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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시 정오. 미린고등학교의 점심시간의 한가운데쯤 되는 시간이다. 본관 앞의 정원에는 여기저기 학생들이 보인다. 벤치에 앉아 있기도 하고, 책을 읽고 있기도 하고, 연못에 있는 물고기를 구경하고 있기도 하다. 정오쯤 되면 대부분은 점심식사를 마친 시간이지만, 몇 명은 모여앉아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운동장에서는 교복 상의를 벗은 학생들이 농구를 하고 있거나, 축구를 하고 있다. 미린 중학교 학생들도 몇 명씩 넘어와서 저마다 축구나 농구를 구경중이다. 동관 1층에 있는 매점에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매점 밖에 마련된 테이블에서는 학생들이 빵이나 과자를 먹거나, 잡담을 나누고 있다.
한편, 1학년 G반 교실에는 학생들이 여기저기 삼삼오오 모여앉아 있다. 칠판 쪽에 앉은 학생들은 모두 남학생들인데 교탁 바로 옆의 의자에 앉은 갈색 머리의 약간 마른 남학생이 뭔가 손짓하는 것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다. 창가 쪽에는 여학생 3명이 뭔가를 보며 깔깔대고 있다. 그리고, 교실 한쪽 구석의 책상에는 세훈과 주리가 마주보고 앉아 있다. 세훈이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말한다.
“야... 어제 학원 숙제 좀 어렵지 않냐?”
“그래? 나는 식은 죽 먹기던데...”
주리가 무심한 듯 말하자 세훈은 가방에서 프린트 몇 장을 꺼낸다.
“그래서 내가 몇 가지 좀 물어 보려고 하는데...”
바로 그 때, 누군가가 세훈과 주리가 앉아 있는 책상 앞으로 다가온다.
“어, 너희들...”
세훈과 주리가 고개를 들어 보니 디아나다.
“갑자기 왜?”
“시간 있으면 나 좀 도와주면 안 될까?”
“아... 도와주면 뭐 해 줄 건데?”
세훈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디아나에게 묻자, 디아나는 선심 쓰듯 말한다.
“도와주면 이따가 매점에서 아이스크림 사 줄 테니까, 일단 한 번 와 보라니까.”
그 말에 주리도 일어나서 세훈과 함께 디아나를 뒤따라간다. 디아나를 따라가며 주리가 말한다.
“분명히 사 준다고 했지?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다.”
“알았어, 알았다니까.”
디아나는 몇 번이고 알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주리를 안심시킨다. 주리가 아직 의심이 풀리지 않았는지 디아나에게 다시 묻는다.
“우리 어디로 가는 거지?”
“동관이야, 동관. 별로 멀지는 않아.”
“그래, 동관은 동관인데... 동관에 어디?”
“아, 내가 어제부터 연극부를 시작했거든.”
“연극부? 부 활동은 한다는 이야기도 없었는데...”
“맞아. 원래 접수 기간은 내일부터로 되어 있는데, 사전에 신청해도 돼.”
“그래서... 우리도 연극부를 하라고?”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연극부실에 짐이 많이 있는데, 물건 옮기는 것 좀 도와 달라고.”
“하... 그런 거였어? 거 참, 싱겁기는. 그런데... 연극부실이 동관에 있었어?”
“아, 맞아. 연극부는 중학교하고 연합부거든. 그래서 중학교하고 붙어 있는 동관에 있어.”
세 명이서 한참 복도를 걷는데, 복도 한쪽에 남학생 2명이 모여서 잡담을 하고 있다. 한 명은 미셸, 다른 한 명은 ‘제레미’라는 이름의 C반 남학생이다. 미셸이 둘을 보자마자 말을 건다.
“어, 너희들 어디 가냐?”
“아, 연극부실에 갈 일이 있어서...”
“디아나 너, 연극부에 들어갔다는데, 설마 신입부원 할당량 채우려고 뒤에 세훈이하고 주리 끌고 가는 거 아냐?”
“그런 거 아냐!”
디아나가 딱 잘라 말한다. 뒤에서 주리가 입을 연다.
“마침 잘 됐네. 시간도 많아 보이는데 너희들도 우리 좀 따라와 주면 고맙겠는데...”
“아, 아니, 됐어. 우리는 또 따로 선생님들이 불러서...”
미셸이 얼른 주리의 말을 자른다.
