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9일은 한글날입니다. 그리고 각 일간지에서는 한글날을 맞이하니 또 수년째 집단광기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표현이 거칠게 느껴질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이것보다 적합한 표현을 찾을 수 없어서 부득이하게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니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주로 이 집단광기는 다음과 같은 유형으로 나뉘어집니다
- 한글과 한국어 혼동
- 한국어의 우수성 운운
- 외국어와 외래어 혼동
- 영어 등 외국어 교육에 대한 트집잡기
- 청소년 욕설, 인터넷 속어 등
- 해외의 한글보급 관련
한글과 한국어 혼동은 정말 더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한글은 한국어를 표기하는 문자이고 한국어는 언어의 한 종류인데 이것을 어떻게 혼동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마치 전철 승차권과 전동차를 같은 것으로 혼동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헛소리입니다.
한국어의 우수성 운운하는 것도 따라서 상당히 위험한 논리입니다.
한글은 분명 우수한 문자가 맞습니다. 그래서 한글의 우수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한국어와 혼동하여 한국어가 우수한 언어인 것처럼 주장한다면 결코 설득력 있는 주장은 못됩니다. 사실 한국어의 시스템 자체에는 강점도 약점도 많다 보니 어떤 언어와 비교할까에 따라서 한국어의 위상은 크게 달라집니다.
흔히 한국어의 장점에 정서표현이 뛰어나다, 조어력이 좋다 등을 꼽는데 사실일까요? 몇 가지만 논파해 보도록 하지요.
첫째, 색상 등의 표현이 다양해서 붉다, 빨갛다, 불그스레하다 등의 다양한 표현이 있다는 게 한국어의 우수한 점으로 잘 언급되는데, 좋습니다. 그렇지만 한번 뒤집어 보면, 어차피 이건 "붉다" 라는 어휘의 변형에 지나지 않습니다. 영어의 경우처럼 Red, Carmine, Crimson, Rose 등의 별도의 색채를 나타내는 잘 쓰이는 어휘가 있습니까? 그렇게 뛰어난 한국어이면서, 왜 한국에는 Pantone Color Chart같은 표준적인 색도표가 만들어지지 않고 있습니까?
둘째, 시간의 흐름과 문장의 흐름이 역전된 경우가 있어서 모순된 표현이 난무합니다. 문을 닫고 들어올 수는 없고 들어온 뒤에 문을 닫아야 맞는데, 보통 한국어에서는 "문 닫고 들어오라" 라는 역전된 문장이 더욱 자주 쓰입니다. 게다가 어떤 일을 지속할 때, 일을 계속하라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일하라는 표현이 많이 쓰입니다. 목적을 먼저 강조하니 효율적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역으로 시간의 흐름과 문장의 흐름이 역전되어 모순을 자초하는 결함이 있다고도 충분히 비판이 가능합니다.
셋째, SVO 구조의 문장이 아니므로 내용의 추가가 어렵습니다. 영어의 경우 동사 뒤에 내용을 추가하여 정보량을 늘릴 수 있는 장점이 있으나 한국어의 경우 SOV의 구조라서 문장의 가운데가 비대해지고 주어와 술어의 거리가 떨어져서 가독성이 상당히 떨어집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를 생각해 보시면 간단합니다. 명령어를 앞에 두고 각종 변수를 뒤에 나열하는 방법과 변수를 나열하고 끝에 명령어를 배치하는 것 중 무엇이 우월한지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습니다.
넷째, 시제와 수량에 대한 개념이 불분명합니다. 한국어에는 시제를 정밀하게 표현할 만한 장치도 없고, 명사의 복수형 표현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을뿐더러 복수형의 형태가 통째로 바뀌는 경우는 없습니다. 이것은 시간과 노무의 관리 및 정량적 분석이 필요한 현대사회에서는 아무래도 약점일 수밖에 없습니다.
외국어와 외래어를 혼동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외국어는 다른 나라의 말이고, 외래어는 외국에서 와서 국어에 편입된 말입니다. 즉 외래어는 국어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이걸 배격하라고 주장합니다. 이게 무슨 미친 발상입니까? 그래서, 정신이 나갔다 보니 중국인 여행객을 요우커라고 부르는가 봅니다. 영어권 국가 출신 여행자는 그럼 투어리스트이고, 일본에서 온 여행자는 료코우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 오면 투리스텐이라고 부릅니까? 국어파괴를 주도하는 자들이 국어사랑 운운하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입니다.
