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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들을 준비 됐지?”
“어... 그래.”
세훈은 입안의 침을 꿀꺽 삼킨다. 주리는 별말 없이 현애를 가만히 응시한다.
주리와 세훈에게 현애가 말해 준 건 이렇다.
현애는 지구 출생이다. 그것도 아득히 먼 과거의 지구 말이다. 태어난 해는 2233년, 태어나서 쭉 살아왔던 곳은 서울이다. 원래 가족은 부모님, 오빠, 언니 이렇게 5인 가족이었다.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사업가였고 어머니는 대학교수였다. 집은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였고, 근처에는 꽤 넓은 공원도 있어 놀기도 좋았다.
집안은 대대로 교회를 나가는 집안이라, 어렸을 때는 찬양 대회 같은 데까지 나갈 정도였고, 중학생 때부터는 좀 소홀히 하게 되었지만, 지금도 기본적으로 신을 믿고 있다.
중학교 때까지는 비교적 쾌활하게 지냈다.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골목대장도 해봤고, 중학교 때까지는 운동선수도 했다. 게임도 남자아이들이 자주 하는 총폭탄이 난무하는 게임을 즐겨 했다. 그러면서도 또 학교에서는 성실한 학생으로 평이 좋았다.
중학교 3학년 겨울이 될 즈음, 현애는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쓰러졌고, 2주 정도 병원에서 지내다가, ‘좀 오래 잠들었나 보다’ 하고 일어나 보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깨어난 곳은 미린대 병원의 특수 병실. 정장을 입은 사람 2명이 앉아 있기에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각각 VP재단과 정부 연구소에서 왔다고 하는 두 사람은 친절하게 물음에 답해 주었다. 이곳은 ‘세온’ 행성의 ‘세라토’라는 도시. 시간 자체는 5억 년 정도 흘렀는데, 지금 시간대의 인류 역시 31세기쯤에 대규모 이민선단으로 동면된 채로 지구에서 출발했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5억 년 후로 와 있었고 그 후로 999년이 지났다고 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엄청나게 많이 흘렀는데 세대차는 별로 안 난다는 건 다행이었다. 그 ‘별로’란 것도 2,000년 정도의 시간이기는 했지만.
그리고 지구에서는 없었던 새로운 것이, 현애에게 생겨났다. 깨어나고 며칠 후, 물을 마시기 위해 물컵을 잡았는데, 무심코 물을 좀 차갑게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하자, 어느새 컵에 든 물에 살얼음이 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때 알았다. 자신에게 ‘초능력’이 생겼다는 것을.?
어쨌든 그 후, 미린대 병원에서 회복 과정을 거치고 2주 정도 ‘해동자 교육센터’라는 곳에서 적응 교육을 받았고, 그 교육이 끝나고 미린고등학교로 전학을 왔다.
“맞아. *하나한테서 한 번 들었지.”
주리가 알겠다는 듯 말한다.
“하지만 다시 들어도 신기해. 동면이 되었다가 해동된 사람을 직접 보는 것도 처음이고, 지구에 살았다는 사람을 직접 보는 것도 처음이니까.”
“그런데 말이야...”
세훈이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은 듯 눈을 빛내며 현애에게 묻는다.
“오늘 처음 만난 건데, 왜 시간이 좀 지나서 말할 만할 걸 지금 미리 말해 주는 거지?”
“숨기고 뭐고 할 것도 아니니까.”
현애의 답은 1초도 안 기다리고 바로 나온다.
“아니 왜? 내 생각에는, 이런 거 말했다가는, 질 나쁜 애들한테 약점 같은 거 잡힌다거나, 안 좋은 의미로 주목을 받는다거나 그럴 것 같아서.”
“그 교육센터라는 데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거든. 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수백 년에 이르기까지 동면했다가 해동된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고 말이야. 내가 그런 걸 숨길수록, 사람들은 그런 걸 더 알고 싶을 테니, 차라리 숨기지 않고 말하는 편이 나아. 애초에 이런 거로 동정 같은 것 받고 싶지도 않고.”
