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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젤로와 재연이 서로 기묘한 대결을 시작하는 바로 그때, 그로부터 조금 떨어진 옆에서는 라일라가 민을 비롯한 만화부 후배들에게 둘러싸여 만화책 한 권을 들고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그런데... 민이랬나? 너 혹시 이거 읽어 본 거 맞지?”
라일라는 민이 쥐어 준 만화책을 몇 번 넘겨보더니, 이윽고 마음에 들었던 건지 약간 싱글벙글하는 표정을 짓고서 말한다.
“이런 걸 나한테 다 추천해 주다니! 역시 너는 보는 눈이 있어!”
“에이, 그건 아니고, 그냥 요즘 유행하길래 읽어보라고 준 거죠.”
민이 라일라에게 준 만화책의 제목은 <힘센 그녀가 보디가드?>. 대략적인 줄거리는 어딘가 모를 괴력을 지닌 여자 주인공이 주변인과 겪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다. 라일라는 꽤 마음에 들었던 건지, 몇 번 더 보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연다.
“이거, 딱 내가 아는 후배하고 비슷한 캐릭터인데.”
“어...”
옆에서 라일라의 말을 들은 리카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후 입을 연다.
“저기 베로니카 선배요?”
“아니야. 여기 나오는 ‘레라’라는 애처럼 좀 뭐라고 해야 하나... 최근에 초능력이 하나 생겼고, 그걸 가지고 이거저거 하고 싶은 애야. 어린 시절 베로니카처럼 운동을 좀 많이 좋아하지.”
“어... 그래요?”
민이 얼핏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냥 스쳐만 지나갔을 수도 있고, 아무튼 누군지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지금 딱히 중요한 건 아니기는 하지만 말이다. 라일라는 그 책이 마음에 들었는지, 옆에 있는 줄리안을 돌아보며 말한다.
“혹시 이거 2권 다음도 여기 있어?”
“아... 물론이죠!”
한편 그 시간, 도서관. 한쪽에 마련된 원형 테이블에 도서부원들과 취미로 요리하는 모임의 부원들이 둘러앉아 있다. 도나텔라는 지금 이 시간에 자기네 동아리방이 아닌 다른 곳에 있어서 그런 건지, 어딘가 좀 불안해 보이는 시선을 보이기도 한다. 그걸 보자마자, 리하르트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너희들, 너희 동아리방 벗어난 게 오늘이 처음이지?”
“어... 맞아.”
리하르트의 말에 도나텔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사실 취미로 요리하는 모임의 정체성은 ‘요리’이기 때문에, 거의 항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부활동 시간이 되면 무엇이 되었든 요리를 하는 것으로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곤 했다. 비록 그날그날 하는 요리가 망한 요리를 넘어서 사람이 먹기도 힘든 무언가가 되는 날이 있어도, 만들 때의 즐거움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도서관이라는 곳은 그런 활동과는 매우 상반되는 곳이다. 무엇을 먹는다는 게 제한됨은 물론, 음식에서 나는 냄새마저도 제한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다가 조리를 할 때 사용하는 연료를 사용할 수 없음도 물론이다.
“하긴... 그렇기는 하지. 하지만 도서관이라는 곳에 또 맞는 무언가를... 해야겠지?”
도나텔라는 여전히 조금은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리하르트의 그 말 자체에는 동의를 하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 오늘은 좀 양보를 해 줄 수 있지만.”
“어... 정말?”
“그래.”
도나텔라가 믿기 힘들다는 듯 되묻자, 리하르트는 ‘뭘 그런 걸 다 묻느냐’는 듯, 미리 준비해 온 무언가를 가져온다. 리하르트가 직접 끌고 온 서가에는 요리책들이 잔뜩 꽂혀 있고, 대부분은 마치 화보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화려한 그림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리고 리하르트는 그 요리책들 중 한 권을 꺼내서 도나텔라에게 건네 준다.
“이걸 왜?”
“책을 보면서 즐길 수 있는 요리도 있지.”
“그게 무슨...”
도나텔라는 그렇게 되물으려 하지만, 그 요리책에 나온 걸 보고는 바로 고개를 끄덕인다. 대부분 디저트 종류에, 푸딩과 아이스크림도 보인다.
“자, 이제 이걸 만들어 보자고. 나는 얼마든지 도전할 의향이 있다고.”
“하지만 재료는 어떻게...”
도나텔라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옆에 앉아 있는 카즈를 돌아본다. 카즈는 책에 나와 있는 그 디저트 종류는 무리라고 생각했던 건지, 고개를 가로젓는다. 지금까지 육류 같은 것만 만들어 봤지 아이스크림이나 푸딩 종류는 만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취미로 요리하는 모임 부원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리하르트는 기다렸다는 듯, 옆에 앉아 있는 세훈에게 눈짓을 보내서 뭔가를 가져오라고 시킨다. 세훈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곧장 도서관 한쪽에 있는 창고에서 무언가를 꺼내서 곧장 이쪽으로 가져온다. 카트에 있는 건 어디서 준비해 왔는지도 모를 디저트 재료가 들어간 통들이다.
