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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능력에, 눈뜨다] 7화 - 폭풍전야, 목요일

시어하트어택, 2019-02-08 21:43:14

조회 수
135

세훈이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서 전화를 받은 그 다음 날의 아침. 창밖에 햇빛이 벌써 짙게 스며드는 시간.
삐비빗- 삐비빗-
시간은 오전 7시 30분. 그러나 세훈은 곤히 잠들어 있다.
“세훈아.”
이진이 세훈의 방문을 열고 세훈을 부른다.
“일어나야지.”
“저, 세훈 님.”
NURI도 세훈을 부르려는 그 때, 세훈은 눈을 뜬다.
“아... 시간이 왜 이렇게 됐지.”
“너 어제도 잠을 못 자서 뒤척이더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니?”
“아... 아니, 그런 건 아니라니까요.”
“정말? 아닌 것 같은데. 혹시라도 있으면 말해 봐. 엄마가 다 들어 줄 테니까.”
“저... 정말이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세훈의 머릿속에는 어제의 그 전화 때문에 걱정이 한가득이다. 누구인지도 짐작조차 할 수 없고, 또 오라는 장소 또한 비밀로 감추는 등, 철저히 베일에 싸여진 그 목소리. 클라인과는 비슷하면서도 달랐던 그 목소리. 정황으로 볼 때 클라인의 패거리 중 한 명인 것 같지만, 그 이상은 알 수 없다. 마치 아무것도 안 보이는 어두운 방에 집어넣고 그 안에서 바늘 하나를 고르라는 것과도 같은 상황이다. 적어도 어제 전화한 그에 대해서는. 그나마 비숍은 동급생이어서 초조함이 조금은 덜했지만, 어제의 그 사람은 세훈을 다짜고짜 하대한 것으로 보아 선배일 가능성이 높다. 그 정도의 초조함 때문인지, NURI가 틀어 준 첼로 이중주곡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급히 옷을 갈아입는다. 다 갈아입고 나서 거울을 보니, 머리는 떡져 있고, 얼굴은 잠을 일주일은 안 잔 사람처럼 초췌하다. 교복만 아니면 완벽한 폐인의 모습이다.
“세훈아, 아침식사 해야지.”
이진의 말에 세훈은 허겁지겁 식탁에 가서 앉는다. 식탁 위에 있는 건 햄과 계란을 넣은 샌드위치 하나와 우유. 세훈은 얼른 샌드위치를 집어들고 먹기 시작한다. 그런데... 평소라면 5분, 아니 3분 만에 다 먹었을 샌드위치가 목구멍에서 좀처럼 넘어가지를 않는다. 역시나, 긴장감 때문인 듯하다. 하기는, 이런 상황에서는 음식을 먹다가 목에 걸려 켁켁거리지 않는 것도 감사해야 할 지경이다.
식사를 다 한 다음, 세훈은 허겁지겁 화장실로 들어가, 입에 칫솔을 물고 나와서 TV를 켠다. 마침 TV에는 뉴스가 나오고 있다.
“...경찰청에서는 외국인 및 타 종족 계열의 범죄조직에 대한 특별단속을 대도시를 중심으로 시행하기로 했습니다. 최근 10년 동안의 통계조사 결과에 의하면 내국인을 상대로 한 범죄 건수는 줄었지만, 외국인 및 종족 간의 범죄 건수가 1.5배 증가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경찰청은 각 지역 경찰본부와의 협조 아래 2개월간 특별단속을 시행하기로 했습니다. 다음은 과학계 소식입니다. 스틸레지드 소재의 제1 인공지능 연구소는 슈퍼컴퓨터 마하 펙타의 보안을 강화하기 위해 각계의 전문가들 및 보안 전문 인공지능들을 투입했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끝나게 되면 마하 펙타의 처리 능력이 한층 더 개선될 것이라고 제1 인공지능 연구소 관계자는 밝혔습니다. 이르면 다음 달 4월에 RZ전자의 새 AI폰 모델 ‘스텔라 AA’가 상용화될 전망입니다. RZ전자 관계자는 스텔라 AA가 현재 테스트 단계를 거치고 있으며 테스트를 마치는 대로 소비자들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RZ전자는 스텔라 AA의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는 즈베즈다 크리에이티브의 지적재산권 관련 소송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했습니다. 문화계 소식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얼음공주 이야기’를 소재로 한 12번째 뮤지컬이 이번 주말에 초연됩니다...”
