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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리가 사는 아파트 단지 알파에서 멀지 않은 학원가. 한 교실에서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나오고 있다. 대부분은 교복 차림이다. 그 중에는 미린고등학교 교복도 간간이 보인다.
“그래도 오늘은 오리엔테이션이라 그런지 빨리 끝났네.”
“역시, 1위는 1위라니까. 설명도 명쾌하고.”
교실에서 나오는 학생들 가운데 세훈과 주리도 끼어 있다. 둘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빠른 걸음걸이로 걷는다.
“어? 세훈이하고 주리 아냐?”
누군가가 세훈과 주리 옆에서 말을 건다. 세훈과 주리가 돌아보니 미셸과 디아나다.
“너희들 혹시 시간 있어?”
“응, 왜?”
“아, 시간도 있고 하니까 RZ타워 같은 데 좀 놀러 가려고.”
“우리는 거기 이미 갔다 왔어.”
“응? 벌써 갔다 와?”?
“응. 갔다 왔지. 그것보다도 우리는 지금 어디 갈 데가 있어서.”
“그래.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내일 보자.”
미셸과 디아나는 아쉬운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고, 세훈과 주리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계단을 걸어 내려가, 1층까지 내려간다. 학원 1층 로비에는 아직 사람이 많이 보이지 않는다. 학원 건물 밖으로 나오니, 밖은 각양각색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붐빈다. 길거리에서 음식을 사먹는 학생들도 있고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학생들도 있다. 세훈과 주리는 그 인파를 뚫고 어디론가 향한다.
“그러니까, 어디로 가면 된다는 거야?”
“나만 따라오면 되니까, 그런 건 걱정하지 마.”
조금 후, 세훈과 주리가 어느 거리에 멈춘다.
이곳은 학원가에서도 멀지 않고 RZ타워에서도 멀지 않은, 오피스 거리이다. 어수선한 분위기의 학원가와는 달리 이곳은 꽤 깔끔한 편이다. 학생들은 거의 보이지 않고, 주로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거리를 오가거나,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거나, 아니면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거나 하고 있다. 인근에 법원이 있어서 그런지, ‘법률사무소’라고 쓰인 간판이 군데군데 보인다.
주리가 걸음을 멈추자, 주리의 인공지능 HANA가 말을 꺼낸다.
“주리야, 너 오래 걸어다닌 것 같은데 뭐라도 먹을래?”
“아, 아니, 됐어.”
“오... HANA는 확실히 친구 느낌이네.”
세훈은 감탄조로 말한다.
“맞아. 그런데 좀 더 ‘핀잔주는 선배’ 같은 느낌이지.”
“그런데... 네가 아는 사람, 여기 있는 거야?”
“맞아.”
주리는 세훈의 질문에 바로 대답한다. 세훈은 주리를 한 번 돌아본다. 당연히 알고 있다는 표정이다. 뭐지, 이 표정은? 더군다나, 고등학생이 이곳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건... 뭔가 맞지가 않는데? 아무리 이 근처에 학원가가 있다고는 해도, 학교들이 이 근처에 많이 있다고는 해도, 주리가 여기에 대해 잘 알고 있다니? 세훈은 알쏭달쏭할 뿐이다. 세훈은 조금은 더듬거리며, 다시 묻는다.
“어느... 건물이야? 여기 있는 건물들... 다는 아닐 거 아냐.”
“그래. 다는 아니지.”
주리는 또 다시 바로 대답하며, 건물 하나를 가리킨다.
“대로 건너편에 보이는 황금색 빌딩 있지? 저기에 내가 아는 사람의 사무실이 있어.”
주리가 말하는 황금색 빌딩은 대로변에 선 다른 건물들에 비해 조금 높아 보인다. 아무래도 이런 건물도 일개 고등학생이 안다고 하기는 거리가 조금 멀어 보인다. 어찌 됐든, 세훈과 주리는 지하철역 출입구를 겸하는 지하도로 들어간다. 지하도 벽면은 주로 변호사나 법무사 등의 광고들로 가득하고, 편의점도 있고, 자판기도 보인다.
조금 걸어가니 아까의 그 황금색 빌딩으로 연결되는 통로가 나온다. 출입문 앞의 명판을 보니 빌딩의 이름은 ‘매그넘 골드’라고 되어 있다. 그 ‘매그넘 골드’ 빌딩으로 들어가니, 말끔하게 정돈된 로비가 먼저 나온다. 지하에 있는 건 주로 식당이나 문구점, 아니면 편의점, 은행 영업소다.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었다. 정장 입은 사람들 사이에 돌아다니는 교복 입은 자신들의 모습이란 왠지 모르게 눈에 더 띄어 보인다.
“이제 몇 층으로 가면 되지?”
“그 사람의 사무실은 32층에 있어.”
“아... 너 여기 많이 와 봤구나.”
“딱히 많이 와 본 건 아닌데...”
세훈과 주리는 가운데 있는 엘리베이터를 탄다. 1층에 서니 사람들이 많이 탄다. 과연, 세훈과 주리 빼고는 모두 정장 입은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은 백팩을 매고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가죽으로 된 서류가방을 손에 들고 있다. 사람들은 다들 바쁜 듯, 앞만 바라보고 있다. 간혹 몇 사람이 자신들과는 다른 차림의 고등학생들을 한 번씩 흘깃 보기도 하지만 그것뿐, 다시 앞을 바라볼 뿐이다.