세훈은 아직도 현애의 말투가 추울 때 끼는 서리같이 좀 차갑다고 느끼면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다시 봐도 역시 차가우면서도 따뜻하다. 이 모순된 것이, 동시에 느껴질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어느새 걷다 보니 미린호가 보인다. 산책로에서, 또는 호수에 설치된 데크에서 호수를 보는 사람들마다 느끼는 건 다르겠지만, 미린 중앙공원에 놀러 오는 사람들과 주민들이 꼽는 이 호수의 볼거리는, 호수에서 노는 동물들, 나무들이 우거진 숲 뒤로 보이는 초고층 아파트들과 오피스 빌딩들, 그리고 2,000m가 넘는 RZ타워의 스카이라인, 그리고 밤에 호수에 반사되어 빛나는 야경 등을 주로 꼽는다. 관광 안내 책자에도 당당히 한바닥을 차지하는 곳이다.
호안 산책로에 막 다다랐을 때.
“야... 잠깐만.”
주리가 뭔가 급한 듯 말한다.
“왜 그러는데?”
“나 잠깐 화장실 좀.”
“아, 그래.”
주리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 얼마 후, 세훈은 뭔가 생각났는지 손뼉을 딱 치고는 현애를 돌아본다.
“아, 잠깐. 하나만 더 물어볼까?”
“뭔데?”
“그런데 말이야. 초능력은 어떻게 얻게 된 거야?”
“나도 몰라!”
현애는 1초도 안 되어 딱 잘라 말한다. 순간, 마치 세훈의 얼굴에 ‘실망했다’고 쓰인 듯, 눈과 입이 떨리는 게 보일 정도다. 세훈에게도 등굣길의 그 한기가 다시 느껴질 정도다.
“나는 초능력 같은 건 모르고 살았는데, 왜 이런 게 생겼는지도 모르겠어.”
“정말이야?”
현애가 뭔가 더 말하려던 그 순간,
뭔가 불길한 예감이 현애를 휘감는다.
돌아본다. 호수 쪽을.
호안에서 좀 떨어진 데크에 누군가 서 있다.
누군지 알 수 없다. 코 위쪽으로는 후드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알 것 같다. 여기서도 보인다. 저 입 모양!
“여기 있었군그래.”
그 남자가 입을 연다. 아까 니라차한테서 들은 대로, 음성은 조금 높은 편이지만 꽤 무겁다. 그리고 그 입은,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다! 세훈은 급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본다. 주리가 보이지 않는다. 이 자를 어떻게든 멈추고 이야기를 들어 봐야 할 텐데!
“야!”
세훈이 현애를 돌아보며 말한다.
“너, 어떻게든 저기 호수에 물 좀 얼려 봐. 건너가게!”
현애가 세훈의 말을 듣고 주춤하는 그 사이.
“헛짓거리하고 있군.”
어느새, 후드를 쓴 남자는 데크의 난간 위에 올라가 있다. 약 5초 전까지만 해도, 데크 위에 서 있었을 터다. 눈 깜짝할 새에 벌어진 일이다.
“당신 말이야...”
현애가 남자를 올려다보고, 얼굴에는 인상을 팍 주며 말한다.
“어떻게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나는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다 방법이 있지.”
“말해 봐. 왜 나를 노리고 있는 거지?”
“흐흐흐흐. 아무렴, 내게 잠재적으로 방해가 될 ‘경쟁자’는 숙청해야 하지 않겠어?”
후드를 쓴 남자는 웃음까지 흘리며 말한다.
“뭐... 뭐라고?”
“귀 막혔나? 숙청 말이야. 숙! 청!”
“너 이 자식...”
남자의 또박또박 하는 말에, 현애는 주먹을 꽉 쥐고 분을 삭이지 못한다. 순간 세훈에게도 느껴진다. 또다시, 겨울과도 같은 찬 기운이다. 하지만 차원이 다르다. 아까와는. 세훈과 처음 만났을 때가 마치 초겨울 같고, 니라차와 싸웠을 때가 포근한 겨울 같았다면, 지금은 마치 칼바람이 부는 극지방 같다.