“이건 어떻게 다 구했대...?”
도나텔라는 거기 놓인 식재료들을 보더니, 할 말을 잃기라도 한 건지 눈을 떼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
그 시간, 격투기 동아리방.
“그래, 그래! 이거지...”
셰릴은 한쪽에서 중얼거리며, 몰래 촬영용 카메라를 하나 꺼내서는, 대련이 막 시작된 조르주와 로베르토를 찍기 시작한다. 조금 전에 분명히 조르주가 주의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모두의 이목이 셰릴에게서 벗어난 틈을 노리는 건 어렵지 않다. 그것만 잘 하면 카메라를 켜고, 방송을 켜는 건 순식간에 끝날 일이니 말이다.
‘이거야! 이제 여기서 켜기만 하면 시청자는 쏟아져 들어올 거라고! 내가 누구겠어? 게임 방송 말고도 이런 것도 잘 한다고! 자! 자! 들어와라! 들어와!’
하지만 셰릴이 그렇게 막 카메라를 켜기도 전...
“저기, 선배님...?”
격투기 동아리 부원 ‘파울’이 문득 셰릴을 보더니 셰릴에게 와서 제지한다.
“지금 들고 있는 그건 뭐죠? 듣자 하니, 지금 동아리 교류행사를 하는 중인데, 혼자서 뭘 켜 놓고 누군가한테 이상하게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파울의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한다. 셰릴이 파울을 귀찮게 여기고서는, 막 뭐라고 말을 이어가려던 파울의 머릿속을 마치 휘저어 버리기라도 한 듯, 파울의 다음 말을 떠오르지 못하게 막아 놨기 때문이다. 셰릴의 능력이, 파울에게 발동한 것이다.
“어...?”
파울은 갑자기 떠오르지 않는 말을 이상하게 여겼는지, 가만히 그 말을 떠올려 보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점점 더 이상하게 상황은 돌아간다. 조르주와 슬레인을 포함, 동아리방에 있는 거의 모두가 파울을 돌아본다. 파울이 아무리 봐도 이상하고도 어색한 행동을 보이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야, 파울, 뭐 해? 왜 그렇게 머뭇거리고만 있는 거야?”
“아, 아니, 선배님, 저는 그러니까...”
파울이 말을 계속 더듬자, 조르주는 이상하게 여기고서는 뭔가 물어보려다가, 때마침 셰릴이 자기 방송을 하고 있는 걸 보게 된다.
“저기 셰릴? 아무리 네가 좋아하는 거라도 기본적으로 남의 동아리방에 왔으면 지켜줬으면 하는 게 있는데...”
조르주가 그렇게 말하는 걸 셰릴은 막아보려고 하지만, 금세 깨닫게 된다. 자신의 능력은 한번에 한 명씩밖에 유효하지가 않다. 그렇다면 후배들을 불러서 뭐든 해야 하지만, 그러기에는 지금 모두의 시선은 조르주와 로베르토가 하는 경기에 가 있다. 즉, 조르주는 지금 셰릴과 파울 쪽에 온전히 관심을 쏟을 수 없다. 그리고 지금 돌아가는 이 상황을 파악한 셰릴은 곧장 다른 쪽으로 생각이 닿는다.
‘네가 경기를 하고 있는데, 나한테 신경을 쓸 틈이 어디 있어? 어디 봐라, 나는 더 재미있는 방송을 할 테니.’
그렇게 다른 후배들과 자신의 앞에서 뭘 할지 몰라서 가만히 있는 파울을 놔두고서, 방송을 속행한다. 그런데, 셰릴을 노리는 복병은 또 하나 있다.
“저기, 선배님.”
“뭐, 뭐야? 왜 또...”
격투기 동아리의 또 다른 부원이 자신을 부르자, 셰릴은 그렇게 대응하지만, 이윽고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알고는 곧 또다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지금 파울에게 쓰고 있는 능력을 또 자신의 앞에 있는 여학생에게 쓰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나는 단지, 여기서 뭘 하고 있냐면...”
그리고 셰릴의 예상대로, 그 여학생은 촬영장비를 셰릴로부터 빼앗으려고 하며 말한다.
“지금 얌전히 줄래요, 아니면 저하고 한판 하고 줄래요?”
셰릴의 머리가 순간 회전한다. 양자택일의 이 상황에서 셰릴의 판단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지금 이 상황에도 방송에 대한 희망을 놓을 수 없는 셰릴의 답이라면, 당연하다.
“그래. 한판 해 보자고.”
한편 그 시간, 미술 애호가 동아리방.