어느덧 32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몇 사람이 내린다. 세훈과 주리도 따라서 내린다.
“자... 이제 어디로 가면 되지?”
“이제 금방이야.”
세훈은 주리를 따라간다. 과연, 주리의 말대로 주리는 몇 걸음 안 가서 어느 문 앞에 멈춰 선다. ‘법률사무소 스텔라’라고 쓰인 간판이 보인다. 주리가 왼손에 찬 AI 시계를 출입문의 인식 장치에 갖다 대자,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환영합니다, 공주리 님. 들어가시기에 앞서 본인 확인 절차를 진행하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인식 장치에서 주리의 얼굴을 스캔하는 광선이 비친다. 광선은 주리의 눈을 중점적으로 비친다. 그리고 한 몇 초 정도 지났을까. 다시 문에서 그 여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본인 확인 절차가 완료되었습니다. 들어가셔도 됩니다.”
그 말과 동시에 문이 저절로 열린다.
“들어와.”
주리의 말에 세훈은 주리의 뒤를 따라 문 안으로 들어간다. 세훈은 사무실 안을 천천히 돌아본다. 사무실 안은 전체적으로 밝은 색감 위주로 되어 있어 산뜻하게 꾸며져 있다. 벽면이나 창가 같은 곳에는 이런저런 장식물이나 화분도 놓여 있다. 테이블은 2개만 놓여 있는 것으로 봐서는 작은 규모의 사무실인 듯하다. 그런데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다들 어디 나간 건가?
“그런데... 우리 이렇게 아무도 없는데 막 들어와도 되는 거야?”
“괜찮아. 나는 여기 이렇게 들어와도 돼.”
“된다...고? 어떻게?”
“왜냐면 공주리 님은 출입 권한이 있으니까요.”
조금 전의 그 인공지능이 주리 대신 대답한다.
“어? 정말? 그런데 혹시 넌 이름이 뭐지?”
“제 이름은 SOPHIA예요. 스텔라 법률사무소의 비서 역할을 맡고 있죠.”
“그건 그렇고 주리 너... 출입 권한은 언제 받은 거야?”
바로 그 때, 사무실 문이 열린다. 그리고 한 남성이 들어온다. 갈색 머리에 안경을 쓰고 있고, 세훈보다도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인다. 지적으로 보이는 외모와 건장한 체격은 덤이다. 정장셔츠와 정장바지를 잘 차려입었는데, 설마 이 사람이 주리가 아는 변호사란 말인가?
“아, 안녕하세요, 변호사님. 제 이름은...”
세훈이 그 남자에게 인사하려 하자 그 남자는 손을 내저으며 말한다.
“아... 저는 변호사가 아닙니다.”
“그러면요?”
“제 이름은 앨런 에반스라고 합니다. 이곳 법률사무소의 사무장이죠.”
“그럼, 변호사님은...”
“아, 이제 올 때가 됐는데...”
앨런 에반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무실 문이 열리더니 또 누군가가 들어온다. 들어온 사람은 여성으로, 흰 반팔 셔츠에 빨간 바탕의 야구모자를 쓰고 있다. 금빛이 도는 머리는 뒤로 묶었다. 이윽고 그 여성이 완전히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자 그 여성의 복장이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핫팬츠에 오른쪽은 파란색, 왼쪽은 빨간색으로 색깔이 다른 양말, 그리고 흰 운동화까지... 세훈의 머릿속에는 이 생각이 든다. 뭐지, 이 사람은? 이 사람은 왜 여기 온 거지? 설마... 이 사무실을 잘못 찾아온 건가? 잘 봐줘도 그냥 SNS 스타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변호사 사무실에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온다? 누구지?
바로 그때, 앨런이 그 여성을 보고는 공손한 어투로 말한다.
“아, 변호사님, 오셨군요!”
그리고는 세훈을 향해 돌아보며 말한다.
“이 분이 바로, 사법시험을 최연소로 합격하시고 검사로써 2년 동안 근무하신...”
“아, 앨런.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는데.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면 부담스럽다고.”
문 앞에 선 여성의 말을 듣고는 세훈은 자신의 귀를 의심한다. 잠깐. 이 사람이... 변호사라고? 보통 변호사 하면... 정장을 말끔히 차려입고, 머리는 말끔히 정돈되어 있고, 그런 이미지인데...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좀 수수하게 차려입는 경향이 강하지 않나? 세훈은 다시 머리를 갸우뚱한다. 그 여성이 주리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
“아, 주리야. 한 달 만이구나.”
“네, 메이링 씨. 오랜만이에요.”
이 사람인가 보구나, 이 사람이 주리가 잘 안다는 그 사람. 그래서 이렇게 반갑게 인사하는구나. 세훈은 말을 잇지 못한다. 이런 사람하고도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라고?
“세희는 잘 있고?”
“네, 저희 언니는 잘 있고요. 다른 데 떨어져 살아서 많이 보지는 못하지만요.”