세훈은 뉴스를 대충대충 보면서 양치질을 마치고 나서 바로 가방을 챙기고 문을 나선다. 시계를 보니 아침 8시 15분. 그래도 늦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그 발걸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 마치 양쪽 발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걷는 느낌이다. 모처럼 하늘은 구름 없이 맑은데도, 세훈은 그 비치는 햇살 또한 피해 버리고만 싶다. 지하철을 타고 갈 때도 마찬가지다. 열차 안을 가득 채우고 서 있는 사람들의 시선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데도, 마치 사람들이 모두 세훈을 피하려는 것마냥 느껴진다. 지하철에서 같은 학교 교복을 보면 특히 더 그렇다. 미린역에 도착할 때에는 일부러 시선을 반대쪽 출입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누가 오고 가는지 전혀 보이지 않으니까 속이 그나마 편했다.
미린대역에 내려서 개찰구를 통과하고 나서도 세훈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쓰며 걷는다. 그냥 누가 인사하건 말건 신경쓰지 않고 앞만 보고 걷는다. 출구를 나와서도 시선을 피하려는 건 마찬가지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세훈이니?”
뭐야, 많이 들어 보던 목소리인데? 세훈은 그러나 애써 피하며 계속 앞으로 걷는다.
“세훈이, 맞지?”
그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분명 세훈에게는 익숙한 목소리인데, 많이 듣던 목소리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목소리다. 좀 더 음조가 낮은 편이다. 그렇다면...
“어... 설마...”
세훈은 뒤를 돌아본다. 경찰관 제복을 입은 키가 큰 남자 한 명이 서 있다.
“아, 진언이 형이잖아.”
“아, 지금 순찰하다가 잠깐 쉬는 중이라서.”
“오, 오랜만이잖아... 언제 여기로 온 거야?”
“배치받은 지는 이제 한 달 정도 됐어. 1지망을 미린경찰서로 써서 냈는데, 어떻게 여기에 딱 되더라.”
“어, 정말? 잘 됐네. 일은 안 어려워?”
“아직 한 달밖에 안 됐으니까 잘 모르지. 그런데 역시 도시라서 그런지 출동이 많은 것 같아.”
“그래...”
바로 그때.
“어, 세훈아!”
지하철 출입구 쪽에서 주리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세훈과 진언은 뒤쪽을 돌아본다. 세훈의 예상대로, 주리는 어제의 교복 그대로 입었지만, 귀에 있는 귀걸이는 또 바뀌었다. 어제는 분명 링 모양이었을 텐데, 오늘은 체리 모양의 붉은색 귀걸이다. 역시 주리답다고 세훈은 생각한다.
“어... 거기 진언이 오빠... 맞지?”
“아, 주리구나! 오랜만이야.”
“그래... 작년 8월에 경찰학교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에 본 이후로는 처음이지, 아마?”
세훈도 어렴풋이 작년에 주리와 함께 미린 중앙공원 근처의 한 카페에서 진언을 만난 일을 떠올린다. 이제 곧 경찰학교에 들어간다고 좋아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중학교 다닐 때만 해도 진언이 형을 서언이 형보다 더 많이 본 것 같은데...”
세훈이 입을 연다.
“최근 들어 서언이보다 자주 못 보는 것 같다고?”
진언이 세훈의 말을 가로챈다.
“하지만 걱정 마. 이제 곧 서언이만큼은 아니어도 자주 볼 수 있으니까 말이야.”
“하긴, 여기로 배치 받았으니까.”
“어... 그런데 진언이 오빠.”
주리가 뭔가 생각이 난 듯 말을 꺼낸다.
“서언이 오빠가 그러던데...”
“응, 서언이가 왜?”
“삼촌인가 고모인가... 아무튼 가족 중 한 명이 초능력자라는 게 사실이야?”
“아... 맞아. 그 말은 사실이지.”
“그런데, 서언이 오빠가 조만간 그 사람과 만날 수 있을 거라는데, 언제 만나볼 수 있다는 거지?”
“아, 그거?”
진언이 뭔가 알고 있다는 듯 미소를 띠며 말한다.
“맞아. 가까운 시일 안에 만나 볼 수 있어.”
“그러니까 언제?”
“그걸 미리 말해 주면 안 되지.”
“에이...”
주리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진언을 실망 섞인 표정으로 바라본다. 진언은 세훈과 주리에게 그저 장난 섞인 웃음을 지을 뿐이다.
“아... 잠깐...”
주리가 손목에 찬 AI 시계를 본다.
“어...? 벌써 8시 45분이네?”
“진짜?”
세훈이 주변을 둘러보니 길거리에는 세훈과 주리 말고 교복을 입은 사람들은 몇 명밖에 안 보인다.
“늦으면 안되는데! 이만 가볼게!”
세훈과 주리는 진언에게 겨우 인사만 하고는 그 길로 학교를 향해 뛰어간다. 진언은 뛰어가는 세훈과 주리의 뒤를 보며 혼잣말한다.
“세훈이, 그런데 왜 아까 나하고 마주칠 때 표정이 그렇게 어두웠지? 먼저 말을 해 봐야 했던 건데... 혹시 요즘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건가? 괜찮은 건지... 아, 나도 이제 슬슬 복귀해야겠다.”
이렇게 중얼거리며 진언은 근처 길가에 주차된 순찰차를 향해 뛰어간다.

