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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프터즈] Chapter 19: 파국. Episode 84

Papillon, 2021-11-21 12:00:37

조회 수
143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던 걸까?

떨어지는 빗방울에 물어봐도 대답 따위 돌아올 리는 없었다.

아무리 질문해도 눈앞의 광경은 변하지 않으며, 후회해도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 잔혹한 현실이 오늘따라 너무나도 싫었다.

나는 멍한 눈으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전의 나였다면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정도로 잔혹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정원이 진흙투성이가 되어 있었지만, 흙을 물들인 것은 투명한 빗방울이 아닌 붉게 물든 혈액이었다. 장미를 짓이겨 문댄 듯 적색으로 물든 대지에는 인간의 살점과 부서져 내린 갑옷 조각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인세의 지옥이나 다름없는 그 광경은 분명 내가 만들어낸 것이다.

사람을 죽이는 걸 망설이지 않는 나는 이전에 만났던 블레어와 비슷한 수준의, 아니 그 이상으로 잔혹한 괴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런 괴물이 되면서도 결국은 지키지 못했다.

나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지옥이나 다름없는 정원 한가운데로 향했다.

그곳에는 땅에 역청을 칠한 것처럼 검게 물든 흙이 있었다. 사람의 흔적이 아닌 그것은, 이 장소에서 유일하게 내가 아끼는 것이다.

?

미안하다, 오드리.”

?

하고 싶은 말은 많은데 그 이상의 말이 나오질 않았다.

이럴 때 그 아이가 좋아하던 말조차 못 해주다니, 나 같은 놈이야말로 희대의 머저리나 다름없으리라.

?

빌어먹을.’

?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세계에는 오드리와의 추억을 논할 사람이 없다. 그녀에 대해 회고할 이도, 함께 울어줄 이도 더는 없었다.

내게 남은 건 그저 홀로 그녀를 떠올리며 회한에 잠기는 것뿐.

파국.

문득 그 단어 하나만이 내 마음이라는 배경에 자수처럼 새겨졌다.

?

[역시 내 예상 이상으로 대단하군, 자네는.]

?

그렇게 홀로 마음이 죽어가고 있던 내게 그림자가 말을 걸어왔다.

검은 노인, 혹은 가면을 쓴 사내.

어느새 나타났는지, 얼굴을 인식할 수 없는 그가 내 앞에 나타나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사냥개가 좀 과하게 반응한다고 생각했는데, 확실히 자네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군.]

?

그렇게 말하며 녀석은 내게 손을 뻗었다.

그 손은 순수한 암흑으로 만들어져 있었지만, 대체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인간의 것과 같은 체온이 느껴졌다.

?

[다시 한번 제안하지.]

?

가면 너머에서 감로처럼 달콤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너도 우리와 함께해라.]

?

노예에게 자비를 베푸는 주인처럼, 혹은 신자에게 기적을 내리는 신처럼. 그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또 선명했다.

그 손을 잡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나는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을 쳐냈다.

?

지랄하지 마라.”

?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나는 그에게 살기를 토해냈다.

?

네 놈이 오드리를 그 꼴로 만들지 않았으면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

마음 같아서야 당장에라도 이 녀석을 찢어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조금 전 지나치게 많은 힘을 쓴 대가인지, 온몸이 무거워서 또 싸울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

[그렇군.]

?

내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금도 화가 나지 않았는지, 무감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

[아직은 때가 아닌 게지.]

?

그 자리에서 등을 돌린 그는 나에게 들으라는 듯 떠벌렸다.

?

[자네에게는 앞으로 두 번 더 기회가 있을 걸세. 그리고 시간이 늦어질수록 그대는 불리한 조건 아래에 우리 쪽으로 들어오게 되지.]

?

철벅. 철벅.

피로 젖은 흙을 구둣발로 짓밟으며 그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

[그런데 그거 아는가? 나는 그 아가씨를 되살릴 방법도 알고 있다네.]

?

그 말을 들은 내가 서둘러 고개를 들었지만, 이미 녀석은 내 눈앞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

[그러면 어디 힘내서 다음번 불행을 막아보도록 하게.]

?

다음 불행?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내용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다음 불행이라는 건 구체적으로 무엇은 말하는 걸까? 아니, 그 이전에 무언가가 일어나기는 한다는 것일까?

그 사실에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

심부름꾼 사무소 근처에서 대규모의 신력이 폭풍처럼 몰아치기 시작했다.

?

설마?!’

?

두 번 더 불행이 있다.

그 말에서 나는 불길한 사실을 깨달았다.

잊고 있었다.

내게는 지켜야 할 이가 아직 둘이나 더 있다는 사실을.

에스텔 그리고 빅토리아.

휴가를 나간 에스텔은 둘째치더라도, 빅토리아는 아직 심부름꾼 길드에 있을 게 뻔했다.

?

젠장!’

?

혀를 깨물어 피를 흘리자, 뻣뻣하게 굳어 있던 팔다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혀의 통증으로 근육통을 못 느끼게 만든 임시조치에 불과했지만, 지금 당장 움직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

강림.”

?