“그렇구나... 세희를 못 본 지도 1년이 넘었네.”
잠깐, 주리의 언니? 그러면... 이 사람은... 주리 언니의 친구인가? 그렇다면 왜 잘 아는 사이인지 알 것 같다. 그 때다.
“아 참.”
메이링이라는 여성은 멀뚱멀뚱 서 있는 세훈을 돌아본다.
“어? 너, 주리 친구니?”
세훈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이다.
“아, 그러면... 그렇고... 그런... 사이겠...구나?”
“아니오. 그냥 친구인데요.”
메이링의 기대감 가득 찬 말에, 세훈은 마치 의도적으로라도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무덤덤하게 대답한다.
“에이, 김빠지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그... 그러면...”
“처음에는... 마치 사귀는 사이인 것 마냥 이야기하다가 조금 지나서 반전을 넣어 주면 관심이 집중되잖아?”
“......”
세훈은 또 한 번 머리를 얻어맞은 느낌이다. 뭐지... 이 ‘확 깨는 느낌’은? 변호사라고 하니까 그래도 조금은 과묵한 사람일 것 같았고, 그것도 아니면 지적인 말투로 법률 용어를 줄줄 읊을 것 같았는데... 변호사 맞아? 마치 법전처럼 무거운 사람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 깃털처럼 가벼워도 되는 건가?
“아! 서로 통성명도 안 했지. 주리 친구, 이름이 뭐야?”
“아... 저요? 조세훈이라고 하는데요.”
“조세훈... 세훈이라... 그래, 이제 내가 누군지 소개할 때가 됐구나. 듣고 싶지?”
“네... 네.”
“내 이름은 무룽메이링이라고 해. 나이는 올해로 26살이고, 이제 좀 있으면 27번째 생일을 맞게 되지. 나는... 뭐 여기 앨런 씨나 주리가 이야기한 걸 들으면 알 수 있듯, 변호사고... 학교는 지금 너희들이 다니고 있는 미린에서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다 나왔지.”
“오, 정말요? 그 정도면 공부를 아주 잘 해야지 된다던데...”
“다들 그러더라. 그런데 어느 정도는 사실이야.”
“그런데... 공부는 어떻게 한 거예요?”
“아, 공부? 공부 말이지...”
메이링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말을 이어간다.
“그냥... 별다른 건 없었어. 꾸준히 했어. 그것뿐이야.”
“에이... 그게 말이 돼요? 대학 입시까지는 몰라도 변호사 되려면 정말 각고의 노력을 다하고도 운 같은 게 따라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던데...”
“맞아... 그렇다고 하지. 그런데, 나는 그냥 시중에 나온 수험서를 몇 번씩이든 상관없으니 끝까지 보려고 했어. 그게 의외로 어렵거든. 그걸 꾸준히 하니까 되긴 되더라.”
“그런데 말이죠...”
“뭔데?”
“나이를 보면 대학 다닐 때 합격했다는 거 아니에요?”
“아... 맞아. 3학년 때였지.”
“어떻게 합격하신 거예요? 수험 공부하느라, 대학 학점관리 하느라 두 배로 힘들었을 텐데...”
“그냥 꾸준히 한 거야. 두 가지 모두 손에서 놓지는 않으려고 했고. 그것뿐이야.”
“친구들이 다들 부러워할 만도 하겠네요.”
세훈은 거기서 잠시 말을 멈춘다. 잠시 후, 세훈은 AI 시계에 비춘 문구를 보더니, 다시 말을 꺼낸다.
“아참, 성 때문에 질문드리는 건데... 혹시 TV에 자주 나오는 무룽샤오화 셰프와는 어떤 관계세요?”
“아, 내 아버지셔.”
“어... 정말요? 어쩐지, 성이 같아서 설마 했는데... 그럼, 유명 소설가 미야모리 치호코 씨가 어머니시겠네요.”
“맞아.”
메이링은 잠시 옆에 있는 물을 마시고는 말한다.
“그런데 말이야... 나는 이런저런 수식어 붙여서 이야기하는 게 싫어.”
“네? 싫다니요? 명성을 얻으면 나름대로 자신감도 서고 할 텐데...”
“변호사까지는 괜찮아.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건 평생을 따라다닐 직함이거든. 공부법 같은 이야기도 괜찮지. 후배들한테 도움이 될 수 있으니까. 그런 거 말고, 어느 대학 나왔다, 시험을 몇 번이나 합격했다, 유명 셰프나 소설가의 딸이다... 이런 거 말이야. 그래서 항상 앨런하고 SOPHIA한테 신신당부하는데... 잘 안 되는 것 같아.”
세훈은 메이링이 하는 말이 얼른 들어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메이링의 입장에서 조금 생각해 보니 이해가 가기도 한다. 그렇게 빠른 나이에 큰 걸 이뤘으니 뿌듯하기도 했지만 또 얼마나 사람들의 관심이나 유명세 같은 것들에 시달렸을 것인가. 그렇게 생각해 보면, 메이링이 검사를 일찍 그만둔 것도 이해는 간다.
“그건 그렇고...”
세훈은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제가 물어 보려고 하는 건요...”