영어 등 외국어의 교육에 대해서도 트집을 잡는 데서는 할 말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은 무역에 경제의 2/3을 의존하는 국가로, 외국어 습득능력은 한국경제를 지탱할 중요한 인적자원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언어적인 능력은 다른 언어를 배움으로서 크게 확장되는 것입니다. 혹시, 인간의 언어능력에 한계가 있고, 따라서 외국어를 배우게 되면 한국어를 잃을까봐 걱정하는 거라면 그런 생각은 그만두라고 충고드리고 싶습니다. 세계가 한국을 알아야 한국어의 신장이 가능해지고, 또한 외국어를 배움으로서 한국어에 대한 재발견을 할 수 있는 것을 왜 무시합니까. 간판을 제대로 보려면 간판 바로 밑에서 보기보다는 길 건너에서 한 눈에 들어오게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청소년의 욕설이나 인터넷 속어 등의 것도 신문에 나오던데, 그게 한글날과 대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어차피 한글과 한국어는 혼동될 수 없는 것이고, 이것은 한국어의 문제이지 한글의 문제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욕설이나 인터넷 속어는 철저히 한글로 표현되고 있으니 오히려 일본에서 각종 속어가 로마자로 표현되고 있거나 한자를 다른 것으로 때워 붙이는 것보다는 더욱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청소년의 욕설 및 인터넷 속어가 철저히 한글로 표기되고 있는 것은 한글사랑이 정말 철두철미해서 오히려 칭찬해야 마땅합니다.
해외의 소수민족 언어의 기록문자로 한글을 보급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거 추진할만한 게 아닙니다. 그 언어의 문제는 언중들이 자체적으로 해결할 문제이지 우리가 간섭할 것이 아니고, 또한 문화적 제국주의로 비칠 위험도 존재합니다. 서구 열강들이 했으니 제국주의이고 우리가 하니까 순수한 의도이다 이런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내년에도 또 똑같이 고장난 녹음기가 돌아가겠지만...
이제부터는 이런 집단광기가 준동하지 못하도록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제대로 깨어 있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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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댓글
대왕고래
2013-10-09 00:01:44
그냥 흘려듣고는 했었죠. 이 글을 보니... 더더욱 흘려들어야겠네요, 그런 말들은.
그러려니 하고 들었었는데, 확실히 그 말들이 영 이상해요.
SiteOwner
2013-10-09 00:30:52
대체 그런 특집기사를 다루는 기자들은 국어와 어문학을 대체 어디에서 누구에게 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활자공해를 양성하며 혹세무민하고 있으니 문제입니다.
한국의 어문정책에는 이제 미래가 없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는 시대가 임박하지 않는지 걱정하고 있기도 합니다. 영어와 로마자도 구분못하고, 퍼센트와 퍼센트포인트를 같은 것으로 착각해도 지적조차 없는 세태가 우려됩니다.
하네카와츠바사
2013-10-09 00:09:04
외국어 교육에 대한 비판에 대해 저도 이야기하자면, 사실 한국은 자국어 교육에 오히려 열을 안 올립니다. 국민들 일반 정서상에서도 그렇죠. 인터넷에서 어떤 게시물에서 영어를 잘못 표기하는 경우와 한국어를 잘못 표기한 경우의 반응을 보면, 영어 쪽은 더 철저하게 지적하는데 한국어는 그게 틀린 말인지 아닌지 지적도 안 하는 경우를 봅니다. 결국 한국어 맞춤법은 틀려도 되는 물건인데 영어 철자는 틀리면 세상 끝나는 것처럼 가르칩니다. 이런 상황인데 한글날에 외국어 가르치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A와 B 사이에서 A가 압도적일 때 A가 죽는다고 무조건 B가 살아나는 것이 아닌데, A를 죽이면 다 해결되는 줄 아는 경우죠. 거기다 이건 언어의 문제지 문자의 문제가 아닌데 한글날에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이상한 경우고요. 광기라는 단어 자체에는 거부감을 느낍니다만, 글의 전체적인 논지에 대해서는 저도 공감합니다.
SiteOwner
2013-10-09 00:34:58
블랙유머지만, 이런 게 있지 않습니까. 한국인의 애국심은 일본에 대한 안티테제라고. 아마 일본이 신대문자 같은 것으로 한글의 일본기원설을 내세워야 국어교육을 강화할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웃기는 현상이 횡행하는데, 국어교육이 부실하거나 없다 보니 대부분의 경우 한국인의 외국어 구사능력은 한계를 보입니다. 작문과제를 내면 천편일률로 그렇게 똑같기도 한 데에서는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게다가 프로이센이 싫다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지배를 긍정하는 추태를 보이는 폴란드인들과 어쩜 이렇게 닮은지 모르겠습니다.
카멜
2013-10-09 22:44:15
한글이 파괴되고 있어요 이를 어쩌면 좋아요, 지하에서 세종대왕님이 통곡하실듯 엉엉은 제가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별 다를거 없고, 아마 10년 20년뒤에도 달라질건 없지 싶습니다.
SiteOwner
2013-10-10 18:56:56
맞습니다. 그런 이치에 안 맞는 소리가 왜 횡행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그 혼동이 지나친 나머지 한민족은 아예 중국어만 썼다가 세종대왕이 현대 한국어의 근간이 되는 언어를 새로 창제했다고까지 여겨지는 작금의 세태는 비이성의 극단을 달리고 있는 듯합니다. 대체 언제부터 한국이 이렇게 잘못된 생각이 상식화되는 국가가 되었을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냥 손놓고만 있어서는 안됩니다. 더 나은 미래의 구성은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권리이자 의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