“핑계 대는 거 아냐?”
“아, 그런 건 아니고... 그럼, 잘 갔다 와!”
미셸은 대충 얼버무린다. 제레미도 아무 말 없이 그냥 어색하게 바라보고만 있다.
“하여튼... 이럴 때는 꼭 안 도와주려고 한다니깐.”
디아나의 말은 그럴 줄 알았다는 투다. 그렇게 또 어느 정도를 걸었을까.
“그런데... 나 말야...”
그 동안 주리와 디아나의 뒤에서 말이 없이 걷던 세훈이 좌우를 두리번거리며 묻는다.
“주변도 살피지 않고 그냥 너희들 따라 무작정 걸은 것 같은데... 우리 지금 어디쯤이지?”
“아, 이제 거의 다 왔어. 봐, 동관에 도착했잖아.”
“응? 동관이라고? 어쩐지 좀 멀리 온다 했네. 그러고 보니까 바로 옆이 중학교네.”
세훈은 반대쪽 창밖을 내다본다. 그러고 보니 오른쪽으로 본관과 동관 연결통로가 보인다. 신경을 못 쓰고 그냥 지나친 모양이다.
“그런데... 연극부실은 몇 층이야?”
“아, 이제 여기서 한 층만 내려가면 돼.”
세 사람은 바로 옆에 있는 계단을 통해 4층에서 3층으로 내려간다. 계단 한쪽에 있는 안내판에 ‘연극부’, ‘오케스트라부’ ‘미술부’ 등이 적혀 있다.
“아... 다 왔네. 계단 바로 옆이 연극부야.”
세훈과 주리는 디아나를 따라 연극부실 안으로 들어간다. 연극부실 안은 매우 넓어 보인다. 한쪽은 무대로 쓰는 듯 조금 높은 편이고, 무대장치를 설치하거나 할 수 있도록 뒤에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그 외에도 벽을 꾸며 놓은 것으로 봐서는 휴식공간도 있는 모양인데, 지금은 한참 짐을 옮기고 하느라 어수선하다. 연극부실 안에는 이미 많은 수의 학생들이 크고 작은 짐들을 옮기고 있다.
“그런데... 다들 어디 가는 거야?”
“아... 이번 달 말에 공연이 하나 있어서, 그것 때문에 소품들을 옮기느라고.”
“벌써 공연을 해? 아직 학기 초잖아.”
“이래저래 하는 게 많더라.”
세훈은 잠시 밖에 한 번 나가 본다. 조금 전에는 그냥 들어가느라 자세히 못 봤는데, 복도에는 짐이 한가득 쌓여 있다. 도대체 이게 언제 끝날지도 모를 정도로. 세훈은 다시 들어와서 디아나에게 묻는다.
“너는... 이게 한 얼마 정도면 끝날 거라고 생각해?”
“글쎄... 오늘 저녁까지 가려나.”
“저녁... 이라고?”
옆에 서 있는 주리가 디아나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정색하며 되묻는다.
“그럼 설마... 우리를 지금... 저녁까지 짐 옮기는 거 도와 달라고 여기 부른 건... 아니겠지?”
“아... 당연히 아니지!”
디아나는 얼른 손을 저으며 말한다.
“설마... 저녁까지겠어? 그 전에는 다 끝나지... 않을까?”
“‘않을까’는 또 뭐야?”
세훈이 목소리를 높인다.
“애초에 언제 끝난다는 걸 알고 있다면 몇 시 정도에 끝난다고 해야 되지 않아?”
“그... 그건 그런데...”
“‘그런데’는 또 뭐고?”
“짐이 저렇게 많은데다가, 선배들이 몇 시에 끝난다고 확실히 답을 안 해 줘서...”
“하아아...”
세훈과 주리는 잠시 뒤돌아서서 한숨을 푹 쉰다. 주리가 먼저 세훈에게 귓속말을 한다.
“우리 아무래도 잘못 걸린 것 같은데. 저녁까지 꼼짝없이 여기 붙잡혀 있게 생겼어.”
“그걸 어떻게 알아? 그리고 수업은 안 하고? 또 학원도 가야 하지 않아?”
“디아나도 우리하고 같은 학원에 가고 같은 수업을 듣잖아! 게다가 오늘은 학원 수업 없는 날이고! 빠질 명분도 없단 말이야!”
