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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모레 있을 코믹 페스타 행사에 대해 설명하는 윤진, 그리고 그 앞에 놓인 4개의 피규어와 걸개그림.
금세, 아이란은 눈앞에 있는 피규어를 가지고 상상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아이란이 주목하는 건, 그중 양쪽 끝에 서 있는 두 남자 캐릭터의 피규어. 그건 다름 아닌, <5월의 거짓말>의 두 주역 캐릭터인 갈라투아, 그리고 모블린이다.
“아니, 갈라투아하고 모블린이 왜 같이 서 있지 않은 거야...”
아이란은 그 배치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머리를 몇 번 흔들다가, 이윽고 다시 입을 연다. 어느새, 아이란의 두 눈에는 아이란만의 그 상상 속 세계로 날아가려는 듯한 눈빛이 맺히고 있다.
“마침 가운데에 있는 게 쿠레 보안부장이지... 그렇다면 이걸 가지고 또 이야기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쓰면 좋아하려나...”
아이란이 막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려는 그때.
“제발 그런 상상은 좀 집에나 가서 할래?”
옆에서 조용하지만, 아이란의 속을 온통 긁어 놓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디아가 마치 파리 우는 소리같이 작은 목소리로, 아이란에게 말하는 것이다.
“너 왠지 그럴 것 같은데? 한 컷에 스쳐 지나가는 병사A와 혁명단원B 가지고도 커플링 만들겠어.”
아이란은 입을 꼭 다물 뿐이다. 입에서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말이 동시에 나오려고 하고 있다. 하나는 이 상황을 모면하려는 절대부정의 답. 또 하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물 터지듯 나오려고 하는 ‘그렇게 써 보겠다’고 하는 완전긍정의 답. 두 가지 답은 모순된 답이지만, 아이란의 입에서는 그 두 말이 동시에 터져 나오려고 한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
“네 그 침묵의 뜻이 강한 긍정의 뜻이 아니기를 바라.”
의외로, 나디아는 아이란에게 계속 대답을 요구한다든가, 아니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해 아이란의 감각 중 어떤 것을 봉쇄한다든가 하지 않는다. 그저, 아이란을 주시하기만 할 뿐.
“휴-”
아이란은 일단은 안도하지만, 곧이어 또 다른 목소리가 아이란의 반대쪽 옆에서 들려온다. 어느새 아이란이 뭘 하는지 알고서, 민이 끼어 들어온 것이다.
“뭐야, 아이란 누나, 또 커플링 만들던 거야?”
“아, 아니야, 아니라고!”
“그러면 나디아 누나가 왜 저러는데?”
아이란의 입에서는 그 말이 차마 나올 수는 없다. 또다시, 그 절대부정과 완전긍정의 두 말이 동시에 아이란의 입에서 나오기 위해 다투고 있다. 이번에도, 아이란은 입을 꼭 다물어 버린다. 차마 그 두 말이 입에서 동시에 나오게 할 수는 없다.
“......”
민은 아이란에게 더 말을 걸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이란의 등 뒤에서는 식은땀이 주르륵 흐른다. 거기에다가, 거칠게 나오는 숨소리는 덤이다. 조금 전 자신도 모르게 무심코 내뱉었던 그 말들이 다시 나올까 두렵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머릿속에 폭풍같이 밀려오는 이 감상을 언제까지고 썩혀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
아이란은 가방에서 노트를 한 권 꺼낸다. 그리고 뭔가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이상이 내일모레 있을 우리 부스의 행사 내용이야.”
윤진은 부실 앞쪽에 프로젝터까지 켜고서 이틀 뒤에 있을 코믹 페스타의 만화부 행사 내용에 대한 설명을 막 끝낸 참이다. 곧이어, 윤진은 부원들을 한번 스윽 둘러보더니, 이윽고 준비한 무언가를 읽어 내려간다.
“토니, 예리, 그리고... 아론.”
“네... 네?”
이름이 불린 토니와 예리, 아론이 눈을 멀뚱거리며 윤진을 돌아보자, 윤진은 그걸 기다렸다는 듯 말한다.
“왜 불렀는지는... 알겠지?”
“......”
세 명은 다들 말이 없고, 똥을 씹거나 아니면 겨자 소스를 생으로 먹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뭔지는 몰라도, 셋은 또 무언가 사고를 쳤고, 윤진이 그 장면을 목격했을 것이다.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전개다.
“오늘하고 내일, 같이 힘쓰자. 마지막 정리정돈을 하자고!”
“네... 네.”
세 명이 마치 영혼이 날아가 버린 듯한 대답을 내놓자, 윤진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다른 부원들을 향해 말한다.
“자, 얘들아, 다른 사람들은 이제 토요일 날 즐기기만 하면 돼. 물론 자발적으로 와서 정리를 도와주겠다는 사람은, 말리지 않아. 그럼, 짧은 영상 하나 시청하고, 쉬자고!”
“그래서...”