그때다. 막 화장실에 다녀온 주리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세훈의 눈에 들어온다.
“빨리 와! 빨리!”
“아니, 왜!”
세훈은 데크의 난간 위에 선 남자를 가리키며 말한다.
“저... 저 녀석 말이야, 좀 움직이지 못하게 해 봐!”
주리는 난간 위에 선 후드 쓴 남자를 보자, 속도를 높인다. 잰걸음으로 막 산책로에 다다른...
순간.
“소용없을 텐데.”
후드를 쓴 남자는 어느새 데크 난간에서 뒤로 뛰어 호수로 떨어지고 있다.
“흐흐하하하, 다시 만나자고!”
풍덩- 하는 소리. 세 명의 눈앞에, 호수의 물결이 거칠게 일렁이는 게 보인다.
“하아아아아아, 저 녀석...”
현애가 분하다는 듯 얼굴을 잔뜩 찌그린다.
“이 호숫물을 다 얼려버려!”
세훈도 분을 삭이지 못하고 약간 붉어진 얼굴을 하고, 현애를 보며 목에 힘을 주고 말한다.
“내가 있다면야 못할 법도 없잖아. 안 그래?”
“아니, 네가 도와준다고 해도, 저 호수를 다 얼리는 건 현재로서는 불가능해.”
“아니, 왜? 아까 징검다리 주변도 얼렸잖아.”
“그게 최대치인 것 같더라. 네 도움을 받는다고 해도, 저 데크까지 가지도 못했을걸.”
현애는 분을 삭이지 못했는지 심호흡을 자꾸 들이켰다 내쉰다.
“그건 그렇고 저 녀석, 너무 거슬리네. 사진으로 처음 봤을 때도 그렇고, 방금 전에 비웃는 것 같은 말투라든가 몸짓도 그렇고.”
세훈과 주리에게, 또다시 서늘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현애 주변에서. 세훈이 말실수하자마자 세훈을 엄습해 왔던, 바로 그런 추위다. 이곳에서는 백년 천년 지나도 느끼지 못할, 1분도 안되는 시간에 계절의 변화를 두 번씩이나 겪는 그런 추위 말이다.
“겨우 좀 다시 기분이 좋아지나 했는데, 이렇게 또 잡쳐 버리면 어떡하자는 거야.”
“야! 우리도 꽤 혼란스러우니까, 진정 좀 해, 진정!”
주리가 메고 있는 가방에서 생수병을 하나 건네준다. 현애가 생수병을 잡자, 들어 있는 물에 살얼음이 잠시 생겼다가, 이내 없어진다. 병을 따고 물을 마신다. 병에 서렸던 김도 어느새 사라진다.
“고마워.”
“뭘 이런 걸 다 가지고.”
“아무튼, 그 녀석, 어떤 녀석인지 알아야겠어. 반드시!”
현애의 눈이 빛난다.
“꼭 그 녀석이 누구인지를 알아야겠다는 일종의 마음속으로부터의 부름이 들린다니까.”
“그렇다니 다행이네.”
세훈이 AI시계를 보며 말한다.
“그럼 월요일에 또 보자고. 나는 이만 가 볼게.”
현애와 주리는 말없이 손을 흔든다. 세훈도 손을 흔들고는 뒤돌아 제 갈 길을 간다.
세훈이 멀어져가고, 현애와 주리는 같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괜찮아, 너?”
주리의 AI시계로부터 *하나의 말이 들린다. 당연히, 주리보고 하는 말은 아니다.
“아, 괜찮아. 괜찮고말고.”
“하루가 마치 열흘만 같았겠지. 아니면 반나절 같았든가. 어느 쪽이든, 잊을 수 없는 하루였을 거야. 무사히 넘긴 걸 축하해.”
“아, 맞아, *하나. 고마워.”
현애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며 말한다. 맞다. *하나의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다. 어쩌면 속에 들어 있는 생각을 그렇게 잘 읽어낼 수 있을까.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너한테 더 들이닥칠지 몰라. 아, 그리고 주리, 너는 앞으로도 현애 좀 잘 챙겨 주고.”