“그러니까, 학교 수업도 있지 않냐고...”
“쉬는 시간마다 불려가겠지!”
“......”
세훈은 말없이 팔짱을 끼고,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푹 숙인 머리는 누가 봐도 어두워 보인다. 주리는 다시 디아나에게로 간다.
“디아나.”
“왜?”
주리는 얼굴에 조금이나마 있던 웃음기를 싹 지우고 말한다.
“아무래도 아이스크림 가지고는 안 될 것 같은데.”
“분명히 아까 딴소리 안 한다고 했는데...”
“지금 이 상황이 아이스크림 가지고 해결될 것 같아? 나도 그렇고, 세훈이도 그렇고.”
“아... 알았어! 그러면...”
디아나가 막 뭔가를 말하려는 찰나.
“저... 선배님!”
연극부실 밖에서 여러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디아나를 부르는 듯하다.
“아, 왔구나. 들어와.”
디아나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말한다. 디아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극부실 문이 열리고 학생 5명이 들어온다. 어두운 초록색 교복을 보니 모두 중학생들이다.
“안녕하세요!”
“그래... 그래. 그런데 어제 본 사람들도 있고, 못 본 사람들도 있네.”
“저... 이 선배님들도 연극부인가요?”
그 중 짧은 머리의 남학생이 디아나에게 묻는다.
“아니, 그건 아니고... 너도 지금 연극부 아닌 사람들 데려왔잖아, 맞지?”
“네, 그건 그런데...”
“아, 그러고 보니까 이 친구들 소개를 안 했네. 이 짧은 머리 친구의 이름은 ‘찰리 베리’라고 하는데, 올해로 3년차야. 우리 연극부의 에이스라고 할 수 있지. 소화를 못 하는 배역이 없어.”
“......”
세훈과 주리는 표정 변화 없이, 아무 말도 없이 잠자코 듣고만 있다. 그런 건 관심 없다는 듯한, 무심한 표정을 유지한 채로.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친구의 이름은 ‘강세민’이라고 하고, 얘도 역시 우리 연극부지. 아! 그리고 또 그 옆에 있는 애는... 아, 우리 연극부가 아닌가 보네. 못 보던 애인데...”
디아나는 왼쪽 끝에 선, 갈색의 긴 생머리에 오른쪽 눈에 안대를 한 여학생 한 명이 신경 쓰였는지 손짓을 해서 앞으로 오게 한다. 그 여학생은 뭔지 모를 웃음을 짓고 있고, 다른 중학생들도 뭔가 알고 있다는 듯 가만히 보고만 있다.
“아! 선배님들, 안녕하세요!”
디아나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 여학생이 먼저 인사한다.
“제 이름은 ‘츠츠지모리 사이’라고 합니다. 올해로 중학교 2학년이 됐고요...”
“잠깐... ‘츠츠지모리’? 혹시...”
“맞아... 얘 언니가 아이돌 출신 여배우 ‘츠츠지모리 코하쿠’잖아.”
사이라는 여학생은 겉으로는 평범한 중학생 같아 보여도 은근히 정신없어 보인다. 머리핀은 7가지 색이고, 캐릭터가 그려진 배지를 10개도 넘게 달고 있고, 스커트에는 인형도 매달고 있고... 그런데 사이는 안대에 신경을 많이 쓰는 모양이다. 자기소개를 하면서도, 오른손으로는 계속 안대를 만지작거린다.?
“저기.”
세훈이 그 안대가 신경 쓰였는지 말을 꺼낸다.
“초면에 실례지만, 잠깐 손은 가만히 있어도 괜찮은데...”
“아, 죄송합니다. 이렇게 안 하면... 뭐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좀 불안한 느낌이라서...”
얘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세훈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있고, 주리는 한숨을 쉬고 있고, 디아나 또한 애써 웃음을 참고 있다.
“설마...”
세훈이 조심스럽게 말한다.
“그 안대 안에 뭔가 숨기고 있는 건... 아니겠지?”
“......”
사이는 아무 말도 없이 입을 다물고 있다. 정색한 표정은 조금 진지해 보이기도 하다.
“아, 알았어, 알았어. 나중에 천천히 알아 가면 되니까...”
세훈의 말에 사이는 안도한 듯 얼굴을 푼다. 디아나는 겨우 웃음을 참아내고 말한다.
