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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아직 눈이 다 녹기 직전의 이른 봄날이었습니다.
철로 너머의 어느 산에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의 장사진이 천천히 산을 오르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장례 행렬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장례를 치를 때에는 꽃으로 장식한 상여를 메고 고인에 대한 추모 등으로 채워진 만장을 높이 들면서 곡을 하면서 동네를 나와 장지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보니 그 광경 자체는 그리 낯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행렬의 종착지, 즉 무덤이 만들어질 곳이, 철로를 사이에 두고 당시 살았던 집을 내려다보는 형국이었음을 알고는 섬뜩함에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그날 오후가 되어 새로이 만들어진 봉분은 붉은 흙이 주변의 상록수림의 녹색 및 잔설의 백색과 대비되어 아주 선명하게 보였습니다. 무덤에 관해서는 온갖 무서운 이야기도 있고 그래서 사실 겁이 안난다면 새빨간 거짓말이겠지요. 당시 살던 집이 화장실이 건물 안에 통합된 게 아니라 마당에 별채로 되어 있는 것이라서 일몰 후에는 화장실에 가기도 꺼려질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그날 이후 그 무덤은 역시 집 앞 경치를 볼 때에는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눈이 녹고, 붉은 흙이 드러난 봉분이 녹색으로 덮여가면서 무덤을 무서워하기만 했던 저의 생각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바뀌어 가는 자연 속에서 저렇게 무덤이 다르게 보이는데 정작 그 무덤을 보는 저 자신은 공포드라마나 괴담집 등에 나오는 그런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해 보니 그 무덤 앞에 부끄러워지더군요.
그래서 그렇게 생각한 이후에는 그 무덤을 무서워하기보다는 그 무덤과 무언의 대화를 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하루, 저 무덤 속에 영면해 있는 그와 살아 있는 저는 서로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상상하면서.
그리고 그 해 추석.
사람들이 그 무덤 주변에 나타났습니다. 시기도 시기였는데다 알록달록 한복을 입은 것으로 봐서 성묘객이 확실했습니다.
초봄에는 슬퍼하며 고인을 떠나보냈지만 결실의 계절에는 그 슬픔이 아물어 그 고인의 후손들이 다시금 인사를 하고 온 것일테지 하는 생각에 그저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봄에 저희집은 다른 동네로 이사했고 그 무덤은 그 때 이후로는 간혹 그 방향으로 열차를 타고 갈 때 이외에만 보입니다. 그럴 때마다 번번이 생각납니다.
저는 아직도 그 무덤에 누가 잠들어 있는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1986년 그 때, 그 무덤과의 무언의 대화에서 느낀 것들은 30년도 훨씬 더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생각나고 있습니다. 변화하는 자연 속에서 우리는 누구와 어떤 대화를 하고 있는가, 그 대화를 주고 받으며 알아가는 서로의 삶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그리고 혹시 주변의 것들에 대해 생각없이 선입견에만 미루어 보고 있는 건 없는가 등등.
추석이 다가오다 보니 그 때의 기억도 다시금 크게 되살아납니다.
그리고, 1986년 그 때의 생각을 담아서 그 무덤에 감사하는 마음을 새로이 갖고 싶습니다.
이 마음을 글로 쓰는 데에 31년의 시간이 걸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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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대왕고래
2017-09-25 21:17:33
고등학생 때 자전거를 타면서 마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곤 했었죠. 가다 보면 꼭 어디 산에, 버려진 무덤이 하나 둘씩은 있고 그랬어요. 벌초도 안 되어서 풀만 무성했죠.
어머니께 말씀드리니까 무덤이 무섭지는 않았냐고 하시더라고요. 무섭지는 않았어요. 무덤인걸요.
다만 버려진 무덤이라는 게 참으로 씁쓸하고 그렇죠. 그 사람들도 분명 자식들이 있었을텐데, 왜 아무도 안 와서 저렇게 풀만 무성하게 자라게 놔두는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SiteOwner
2017-09-25 22:42:06
버려진 무덤을 보면 여러모로 씁쓸한 생각이 들기 마련이지요.
후손이 관리하지 않고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 후손들이 야속하게 여겨질 것이고, 혹시 대가 끊겨서 관리할 사람이 없어 버려진 것이라고 생각하면 무덤의 주인은 그 비극을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할 말이 없어지고...여러모로 많은 생각이 나기 마련입니다.
무덤이니까 무섭지 않다...그렇지요. 그래서 지명에 무덤 관련이 들어가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강릉처럼 陵이 들어가거나 일본의 히라츠카처럼 塚이 들어간다든지...마키
2017-09-26 02:04:15
무덤 하니까 생각난게, 공동묘지가 우리나라에선 아무래도 망자가 묻히는 공간이다보니 상당히 껄끄러운 공간으로 취급되는데, 일본이나 서양에선 괴짜가족(개그만화긴 하지만...)처럼 동네 한복판에 공동묘지가 떡하니 들어서 있고 동네 사람들도 "어차피 거기 묻힌 사람들이래봐야 동네 주민들이나?친인척인데 굳이 우리한테?해를 끼칠 이유가 있겠냐?"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게 재밌더군요.?
심시티 시리즈 같은 도시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도 우리네 상식에서 벗어나서 공동묘지를 주거지 근처에 지어야 주거지의 행복도가 상승하는 시너지 효과가 발휘되기도 하죠. 물론 어디까지나 우리보다 친숙하게 생각할 뿐이지 괴담이나 도시전설의 무대로 심심찮게 등장하는걸 보면 결국 사람 생각하는건 다 똑같은 모양입니다만...
SiteOwner
2017-09-26 19:09:02
확실히 문화의 차이가 크긴 합니다.
서양에서는 교회가 묘지의 역할도 겸하고 있지요. 교회 건물 구내, 지하, 건물 밖 뜰 등 여러 곳을 묘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작은 마을 단위에서부터 크게는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교회나 프랑스의 판테온 같은 국가적인 시설에 이르게까지 광범위하게 적용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는 묘지가 주택가에 자리잡은 경우도 있고, 조상의 유골을 집 안에 설치한 불단에 모셔놓고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하는 모습도 잘 볼 수 있습니다.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의 어떤 지방에서는 미이라화된 조상의 유해를 매년 한번씩 묘지에서 꺼내서 후손들이 그 유해를 소중히 손질하고, 유해를 향해 근황을 보고하는 식으로 예를 올리기도 합니다. 국내의 일반적인 상식과는 매우 다른 면모이긴 하지만, 역시 이것도 문화의 차이에서 빚어진 게 아닌가 싶습니다.
역시 말씀하신대로 묘지가 각종 괴담의 근원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요.
서양의 경우,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교회 지하를 묘지로 쓰는 경우가 있는데, 전염병의 실체가 규명되지 않았던 시대에는 전염병 사망자의 시신을 교회 지하에 안치했다가 이것이 전염병 전파의 근원이 되어서 큰 화를 입은 사례도 꽤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동네에서 떨어진 외딴집을 병막(病幕)으로 지정하여 중병환자를 그곳에 방치하여 죽게 만든 경우도 있었지요. 일본의 경우는 2000년대에 모 부동산업자가 전국 사고물건, 즉 이전 입주자가 자살하거나 범죄로 살해당하거나 한 등의 이력이 있는 부동산 정보를 인터넷에 올려서 난리가 난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사람이 죽은 곳이나 그 시신이 뉘여져 있는 곳에 여러 괴담이 따라다니는 것 또한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