온몸이 무너지는 것 같은 통증을 이겨낸 채, 나는 다시 한번 사도의 갑주를 입었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싸울 수 있을까? 아니, 티나 크루거가 끌고 온 것 같은 군세가 있다면 내가 또다시 이길 수 있을까?

?

생각은 나중에.’

?

일단 지금은 빅토리아를 지켜야만 한다.

그리고 지켜낸 뒤에 어떻게든 그 가면 자식을 붙잡아 오드리를 되살릴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

?

움직여야 해.’

?

전력을 다해 심부름꾼 길드 쪽으로 움직이며, 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

?

*** ***

?

?

뭐지, 조금 전 그건?’

?

무언가 코끝을 간지럽히는 것 같은 이상한 감각에 빅토리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사도의 힘을 대부분 잃은 이후, 신력을 느끼는 감각 역시 이전보다 약해졌다.

?

분명 신력이긴 한 것 같은데.’

?

하지만 대체 무엇일까?

강력한 것인지, 약한 것인지. 근처인지, 먼 곳인지 정확한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

에스텔이나 그레고르가 근처에 있다면 물어볼 텐데.’

?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두 사람 모두 근처에 없었다.

오드리가 그레고르를 돕는 일에 집착하게 된 이후, 에스텔이 할 일은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무언가 그녀가 모르는 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 같은데, 빅토리아는 그것을 물어볼 정도로 에스텔과 친하질 못했다.

그리고 그레고르는…….

?

뛰쳐나갔었지?’

?

아마 저 신력의 폭발과 관련된 일 때문인 것 같기는 한데, 자세한 건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고개를 갸웃거리던 빅토리아는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누군가를 보며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

, 네가 왜 이 자리에 있어?!”

?

놀란 그녀의 두 눈동자에 아름다운 외모를 한 사람이 들어왔다.

창백한 피부에 여자보다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지만, 그 상대가 남자라는 것 정도는 빅토리아 역시 알고 있었다.

블레어, 어째서인지 그가 지금 이 심부름꾼 길드에 와있었다.

?

흐흥. 나는 이전부터 와있었어. 원래는 그레고르랑 대화 중이었는데 뛰쳐나가 버렸지 뭐야~.”

?

그런 빅토리아에게 블레어는 지루하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빅토리아는 그 사실을 묻지 않았다.

설령 묻는다고 대답해 줄 리도 없겠지만, 그것을 알게 된 순간 녀석이 공격해 올 것으로 생각했다.

?

그건 그렇고 이제 곧 이려나~?”

?

빅토리아는 그런 블레어를 계속해서 경계하고 있었지만, 블레어는 빅토리아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체내에 시계라도 있는 것인지, 눈을 감고 시간을 가늠하던 블레어는 천천히 눈을 떴다.

아무래도 그가 기다리던 무언가가 이제 시작하려는 모양이다.

?

, 왔네.”

?

그 말에 빅토리아가 긴장하는 순간, 갑자기 건물의 벽 한쪽이 무너져 내렸다.

?

꺄악!”

, 뭐야?!”

?

길드 내에서 일하고 있던 길드원들이 모두 경악한 표정으로 벽면을 바라보았다.

마치 장난감 나무 블록의 한 조각을 빼낸 것처럼, 벽면이 너무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서 붕괴했다.

그 벽면 뒤에는 검은 갑주를 입은 덩치 큰 사내가 있었다.

일반적인 갑주와는 전혀 다른 기괴한 형태의 갑주였지만, 빅토리아에게는 눈에 익은 모습이었다.

?

저건 그 자식이잖아?’

?

사도. 그것도 그레고르와 함께 만났던 마이어스 가문의 남자가 변신한 모습이다.

존 마이어스라고 했던가?

무례했다는 것 기억이 나지만, 묘하게 이름만큼은 잘 떠오르질 않았다.

?

뭐 중요한 건 이름이 아니지.’

?

중요한 건 지금 그가 무언가 나쁜 의도로 온 것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좋은 의도로 왔다면 벽면 따위를 무너뜨리고 나서진 않았을 테니까.

?

일단 모두를 대피시켜야 하는데.’

?

빅토리아가 고민했지만, 딱히 답이 나오질 않았다.

애초에 길드 신입에 불과한 그녀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줄 길드원은 이곳에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가 끙끙거리는 사이에 어느 사이엔가 몇몇 사내들이 존 마이어스에게로 다가갔다.

본래 마도기사나 전투마법사 같은, 전투력이 뛰어난 길드원들이었다.

존 마이어스를 제압하려는 듯, 그들의 손에는 무기가 하나씩 들려 있었다.

?

저 바보들!’

?

그 모습을 이제 파악한 빅토리아가 서둘러 그들을 구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지 오래였다.

파삭-!

날달걀이 깨질 때처럼 너무나 간단하게 존 마이어스에게 다가간 사내들의 머리통이 깨져나갔다.

사도야행의 은밀성을 중시하던 4대 가문의 사도가 보여서는 안 되는 행동이었지만, 이미 그런 것 따위는 존 마이어스에게 장애가 되질 않았다.

존 마이어스는 자신이 죽인 시체들을 쓰레기처럼 버려두고, 천천히 시선을 움직였다.