“자, 뭐 얘는 그렇다 치고, 계속 소개를 한 번 해 볼까. 여기 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디아나가 막 후배 중 한 명을 가리키려던 그 때.
“야.”
그 동안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서 있던 주리가 말을 꺼낸다.
“지금 장난해?”
“장난이라니...”
“아니,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애들을 데려와야지. 여기 모인 애들한테는 좀 미안한 소리지만, 우리가 지금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자기소개나 듣자고 여기 온 줄 알아?”
“아, 아니... 그건 그렇긴 한데... 일단은 서로 누군지 알아야... 하는데...”
디아나는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한다. 주리는 한숨을 푹 쉬고는 계속 말을 이어나간다.
“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네. 숨고르기 하는 시간이었다 치고, 일단은 당장 시작하자고. 알겠지? 시간이 없잖아.”
“......”
주리가 앞에 서고 세훈과 디아나, 그리고 중학생 5명이 주리 뒤를 따라간다. 복도에 있는 짐더미는 여전히 그대로다. 중학생들이 짐들을 이리저리 옮기려고 애를 쓰고 있다. 그런데, 사이는 짐들을 만져만 보고 다른 짐으로 가고 하는 이상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왜 저러지, 사이라는 친구는. 뭐라고 한 마디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주리가 한 마디 하자 세훈은 ‘될 대로 되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한다.
“놔 둬. 자기 나름대로 뭔가가 있겠지.”
“그런데, 디아나.”
주리가 디아나에게 넌지시 묻는다.
“너는 한 몇 명쯤 와야 이게 다 끝날 수 있다고 생각해?”
“지금 30명 정도 달라붙어 있으니까... 지금 있는 인원의 2배만큼은 더 와야 하지 않을까...”
“하... 그러면 지금 있는 인원들 가지고는 안 되잖아.”
세훈이 투덜대며 디아나에게 말한다.
“아까 주리한테 뭐 말하려고 했지? 그래, 네가 뭘 약속할 건지 한 번 말해 봐.”
“그러니까... 으음...”
디아나는 말을 얼버무린다.
“뭐야, 설마 생각을 안 해 본 거야?”
“아,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냥 싸게 우리를 부려먹으려고 했던 거 아냐? 그럼 어림도 없지.”
“그런 게 아니라니까! 내 말 좀 들어 봐.”
“뭘 그렇게 고민해! 세훈아, 가자.”
주리가 세훈의 손을 잡아 끈다. 디아나는 이제 울상을 짓는다.
“그러니까, 내 말 좀...”
“저, 잠깐만요.”
바로 그 때, 5명의 중학생들 중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디아나, 세훈, 주리가 뒤돌아보니, 아까 그 5명 중 연극부가 아닌 사이다. 사이는 여전히 짐들을 만지기만 하고 있다.
“아직 한 명이 안 왔는데...”
“응? ‘한 명’이라고?”
주리가 되묻는다.
“아까 말했겠지만, 30명이 와서 도와준다고 해도 모자란 판에, 한 명이 온다고 될 것 같아?”
“저... 한 명은 맞는데, 그 한 명이 오면 다 끝날 수 있을 것 같아서...”
주리는 대답 대신 큰 소리로 웃는다. 웃음이 그치고 나서, 주리는 어이없다는 듯 부자연스럽게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방금 그 말 말인데... 혹시... 나를 웃기려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아, 아니, 저, 그게...”
“적당히 말이 되는 말을 해야지. 한 명이 와서 다 끝내 준다는 게 말이나 될 것 같아? 그리고 네가 지금 하는 걸 보면, 더더욱 그 말이 믿기지 않는다고.”
“그게... 진짜인데...”
사이는 선배 앞에서는 얼버무리면서도 끝내 자기 주장은 굽히지 않는다. 주리는 순간 머릿속에 뭔가 떠오르는 게 있다. 설마... 하지만 방금 자기가 생각한 그건 아닐 거라고 단번에 부정한다. 주리는 짐짓 태연한 척하며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옆에 있는 세민에게 묻는다.
“아, 너도 한 번 생각해 봐. 말이 안 되잖아. 맞지?”
“저... 정말인데...”
뒤에 서 있는 다른 학생들도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사이와 세민의 말에 동의하는 듯하다. 세훈과 주리가 뭐라고 해 보려는데, 찰리가 손가락으로 연극부실 바깥의 복도 쪽을 가리키며 말한다.