토마가 윤진의 설명을 다 듣더니, 옆에 있는 민에게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묻는다.
“나도 저기 코믹 페스타라는 데에 가야 하는 건가?”
“어, 왜?”
“어... 나, 저런 행사는 별로...”
“사람들 많은 데라서 가기가 좀 그런 건가?”토마는 민의 질문에 말이 없다. 꽤 근심이 어려 보이는 표정은 덤이다. 그 표정에서 나름 뭔가를 읽은 것인지, 민은 조용히 말한다.
“코믹 페스타는 그냥 가고 싶으면 가고, 안 가고 싶으면 안 가도 되는 거야. 그런 거 가지고 괜히 걱정하거나 할 필요는 없어. 나도 너 잘 알잖아.”
“그래...”
토마는 내심 고마운 기색을 내비친다. 민은 그런 토마를 보고서 잘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하지만...
‘오, 코믹 페스타라. 꽤 재미있겠는데?’
토마의 실제 생각은 완전히 다르다. 어느새, 토마도 모르는 사이, 토마의 주위에는 희미한 수증기가 감싸고 있다. 그 양이 워낙에 미미해서 자세히 안 보면 옆에 있는 민조차도 모를 정도지만 말이다.
‘좋아. 거기서 꽤 재미있게 놀아 볼 수 있겠어. 한번 가 보자고!’
그렇게 해서 찾아온 쉬는 시간.
다들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아니면 조용히 만화를 보거나 하고 있지만, 토마는 혼자 앉아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응?”
지온이 혼자 앉아 있는 토마를 보더니 토마 쪽으로 가까이 온다.
“왜 그렇게 혼자 앉아 있는 거야? 뭐라도 좀 하지그래.”
그 말이 더 부담스러운 건지, 토마는 지온을 보려고도 하지 않고, 그냥 우두커니 그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다.
문득, 지온은 뭔가 좀 덥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창문은 열어 놨고, 냉방도 하고 있을 텐데, 또 습해진 듯하다. 처음에 지온을 그렇게 괴롭혔던 그 습기다. 몇 분 전만 해도 이런 습기는 부실 안에서 느낄 수가 없던 것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도대체 어느 녀석이야... 또 그 녀석인가...”
하지만, 지온은 그 능력자가 지온의 바로 앞에 있음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로, 가만히 앉아 있는 토마를 보고 다시 말을 건다.
“괜찮아. 일어나서, 아무거나 해도 돼. 부담 갖지 말고.”
“네...”
토마가 그렇게 말하며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또다른 누군가가 앉아 있는 토마를 보더니, 토마에게 다가온다.
“네가 그 신입이구나?”
지온이 보니, 줄리안이 토마에게 유독 관심을 보이며, 토마의 앞에 서 있다. 토마는 그런 줄리안에게도 애써 눈을 맞추려 하지 않고, 시선을 땅바닥으로 하든지, 아니면 눈동자를 굴려 가며 피하려고 한다.
“어... 말이 왜 없는 거지...”
줄리안은 말이 없는 토마를 잠시 걱정스럽게 보더니, 다시 말을 걸어 본다.
“혹시... 내가 잘못 말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
“어... 그건 아니에요.”
토마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줄리안에게 시선을 좀처럼 주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그건 이유가 따로 있어서다. 여기 있는 다른 부원들에게는 말을 못 하는 이유다. 지금껏 만화부실에서 잘 놀았던 토마였지만, 이제는 그러기는 힘들게 되었다. 그것 때문인지 복잡한 머릿속 때문에, 토마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가만히 있다가, 콜록거리는 기침 한 번만 할 뿐이다.
줄리안은 구석에서 졸린 눈을 한 채 앉아 있는 아론과 자신에게 눈을 맞추지 않는 토마를 번갈아 보더니, 이윽고 토마를 좀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며 말한다.
“얘도 아론 같은 애인가. 자세한 이야기는 이따가 끝나고 해 봐야겠는걸.”
그리고 줄리안은 그 자리를 벗어나고, 토마는 그런 줄리안을 보고 눈을 한번 찌푸리더니,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신을 보고 말을 걸고 싶어하는 다른 부원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를 뜨는 토마를 보는 부원들은 한마디씩 한다.
“오늘 온 토마라는 애, 왜 저렇게 음침하지?”
“나도 몰라. 윤진 선배, 왜 저런 애까지 데려오고 그래.”
“말 붙이는 걸 싫어하나 봐.”
“줄리안이 아까 말 걸던데 말도 안 하려고 하고. 내가 해 주면 혹시 입을 좀 열려나.”
“에이, 하지 마. 또 이상한 초능력 쓰는 애면 어쩌려고 그래.”
한편, 토마는 그 사이에 만화부실에서 조금 먼 복도 쪽으로 가서 창밖을 내다본다.
“어! 뭐야!”
