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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YANA, 2015-10-06 00:28:58

조회 수
176

한 작가가 있었습니다. 그의 책은 매우 유명해서 전국 어떤 서점에 가도 그의 책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는 예전처럼 글을 쓰는 것이 힘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출판사의 마감일을 뒤로 미루고, 어쩌다가 써낸 이야기들도 그렇게 좋은 평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작가는 자신이, 소위 말하는 슬럼프에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예전의 글 쓰는 감각을 깨달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웃긴 만화를 보기도 하고, 여행을 가기도 하고, 인터넷에서 브레인스토밍 방법을 찾아 시도해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행동으로 만들어낸 결과물은, 초등학생이 봐도 비웃을 만한 글이었습니다. 그는 절망했습니다. 그 글로 인해, 그는 출판사에서도 해고되었고, 문학계에서도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 만큼 혹평을 받았습니다. 슬럼프 초기에 응원하던 팬들의 편지도 끊기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로, 작가는 서서히 모든 것에 무덤덤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세상이 흑백으로 변해가는 것과도 같아서, 그렇게 큰 변화가 아닌 듯 하면서도 천지가 뒤바뀌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결국에는, 그는 꽃을 보고도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하고, 노래를 듣고도 감동적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바깥에 나가지 않은 채 자기의 방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가만히 있고, 그러다가 점심이 되면 또 밥을 먹고, 컴퓨터로 뉴스나 보다 저녁을 먹고 잠이 드는 것이 그의 하루의 전부였습니다. 가족도 친구도 없던 그는 어두운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마음부터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눈부심과 따뜻함에 의해 침대에서 일어났습니다. 커튼을 제대로 여미는 걸 깜빡 했는지, 한 줄기의 햇살이 커튼의 틈으로 침대에 내리쬐고 있었습니다. 그 햇살은 등을 돌리고 잤더라면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로 얇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얇은 햇살이라도 어두웠던 그의 방에선 확실히 빛나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밝은 것을 봐서인가, 아니면 자신의 방에 맞지 않는 이질적인 것을 봐서인가, 그는 눈을 한껏 찌푸린 채 햇볕이 내리쬐는 곳에 손을 올려놓았습니다. 따뜻했습니다. 조용히 햇살은, 차분히, 그러나 따갑지는 않게, 그의 손을 덥혔습니다. 문득 그는 한 줄기 햇살을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햇살은 화사한 샛노란 빛이었음에도 강렬하지 않았고, 따뜻했음에도 뜨겁지 않았으며, 밝았음에도 눈이 부시지 않았습니다. 커튼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모습은 마치 절망의 늪에 빠져있는 그를 구하기 위한 동아줄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드리워진 동아줄을 물끄러미 보더니, 이내 그것을 잡기로 결심했습니다. 누구하고도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내심 누가 찾아와 주기를 바랐던 그는 조그마한 구원의 빛줄기를 잡았고, 이내 그는 구원받았다는 안도감과 햇살이 내미는 친절한 손길에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몇 방울씩 흘러내리던 눈물은 이내 비가 되더니 급기야는 홍수가 되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습니다. 어떻게 통제할 수도, 통제하고 싶지도 않았던 그는 눈물에 모든 것을 - 그의 절망을, 어두움을, 슬픔을 - 흘려보냈습니다.


한참을 울고 진정된 그는 자신이 오랜만에 느꼈던 감정을 잊고 싶지 않았습니다. 힘들게 되찾은 느낌을, 감정을, 그는 또다시 시간이라는 강에 흘려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그는 자기가 느꼈던 모든 것을 종이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어둡고 우중충하던 나날을, 우울 감마저 상실했던 나날을, 그리고 햇살의 따뜻함과, 그가 느꼈던 안도감, 자괴감, 모든 것들을. 마지막으로, 한 때 그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그러나 무엇보다도 소중해 마지않았던, 그의 감정을. 그는 조용히, 물이 흐르듯이 써 내려갔습니다. 천천히 써 내려가던 그는 점점 속도가 붙어, 마치 종이가 불에 타는 듯이,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적어나갔습니다. 이렇게 그는 다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

쓸 때 엄청난 의식의 흐름을 가지고 쓴 글입니다. 음악을 듣다가 갑자기 느낌이 와서 30분만에 후딱 쓰게 된 글이에요. 그래서 제대로 된 제목도 없습니다; 적당한 제목이 있다면 하나 추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름 정하는 걸 원체 못해서...


아, 들었던 음악은 Shira Kammen - Lullaby Set 입니다. 무지 좋은 곡이에요. 사정상 유튜브 링크를 드리지 못하는 건 죄송합니다.

YANA

You are not alone.

5 댓글

마드리갈

2015-10-06 22:59:04

읽고 나서, 세 노래가 생각나서 소개해 드리고 싶었어요.


첫째 문단은 Carpenters의 Trying to get the feeling again.

1975년에 녹음되었고, 보컬 Karen Carpenter가 타계한지 12년 뒤인 1995년에, 관현악 반주가 추가된 편집판이 25주년 기념앨범인 Interpretation에 수록되어서 빛을 보게 되었어요.


둘째 문단은 Bread의 If.

1971년에 발표된 곡이예요. 힘겹고 어두운 나날에서 일어나려는 잔잔한 희망이 보여서 좋아해요.


셋째 문단은 John Lennon의 Just like starting over.

1980년, John Lennon이 생존했을 당시에 마지막으로 내놓은 앨범과 싱글에 수록된 곡인데, 솔로 활동 때 대부분의 음반을 Apple Records에서 냈던 것과 달리 이것은 Geffen에서 발매했어요. 제목, 내용은 물론이고 곡의 템포도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뽑아 봤어요.


소개해 주신 음악도 잘 듣고 있답니다!!

대왕고래

2015-10-07 00:04:32

엄청나네요. 장면이 딱딱 떠올라요. 이걸 바로 써내신거군요...


글재간이 그렇게 좋지 않은지라, 부럽기도 하고, 감탄스럽기도 해요.
좋은 소설 감사했습니다!

하루유키

2015-10-14 13:39:45

웬지는 모르지만 책이라는 소재 때문인지 발터 뫼르헨의 '꿈꾸는 책들의 도시'가 생각나네요.

30분만에 후딱 썼다는게 신기할 정도로 아름다운 글이에요.

마드리갈

2020-02-28 23:14:50

물드는 세계의 내일로부터 애니를 보면, 어느 때부터 갑자기 색을 볼 수 없어서 흑백과 회색의 세계에 갇혀 버린 소녀 츠키시로 히토미가 할머니 코하쿠의 마법으로 2078년에서 60년 전인 2018년으로 보내지고 그 60년 전의 나가사키에서 할머니의 동급생들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결국에는 다시금 색을 보는 게 나오죠. 그것이 같이 연상되어서 갑자기 울컥했어요.


어느 날, 뜻하지 않은 계기로 이전같이 행동할 수 없어 버리는 때가 오기도 하죠.

그렇지만, 그 역도 분명 있어요. 그걸 이렇게 짧은 글 한 편에서 바로 잘 느낄 수 있었어요.


제목을 제안해 볼깨요. 어제와 다른 오늘.

SiteOwner

2020-05-15 18:21:08

글의 길고 짧음은 감동의 깊이와 하등의 상관이 없습니다.

이렇게 간결하고 함축적으로 묘사된 글 속에 주인공의 인생과 고뇌와 극복이 이렇게 유려하게 묘사될 줄은...

삭막함이 두드러진 오늘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에의 선물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제가 제안하는 제목은 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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