3교시의 문학 시간, 1학년 G반 교실.
“오늘은 ‘문학의 다양한 변용’이라는 주제로 수업을 진행해 볼 건데요, 아마 다음 주까지는 쭉 이 주제로 갈 것 같아요.”
키라 선생이 교실 전체를 한 번 둘러보며 말한다.
“마침, 바로 이번 주에 ‘얼음공주 이야기’를 소재로 한 뮤지컬이 상연된다고 해요. 우리가 배워 볼 내용도 바로 이 이야기를 중심으로 해서 진행될 거예요.”
얼음공주 이야기라... 세훈은 탄식섞인 한숨을 내쉰다. 오래 전, 어른, 아이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받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또 오랜 시간 동안 전해져 내려온 것이라 친숙하고 익숙한 것이기는 하지만, 하도 여기저기서 많이 나오다 보니 이제는 교과서 같은 곳에서 이 이야기를 보면 저절로 지루한 느낌이 들기까지 할 정도다.
그런데, 키라 선생의 말에 따라 교과서를 펼친 순간, 세훈은 오늘은 어쩐지 이 시간을 지루하게 보내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제까지 문학 교과서에서 예문으로 나오는 것들은 내용은 다 달라도 모두 소설, 수필, 시, 극본, 시나리오 같은 활자를 사용한 작품들이었다. 다른 요소라고 해 봐야, 중간중간 삽입된 몇몇 삽화가 전부였다. 그런데... 교과서의 ‘문학의 다양한 변용’ 파트의 첫 페이지를 펴 보니... 첫 장부터 만화가 나온다! 그것도 풀 컬러로! 이 정도라면 지루하게 느껴질 만한 얼음공주 이야기라도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다. 작가 이름을 보니 ‘MAX’라는 이름이 보인다. MAX라면... ‘오션 코믹스’에 여러 편의 작품을 연재하는 유명한 만화가 아닌가! 역시 이름값이 있으니 더 끌리게 된다.
세훈은 교과서에 있는 만화를 보며, 또 키라 선생의 말을 들으며 찬찬히 자신이 어린 시절에 봤던 얼음공주 이야기 동화를 떠올려 본다. 세훈이 기억하는 얼음공주 이야기의 원래 줄거리는, 여주인공이 마왕의 마법으로 병에 걸려서 얼음 속에 들어가 잠이 든 후, 먼 훗날 깨어나서 왕자, 용사, 마법사 등의 친구들을 만나, 겨울이 된 그 세계에서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나서 마왕을 쓰러트려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만화를 보니, 분명 원작 동화에는 보이지 않았던 여전사 캐릭터, 남자 꼬마 캐릭터가 하나씩 추가되었고, 그 덕분에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이야기 또한 다양해졌다. 그림 또한 유명 만화가인 MAX답게, 세훈이 아는 동화 그림체가 아닌 판타지 게임에서 자주 보이는 그림체로 그려졌다. 또 주인공 이름도 ‘세라’로, 세훈이 기억하는 원래 이름은 아니다. 세훈은 주인공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하는 이런저런 대화나 행동들을 보며 웃음을 짓는다. 특히 글로는 보기 힘든 등장인물들의 개그 장면이라든지... 그런데, 역시나 주인공은 일행들 속에서도 외로움을 좀 많이 타는 듯하다. 혼자 먼 산을 바라보는 장면이나, 혼자 쪼그려 앉아 어딘가를 보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어쩌면 새로운 세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러고 보니까, 어린 시절 읽던 동화에서도 여주인공은 친구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많이 외로워했던 것 같다. 무서움도 많이 탔던 것 같다. 오늘따라 그런 주인공의 모습이 세훈의 눈에 더욱더 띈다. 기분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날 점심시간. 여느 때처럼 세훈과 주리는 운동장이 보이는 분수대 옆에 앉아 각자 싸온 도시락을 먹고 있다.
“뭐 싸왔어?”
밥을 먹던 중 주리가 세훈을 보고 묻는다.
“아... 그냥 계란말이하고... 돼지고기 볶은 거.”
“에이... 뭐 특별한 거 있으면 하나 먹어 보려고 했더니...”
주리는 실망 섞인 말투로 말하고는 물을 한 모금 마시더니 다시 말한다.
“그럼, 내가 싸 온 캘리포니아 롤 하나 먹어 봐.”
“아, 고마워.”
주리는 세훈에게 자기가 싸 온 캘리포니아 롤 하나를 준다.
“이거... 너희 어머니가 하신 거야?”
주리는 입안에 캘리포니아 롤을 가득 넣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음...”
세훈은 캘리포니아 롤을 한입 베어 물어 먹어 본다. 부드러운 촉감이 입 안 전체에 퍼지고, 혀에서는 연어 알이 그대로 느껴진다.
“맛있는데, 이거?”
“당연하지. 우리 엄마 손맛이 좋으니까.”
세훈은 천천히 캘리포니아 롤을 씹으며 맛을 음미한다. 주리는 세훈이 먹는 모습을 보다가 자기 AI폰을 본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 생각난 듯, 다시 세훈을 보고 말한다.
“너...”
“아, 왜?”
“아까 문학 시간에 너무 감정 이입해서 본 거 아냐?”
“아니... 왜?”
“그거 뻔한 내용이던데... 아까 옆에서 너 보니까 주인공이 외로움 타고 그러는 장면에서 넋을 놓고 보고 있더라.”
“......”
“왜 그래? 너 요즘 외로움 타?”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런 게 아니라...”
세훈은 대답하는 데 애를 먹는다.
“아니면, 어제 그 전화 때문에 불안해서 그러는 거야? 지금의 너라면 그럴 가능성이 더 높겠네.”
이럴 때마다 세훈은 주리가 마치 자기 위에서 놀고 있는 신적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 본다. 이런 적이 한두번도 아니다. 아마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그랬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 중학교 때도 쭉. 어쩌면 그렇게도 세훈의 생각을 잘 읽어내는지!
“아... 맞아.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세훈은 감탄 반, 탄식 반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한다.
“네 마음 잘 알지.”
“고... 고마워.”
“아마 혼자서 큰 짐을 짊어진 것 같아서 고민이겠지.”
“......”
“그런데 그 네가 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짐은 네가 생각했던 것만큼 큰 게 아닐 수도 있어. 그들이 아무리 무섭게 보여도 말이야.”
“그렇겠지. 그럴 가능성이 높아.”
세훈은 눈빛을 똑바로 한 다음 말을 잇는다.
“하지만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짐이 될 수도 있겠지. 만약 여기서 내가 잘못 대처한다면 이 짐은 3년 내내 짊어지고 가게 될 수도 있어.”
바로 그 때.
“여!”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세훈과 주리는 뒤를 돌아본다. 돌아보니 벤치 바로 뒤에 운동부원 후지타가 서 있다.
“뭘 그렇게 고민하고 그래?”
후지타는 장난스럽게 말한다.
“아... 아니야.”
“무슨 짐을 진다고 그런 것 같은데...”
“아... 아니... 내가 무슨 짐을 진다고...”
세훈이 얼버무리자, 후지타는 장난기를 빼고 말한다.
“방금 전에 확실히 들었다니까.”
“......”
“여기서 말하기는 좀 그런 건가?”
“으...음...”
“뭐, 굳이 강요는 안 할게. 누구나 비밀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테니까.”
세훈은 속으로 끙끙 앓는다. 그게, 혼자만의 비밀이 아니라, 모두가 위험하니까 그런 건데!
“그런데... 이거 옛날 속담이기는 한데, ‘철벽을 깨트릴 수 없으면 뛰어서 넘어라’라는 말 있잖아? 그 말, 딱 지금의 너한테 맞는 말인 것 같은데.”
“어... 그런가?”
“그럼 나는 운동부 스케줄이 잡혀 있어서 이만 가 볼게. 내가 한 말 잘 생각해 보고!”
“어... 이따가 봐.”
세훈이 어색하게 인사하자 후지타는 손을 흔들고는 체육관 쪽으로 간다. 후지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세훈은 크게 한숨을 내쉰다. 후지타의 말을 들으니 한순간은 고민이 해결될 것만 같았는데, 오히려 더 많은 걱정거리가 썩은 나무에 버섯 피어 올라오듯 세훈의 머릿속에서 고개를 내민다. 주리는 세훈의 근심으로 가득 찬 얼굴을 보더니, 젓가락으로 롤 하나를 집어 들고는 말한다.
“내 거 하나 더 먹을래?”
“아니... 괜찮아.”
세훈은 애써 주리에게서 얼굴을 돌린다. 주리가 안쓰럽다는 얼굴로 세훈을 보며 말한다.
“그렇게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려고 하지 말라니까.”