자기도 모르게, 토마는 큰 소리를 내지른다. 그리고서, 곧바로 자기 입을 틀어막는다. 기침이 나오려다가 만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까 운동장 위에 만들어 놨던 구름이 다 흩어져 버렸다. 누군가가 초능력을 써서 구름을 흩어 버린 건 아니고, 바람이 불어서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어찌 되었든간에 토마는 이 광경을 보고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지, 안 그래도 어두워 보이는 얼굴빛이 더 어둡게 된다.
“구름을... 또 만들어야 하잖아...”
금방이라도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지만 어쩌랴. 벌건 얼굴로 돌아가면 다른 부원들이 더욱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그런 고로, 지금은 어떤 감정 표현도 하기 힘든 상황이다. 토마는 어쩔 수 없이 이를 꽉 다물고, 다시 조그만 구름부터 만든다. 그리고, 나오려는 눈물과 울음을 겨우 참고서, 한숨이 섞인 기침을 한번 내뱉고는, 부실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그렇게 상심에 젖은 토마가 부실로 돌아오는 걸 보자, 민은 토마에게 다가간다.
“어, 너 왜 그렇게 울상이야?”
“아... 아니야.”
토마는 억지로라도 얼굴을 펴 보이며 말한다.
“그냥 화장실 다녀온 건데.”
“어... 정말?”
민이 보기에는, 화장실에 다녀왔다고 하기에는 뭔가 일을 벌이다가 만 것 같은 느낌이지만, 어쨌든 토마가 갔다 오는 방향이 화장실 방향이니 아주 지어낸 말은 아닐 것이다.
“뭐... 좋아. 이제 또 네가 좋아할 만한 시간이니까, 빨리 와!”
“조, 좋아할 만한 시간이라니?”
토마의 눈이 번쩍 떠진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민이 그렇게 말하니 토마는 괜히 기대된다. 물론 그 기대라는 건 진심 반, 그리고 남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그 무언가에 대한 불안감 반이다.
“무슨 시간인데?”
“자유 토론 시간인데...”
“토, 토론이라니...”
토론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토마는 얼른 어디론가 숨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아직도 남들의 시선 자체가 부담스럽고, 그래서 움츠러든다. 물론 지금은 다른 ‘무언가’ 때문이기는 하지만. 토마의 시선도 무의식적으로 자꾸 그 방향으로 쏠린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마드리갈
2022-11-24 12:43:32
아이란과 나디아의 감정싸움, 여전하네요. 그런데 냉정하게 판단하자면 나디아가 잘못했네요. 만화부의 활동영역에는 작품의 감상, 평가, 2차창작 같은 것이 있을텐데 아이란의 경우는 커플링 망상으로 자기 사심을 채우는 모습이 기분나쁘다는 비판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활동영역 내에 포섭이 가능하죠. 물론 그것을 갖고 이 커플링이 진리 운운, 다른 것은 죽어라 하는 건 문제가 되지만요. 그런데 나디아의 발언은 만화부의 존재이유 자체를 부정하는데다 부원에 대한 모욕이기까지...
윤진이 토마를 만화부에 끌어들인 건 아직은 다른 부원들이 확실히 이해를 못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된 것 같네요.
일단 이상한 구름으로 기상상태가 엉망이 되는 현상은 억제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윤진은 그런 것까지 모두 계산에 넣은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외부효과를 낸 것인지, 그걸 모르겠어요. 앞으로가 기대되기도 하는 건 동시에 그렇기도 하고.시어하트어택
2022-11-27 21:16:46
취향 가지고 싸우는 건 쉽게 결론이 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게 서로에게 양보 못하는 거라면 더더욱 말이죠. 그래서 팬덤끼리도 서로 치고박고 싸우는 듯합니다.
토마는 자기 나름대로의 꿍꿍이가 있겠죠. 윤진의 의도도 따로 있겠지만요...
SiteOwner
2023-01-22 17:14:35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 내에서 충돌이 없을 리는 없겠지요. 그런데 아이란과 나디아처럼 저런 견원지간은 완화되지 않으면 정말 곤란해질 것 같습니다. 저도 예전에 비슷한 사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어떤 여학생이 유독 남학생에 집착하고 여학생이 많은 팀에 배정되면 꼭 분란을 일으켜서 팀을 엎어버리는 그런 일이 빈발했던(시원하다 못해 추운 날씨 속의 회상 참조). 아무튼 그 둘이 화해했으면 좋겠습니다. 원인을 제공한 나디아도 좀 둥글어지면 좋겠습니다.
토마가 저렇게 운신의 폭이 좁아지는 게 재미있군요.
저러다가 제대로 똥을 밟아야겠다는 게 기다려지기까지 합니다. 읽다 보니 묘하게 새디스틱해지고 있습니다.시어하트어택
2023-01-29 23:50:04
성격도, 취향도 다르지만, 큰 범위 안에서는 비슷한 취향을 갖고 있기에 저렇게 티격태격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걸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렇게 걱정스러울 정도로 다투면 좋게 보이지는 않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