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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어느 순간에 알게 된 새로운 세계.
아이란은 그 새로운 세계가 마냥 신기했고 또 그 세계를 알아가는 게 즐거웠다. 미남들의 우정이 단순한 우정이 아니라니, 그것보다 더한 신세계는 없었다. 거기에다가 그 세계를 더욱더 깊게 파고 들어갈수록, 거기서 얻어지는 이런저런 정보는 점점 쌓였다. 생각 외로 많은 인물들 간의 관계와 그것을 다룬 작품들의 양에, 아이란도 놀랄 정도였다. 그 놀라움과 호기심은 금세 차츰 아이란은 자신과 관심사와 취미가 같은 사람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인터넷이나 SNS에 들어가 보면 아이란과 취향뿐만 아니라 주로 관심이 있는 캐릭터들까지 공유하는 사람들이 생각 외로 많았다.
차츰 자신감을 얻자, 아이란은 바로 다음 단계로 들어갔다. 온라인뿐만 아니라, 오프라인에서 같은 관심사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기에서 아이란은 난관에 봉착했다. 그냥 이야기나 들어주는 정도면 다행이고, 거부감을 보이는 동급생, 선배, 후배들이 대다수였다. 즐기는 작품들의 범위와 좋아하는 캐릭터의 범위가 상당히 겹침에도, 아이란이 이야기하는 ‘그 세계’에는 질색부터 하고 보는 후배도 있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점점 멀어지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아이란은 얼른 깨닫지는 못했지만, 그 이후로 인간관계도 점점 좁아졌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가 찾아간 곳이 만화부였는데, 비슷한 취향을 지닌 부원들이 좀 있었음에도 점점 아이란은 다른 부원들에게서도 멀어져 갔다. 당연히 아이란이 취한 일련의 행동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란이 모르는 사이에 아이란에게 생겨난 게 하나 있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과 멀어지는 상황에서 정신적으로 코너에 몰려 있던 차. 아이란의 초능력은 우연한 기회에 발현하게 되었다. 그것은 약 한 달쯤 전, 아이란이 저녁에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였다. 어깨가 조금 따끔거리기는 했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로 뭔가 달라졌다. 없던 힘이 생겨나는 것 같기도 했고, 눈에 이상한 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이윽고 초능력이 생겼음을 알게 되자, 시험 삼아 자신을 괴롭히던 불량배에게 그 능력을 사용해 보았더니, 그 불량배는 무엇인지 모를 깊은 공포심에서 나오는 비명을 지르더니, ‘살려 달라’고 울부짖으며 머리를 싸매고 도망갔다.?
그 이후로 몇 번 적대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에게 싫어하는 기억을 일깨워 주니, 아이란에 대한 공포감이 들게 되어 아이란을 꺼리게 되기를 몇 번. 아이란은 자신을 지킬 수 있었으나, 그만큼 벽은 더 높게 쌓았다.
그리고 지금, 아이란의 앞에는 또 다른 큰 벽이 놓여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아이란 자신이 쌓아 올린 것이기는 하지만...
“하, 나는 또 거창한 답이 나올 줄 알았는데.”
나디아가 아이란의 말을 듣고는 코웃음을 치듯 짧은 숨을 뱉어내며 말한다.
“고작 네 취향을 설파하려고 하는 게 이유였다고?”
“그러니까 너는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인데, 그게 내게 어떤 의미인지 너는 몰라!”
아이란이 목에 힘을 주자 나디아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 말한다.
“그래서,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여기에 와서까지 다른 부원들하고도 담을 쌓고, 여기 나한테도 그 끔찍한 느낌을 주고, 그랬다는 거 아니야?”
나디아의 그 말에, 아이란의 눈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뒤집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조금 전, 나디아에게 그 습한 기운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기 바로 전의 그 모습이다.
“너... 너... 너!”
여기까지에 이르자, 그때까지 상황을 방관하는 것처럼 보였던 윤진도 앉아 있던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더니, 한 부원 쪽으로 시선을 둔다. 미린중학교 교복을 입은, 양갈래로 머리를 묶은 여학생이다. 안대도 하고, 알록달록한 장식물을 배지처럼 부착한, 딱 봐도 시선이 쏠리게 생긴, 그런 여학생이다.
“저는... 왜요?”
그 여학생이 윤진을 돌아보자, 윤진은 바로 그 여학생에게 가서 귓속말로 뭐라고 조곤조곤 말한다. 그러자, 그 여학생은 뭔가를 예감이라도 한 듯, 조금은 들떠 있는 듯하던 표정이 굳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고서 자리로 돌아와 앉은 윤진은 혼자 중얼거린다.
“이러다가 소란스러워지면 안 되는데... 제발 저 애까지 나서게 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한편, 그 광경을 보던 민과 유, 리카도 상황이 제법 심각한 게 아님을 눈치챈다. 보던 책을 잠시 내려놓고 나디아와 아이란이 말싸움하는 쪽을 돌아볼 정도면 말이다.