하루의 모든 수업이 끝나고, 세훈은 교내 도서관에 들어선다. 독서부 활동이 있어서다.
“어, 세훈이구나.”
도서관 입구에서 금발의 남학생 한 명이 세훈을 반갑게 맞아 준다.
“아, 네, 안녕하세요, 선배님.”
세훈을 반갑게 맞아주는 이 2학년 남학생의 이름은 리하르트 폰 라이첸슈타인. 세훈이 부 활동을 할 때 자주 만나게 되는 관계로 믿고 따르는 선배이기도 하다.
“왜 그렇게 또 얼굴이 똥 씹은 상이야?”
“아... 아니...”
“또, 그 녀석들 때문이겠지 뭐.”
“아... 그게...”
“다 알아 인마.”
세훈은 겉으로는 애써 어색하게 웃어 보이지만 속으로는 안도와 걱정과 불안감이 한데 섞인 한숨을 깊게 내쉰다. 곧장 소설책들이 꽂혀 있는 책장으로 간다. 세훈은 책장에서 책을 한 권 고른다. 제목은 ‘어둠을 가로지르는 기사’. 요즘 인터넷상에 연재중인 판타지 소설들 중 중고등학생 기준으로 상위 10위 안에 든다. 물론 읽고 싶어서 고른 건 아니다. 오늘은 책을 읽고 싶어도 읽힐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세훈은 책을 들고 한쪽에 있는 테이블에 앉는다. 책은 펼쳐만 놓고 보는 척만 한다. 그리고 창문 너머를 본다. 가까이는 정원 딸린 주택가가 보이고 멀게는 공원과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물론 그 풍경을 보려는 건 아니다. 세훈은 조용히 생각에 잠긴다. 그러나 그 생각에 잠긴다는 건 감상에 잠긴다는 것이 아니다. 그의 머릿속은 마치 벌집마냥 들쑤셔져 있다. 진언이나 후지타가 한 말이... 정말 도움이 될까? 그러고 보니, 어제 서언도 그런 말을 했다. 상대방이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라고. 그런데, 상대방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지 않은가? 초능력자라고 하면 어떤 능력을 사용하는지조차 알 수 없고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하란 말인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 시간 앞에서, 그 말들은 너무나도 원론적일 뿐이다. 또 그렇게 고통스러운 시간이 흘러만 간다.