“그런 건 걱정 마.”
저녁 7시 40분쯤, 미린역에서 북쪽으로 가면 나오는 아파트단지 ‘알파’ 에 있는 주리의 집. 주리의 부모님이 막 식사를 하려는 참이다.
♩♪♬
벨소리가 들리고, 주리의 고양이 ‘에이미’가 현관 앞에 나와 꼬리를 세우고 있다.
“다녀왔습니다-”
주리가 경쾌하게 문을 열고, 에이미를 한 번 쓰다듬고는 바로 식탁 쪽으로 온다. 그 뒤로 들어오는 건 다름 아닌 현애.
“이야- 너희 언제 오나 했어. 안 왔으면 너희 것까지 다 먹어 버렸을 거라고.”
주리의 아버지 수현이 능청스럽게 웃으며 말한다.
“먹지 마, 아빠. 먹지 마!”
주리도 한껏 과장된 몸짓을 하며 식탁 앞에 앉는다.
“다 먹어도 좋아. 단, 내 건 빼고.”
현애 역시 장난스럽게 말하고 주리 옆에 앉는다.
“어때, 여기서 처음으로 학교에 다녀온 소감은?”
“옛날 생각이 많이 나네요. 정말로요.”
수현이 현애를 보며 묻자, 현애는 엷게 미소를 띄우며 말한다.
“좋은 친구들이에요. 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요.”
“걱정했는데 다행이구나. 자, 식사하자.”
수현의 말에 현애와 주리 모두 깔깔거리며 수저를 든다. 그리고 아까의 나쁜 기억들은 잠시 잊고, 이야기꽃을 피운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마드리갈
2020-04-30 00:38:17
현애의 과거가 이런 거였다니...
굉장히 놀라서, 처음 읽어보고 나서 한동안 멍하게 있었어요. 5억년 전의 사람이라니...
이나가키 리이치로(?垣理一?, 1976년생) 및 Boichi(본명 박무직, 1973년생)의 만화 닥터 스톤에서는 모종의 이유로 지구상의 문명이 멸망한 이후 3700년이 지나 돌이 된 사람들 일부가 깨어났고 각기 다른 야망을 실현하려 하다가 그 중 주인공 이시가미 센쿠는 살아남은 인류의 후예를 만나게 되며 문명을 재건해 나가게 되는데, 이것도 엄청나지만, 여기서는 5억년이 넘는 시간을 뛰어넘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바로 현애네요.
호반에 나타난 그 남자의 모습, 상상만 해도 몸서리쳐지네요.
시어하트어택
2020-05-02 21:13:03
뭐, 저 5억년이라는 시간 자체는 그렇게 큰 생각을 하고 쓴 게 아닙니다. 자세한 건 대강당에 보론 비슷하게 써 보도록 하겠습니다.
큰 신경은 안 쓰고 읽어 주시면 되겠습니다.
SiteOwner
2020-05-02 19:31:05
엄청난 사실이 공개된 것에 정말 놀랐습니다.
현애는 지구 출신, 그리고 작중 시점은 현애가 원래의 삶을 살고 있었을 때에서 5억년도 더 지난 시기...
그야말로 구인류와 신인류가 만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나저나 현애는 정말 대단합니다. 분명 큰 문화충격을 받았을텐데, 그걸 어린 나이에 극복해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면.
질문이 2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작중의 이 시점에서는 지구는 어떻게 된 것인지에 대한 것, 다른 하나는 현애로 대표되는 구인류와 그 구인류의 자손들은 거의 변화없이 형질이 유지되어 있는 것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시어하트어택
2020-05-02 21:17:56
공작창의 에스퍼리움의 역사의 앞부분을 보셔도 되고, 본문에도 조금 보강을 해 놨습니다.?
지구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자세한 설정은 안 짜 놨습니다. 그냥 막연히 '먼 미래'를 설정해 놓은 거라서요.
두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실제 세대차는 2,000년 정도밖에(?) 안 나니까 종이 다르다든가 형질에 차이가 난다든가 하는 건 거의 없겠죠.
대강당에 보론(?) 비슷한 글을 써 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