“야, 너 한번 나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그래, 상황이 좀 안 좋네. 이 정도면 내가 나가야 되는 건가...”
하지만 그러면서도 민은 여전히 소극적이다. 괜히 또 나갔다가 귀찮게 될까 봐 그렇다. 하려면 할 수 있겠지만, 윤진의 말은 그만큼 무게감이 있게 들린다. 민이 잠시 주춤하는 모습을 본 건지, 옆자리에서 누군가가 입을 연다.
“할 거면 하고 말 거면 말고!”
민이 돌아보니, 현애다. 나디아와 아이란이 있는 쪽을 돌아본다든가 하지는 않았어도, 꽤 짜증이 섞인 얼굴이다. 아직 행동을 취하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꽤나 신경이 쓰이기는 한 모양이다. 찬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게, 한눈에 봐도 보인다. 아지랑이 같은 게 피어오르는 게 희미하게 보인다.
“하, 답답해. 뭘 그렇게 우물쭈물하는 거야. 할 거면 나처럼 하라고!”
현애가 막 자세까지 취한 바로 그 순간...
나디아가 얼굴을 찡그린다. 가장 싫은 기억이, 나디아의 머릿속을 채운다. 마치 검은 물감이 도화지에 가득 스며들 듯 말이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채 3초도 걸리지 않는다.
“으, 으으으...”
이윽고 머리를 싸맨 나디아는 눈을 까뒤집는 듯하더니 이내 금방이라도 아이란에게 달려들 듯한 기세다. 하지만 아이란은 짐짓 생각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공격이고 뭐고 제대로 되지 않을 거라고. 아이란 자신도 시야가 방해가 되어 잘 보이거나 하지 않음에도, 결정적인 한 방을 준비한다.
“내가 이런 것까지는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안 되겠어. 네 생에 있어서 가장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게 해 줄 테니...”
아이란이 그렇게 말하는 걸 듣자마자, 지온이 벌떡 일어난다. 지온 자신에게 초능력이 없는 건 둘째치고, 지금 상황은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물론, 금방 윤진에게 제지당해서 도로 자리에 앉기는 하지만.
“아니, 형은 왜 가지 말라는 건데요?”
지온이 지금 윤진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음에도 불구하고 윤진은 오히려 태연히 말한다.
“나도 다 생각이 있거든.”
“네...?”
“괜히 끼어들었다가 또 못 볼 꼴 보면 안 되니까.”
“아니, 형, 그건 말도 안 되잖아요. 그냥 있으라는 게 말이 돼요?”
“좀 들어 봐.”
그러면서 윤진이 한번 돌아보는 쪽을 보니, 아까 윤진이 찾은 그 양갈래 머리의 여학생이 조금 긴장된 표정을 하고 나디아와 아이란 쪽을 보고 있다.
“저 애는 또 왜요?”
“무슨 일이 터지면 저 애가 뭘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직 그렇게 활약하는 걸 본 적도 없을 텐데.”
“알게 될 거야. 저 애가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여전히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고는 지온이 한번 또 돌아보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부원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귀찮음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려 하지 않는 민은 제외하고서라도. 두 명에 한 명꼴로 자리에서 일어섰거나 엉덩이를 막 뗀 상태라는 걸 알 수 있다. 만화부원들이 아니더라도 카페 안의 다른 손님들 중에서도 이쪽을 돌아보는 사람들이 두 명 정도는 보인다. 정말이지, 지온에게 이 상황은 한숨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상황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란은 이제 아무것도 눈에 뵈는 게 없는지, 다른 부원들이 자신을 말리려고 나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나디아를 향한 일격만 생각하고 있다. 다행히, 공격은 잘 들어간 것 같다. 저렇게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아이란, 너어어어어-!”
아이란에게 무서운 기세를 보이는 나디아를 보자 아이란은 짐짓 놀란 척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도한다. 저 정도로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다면, 분명히 심각한 피해를 주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으은...!”
상황은, 아이란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돌아간다. 나디아의 그 분노가 향하는 방향은 명확하다. 그건 바로, 나디아의 앞에 서 있는 아이란.
“너의 그 취향 설교가 제일 싫단 말이다-!”
큰일났다. 나디아가 자리를 확 박차고 일어나더니 아이란을 바로 향해 달려들려는 자세를 취한다. 초능력으로 어떻게 대처할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아이란의 능력은 그런 능력이 아니다. 더군다나 아이란의 그 능력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 버린 지금의 상황에서는 더더욱.
“어... 어? 이게 아닌데...”
아이란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 때문인지, 아이란은 적잖이 당황했는지, 다음에 자신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인지도 순간 잊어버리고 우왕좌왕한다. 그러면서도 나디아가 자신을 향해 점점 달려드는 건 무서웠는지,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린다. 하지만, 그런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문제다.