“왜? 뭐든 말해 봐.”
“법률 관련된 건 아니고, 주리가 말해 줬는데, 초능력에 대해서 좀 알고 있다고 하던데, 맞나요?”
“아... 맞아. 뭐든 물어 봐.”
메이링은 흔쾌히 대답한다. 세훈은 바로 입을 연다.
“하... 그러니까 말이죠, 아까 전에 백화점에서... 그 뭐냐... 남문 쪽에서 말이죠... 어...”
세훈의 목소리는 떨린다.
“긴장하지 말고. 차분하게 좀 이야기해 볼래?”
“그러니까... 어느 선배가 제 옆을 지나간 거예요. 그런데...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선배와 어깨를 부딪치고...”
“정말? 그거 불량한 애들이 자주 쓰는 수법인데. 특별한 건 아니잖아.”
“그런데, 분명히 저는 똑바로 앞으로 걷고 있었고 의도적으로 그 선배를 피하려고 했는데, 어느 샌가 그 선배와 어깨를 부딪쳤다니까요?”
“아, 그거? 별것 아닌 능력인데.”
“네? 별것 아닌 능력이라니요?”
“그래. 별것 아니지. 정말 별것 아닌 능력이야. 그냥 상대를 자신이 있는 곳으로 끌어오기만 하는 거야.”
“정말요? 저는 그런 것도 처음 겪어 보는 거라서...”
“맞아. 초능력이 없는, 그리고 초능력을 안 겪어 본 일반인들이 느끼기에는 그렇겠지. 물론 염동력 같은, 정말 말도 안 되게 강한 능력도 있기는 하지. 그런데 이 별거 아닌 능력도 초능력이다 보니까 초능력 없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하게 보이기도 한다고. 이해됐니?”
“네... 뭔지 알겠어요.”
세훈은 조금 찜찜하다는 말투로 대답한다. 그러면서도 눈빛은 메이링의 말에 수긍하고 있다. 나름 이 분야에서 전문가라는 사람이 내놓은 결론인데 믿어 볼 수밖에.
“그런데... 하나만 더 물어 봐도 될까요?”
“음... 뭔데?”
“초능력 관련된 건 어떻게 알게 됐어요?”
메이링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사무실 벽면 한쪽에 있는 홀로그램을 켜서 어느 지도를 보여 준다.
“이건... 뭐죠?”
메이링이 홀로그램에 보여 준 지도는 세라토와 그 근교 지역의 지도다. 세훈과 주리는 그 지도를 훑어본다. 붉은 점들이 곳곳에 찍혀 있다. 붉은 점의 분포지역은 대체로 도시 지역, 그러니까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이다. 당연히 대도시일수록 붉은 점은 더욱 많이 보일 것이다. 특히 인구 1,500만 명이 넘는 세라토 같은 곳은 더더욱. 그리고 대도시라도 어떤 곳은 점이 적게 분포하고 어떤 곳은 조밀하게 분포해 있다. 점이 조밀한 곳은 그만큼 초능력자가 많이 분포한 곳이라는 뜻이리라. 그런데 유독 세라토 동남부, 그러니까 미린 쪽만 붉은 점이 매우 촘촘히 찍여 있는 것이 눈에 선명히 들어온다.
“어... 미린만 왜 이렇게 빨간 점이 많죠?”
“보는 눈이 있네. 이건 VP재단이라는 곳에서 파악하고 있는 초능력자들의 분포를 나타낸 지도야.”
“VP재단이라니요? TV에서 많이 나오는 것 같은데, 거기 원래 기초과학 연구나 의학 연구를 주로 하는 곳 아니었나요? 광고 나갈 때도 ‘우리의 건강과 행복을 책임지는 VP재단’이라고 하고 의사들하고 연구원들 나오고... TV에서 나오기는 그렇게 나오는데...”
“맞아. 맞는데, 그건 표면적인 목적이고, 조금 더 파고 들어가 보면, 초능력 연구나 외계 종족 연구도 하고 있지. 의외로 하고 있는 게 많아.”
“그럼 이 지도는...”
“VP재단에서 파악하고 있는 초능력자만 여기에 들어간 거야. 파악이 안 된 초능력자들도 있기는 한데, 분포는 대체로 비슷하다고 봐야겠지. 그 중에는 물리적인 영역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거나, 정신을 조종한다거나 하는 위험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도 있을 테고, 또 세훈이 네가 아까 전에 겪은 것처럼 별것 아닌 것 같이 보이는 능력이어도 그 능력을 사용하는 사람의 머리가 뛰어나서 그 능력을 위험하게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물론, 그렇지 않고 미미한 능력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지만.”
“그런데, 조금 전에도 이야기했는데, 어째서 미린 쪽만 유독 빨간 점이 많죠? 특별히 무슨 연구기지 같은 게 있다거나 하는 곳도 아니고, 그냥 바다를 매립해서 지어진 신도시잖아요? 이름도 신도시를 지을 당시 이전한 미린 재단을 따서 지은 거고...”
“맞아. 그러게 말이지. 유독 이곳에 초능력자들이 많이 모이네. 그것도... 다른 지역의 열 배 이상으로.”
“여... 열 배라니요?”
