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other Day at the Office - 하루하루 똑같은 날(정확히는 Same Shit Different Day의 좀 더 고급스러운 표현이다)
"여~ 왔구나!"
레스터가 자신이 사는 동네에서 가장 큰 슈퍼마켓의 2층으로 올라가자 바깥쪽에 앉아 있던 앨프레드가 반갑게 맞이했다. 레스터도 그의 손인사를 받으려다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유, 대체 몇 잔이나 마신 거에요?"
레스터가 코를 막으며 장난을 치자 앨프레드가 혀 꼬부라진 입으로 말했다.
"뭘 그래~ 이 정도면 양호하지. 네가 하도 안 와서 몇 잔 기울였을 뿐이야."
"진짜요?"
"헹, 나 못 믿냐?"
앨프레드가 취기 탓인지 오른손으로 레스터의 어깨를 두드렸다.
"크악!"
"...아."
레스터가 의도치 않게 낸 비명소리 때문에 방 안의 모든 대화가 끊기고 시선이 그들에게 쏠리자 레스터와 앨프레드는 황급히 사람들에게 사과했다. 그들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갸우뚱하며 대화로 돌아갔지만, 그들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조용히 웃으면서 눈짓을 보냈다. 앨프레드가 방금 자신이 두드린 레스터의 어깨를 '왼손'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미안하다."
"됐어요. 형이 미안해 할 일이 아니잖아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레스터가 외마디 비명을 지른 것은 너무 아파서였다. 다만 앨프레드가 너무 세게 내리친 것은 아니다. 그의 오른손이 의수였기 때문이다. 레스터는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적당히 넘어갔다. 더 얘기해봐야 당사자인 앨프레드도 비밀을 공유한 레스터도 괴로울 뿐이었다. 그 의견이 일치했는지 이번엔 앨프레드가 적절하게 화제를 돌렸다.
"참, 누구누구 왔는지 봤어?"
"누가 왔는데요?"
"일단 저 쪽에 해골바가지 형제."
"아, 젠장. 솔트하고 페퍼요?"
레스터가 솔트(salt, 소금)와 페퍼(pepper, 후추)라고 부른 것은 전혀 농담이 아니었다. 각각 숀 셰클턴Sean Shekleton과 필랜더 셰클턴Philander Shekleton 흑인 형제를 이르는 별명이었다. 별명의 유래는 간단했다. 형 숀은 재미대가리가 없어서, 동생 필랜더, 약칭 필은 너무 팔팔해서. 셰클턴 형제는 어머니가 무슨 흑마법이라도 부렸는지 정반대인 구석이 많았다. 숀은 짜리몽땅한 체격에 털털했고, 필은 멀대같은 체격에 끈질겼다. 하지만 우애관계는 지극히 좋았다. 물론 그들도 형제답게 다투기는 했지만 대개는 역시 형제답게 필이 지는 쪽으로 끝났다. 필이 싸움을 못해서가 아니라 숀의 흘러넘치다 못해 태평양을 이루는 여유를 감당할 수 없어서였다.
"대체 뭐하러 왔대요?"
"동네 잔치니까 동네 사람들이 오지. 당연한 거 아냐?"
"보나마나 페퍼가 솔트를 끌고 왔겠죠?"
"그것도 당연한 거 아냐?"
"알 만 하네요."
"그리고 또 누가 있죠?"
"우리 아파트 1층에 사는 바텐터 삼촌."
"...맙소사."
레스터는 누구인지 단박에 이해하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니, 앨프레드가 얘기하기 전부터 가장 안쪽에서 들려오는 크고 걸걸한 목소리를 듣고서 이미 알고 있었다. 트레버 맥베어Trevor McBear는 레스터와 앨프레드가 사는 릴리퍼트 아파트의 1층에서 '바 비르투Bar Virtue'라는 술집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바텐더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험상궃은 외모에 우락부락한 체격, 쩌렁쩌렁하고 고압적인 말투, 접대는 엿 바꿔먹고 손님과 싸우는 태도 등. 하지만 의외로 술 만드는 실력은 제법이라는 얘기가 있었다. 레스터는 술을 잘 마시는 편이 아니라 확인하진 못했지만. 그 외에 전직 갱스터였다는 소문이 진짜였는지 술집 안에서건 밖에서건 그를 만나는 건달패들이 인사를 한다고 했다. 사실을 알면 알수록 도심의 바텐더라기보단 옛날 판타지에 나오는 선술집의 마스터가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럼 저 아저씨는 왜 왔죠?"
