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빠르게 감기라도 한 것처럼, 대지의 흙이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그와 동시에 허공을 덮는 것은 순백의 광휘. 그 정체는 추위 속에 얼어붙은 공기 그 자체였다.
마치 지상에 떨어진 은하수와 같은 모습. 아름답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빙결시키는 잔혹하고 위험한 순백의 동토. 그 중심에 서 있는 건 강림한 북풍의 왕이었다.
?
“하아…….”
?
빅토리아, 세상에 겨울을 몰고 온 그녀는 얼음 동상처럼 그 자리에서 우뚝 서 있었다. 얼핏 죽은 이처럼 보일 수 있는 모습이지만, 그녀의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얼어붙은 숨결만이 그녀가 아직 살아있는 존재임을 증명했다. 얼음의 땅에 살아 숨 쉬는 백룡과도 같은 모습. 단 하나 차이를 두자면, 이곳에 있는 그녀는 백룡보다 위험한 존재라는 것뿐이리라.
그 두렵기 그지없는 모습을 쳐다보며, 나는 내 몸이 자연스레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
‘위험해!’
?
피해야 한다. 내 몸에 자리 잡은 생존 본능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외쳐댔다.
이는 단순히 그녀가 사도의 모습을 취했기 때문이 아니다.
본래의 그녀라면 목숨이 위험할 리는 없을 터. 하지만 지금 그녀의 상태는 아무리 보아도 정상이라고 할 수 없었다.
?
“하아아아아…….”
?
짐승의 울부짖음과 같은 깊은 숨소리에, 얼어붙은 세계가 만연해 대지를 침식한다. 이대로 가다간 단순히 마당만이 아닌, 보육원 전체가 동토로 뒤덮일 터.
평소의 그녀라면 결코 할 리가 없는 행동. 하지만 단 하나, 나는 그러한 경우를 알고 있었다.
사도의 폭주.
보어헤스 백작이 나와의 결투에서 이기기 위해 택했던 수단. 그때와 다른 점은 백작은 의도적으로 폭주했다는 것이지만, 빅토리아는 격한 감정으로 폭주했다는 것뿐이리라.
?
‘어쩔 수 없어!’
?
이대로라면 보육원의 아이들 역시 해를 입게 될 터. 가능하면 싸우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다.
?
‘우선은 제압한다.’
“강……!”
?
그렇게 결심한 내가 강림을 외치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
“……!”
?
울컥-!
얼어붙은 피가 마치 내장 조각처럼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
‘어떻게 된 거지?’
?
혈액이 부족한 건지, 머리가 핑 도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함께 가슴에서 시작되는 극한의 통증. 마치 내 몸 내부에서부터 괴물에게 갉아 먹히는 감각이다.
?
‘뭐가 어떻게 된 거야?’
?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내가 눈을 크게 뜨는 순간,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것은 빅토리아의 입가에서 그대로 떨어져 내리는 얼어붙은 입김.
?
‘설마!’
?
말하려고 입을 연 순간, 호흡기가 통째로 얼어붙었다고?
말도 안 된다.
순간 부정하고 싶었지만, 나는 이 빌어먹을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
‘허를 찔렸어!’
?
사도는 초월자지만 약점 역시 분명한 존재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변신하지 않는 한, 재생력을 제외하고는 남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 그리고 사도의 모습을 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강림’을 외쳐야만 한다.
그런데…….
?
‘불가능해!’
?
아무리 사도의 재생력이 있다고 한들, 호흡기가 얼어붙은 상황에서 말을 하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지금 내게 문제가 되는 사실은……,
?
‘에스텔!’
?
그녀 역시 이 지옥 같은 냉기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
?
‘쳇!’
?
나는 움직일 때마다 얼어붙은 피부가 찢겨나가는 것을 느끼며, 억지로 에스텔을 향해 걸어갔다.
?
‘내가 지켜야 해!’
?
나는 사도다. 죽지만 않는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재생할 수 있다.
하지만 에스텔은?
잠깐 숨 쉬는 것만으로도 큰 상처를 입을 터. 물론 마도기사인 그녀는 나보다 적은 내상을 입겠지만, 지금은 그조차 위험하다.
?
‘이제는 의료 지원은 받을 수 없어.’
?
비싼 소생약도, 뛰어난 치유술사에게 치료받는 것도 이제는 할 수 없다. 소여 가문의 후원이 사라진 이래,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싸구려 치유 비약을 마시며 내상을 달래는 것뿐이다.
?
‘그럴 순 없지!’
?
다행히 나를 방해할 생각은 없는지, 나는 아무런 장애물도 없이 에스텔의 눈앞에 도달할 수 있었다.
?
‘괜찮아 보이네.’
?
극한 상황에 익숙하기 때문일까? 에스텔은 마투술로 신진대사를 조작해 가능한 한 가늘게 숨을 쉬고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한계는 분명.