저녁 5시. 세훈과 주리는 나란히 지하철역을 향해 걷고 있다.
“이야... 해 지는 것 좀 봐.”
“해 지는 게 왜? 그냥 평소하고 다를 게 없는데.”
“네가 요즘 머릿속이 복잡해서 그래. 저렇게 구름 너머로 비치는 저녁 햇살 같은 것도 보면서 네 머리도 좀 쉬게 하라고.”
“그게 말은 쉽지...”
세훈은 그렇게 말하며 주리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붉은색 귀걸이가 햇빛을 받아 더 붉게 빛나고 있다. 잠시 넋놓고 그것을 보는 세훈이지만, 이내 수많은 걱정이 세훈의 머릿속을 엄습한다.
“그건 그렇고...”
주리 역시 고개를 돌려 세훈을 보고는 말한다.
“왜?”
“메이링 씨에게 말은 해 봤어?”
“그게...”
세훈은 잠시 말을 멈추고 망설이는 듯하다가 다시 말한다.
“아무래도 직접 만나서 말해야 할 것 같아.”
“어, 직접 만난다고?”
“아니, 왜?”
“아무래도 메이링 씨는 다른 할 일도 많다 보니까, 웬만하면 전화나 메시지 같은 걸로 연락해 보는 게 더 좋지 않겠어?”
“혹시 그 패거리가 메시지를 해킹해서 훔쳐보거나 할지도 몰라.”
“그래...”
주리가 주머니에서 AI폰을 꺼내며 말한다.
“그래도 전화를 해서 언제쯤 간다고 하는 게 낫겠지.”
“어, 네가 걸려고?”
주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를 건다. 세훈은 주리가 전화를 거는 걸 초조하게 지켜본다. 그 모습을 보는 세훈은 1초가 마치 1시간 같이 느껴진다. 주리가 전화를 걸고 한 30초 정도 지났을까.
“안 받아.”
“어? 안 받는다고?”
“응.”
“에이... 꼭 이야기해 보려고 했는데...”
“어떡하지...”
주리는 잠시 말이 없다.
“아... 잠깐...”
“왜?”
“내가 연락처 하나를 줄게.”
“누구 연락처인데?”
“앨런 씨한테서 개인적으로 받은 연락처거든. VP재단 직원이래.”
주리가 준 연락처에 적힌 이름은 ‘피에르 모랭’. 세훈은 거기 적힌 연락처 주소를 AI폰에 저장한다.
“내가 다시 한 번 말하는데, 혼자 모든 걸 짊어지면 안 돼. 알았어?”
“아... 알았어. 알았다고.”
세훈은 건성으로 대답하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다. 누구보다 더 중압감을 느끼는 사람은 바로 세훈 자신이기에.