“맞아. 열 배. 다른 지역 평균은 10,000명당 1명꼴 정도 되는데 미린은 1,000명당 1명꼴이라고 생각하면 돼. 어쩌면 그걸 더 넘을 수도 있어.”
“그렇게 초능력자들이 많이 모이는 이유라도... 있나요?”
“글쎄... 그건 아직 VP재단에서도 정확한 이유는 파악하지 못했어.”
세훈은 그 지도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숙지한다. 빨간 점만큼 초능력자가 분포하고 있고, 그 중에는 위험한 능력자도 있다. 그리고 미린에 그 빨간 점이 다른 곳보다 조밀하게 분포해 있다는 것은...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세훈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그럼... 이 지도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뭘까요?”
“단단히 조심해야겠지!”
어? 이 목소리는 뭐지? 다른 목소리다. 주리도 메이링도 아닌 다른 목소리가 대답한다. 인공지능인가? NURI나 SOPHIA는 아닌데...
“아... HANA는 또 이러네.”
HANA? HANA가 왜 그럴까?
“왜?”
“일화 하나만 말해 볼까? 1년 전에 처음 받았을 때, 이름을 지으려고 했거든. 그런데 내가 이름을 지으려고 막 켜니까 대뜸 자기 이름을 HANA라고 소개하더라.”
“호오... 그래?”
“그거 참 신기한 인공지능인데.”
여러 인공지능 기업들에서 다양한 개인용 인공지능들을 개발해 시중에 내놓고 있지만, 보통 개인용 인공지능들은 시스템 초기화를 할 때에 그 인공지능의 ‘동반자’가 될 사람이 이름을 지어 주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동반자가 되는 사람은 인공지능에 더욱 친밀감과 애정을 품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주리의 인공지능 HANA가 스스로 자기 이름을 지은 것은 아주 예외적인 케이스라 할 수 있다.
“그것도 그렇고, 또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먼저 나서서 이거저거 참견 많이 해. 예를 들자면... 친구들과 약속장소 정하는 데 불쑥 튀어나와서 자기가 어디어디 찾았다며 장소를 추천해 준다든가,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각종 잡학 지식을 읊어 준다든가. 그나마 공공장소 같은 데서 방해 안 하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걸까.”
“하...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겠네.”
“빈 말이 아니야! 조심해야 한다니까!”
HANA의 반응은 다소 격앙되어 있다. 주리의 AI 시계의 홀로그램 표시 부분도 어느 새인가 진한 빨간색으로 바뀌어 있다.
“알았어, 알았다고, HANA.”
주리가 HANA를 진정시키자 주리의 AI 시계 홀로그램 표시 부분의 빨간색이 점점 연해진다. 어느 정도 HANA가 진정되자, 세훈은 메이링에게 계속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이 지도라든가... 초능력자 관련한 자료들은 어떻게 알게 됐어요? 이런 지도는 원래 외부에 보여주거나 하면 안되는 것 아닌가요?”
“아, 맞아. 내 본업은 변호사기는 하지만... VP재단의 의뢰를 받아서 일하고 있기도 하지. 대외적으로는 법률자문역이라고는 하지만, 정보조사원으로도 일하고 있어.”
“하... 그래서 이런 걸 가지고 있군요.”
“저, 그런데... 메이링 씨.”
이번에는 주리가 입을 연다.
“VP재단과는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메이링 씨하고 알고 지내면서 저도 참 궁금했는데...”
“어... 그게, 처음에는 그냥 우연한 계기였는데...”
메이링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이내 다시 말을 잇는다.
“그러니까, 대학 동아리 선배 중에 물리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있거든...”
“물리학...이요? 물리학하고 법학이... 접점이 있나?”
“아니... 꼭 학과가 같지 않아도 같은 동아리일 수 있지. 내가 있던 동아리는 밴드 음악 동아리였거든. 내가 보컬을 하고 그 선배가 드럼을 했는데, 졸업하고 나서도 종종 연락하고 그런 선배였지. 내가 검사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한테 자기가 잘 아는 곳이 있다며 VP재단을 추천해 주더라.”
“아... 그래요? 그럼 처음에는 그냥 과학 연구 관련 재단인 줄만 알았겠네요.”
“그래. 나도 처음에는 그런 곳으로만 생각했고 그곳 직원들도 그냥 연구재단이라고만 했어. 나도 처음 얼마간은 법무팀에서 근무했지. 그런데...”
“‘그런데’, 라니요?”
“그건... 참 우연한 계기였지.”
메이링은 잠시 말을 멈추고 세훈과 주리, 앨런을 돌아본다. 그 때, SOPHIA의 목소리가 들린다.
“메이링님, 혹시 이 ‘계기’라는 건 앨런 씨도 잘 모르는 건가요?”
“맞아, SOPHIA. 그간 이건 아무한테도 말 안 해줬어.”
“그 계기라는 게 뭔데요?”
세훈과 주리보다도 먼저, 앨런이 입을 연다.
“한번 들어 보자고요, 변호사님!”
“그러니까... 내가 VP재단 법무팀 사무실에서 일하다 말고 잠깐 앉아 있었는데...”