“보세요! 저기 오고 있잖아요.”
“응? 어디?”
학생들이 잡담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찰리가 지목한 학생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순간 주리는 뭔가 이상하다 싶어 자기 눈을 비빈다. 그 무거운 짐들이 지면에서 조금씩 떠 있다? 거기다가 서서히,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주리는 곧장 세훈과 디아나를 보고 말한다.
“야, 너희들, 저거 보고 있어?”
“아. 저 짐들이 왜?”
세훈은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눈치를 못 챈 듯하다. 그냥 별 일 아니겠거니 하며,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서서 다른 곳을 본다. 한 1분쯤 지났을까. 세훈은 다시 복도 쪽을 돌아본다.?
“어? 뭐야! 짐들 다 어디 갔어?”
“너... 설마 딴 생각 하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주리가 세훈을 돌아보며 말한다.
“우리는 여기서 쭉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뭐냐고? 우리 할 일은 이제 끝났어.”
“끝났다고?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저기 봐봐.”
주리는 연극부실의 한쪽 구석을 가리킨다. 그리고 거기에는...
“뭐... 뭐야, 저거, 언제 다 된 거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복도 한쪽에 가득 쌓여 있던 짐들이 어느새 연극부실 한쪽에 차곡차곡 정돈되어 있다. 1분도 안 된 시간이었을 텐데!
“어, 어떻게 된 거야?”
“아, 그러니까... 나도 처음에는 안 믿겼는데...”
주리 옆에 서 있는 디아나가 운을 뗀다.
“저 짐들이 저절로 조금씩 움직이더니, 한 10초쯤 되니까 속도가 빨라진 거야. 그리고... 그 짐들이 다 차곡차곡 쌓이는 데 30초밖에 안 걸렸지.”
“뭐야? 그걸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아니, 어떻게 생각해 봐도 그건 말이 안 되잖아?”
“넌 그럼 남들이 다 보는 동안 안 보고 뭐 했어?”
“......”
“보나마나, 멍때리고 있었겠지. 세훈이는 그런 거 아주 잘 하잖아.”
“아니...”
세훈은 주리의 말에 뭐라고 변명해 보려고 하지만, 말이 자꾸 입 안에서만 맴돈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러니까...”
“아, 말은 이따가 듣자고. 지금 그 짐을 다 옮긴 문제의 주인공이 여기 있으니까.”
“문제의... 주... 인공?”
세훈은 반문하며 주위를 돌아보려 한다. 하지만... 그 문제의 주인공은 바로 세훈의 정면에 있다. 어두운 초록색의 교복을 입은 긴 생머리의 여학생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푸른빛이 도는 머리색 말고는 모든 게 평범해 보인다. 그리고 이미 주리나 디아나는 그 여학생과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것도 세훈은 쏙 빼놓은 채로.
“레아라고 했지? 혹시 그 능력은 어떻게 얻게 된 건지 물어봐도 될까?”
?주리의 질문에 레아라고 불린 여학생은 얼굴을 붉힌다.
“아... 그건 저도 모르는 새에 생긴 거라서... 저도 딱히 뭐라고 할 말은...”
“뭐 어쨌든... 한 번에 끝내 줘서 고마운데...”
“알고 보면 별거 아닌 능력이죠.”
“야, 너희들!”
그 때 가만히 있던 세훈이 끼어든다.
“나만 빼놓고 너희들끼리만 말하기야?”
“직접 보지도 않은 사람이 뭘 말하겠다고 그래?”
“아니... 아, 됐어.”
세훈은 그냥 고개를 돌린다. 다들 뭔지 모를 능력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세훈만 못 봤다. 이런 상황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든 끼어들지 못할 것 같다. 그냥 지금까지 들은 건 못 들은 걸로 쳤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 그냥 지금 여기서 나가 버리자. 세훈은 조용히 발을 돌려서 연극부실을 나가려 한다. 막 문에 들어섰을 때...
“어...? 뭐야?”
어느새 세훈은 일행의 한가운데에 있다. 다시 돌아서 거기로 간 것도 아닌데! 세훈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한다.
“아... 아니, 이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꼭 몸으로 느껴야 알겠어?”
주리가 한심하다는 듯 말한다.
“아니... 그러면... 이게...”