“나한테... 그 끔찍한 설교를 다시 떠오르게 해?”
그 순간을 목격한 윤진은 다급히 옆에 앉아 있는 그 양갈래머리 부원을 돌아보며 말한다.
“이제 네가 나서 줘야겠는데. 이 상황을 좀 정리해 봐.”
“네... 네!”
그 여학생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말한다. 역시, 이 상황이 내키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렇게 막 일어서는데...
“후... 이미 상황은 다 끝났어요, 형.”
지온의 목소리가 들린다. 뭔지 모르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도 들린다.
“으... 응?”
윤진이 보니, 나디아와 아이란은 금방이라도 서로에게 달려들 듯한 기세지만, 그 자리에서 다른 데로 움직일 수는 없다. 두 발이, 뭔가에 붙잡혀 있는 것인지. 두 팔만 허둥거릴 뿐이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내 발은!”
“아이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봐! 내가 했냐?”
나디아는 그렇게 큰소리는 치지만, 역시 당황한 표정이 역력하다. 움직이지 않는 발을 자세히 보니, 마치 접착제로 신발 밑창을 바닥에 붙여놓은 것 같다. 발바닥이 좀 차가운 것 같다고 생각하지만, 신발만 벗으면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발도 뗄 수가 없다. 발이, 바닥에 붙어 버렸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그러면 어떻게...”
문득 보니, 눈앞의 아이란은 엎어지면 코 닿을 만한 거리임에도 손을 좀처럼 나디아에게 닿지 못하고 있다. 뭔가 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마드리갈
2022-08-26 15:56:18
아이란의 그 환상, 어떤 건지 알 것 같아요.
한일 양국에서 본 두 사례가 생각나니 언급해 볼께요.
일단 우리나라에서 본 사람은 한겨울에 반팔 상의와 반바지를 고집하던 20대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었는데, 헤나인지 문신인지는 몰라도 드러난 두 팔에 인기 남성아이돌 이름을 한 팔에 2명씩 써놓고 커플링을 암시하는 기호를 써놓고 있었어요. 게다가 지하철 내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그 아이돌들의 커플링 이야기를 하고 안 들어주면 화를 내고 그러기까지 했죠. 저는 당장 다음 역에서 내렸어요.
그리고 일본에서 본 사람은 대형서점 구내의 BL(=Boys' Love)만화 전문코너에 있던 여학생. 작은 체구의 귀여운 인상의 여자아이였는데 중학생 같아 보였어요. 그리고 조용히 BL만화를 보면서 혼자 좋아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대체로 서점 내는 조용하다 보니 딱히 트러블이 일어날 여지는 없었지만요.
아이란이 스스로 쌓은 벽,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스스로를 가두어 버렸어요. 그 심정도 이해가 되네요.
저도 한때 그렇게 스스로 벽을 쌓아서 자신을 지킬 수는 있었지만 다른 인간관계 자체를 폐기한 적이 있었거든요. 사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지금의 저는 없었겠지만...
아이란과 나디아의 충돌은 일단 저지되었지만 그 방법은 그것대로 이상하네요. 그것도 굉장히 나쁜 방법으로.시어하트어택
2022-08-31 20:26:07
의외로 인터넷상에는 저런 유형의 사람들이 많이 보이더군요. 그렇다고 해도 아이란처럼 현실에서까지 저렇게 하는 유형은 많지는 않겠지만요. 아이란의 그 열정이 너무 강했기에 저렇게 벽을 쌓아 버린 건지도 모릅니다.
SiteOwner
2022-08-28 20:16:37
개인에 따라서 여러모로 다양한 취향이 있지요. 그런데 이것을 자신의 마음에만 담고 있으면 병이 날 것 같은 사람도 분명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혼자 있으면 자신이 혹시 변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고 그렇겠지만,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의 존재가 있다면 상황은 일전하기 마련입니다. 아이란이 왜 그랬는지는 충분히 이해됩니다.
자신의 심리 속에 떠올리기 싫은 것도 분명 있고 저도 그렇습니다. 나디아는 그 점을 잘 이용하는군요.
그러고 보니 저도 나디아처럼 그런 적이 있습니다. 초능력을 쓴 것은 아닌데다 기본적으로는 타인과 관여하고 싶지는 않아하지만, 만일 특정 타인이 저를 공격하려 하면 그의 약점을 찔러버리는 방식으로 타격을 입혀 버립니다. 그래서 나디아의 경우도 이해를 못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저렇게 마찰을 일으키는 장소를 생각하면...
머리를 싸쥘 수밖에 없겠군요. 적어도 저는 그러합니다.
시어하트어택
2022-08-31 20:28:10
저도 창작활동을 시작한 건 순전히 '내가 가진 아이디어를 나만 품고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죠. 다만 그 생각을 어떤 방식으로 표출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아주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둘의 충돌이 저런 식으로 끝나게 된 건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