“아, 혹시 그냥 일하다 말고 노는 때가 많았나요?”
“어... 음... 맞아.”
메이링의 대답은 시원치가 못하다.
“아... 그 대답은, 많이 놀았다는 소리군요!”
메이링의 시원치 못한 대답에 비해 SOPHIA의 목소리는 마치 범인을 알아낸 탐정처럼 확신에 가득 차 있다. 메이링은 조금은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말한다.
“아... 그래, 맞아. 좀 놀았지. 검사 생활이 조금 팍팍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VP재단 법무팀 변호사라면 어느 정도 명성도 얻으면서도, 조금 시간을 편하게 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실제로 좀 그랬고.”
메이링은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책상에 있는 물을 마신다. 그러고 나서 잠시 벽 한쪽을 바라본다. 세훈과 주리도 메이링이 보는 방향을 돌아본다. 사진이 하나 걸려 있는데, 머리 모양으로 보아 메이링과 동기들의 사진인 듯하다. 사진 속 메이링은 지금의 자유분방한 모습과는 정반대로, 정장을 아주 말끔하게 차려입은 모습이다. 세훈은 그 사진이 조금은 신기한 듯, 몇 번이나 사진 속 메이링의 모습을 유심히 본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지.”
메이링은 다시 말을 잇는다.
“하루는 VP재단의 직원 중 한 명이 법무팀에 와서는 나만 따로 부르는 거야.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 직원을 따라갔지. 법무팀의 다른 동료 변호사들은 드디어 내가 좀 피곤해지겠구나 하고 위로하는 분위기였고. 나름 큰 사건을 맡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그 직원을 따라서 어느 큰 회의실로 들어갔는데, 뜻밖에도 거기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흰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었어.”
“네? 연구원들이요? 연구원들이 변호사를 부를 일도 있나요?”
“그러니까. 보통 연구원들은 연구에 집중하느라 법무팀을 만날 일도 별로 없거든. 법무팀은 대부분 재단 경영진이나 행정직원들과 접촉하지. 그런데 내가 그 회의실에 들어갔을 때 나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세 명이었는데, 모두 나이가 지긋한 연구원들이었어. 그것도 꽤 높은 위치에 있는 연구원들이었지. 그 중에서, 가운데에 앉은 나이 많은 연구원이 있었는데, 이름은 ‘스티븐 사이먼 엘더’라고 했지. 그런데 그 사람이 나를 한 번 보더니 이렇게 말하더라.”
“뭐라고 하던데요?”
“그 사람은, ‘나 정도면 초능력에 소질이 있어 보인다’고 했어. 처음에는 깜짝 놀랐지. 그간 공부만 하고 살아왔는데 나한테 무슨 초능력의 재능 같은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이상한 거잖아. 무슨 근거로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겉으로는 ‘아니에요, 아니겠죠’라고는 했어도 무의식적인 동의감이 들더라.”
“혹시 그 사람은... 초능력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었나요?”
“아니. 그건 또 아니라고 하더라. 그저 VP재단에서 오래 있다 보니까 초능력에 대해서 좀 알 것 같다고 한다는 거야.”
“그럼 원래는 뭘 연구하는 사람인데요?”
“아, 엘더 박사님은 말이죠...”
SOPHIA의 목소리가 들린다.
“원래 재료공학을 전공한 사람이에요. 박사학위도 신물질 연구로 받았고요. 그 뒤로 대학하고 연구소 여러 군데에 있다가VP재단에 정착하게 된 거고요, 그리고 연구활동 외에도 강연활동으로 수입이 많은 편이지요.”
“원래 초능력을 연구한다거나 하지는 않는 분인데, VP재단에 오래 있다 보니 초능력에 대해 좀 알 것 같다라... 그 분 참 많이 기묘하네요.”
주리가 눈을 빛내며 말한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됐어요?”
“연구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그 엘더 박사라는 분이 이제 더 이상 법무팀에서 근무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더라. 그 대신 재단 밖에서 초능력자들을 조사해 달라는 거야. 그래서 그 날로 표면적으로는 VP재단 법무팀을 그만두고 개인 법률사무소를 차리게 됐어. 물론 지금은 보는 것처럼 개인 사무소를 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계속 VP재단과 연락하면서 수시로 드나들면서 법률 자문, 그리고 초능력자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정보 조사원 역할을 맡고 있지.”
“사실 저는 말이죠, 변호사님...”
앨런이 입을 연다.
“변호사님하고 같이 일을 하다 보니 저도 초능력자 조사를 같이 맡아서 하고 또 몸으로 뛸 일도 많은데...”
“맞아.”
“그러다 보니까 변호사님이 초능력자라고 짐짓 생각했는데... 그건 또 아니었네요.”
“맞아. 그런데 꼭 초능력자만 초능력자 조사를 하고 그런 건 아니잖아.”
“하긴... 그렇죠.”
“아무튼... 지금까지 말한 게 내가 VP재단의 정보 조사원으로 일하게 된 계기야. 정말로 우연한 계기였지.”
세훈과 주리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편으로는 궁금증이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메이링의 말을 듣고 나서도 마치 나무에서 가지가 나와 뻗어가듯 의문점들이 하나하나 생겨 나가는 것이다. 메이링은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의문점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구나? 어차피 지금은 말해 줘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게 많을 거야. 나도 처음 그 말을 들을 때는 그랬어.”