그와 눈이 마주친 사람들이 비명을 터뜨렸지만, 마치 상대를 해충으로 취급하는 것처럼 그는 그저 조용히 그들을 무시했다.

그렇게 움직이던 그의 시선이 한 장소에 멈췄다.

그리고 그것을 인식한 순간, 빅토리아는 서둘러 전력을 다해 그 자리에서 이탈했다.

파사삭-!

조금 전 빅토리아가 있던 장소에 있던 가수가 삽시간에 삭아 들어갔다.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 초고속으로 가구를 갉아낸 것처럼 보였다.

?

저 자식 언제부터 저렇게 강해진 거지?’

?

그 모습을 보고 빅토리아의 등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분명 전에 만났을 때만 해도 권능을 단순히 활용하던 녀석인데 어째서인지 이상할 정도로 강해졌다.

?

헤에, 쟨 저런 식으로 할배가 준 걸 썼나 보네~. 부하로 두기보다는 장작으로 쓰겠다는 거려나~?”

?

그런 경악스러운 모습을 보고도 블레어는 태평하게 과자를 오도독 씹어 먹었다.

아무래도 존 마이어스가 빠르게 강해진 이유를 아는 것 같았지만, 빅토리아에게 말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

집중해!’

?

자기 자신에게 속으로 외치며, 빅토리아는 얼마 되지 않은 신력을 움직였다.

그레고르의 봉인이 풀린 걸 모르는 그녀는, 지금 이 상황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도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

일단 이 자리에서 벗어난다.’

?

그렇게 해야지 길드원도 자기 자신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빅토리아는 전력을 다해 발을 굴렀다. 질풍이 그녀의 뒤를 밀며, 그녀의 신형이 평범한 사람은 볼 수 없는 수준까지 가속했다.

하지만 사도에게는 너무나 느린 움직임이었다.

그녀의 움직임을 예상하기라도 한 것인지, 존 마이어스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빅토리아의 다리를 잡고 휘둘렀다.

콰직-!

그대로 벽에 부딪힌 빅토리아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갈비뼈가 부러져 폐를 찔렀는지,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본래라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 순간 그녀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그녀가 휘둘리면서 먼지가 블레어에게 휘날렸고, 블레어의 옷이 나뭇조각으로 더러워졌다.

?

헤에? 할배가 준 힘으로 나한테 먼지를 묻히네~.”

?

그렇게 말한 블레어의 눈에 스산한 안광이 스쳐 지나갔다.

그레고르와 대화할 때와는 전혀 다른 섬뜩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

할배가 그냥 놔두라고 했는데, 짜증 나네~.”

?

블레어는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그의 정체를 모르는지, 존 마이어스는 그를 신경 쓰지 않은 채 빅토리아를 향해 주먹을 내리쳤다.

그 순간.

?

강림.”

?

블레어의 음울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신력이 수압처럼 모든 것을 짓눌렀다.

그리고 그 수압이 사라졌을 때.

그곳에는 괴물이 있었다.

?


Papillon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4 댓글

마드리갈

2021-11-22 22:44:40

오로지 싸움에 집중하는 것조차 100% 가능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데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정말 힘든 상황이죠. 그들을 포기할 수도 없으니까요. 에스텔은 그나마 독자적으로는 대응할 수야 있겠지만 빅토리아에게는 그게 가능할지...우려한 상황이 결국 현실화되네요. 블레어의 저 끔찍한 화법에 존 마이어스의 공격까지 함께...


큰 악은 작은 선으로 포장되어 있다는 경구가 새삼스럽게 무섭게 느껴지고 있어요. 그레고르에게 선택지는 주어졌지만 선택할 수 없으니...

Papillon

2021-11-28 16:25:32

빅토리아는 지금 일행 중 최약체다 보니, 혼자 있을 때는 위기에 빠지기 쉽죠.


선택이라는 것이 늘 그렇죠. 언뜻 자유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유가 아닌 경우도 많고요.

SiteOwner

2021-12-04 14:03:27

어딘가의 파락호처럼 행패를 부리는 협박도 무섭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정중한 말투로 제의하는 것은 더욱 무섭습니다. 보통 전자의 경우는 파락호가 자신보다 더욱 강한 상대를 만나거나 공권력이 개입된다든지 해서 그 행패가 통하지 않으면 상황은 종료되지만 절체절명의 상황하에서의 정중한 제의는 그 객체가 된 사람의 마음 자체를 뒤흔들어 놓다 보니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약간 다르게 표현하자면 전자의 경우는 출발점이 외부, 후자의 경우는 출발점이 자신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레고르의 고민이 그래서 깊은 게 아니겠습니까. 고민만 하고 있기에는 허락된 시간도 역량도 없지만...


하늘이 무너진다는 게 이런 것 같습니다. 빅토리아가 맞은 상황이 너무 좋지 않군요.

Papillon

2021-12-07 21:06:47

위기의 순간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내놓는 상대만큼 무서운 게 없죠. 그레고르의 처지가 상당히 난처해졌습니다.


참 좋지 않은 상황이죠. 전성기 시절의 빅토리아라면 별일이 아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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