한데, 자라...”
바닥에 발을 딛자마자 미켈이 보는 건 홀로그램 지도. 붉은 점으로 표시된 현재 위치와 푸른 점으로 표시된 가브리엘과 일행이 있는 위치를 비교해 보니 확실히 금방 갈 만한 거리는 아니다. 어림잡아도 10분 정도는 걸려야 도달할 수 있는 거리다...
“이거 어떡하지? 다들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아, 그거? 어렵지 않아.”
자라가 기다렸다는 듯 말한다.
“내 능력이면 되잖아? 길 자체는 빙 돌아가더라도, 지름길을 뚫으면 금방 갈 수 있다고.”
“아... 참. 네 능력이 있었지.”
그리고 약 20분 후.
미켈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고, 가브리엘도 자기 할 일을 하러 갔다. 현애와 세훈을 제외한 다른 일행이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한 건 물론이다.
일행이 통로를 걸어서 도착한 곳은 또다른 넓은 공간. 조금 전의 사원과는 다른 분위기가 풍기는 곳이다. 한가운데에 밋밋하게 보이기도 하는 비석이 하나 서 있고, 주위로는 둥그런 표석들이 정렬되어 있다. 아까의 예배당과는 달리, 이 공간은 전체적으로 썩 화려하지는 않아 보인다. 그래도 아까와는 또 다른 분위기의 장소다 보니, 일행의 호기심은 늘면 늘었지 줄지는 않는다.
“자, 여러분, 또 도착했습니다.”
넓은 공간의 한가운데에 발을 딛자마자, 미켈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낸다.
“그럼 여기서 질문! 여기는 어떤 것을 하는 장소였을까요?”
“음...”
일행은 다들 한번씩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약품 저장고?”
맨 먼저 대답하는 사람은 니라차.
“예술작품 창고?”
듣고 있던 시저도 지지 않겠다는 듯 손을 들며 말한다.
“파울리 씨, 맞나요?”
“음, 글쎄요. 다들 왜 포인트를 못 잡고 계시죠?”
미켈은 일부러 일행을 더욱 자극한다.
“전혀 아니에요. 완전히 어긋났다고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나요?”
“어... 글쎄요?”
“힌트를 주죠. 왜 이곳의 문양은 다른 곳과 다르게 화려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발밑에 있는 둥근 표석들을 자세히 보시죠.”
미켈의 말에 따라 다들 표석을 내려다보는데...
“어? 여기, 깨알같이 뭐가 쓰여 있는데...”
맨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은 세훈. 세훈을 따라, 현애도 몸을 굽히고 표석을 본다. 격자형의 문자가 규칙적으로 쓰여 있고, 한쪽에는 크게 쓰여 있다. 어떤 표석에는 동판이 붙여져 있다.
“이 표석들은 다 무엇이었죠?”
“자, 한번 이쪽을 좀 더 자세히 보실까요?”
미켈은 바로 대답하는 대신 밋밋한 비석에 새겨진 부조를 보여준다. 별 같이 생긴 도형이 하나 그려져 있고, 그 도형들로부터 방사선이 뻗어나가고, 그 밑에 다양한 모양의 작은 도형이 여러 개 모여 있다. 그 옆에는 한 사람이 근엄하게 앉아 있고 그 밑에 여러 사람이 고개를 조아리는 그림도 보인다.
“꽤 엄숙해 보이는 그림들이네요.”
먼저 말을 꺼내는 사람은 니라차의 아버지다.
“이런 그림들이라면, 분명히 가벼운 주제의 그림은 아니겠죠.”
“어, 맞아요, 아저씨!”
그림을 유심히 보던 외제니가 맞장구친다.
“그거, 학교 미술 시간에 배웠던 것 같은데...”
“미술 시간에 우리가 이런 거도 배웠나?”
외제니의 말에 다들 고개를 갸우뚱하거나 머리를 긁는다. 다들 외제니의 말에 동의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글쎄... 이런 그림까지는 못 본 것 같은데...”
“아니, 이런 그림을 봤다는 게 아니고요, 시저 오빠.”
“어? 그러면?”
“전형적인 추모비의 양식이라는 거죠!”
“아...”
외제니의 설명을 들으니 이 비석의 모든 것이 그럴듯해 보인다. 나아가, 이 단순하면서도 엄숙하게 보이는 공간까지.
“그렇다면 여기는...”
세훈과 니라차가 동시에 입을 연다.
“공동묘지, 아니면 영묘 같은 곳이네요.”
“바로 그겁니다!”
미켈이 기다렸다는 듯 세훈과 니라차의 말에 맞장구친다.