“맞아요. 선배님만 모르는 것 같아서요.”
사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뒤돌아보니, 세훈의 뒤에는 사이가 레아와 함께 서 있다. 사이는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웃음을 지으며, 오른손을 슬며시 들어 보인다. 세훈은 잠시 머리를 긁적거리고는, 이내 입을 연다.
“아... 이제 알겠다. 뭔지 알겠다고.”
“이제 안 거야?”
주리의 말에 세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참 빨리도 안다.”
세훈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아직도 뭐가 뭔지 감이 잘 안 잡힌다. 레아가 뭔지 모를 어떤 힘으로 나를 움직였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인 것까지는 알겠는데...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인 거지? 아까 그 짐들과 같은 방식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된 거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정확한 원리가 뭔지는 도무지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사이는 도대체 왜 손을 들어 보이는 거지?
세훈이 다시 주리와 디아나 등이 있는 쪽을 보니, 레아는 아직도 선배들과 후배들에 둘러싸여 질문공세를 받고 있다. 들어 보니 레아의 능력과 상관없는 질문들도 많다. 남자친구는 있느냐, 요새 가수 누구 좋아하냐... 세훈은 완전히 혼자가 되어 버린 듯한 기분이다. 혼자 나가 버리려고 했지만 그것도 실패했다. 그렇다고 끼어들자니 다들 아는 레아의 능력을 혼자만 모르고... 고독감이 저절로 밀려든다. 그대로 벽 한구석에 주저앉아 버린다.
한편, 주리와 디아나는 고독감을 느끼는 세훈과는 달리 꽤 관심있게 레아의 능력을 지켜봤는지 레아의 바로 앞에 서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고 있다.
“그래... 그런데 혹시... 그 능력은 어떻게 얻게 된 거야?”
“아, 제 능력이요? 그건 비밀인데요.”
“에이! 그런 게 어디 있어. 선천적인 건지, 아니면 후천적인 건지 그건 알 거 아냐?”
레아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는다. 안 가르쳐 주려는 듯하다.
“아, 알았어. 그러면... 한 가지만 더 묻자.”
주리가 다시 레아에게 묻는다.
“혹시... 나도 너처럼 그런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까?”
“음...”
레아는 대답하는 대신 뭔가 숨기고 있는지 손을 턱 밑에 괴고 있기만 한다.
“왜 그래? 뭔가 숨기고 있는 거라도 있어?”
“아... 그건 지금 여기서 말하기는 곤란한 거라서...”
“뭐가 곤란해?”
“아... 지금 여기서는 말할 수 없는 거라서... 나중에 만나면 다시 말할게요.”
레아는 급히 얼버무린다. 주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서 있다.
“레아가 왜 말을 저렇게 얼버무리고 있는 거지?”
옆에서 듣고 있던 디아나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원래는 꽤 쾌활한 성격인데... 그러게 왜 네가 화제를 이상하게 돌려서...”
“딱히 내가 화제를 이상하게 돌린 것도 아닌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질문에도 잘 대답했는데.”
“하... 그럼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나중에 다시 한 번 만나서 물어 보는 수밖에.”
주리는 말하던 중 시계를 본다.
“아... 수업 5분 전이네. 이제 가 봐야 하지 않아?”
“아, 맞다! 이제 수업 시작이지.”
디아나 역시 주리와 함께 연극부실을 떠날 준비를 한다. 주리는 레아를 돌아보고 말한다.
“너 그거 뭐냐...”
“네?”
주리는 레아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귀를 가까이 댄다. 그리고 소리를 낮추고 말한다.
“혹시 나한테만 살짝 이야기해 줄 수 있어?”
“음...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혹시나 했는데, 선배는 그런 능력 같은 걸 쓸 수 있는 것 같지는 않네요.”
“에이, 뭐야. 난 또 특별히 뭐라도 숨기고 있는 줄 알고.”
레아는 말없이 그저 웃을 뿐이다. 주리는 돌아서서 연극부실을 나서려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레아에게로 돌아온다.
“잠깐... 하나만 좀 더 물어 보자.”
“네?”
“누군가 그러던데... 이 학교에는 초능력자가 다른 곳보다 훨씬 많다더라. 알고 있어?”
“네, 알고 있죠.”