그날 저녁, 세훈의 집.
“다녀왔습니다.”
세훈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힘빠지는 목소리로 말한다. 이진과 세훈의 아버지 우현이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다가 세훈을 돌아보며 말한다.
“어, 왔니?”
“네.”
“역시, 무슨 일이 있나 보구나.”
“에이,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그러면 왜 말에 힘이 다 빠지고 그래.”
“그런 거 아니에요.”
세훈은 이진과 우현을 한 번 돌아보고는 그대로 방 안으로 들어간다. 세훈이 방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는 우현이 이진에게 묻는다.
“세훈이, 오늘 왜 저러지? 어제도 잠을 잘 못 자더니.”
“모르겠네. 뭔가 말하기 어려운 게 있는 것 같은데,,,”
“놔 둬. 나도 세훈이만한 나이에 저랬으니까.”
“그런데 놔 둔다고 해결되는 문제일까.”
그 시간, 세훈의 방. 세훈은 방 안을 한 번 둘러보고는 컴퓨터를 켠 다음, 침대 위에 털썩 앉는다.
“세훈 님.”
컴퓨터 메인 화면이 켜지자 NURI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 NURI, 왜?”
“제가 해 드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미안해요.”
“아니야. 너는 네가 할 수 있는 것을 해 줬어. 이제 내일의 일에 대처하는 건 나의 몫이야.”
“그럼, 저는...”
“이따가 잘 때, 잠 잘 오는 곡이나 하나 틀어 줘.”
“네, 그럼 오늘은 전에 틀어 드렸던 바이올린 독주곡 하나 틀어 드릴게요.”
“고마워.”
시어하트어택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2 댓글