메이링은 말하면서 벽 한쪽에 홀로그램 또 하나를 띄운다.
“아참, 그리고 주리하고 세훈이한테 보여 줄 게 또 있어.”
홀로그램으로 나타난 건 미린의 지도. 미린 지역만 따로 나타낸 지도다. 빨간 점의 전체적인 분포는 미린 지역만 확대해 놓고 보니 일반적인 인구 분포와 비슷하다. 다른 건 이곳의 초능력자 분포가 다른 곳의 10배 정도라는 사실뿐.
“어? 이렇게만 놓고 보면 별 차이 없어 보이는데요?”
“맞아. 그렇지. 이제 좀 다르게 한번 볼까?”
메이링이 컴퓨터 자판을 몇 번 두드리자, 이제 홀로그램의 점의 분포가 바뀐다. 미린역 쪽의 업무지구나 학교에 빨간 점들이 모여 있는 것으로 봐서는 해당 초능력자의 직장이나 학교를 분석한 지도인 듯하다. 그런데...
“어? 잠깐만요... 여기...”
세훈이 손가락으로 한 곳을 가리킨다. 빨간 점이 유독 눈에 띄게 모인 한 곳.
“우리 학교잖아! 그것도, 미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까지 다!”
“우... 우리 학교에... 초능력자가 뭐가 이렇게 많아?”
주리 역시 자기 학교에 모여 있는 빨간 점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더듬거리며 말한다.
“무슨... 초능력자만 모아 놓고 양성하는 학교도 아니고! 일반적으로 알려진 우리 학교의 이미지는 그저 ‘공부 잘 하는 학교’일 뿐인데!”
“그러게 말이지. VP재단에서도 우리 학교의 사례는 미스터리 중 하나라더라.”
“‘우리 학교’요? 아...아참, 메이링 씨도 우리 학교 나왔다고 했지.”
“그런데 말이죠...”
세훈이 메이링에게 묻는다.
“우리 학교에만 유독 그렇게 초능력자가 모인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음... 잘은 모르겠어.”
메이링은 조심스럽게 대답한다.
“아직은 VP재단에서도 여기에 대해서 연구하고 있고, 나는 그저 조사원일 뿐 전문가는 아니니까. 다만... 이건 내 감인데... 그냥 느낌일 뿐이야. 내 생각에는... 우리 학교에 초능력자를 끌어들이는 누군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것도 매우 강력한 초능력자 말이지.”
“잠깐... ‘초능력자를 끌어들이는 누군가’라고요?”
세훈의 머릿속에는 바로 짚이는 누군가 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설마... 제가 말한 그 선배가 아닐까요?”
“아니야.”
메이링은 바로 고개를 젓는다.
“그렇게 약한 능력 가지고는 다른 초능력자들을 끌어들일 만한 것도 되지 못해.”
“그러면요? 어느 정도는 되어야 ‘강력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요?”
“그럴 정도라면... 바로 생각나는 건 염동력 정도지. 그에 걸맞거나 더 강한 능력은 되어야 다른 초능력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겠지. 아니면 그런 능력이 아직은 없어도 그만한 잠재력을 갖추고 있든가.”
“그렇다면... 혹시 VP재단에서 파악하고 있는 정보에는 아직 그런 정도의 초능력자는 없나요?”
“자세한 정보는 알려 줄 수 없어. VP재단에서 가지고 있는 초능력자 개개인에 대한 상세한 자료는 기밀 정보거든. 다만 사람들의 제보나 증언, 그리고 목격담 등 여러 가지 정보를 취합해 그 사람의 능력에 대한 대략적인 정보를 알 수 있지.”
“그 말은...”
“알아서 조심하라...는 거네요.”
“그래. 웬만한 일반인이라면 초능력자와 엮일 일은 별로 없겠지만, 아무래도 사는 곳이 사는 곳이고 또 학교가 그렇고 그런 곳이니까, 너희들의 경우는 특히 주의해야겠지. 그 중에 자기 능력을 나쁜 쪽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테니까. 세훈이 네가 아까 전에 겪었다는 그 선배도 그렇고 말이야.”
“......”
세훈은 말없이 그냥 메이링의 말만 조용히 듣는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다. 의문점이 해소될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오히려 더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메이링의 말이 맞다. 지금은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말들뿐이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차차 알게 되겠지만...
“다들 표정을 보니까...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들이네.”
“......”
“그래. 그게 당연한 거라니까. 나도 처음에는 그랬다고 했잖아. 재단에서 좀 일하고 여러 유형의 초능력자들과 접촉하면서 조금이나마 알게 된 거야. 그러니까 지금 모른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러면... 무슨 일이 생긴다거나 하면...”
“언제든지 나한테 연락 주기만 하면 돼. 나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변호사 본연의 업무도 해야 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저희 연락을 받고 조사하고 할 시간은 많이 부족할 것 같은데...”
“아... 그건 그렇구나. 어쨌든,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연락해 줘. 내가 바빠서 연락을 못 받는다거나 하면, 여기 앨런 씨한테 연락을 줘도 돼. 알았지?”