레아의 대답은 의외로 금방 나온다. 혹시 레아는 정말로 뭔가를 알고 있기라도 한 걸까? 주리는 더욱더 궁금증이 생겨서 물어 본다.
“여기에 그런 초능력자들을 끌어들일 정도로 강한 사람이 있다고 들었거든. 혹시 그게... 누구인지 짚이는 사람 있어?”
주리는 그렇게 물어 보았지만, 사실 주리는 내심 마음속으로 의심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건 다름 아닌, 주리의 바로 눈앞에 서 있는 그 사람. 일단 주리의 생각으로는, 그리고 주리가 본 것으로는 그 정도도 충분히 강한 능력이다.
“아니오.”
이 대답도 의외로 명쾌하게 나온다.
“분명히 있기는 할 거예요. 그리고 또 확실히 대답할 수 있는데, 저는 아니에요.”
“어떻게 그걸 확신할 수 있는데?”
“일단 제 능력은 의외로 그렇게 강한 것까지는 아니거든요. 그리고 제 주변에는 그렇게 강력한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거든요.”
“아... 그런가? 일단은 뭐, 알았어.”
주리와 레아는 거기서 일단 헤어진다. 주리와 디아나는 연극부실을 나서던 중, 연극부실 입구 구석 쪽에 혼자 처박혀 있는 세훈을 본다.
“야! 너 거기서 뭐 하냐?”
“아... 나?”
세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을 뗀다.
“나... 나는...”
“왜 거기서 혼자 그러고 있어? 그러면 더 소외되고 그러는 거 몰라?”
“아니, 그런 건 아는데...”
“알았으면 따라와. 수업 시작하기 5분 전이야.”
세훈은 조용히 일어나 주리와 디아나를 따라간다. 세훈은 주리와 디아나를 뒤따라가는 중에도 여전히 머리를 긁적인다. 그렇다고 말하자니 더욱더 바보 취급만 받을 것 같고... 세훈은 그냥 말없이 교실까지 가기로 한다. 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주머니 속이 왠지 모르게 허전한 느낌이 든다.
“저... 선배님!”
세훈, 주리, 디아나가 돌아보니, 사이가 복도에 서 있다.
“어...? 누구?”
사이는 세훈을 보고 눈짓한다. 세훈은 사이 쪽으로 걸어간다.
“나는... 무슨 일로... 불렀어?”
“선배님이 못 본 것 같아서요.”
세훈이 충분히 가까이 오자, 사이는 목소리를 낮추고 말한다.
“이건 맛보기예요.”
사이는 세훈의 오른손에 자기 손을 살짝 스친다. 그리고 그 순간...
“어...? 내 AI폰이잖아? 어떻게...”
세훈의 손에는 어느 새 세훈의 AI폰이 들려 있다. 사이가 직접 그것을 준 것도 아닌데도.
“조금 전에 급하게 나가느라 떨어트리고 갔더라고요.”
“아... 그래? 고... 고마워.”
세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런데... 능력을 쓰는 쪽은... 레아 아니었어?”
“맞아요. 그것도 맞는데...”
사이는 아까의 미소를 또 지으며 말한다.
“뭉치면 강하죠.”
“아... 그래?”
세훈은 아직도 뭔지 모르겠지만 사이의 그 말을 듣고 보니 뭔가 또 하나를 알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고맙고, 그럼... 또 보자.”
“네, 또 봐요!”
세훈은 사이와 인사를 나누고 다시 주리와 디아나한테로 와서 갈 길을 간다. 그렇게 또다시 1분 정도를 갔을까...
“어? 잠깐...”
“왜 그래, 또?”
세훈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하자, 주리가 퉁명스럽게 반응한다.
“저기... 며칠 전에 본...”
“며칠 전에 본 뭐?”
“그러니까... 저번에 백화점에서 본 그...”
“좀 똑바로 말해라.”
“그... 그 선배 있잖아!”
“아! 누군지 알겠다.”
주리는 세훈이 다급하게 말하는데도 그냥 지나가듯 대답한다.
“아니, 너도 그 때 내 옆에 있었잖아!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거야?”