“자, 그럼 오늘의 모임도 시작해 보자고...”
영화부원들을 본 나타샤는, 영화부원들의 눈빛이 예상외로 초롱초롱하자, 순간적으로 거기에 압도되기라도 한 듯 잠시 말이 없다가, 이윽고 동아리방 양옆을 채운 그림과 조각, 그리고 비디오 아트 등을 차례로 보여주며 말한다.
“우선 여기 있는 건 전부 우리 동아리에서 수집한 미술품이야. 전부 진품이니까 조심해서 보도록 하고...”
나타샤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알렉스는 곧바로 벽에 걸려 있는 그림들 중 하나를 고른다. 40대 정도로 되어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스패너나 손망치같이 보이는 연장을 들고서 정면을 빤히 노려보고 있는 그림인데, 전체적으로 보면 어느 영화의 스틸컷처럼 보이고, 멀리서 볼 때는 선과 면 위주의 추상화처럼 보이는데, 가까이 가서 보면 또 인물화로 보이는 그림이다.
“오, 알렉스! 바로 네가 그럴 줄 알고 있었지. 네가 그걸 한 번에 고른 이유가 혹시 있을까?”
알렉스는 굉장히 여유 있는 표정을 하고서 웃을 뿐이다. 나타샤는 알렉스가 하려는 말을 금방 알 것 같지만, 일단 모르는 척하고서 지켜보기로 한다. 그런데 알렉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타샤의 예상 밖이다.
“에이, 내가 이런 것도 모르려고! 나타샤, 여기 이런 미술 작품들을 가져오려면 좀 그럴듯한 걸 가져와! 아니면 좀 수수께끼 식으로 해서, 나도 잘 모를 법한 그런 작품을 소재로 한 걸 가져오든가. 이거 봐봐.”
그렇게 말하며 알렉스는 자기 태블릿을 꺼내서 마치 준비라도 한 것처럼, 영화의 한 장면을 켜서 보여준다. 그 장면이 나오는 시간대까지 정확하게 말이다.
“오, 그 장면이잖아!”
“어때, 맞지?”
알렉스는 이런 건 식은 죽 먹기라는 듯, 벽에 걸려 있는 다른 그림들도 모두 알아맞힐 수 있다는 듯 말한다. 하지만, 나타샤에게는 또 다른 무언가가 보인다.
‘어디... 알렉스, 하나는 정말 모르는 것 같은데...’
문득 호기심이 발동한 나타샤는, 알렉스를 한번 테스트해 보기로 한다. 그리고 알렉스를 보며 말한다.
“알렉스!”
“어... 왜?”
“어디 그러면, 네가 영화에 대해서 얼마나 아는지 한번 시험이라도 해 볼까?”
“어... 좋아!”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마드리갈
2023-09-28 20:55:58
라일라가 베로니카의 어린 시절을 아는 사람이네요. 그리고 현재의 베로니카를 보면서 생각하는 게 꽤 많을 듯하네요.
역시 요리를 주제로 하는 모임은 장소에 구속될 수밖에 없죠. 요리를 하기 위한 환경이 아니면 일단 시작부터가 불가능하니까요. 역시 그런 점에서 도서관의 도서부원들과의 교류는 의미가 깊네요. 게다가 요리책도 많은데다 어디에서인가 디저트 재료도 나오고 있고...
셰릴은 진짜 인성에 문제가 많네요. 저렇게 행동해서 좋아할 사람은 누구도 없어요.
알렉스는 정말 지식이 풍부한 것인지 아니면 사이코메트리같은 능력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한 인물인 것만은 분명해요. 어느 쪽이든.
시어하트어택
2023-10-08 23:22:22
히어로 동아리 이전에도 알고 지내던 동네 언니동생 사이이니 저런 말을 할 수 있을 겁니다. 2부 뒤에 그 이야기를 한번 써 볼까도 생각중이죠.
물론 셰릴의 저런 행동 역시, 문제 많은 인터넷 방송인들에게서 따 온 겁니다.
SiteOwner
2023-10-07 22:54:29
누군가가 창작물의 캐릭터를 많이 닮았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는 역시 여러모로 새로운 게 많이 보일 것 같습니다. 라일라가 기억하는 과거의 베로니카와 현재의 베로니카는 얼마나 어떻게 다를지...
도서부원들과 취미로 요리하는 모임 부원들이 만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시 저렇게 교류해야 정답이지요. 반면 격투기 동아리방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안 하는 게 나을 정도로 험악합니다.
알렉스는 굉장하군요. 혹시 진짜 영화광인 것인지...
시어하트어택
2023-10-08 23:23:07
알렉스는 전작 <초능력자 H>에서도 나온 적은 있지만, 진짜배기 영화광이죠. 아예 영화부 하면 알렉스가 먼저 떠오를 정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