“뭐... 보통은 제가 연락을 받게 되겠죠. 변호사님은 법정에 나가랴, 사건 맡으랴, 그런 걸로도 좀 바쁘니까요.”
세훈은 시계를 본다. 시계는 오후 4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어? 저 이제 가 볼 시간이네요. 오늘 집에 일찍 가기로 했거든요.”
“벌써 가?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은데.”
“아... 아니에요. 그냥 천천히 알려고요.”
“그래? 그럼 나도 같이 가자.”
“주리 넌 왜? 너는 메이링 씨와 이야기 더 하다 가도 되지 않아?”
“우리 엄마는 시간 같은 거 좀 많이 따지거든.”
“음... 하긴, 너희 어머니는 시간에 좀 철저하시지.”
메이링은 이런 일이 익숙한 듯하다.
“세희도 그래서 나하고 어디 놀러 가거나 할 때 일찍 집에 가거나 하는 일이 많았지.”
“그게 좀 아쉽겠네요.”
“그래, 그런데 어머니가 그런 분이시니까 좀 이해는 가. 어쨌든, 또 보자. 내가 아까 한 이야기 잊지 말고!”
세훈과 주리는 지하철역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본다. 그냥 평범하게 보일 뿐인 오피스 거리다. 정장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오갈 뿐인... 그저 평범하게 분주한 거리일 뿐이다.
“혹시... 우리가 조금 전까지 헛소리를 들은 건... 아니겠지?”
“왜?”
“이렇게나 평범한 풍경인데 말이야...”
“어떻게 초능력자가 많다고 상상할 수 있겠냐고? 그것도 다른 지역의 10배나 되는?”
세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야, 그런 걸 가지고 뭘 그렇게 심각한 표정이냐. 그런 건 천천히 생각하자고. 자, 집에 가야지.”
주리가 걸음을 재촉하고, 세훈도 주리의 뒤를 따라간다. 지하철역 출입구로 들어가면서도, 세훈은 자꾸 머리를 흔든다. 그냥 집에 도착할 때까지 잊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이다. 게다가 이렇게나 평범한 곳인데...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마드리갈
2019-01-06 21:53:45
이번 회차는 조세훈, 공주리, 무룽메이링의 3명을 위주로 전개되네요.
인물설정에 대해서는, 아트홀의 문서 및 공작창의 첫번째 문서, 두번째 문서(로그인 필요)를 참조하시면서 읽어 보시면 좋을 듯하니 편의를 위해 소개해 놓을께요.
법조단지가 있는 대도시의 거리 하니까, 예전에 서울에서 살 때의 옆동네였던 서초동 법조타운이 연상되네요. 대체로 서울지하철 3호선 고속터미널역에서 교대역 사이의. 법원, 검찰청이 있고 그 주변으로 별별 변호사 사무소가 늘어선 건 물론, 증권사, 외자계 은행 등의 지점도 많았죠. 배후에는 서초구 유수의 고급아파트는 물론 각급학교도 제법 있었고 각 과목별 전문학원 또한 상가에 빼곡히 들어서 있었던 게 기억나서 반갑게 느껴져요.
역시 특이한 인물들이 다른 지역에서보다 자주 나타난다면 분명 의심할 여지가 있죠. 그게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그나저나 인맥은 참 좋은 거예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미래에도 그리 다르진 않겠죠.
시어하트어택
2019-01-12 21:27:03
저도 최대한 그런 걸 연상해 가면서 썼죠. 마드리갈님이 말한 조건에 딱 맞는 곳을 생각해 보니 바로 저곳이 떠오르더군요.?
SiteOwner
2019-01-06 23:53:38
묘사된 정경이 어떨지 환히 보여서 그 점이 좋습니다.
게다가 파격적인 인물상도 재미있는 포인트군요. 변호사 무룽메이링의 모습, 확실히 변호사의 일반적인 인상과는 동떨어져 있으니 놀라도 무리는 아닐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전에 올려주신 설정에서 미루어 볼 때 추가된 게 있군요.
무룽메이링의 초기설정에서는 대학 재학도중에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졸업 직후에 강사가 되었다고 나와 있는데, 이번 회차에서는 앨런 에반스를 통해 새로운 정보인 검사 재직경력이 드러났고, 소설 외적의 사안이긴 하지만 사법시험 합격의 시점도 아트홀 게시물에서는 4학년, 공작창 게시물에서는 3학년으로 달라져 있는 게 드러나 있습니다. 도중에 설정을 변경하신 것으로 보이는데, 검사로서 부임했다가 단기간에 사직한 게 앞으로의 사건에 어떻게 이어질지 등이 기대되기도 합니다.
지난 설정은 어디까지나 지난 설정이니, 이 경우에는 버전, 업데이트 여부 등을 표시하여 처리하시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듯합니다.
시어하트어택
2019-01-12 21:28:13
뭐... 설정 변경은 없을 수가 없지요. 앞으로 스토리 전개시 나올 인물들의 이름이나 인적사항 같은 것도 많이 바뀐 상태입니다. 삭제된 인물도 있고, 추가된 인물도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