SiteOwner

2019-02-08 22:23:57

안 좋은 일, 불편한 상황 등은 세트로 몰려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훈의 긴 하루 또한 그 전조같군요. 읽는 저도 뭔가 입 안에 모래가 씹히는 것같은 감각이 들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시어하트어택님의 소설 속 세계는 지구만의 세계, 인간만의 세계인 것만은 아니지요. 문명은 여러 행성 및 은하계 전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고, 그 구성원 또한 다양합니다. 현실세계에서도 국적이다 인종이다 피부색이다 종교다 성별이다 뭐다 하면서 대립과 반목이 일상화되어 있는데, 외국인, 이종족간의 범죄건수가 많이 증가한다는 뉴스보도는 아무래도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즈베즈다 크리에이티브를 보니 연상되는 현실세계의 기업이 있습니다.

즈베즈다(Звезда)는 별을 의미하는 러시아어. 그렇다 보니 러시아의 유명 뮤지션 티마티(Тимати, 1983년생)가 세운 블랙스타(Black Star Inc)가 연상되는군요.

마드리갈

2019-02-21 19:30:11

1초가 1시간처럼 느껴진다...그렇게 느껴질 때가 있죠.

뭔가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을 경우에는 차를 마시면서 긴장을 풀려고 해도 뜻대로 안되고, 상황이 좋게 끝나야 마음의 평화를 찾는...게다가 세훈이 마주한 상황은 만나는 상대와 사안의 성격으로 인해 기분이 좋을 수도 없으니까 문제가 될 수밖에 없어요. 그래도 세훈의 태도는 아주 성숙해 있어요. 결국 사안의 해결은 자신의 몫이라는 것을 직시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예의 대사는 인공지능이 더욱 발전하여 활용분야가 넓어질 미래에의 금언이 될 수 있으리라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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