"술 마시러 왔겠지."
"이번에도 알 만 하네요. 그 외에 또 누가 있죠?"
"다 네가 아는 사람들이야. 옷가게의 린다 아줌마Linda Dingle, 그 옆의 세탁소 할아버지, 그 옆의 청소부 남매... 그러고 보니 우리 아파트 사람들은 우리하고 관리인인 셰클턴 부인이랑 몇몇 사람들을 빼면 거의 다 안 왔네."
"이런 데에 관심 없어요, 그 사람들은."
릴리퍼트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같은 아파트 주민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만나기가 힘들었다. 진짜로 방 안에 틀어박혀서 안 나오거나 잠만 자러 오거나 둘 중의 하나인 것 같았다. 어쩌다가 마주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다들 눈인사만 하고 갈 길을 갔다. 반대로 거리의 변호사 글렌쇼 선생님Morgan Glenshaw, 맹인 학자 올드포드 씨Leigh Oldford 등처럼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레스터는 그렇게 별난 사람들이 한 아파트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광경을 볼 때마다, 아파트의 이름이 '릴리퍼트Lilliput'인 건 정말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아, 그걸 깜박했네."
앨프레드의 말에 레스터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뭔데요?"
"내가 이런 것도 잊어버리고."
앨프레드는 어느새 옆자리에서 빌려온 술잔과 술을 탁자에 놓으며 말했다.
"왔으니까 한 잔 해야지? 이제 오늘 일은 다 끝났다면서?"
"저 술 못하는 거 아시잖아요."
"그래도 마셔~ 분위기도 좋은데."
"그럼 뭐..."
레스터는 앨프레드가 주는 대로 가득 찬 잔을 한 번에 털어넣었다. 분위기에 벌써 취해버린 것인가, 아니면 역시 무리였던 것인가. 레스터는 술을 삼키자마자 목을 움켜잡고 고통에 몸부림쳤다. 앨프레드가 킬킬 웃으며 말했다.
"어이쿠, 이 정도면 술이라고 할 수도 없는 건데."
"그러게 내가 술 못한다고 했잖아요!"
"아아, 미안미안~ 그럼 이제 마시지 말고 쉬어."
앨프레드가 계속 웃으면서도 레스터 앞에 있는 잔을 멀찍이 치웠다. 주변에서는 계속 말소리와 웃음소리, 손과 잔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레스터가 술기운 때문에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앨프레드가 조용히 물었다.
"좋지 않아?"
"뭐가요?"
"그냥. 딱 그림 같지 않나 해서. 좋잖아. 아늑하고, 따뜻하고."
"...그렇긴 그렇네요."
"그치? 이런 게 좋은 거지."
앨프레드는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고는 단숨에 입으로 털어넣었다. 그리고 다시 한 잔을 따르며 말했다.
"이러면 되는 거야. 오늘 하루에 무슨 일이 있었든, 즐거웠든 슬펐든, 기분 째지든 더럽든, 엔딩이 아름답기만 하면 제일이라고."
"그 말 좋네요. 어디서 베낀 거에요?"
"그런 거 없어."
"뻥치시네."
"이 자식 봐라."
레스터와 앨프레드는 술 때문에 흐리멍덩한 눈으로 서로를 흘겨보다가 결국엔 맥없이 웃어버렸다. 앨프레드가 말했다.
"애썼다."
"뭐가요?"
"그냥. 뭐가 됐든."
"네. 형도요."
레스터는 빈 잔을 들며 대답했다. 그걸 보자 앨프레드가 물었다.