문제의 그 선배는 점점 세훈과 주리 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그것도 좌우에 남학생 몇 명을 끼고. 세훈의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진다. 한 발 한 발 다가온 그 선배와 남학생들은, 이윽고 세훈의 바로 옆에까지 다가온다. 그 선배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능력도 사용하지 않는다. 다만 무엇인지 모를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세훈을 한 번 흘겨보고는 지나갈 뿐이다. 그 뒤에서 그 선배를 묵묵히 따르는 남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세훈은 그 자리에 마치 굳은 듯 가만히 서서 눈동자만 굴린다. 그 선배를 위시한 남학생들이 지나가자, 세훈의 심장박동이 점점 잦아든다. 그와 동시에 세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러고 보니까 그 남학생들 중에, 세훈이 자주 보는 옆반 남학생도 한 명 있는 듯하다.
“방금 저....”
세훈이 옆에 있는 주리에게 묻는다.
“저 뭐?”
“저 선배 뒤에서 걸어가던 애 한 명 있잖아...”
“그런데?”
“누구...였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우리 반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 반 아니면 신경 쓰지 마.”
주리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세훈의 손을 잡아 끈다.
“자! 시간이 얼마 없어. 빨리 들어가자고.”
세훈은 주리에게 이끌려 가면서도 불안한 생각을 떨쳐 내지를 못한다. 저 선배는 무슨 꿍꿍이가 있기에 나한테 저러나, 무슨 짓이라도 하려는 게 아닌가, 그리고 저 선배는 도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저렇게 자기 동급생이나 후배들을 데리고 다니나... 그런 생각을 하며 막 교실로 들어가려는데, 복도 한 쪽에 여학생 2명이 서 있다. 명찰 색으로 봐서는 분명 1학년인데, 얼굴로 봐서는 같은 반은 아닌 듯하다. 그런데, 그 2명은 세훈을 보고는 대놓고 비웃는 웃음을 짓고 있다.
“너... 저 애들 누군지 알아?”
세훈이 조심스럽게 주리에게 묻는다.
“아니. 당연히 알 리가 없지.”
주리는 애써 무시하며 말한다.
“얼른 들어가자고.”
세훈은 교실로 들어가면서도 교실 문 바깥을 돌아본다. 그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지 안 보인다. 하지만 왜인지는 모르게 자꾸만 불안하다. 별것 아니야, 별것 아니야. 자꾸 되뇌어 봐도 불안감은 떠나지 않는다. 그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한 채, 세훈은 책을 편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마드리갈
2019-01-13 15:58:59
짐들이 저절로 움직여서 단시간에 쌓였다는 건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잘 안되겠죠. 자연의 일반적인 법칙과 그에 대한 인간의 이해를 근간부터 뒤흔드는 현상임에 틀림없으니까요. 정말 뭘 본건가 하는 생각이 안 들면 그게 더 이상할 것도 분명할 거예요.
정말 저런 현상을 접했다면 그냥 불안감만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거예요. 자신의 감각이 이상한 건가, 왜 저게 큰 화제가 되지 않을까 등등의 생각이 중첩되면서 굉장히 혼란했을 건 분명해요. 세훈은 분명 책을 읽어도 뭘 읽는지, 음식을 먹어도 이게 뭔지 잘 모를 정도로 정신없지 않을까 싶네요.
시어하트어택
2019-01-21 23:10:39
저 장면은 최대한 재미있게 상상을 해서 나온 거죠. '남들이 다 아는 걸 나만 몰랐다'라는 명제에서 시작을 한 건데...
아마 저였어도... 저랬을 듯합니다.
SiteOwner
2019-01-13 20:12:49
19세기의 사람들이 기계가 일을 척척 해내는 것을 보고 놀랐던 것을 현대인이나 미래인이 느낀다면 아무래도 이런 상황이 아닐까 싶군요. 게다가, 일상과 비일상의 차이란 어떠한 현상 그 자체보다는 익숙한 것인가 익숙하지 않은 것인가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초능력자가 존재하는 건 비일상같지만, 초능력의 존재가 확인되어도 큰 화제가 되지 않는 것을 보면 초능력자가 있는 지역 미린에서는 초능력자의 존재가 일상, 그래서 일상과 비일상은 상대적인 것이라고 봐야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다음 이야기도 기대됩니다.
시어하트어택
2019-01-21 23:13:54
오너님 말이 맞습니다. 정말 뭐든지 상대적인 것 같군요.
한때 '우리 일상에서 비일상적인 존재들이 암약한다'는 설정이 유행했는데, 반짝 유행하고 금방 사장되었죠. 아마도 저런 점 때문이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