“정확히 말하면 아까 우리가 지나온 지하 사원은 단순한 사원 역할만 하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원의 역할은 부차적인 것이었죠.”
“사원의 역할이 부차적인 것이었다면...”
“그렇습니다.”
미켈은 이 한 마디만 하지만, 일행의 머리는 어떤 때보다도 강하게 울린다. 그렇다는 건... 일행이 서 있는 바로 이곳 역시...
“어... 어우!”
세훈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는다.
“아니, 무슨 공포영화 찍는 거 같잖아! 그럼 지금까지 우리가 시체 같은 걸 밟고 서 있었다는 말이야?”
“야! 이게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이야?”
옆에 서 있는 현애가 세훈을 놀리듯 말한다.
“너 전에 공동묘지 같이 간 적 있지? 그 때는 이렇게까지 놀라지는 않던데...”
“야, 묘지라는 걸 알고 가는 거하고 모르고 가는 건 큰 차이가 있잖아! 안 그래?”
“자, 자! 다들 진정하시고...”
미켈이 중간에 끼어 말한다.
“단순한 묘지라면 이렇게 공을 들여 짓든가 하지는 않았겠지요? 그렇다면 어떤 곳이었기에, 이렇게 제법 큰 규모로 지어진 걸까요?”
한편 그 광경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다.
“C구역으로 가려나 보군...”
아니꼽게 그 광경을 지켜보는 짧은 머리의 여자, 다름 아닌 나오미다.
“‘키릴’에게 연락해 봐야겠는데... 아즈탄이나 조나의 선에서 끝날 줄 알았는데, 키릴까지 끌어들이기는 좀 미안하군.”
이어서 나오미는 전화를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아, 여보세요?”
“단장, 지금 좀 바빠?”
나오미의 전화 너머로는 꽤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린다. 딱 들어도 사무실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다.
“지금 밖에 좀 나와 있는데, 무슨 일이야?”
“으... 응? 밖에?”
나오미는 의외였는지 크게 놀란다.
“지금 사무실에서 거래처하고 미팅 있는 거 아니었어?”
“아, 미팅은 맞지.”
나오미는 단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장소가 바뀌기는 했지만.”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마드리갈
2021-07-02 12:52:54
사원, 종교시설 등은 예로부터 묘지를 겸하는 경우가 많았죠.
특히 기독교의 경우는 포교 초기에 로마제국의 탄압을 피해 카타콤이라고 불리던 지하묘굴에 설립된 경우가 많았는데다 중세의 교회는 대체로 묘지를 겸했어요. 지금도 그 관념은 유지되어 있어서,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프랑스의 판테온은 물론 러시아의 경우 국가적으로 무신론을 유지했던 소련시대 크렘린 벽 묘지를 만든 것같은 사례도 있는 등, 이런 것들이 우연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방식 저변에 널리 자리잡혀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이레시아인들 또한 이런 관념을 지니고 있는가 보네요.
또 누군가가 먼발치에서 일행의 동향을 관찰하고 있네요.
굉장히 기분나쁘게 느껴지고 있어요.
시어하트어택
2021-07-04 20:34:19
마드리갈님이 잘 지적해 주셨군요. 작중의 묘지 구역을 묘사할 때도 그런 걸 많이 생각했습니다. 정확히는 고대 이집트 유적에서 모티브를 좀 많이 얻기는 했죠.
다음 화에는 좀 익숙한 인물이 나올 거라고 예고하지요.
SiteOwner
2021-07-11 15:57:06
삶과 죽음은 유리되어 있는 개념이 아니지요. 사실 공존한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유럽의 대도시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유서있는 건물과 그 건물들이 입지한 구시가지란 몇천년 전부터 사람들이 살아오고 죽고 그 후손들이 그 과정을 반복해 온 장소입니다. 사실 양택 음택 하면서 경계를 굳이 나누려는 우리나라 쪽이 좀 특이한 것이긴 합니다. 그렇게 문화가 다르면서도 묘지란 여러모로 공통적인 느낌을 주는 게 참 묘하지요. 여기서도 그 점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전에 썼던 글 중 1986년에 생긴 어느 이름모를 무덤에의 감사가 있습니다. 이것도 참고해 보시면 좋을 듯합니다.시어하트어택
2021-07-11 22:46:19
제가 2부에서 묘사한 묘지공원도 비슷한 관념에서 나왔다고 보면 되겠죠. 사실 이 문제는 다른 작품에서 좀 더 깊이 다루어 보고 싶은데 아직은 준비 단계까지도 못 갔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