"술 더 못 마신다면서?"
"쨍 소리가 나야 술이 더 맛있죠."
레스터가 헛소리하듯 웃으며 말하자 앨프레드도 웃으며 자기 잔을 들었다.
"그거 말 되네."
레스터와 앨프레드의 잔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쨍 소리를 냈다.
---------------------------------
이렇게 일단 오프닝...이라기보단 오랜만의 글쓰기 연습이라고 할 수 있는 첫 번째 에피소드를 마무리했습니다. 처음부터 무거운 에피소드는 좋지 않겠다 싶어 적당히 가볍게 하려고 했는데, 왜인지는 몰라도 뒤로 갈수록 훈훈함이 많아지는 구성이 되었네요. 싫지는 않지만요. 이런 식으로 쭉 진행했으면 좋겠지만, 전공(?)이 전공인지라 다음엔 무거운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그렇다고 암울한 건 아니고, 범죄 쪽 내용을 쓰더라도 적당히 정의롭거나 적당히 즐겁게 끝나도록 써나갈 생각입니다. 물론 각잡고 무거운 내용도 쓰기는 쓰겠지만, 지금 당장은 쓸 계획이 없습니다. 좀 더 세계관이 체계가 잡혔을 때 제대로 된 악을 내놓고 싶네요. 그래야 악을 쳐부수는 재미가 있고 공정한 심판을 내릴 수 있을 테니까요.
그거 알아? 혼자 있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유야 어쨌든 고독을 즐겨서 그러는 게 아니야. 사람들한테 계속 실망해서 먼저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는 거야. - 조디 피코
4 댓글
마드리갈
2018-03-27 23:03:54
외부인의 시점에서 보면 뭔가 재미있는데, 정작 저 상황 속에 들어가려고 하면 좀 꺼려질 것 같네요.
술냄새가 짙게 풍겨오는 광경이라 어느 정도의 진입장벽은 있는데, 그 장벽을 넘은 전제하에서는 뭔가 나쁘지는 않은, 악우 관계가 성립하는 사람들이 묘하게 재미있게 비틀린 듯한 일상을 즐기고 있는 게 여실히 보이고 있어요. 해가 저물려는 오후 시간대의 나른한 속의 사나이들의 담소를 실감나게 묘사한 게 좋아 보여요.
이게 폭풍전야가 될 것을 생각하니, 어디에서부터 갑자기 달라질까가 신경쓰이기도 해요.
Lester
2018-03-28 01:03:45
저도 처음에는 그냥 하하호호 포근한 동네 잔치를 생각하고 써나갔지만... 어째서인지 이상한 사람들만 소개하게 되더군요;;; 누구를 만나느냐보단 분위기 그 자체에 취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것과 달리 그렇게까지 악우 관계인 건 아니에요. 그냥 '특별한 이웃'이라고 할까, 그 정도입니다.
또한 폭풍전야 역시 아닙니다. 그렇게까지 판을 뒤집어놓을 건 아니에요;;; 물론 범죄 이야기가 안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요. 어쨌든 다음 에피소드는 공동 주인공 중 '범죄 담당'의 입장에서 써나갈 생각입니다. 다른 주인공도 소개해야 하니까요.
SiteOwner
2018-03-31 23:56:37
이런 분위기를 100%까지는 아니지만, 미군부대 내에서 카투사로서 복무했을 당시에 느낄 수는 있었습니다. 금요일 오후의 막사, 클럽 등은 거의 대부분 이런 분위기여서 옛날 생각도 나고 그렇습니다. 다시 경험하라면 약간 미묘하겠습니다만, 그렇다고 멀리하겠느냐고 질문받더라도 단호히는 거절하지 못 할 것 같습니다.
역시 동생과 여러 입장이 다르니 느끼는 것도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Lester
2018-04-01 21:35:33
저도 저런 데에 끼라고 하면 거의 못 낄 겁니다. 저런 상황의 분위기를 좋아하지 술과 격한 태도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서요. 그냥 '저것도 하나의 소통'이라는 데에 의의를 두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