그녀의 피부 역시 새하얗게 얼어붙어 가는 것이 내 눈에 선명히 보였다.
?
‘조금이라도 막아야 해!’
?
우드득-!
내 몸이 뒤틀리며 하얀 털로 뒤덮여 간다.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백곰의 신체.
극지방에 사는 존재로 변신한 나는, 내 몸을 이용해 어떻게든 에스텔을 최대한 덮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그 순간.
뽀드득, 뽀드득.
어린 시절 익숙하게 들었던 눈을 밟는 소리가,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
‘움직이기 시작했나?’
?
고개를 돌리니 서서히 걷고 있는 빅토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일전에 보여주던 재빠른 모습과는 달리, 느긋하고 여유로운 움직임.
?
‘젠장!’
?
차라리 전처럼 빠르게 처리해주면 좋겠건만……!
그녀의 느린 움직임을 생각하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겠지만, 회피할 수 없는 현 상태로는 차라리 빨리 끝내주길 바랄 뿐이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빅토리아는 내 눈앞에 다가왔고,
우드득-!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곰으로 변한 내 목을 움켜쥐었다.
?
‘큭!’
?
인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튼튼한 곰의 모습이건만, 사도인 그녀의 내 목을 분지를 것처럼 조여왔다.
마치 빙하 속에 끼인 것 같은 압력. 그렇지만 정말로 무서운 것은 그 압박감 따위가 아니었다.
?
‘차가워!’
?
차갑다. 뼈가 얼어붙을 것처럼, 피가 얼음과자가 될 것처럼 미치도록 차갑다. 여태까지 차갑던 공기 따위는 그저 맛보기에 불과했다는 것처럼, 그녀의 손은 놀라울 정도로 차가웠다.
?
‘이대로 죽는 건가?’
?
더는 무언가 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
‘하하하하!’
?
정말 허무한 최후네.
그렇게 내가 삶의 끝을 받아들이려는 순간.
키잉-!
얼음을 갈아내는 것 같은 소리가 코앞에서 들려왔다.
?
‘에스텔?’
?
에스텔, 그녀는 얼어붙어 가는 몸으로 마력검을 뽑아 빅토리아의 팔을 내리치고 있었다.
본디 그녀의 마력검은 강철조차도 가볍게 잘라낼 터.
하지만 사도의 단단한 갑주는 오히려 기묘한 소리만 울릴 뿐 아무런 타격조차 입지 않는다.
?
‘그만두세요!’
?
나는 어떻게든 외쳐보려고 하지만, 이미 호흡기가 망가졌을뿐더러, 곰의 모습으로는 말을 할 수조차 없다.
이윽고, 한계가 왔는지 에스텔의 마력검 역시 빛을 잃은 순간.
?
“배신하지 않을 줄 알았어…….”
?
처음으로 빅토리아의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
‘빅토리아?’
?
폭주의 영향인가?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다르게 공허하게 들려왔다.
?
“그 녀석들이랑은 다를 줄 알았어.”
‘그 녀석들?’
?
분명 그녀와 친해지기 위해서는 중요한 정보일 터. 하지만 그것에 집중하기에는 지금 내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뿌드드득-!
?
‘큭!’
?
그렇게 서서히 내 눈앞이 하얗게 물들 무렵.
?
[그만!]
?
거짓말처럼 추위와 압력이 모조리 사라졌다.
털썩-!
목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사라진 것과 동시에 빅토리아의 신형이 바닥에 쓰러졌다.
아무래도 폭주의 부작용 때문에 쓰러진 것일 터.
?
‘어떻게 해야 하지?’
?
무언가 하고 싶기는 하지만, 지금 내 몸 상태 역시 움직이는 것이 신기할 정도.
우드득-!
지쳤기 때문일까? 내 몸에 걸린 둔갑술 역시 해제된 채, 나 역시 바닥에 엎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등으로 넘어져서 품에 안긴 에스텔은 안전했다는 것 정도겠지.
?
‘그나저나 그건 어떻게 된 거지?’
?
그렇게 내가 의문을 느끼려는 순간.
?
[정말 빌어 처먹게 상황이 돌아가는군.]
?
이타콰의 목소리가 내 귓전을 울렸다.
이타콰, 빅토리아와 계약한 옛 군주의 목소리는 유쾌하던 평소와는 달리 짙은 짜증이 묻어 있었다.
아무래도 지금 상황은 그가 정리한 것일 터.
?
“당신이……멈춘 겁니까……?”
[그럼 누구겠냐, 멍청한 자식!]
?
억지로 체력을 짜내 한 말에 돌아온 것은 퉁명스러운 답변뿐이었다.
?
[쯧,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
무슨 소리지?
내가 살짝 의아함을 느끼려던 찰나.
?
[이봐, 오늘은 그냥 가주지 그래? 그레고르. 아니, 이드라 누님에게 부탁해야 하나?]
?
내가 누구와 계약했는지 정확히 짚어낸 그의 안목에 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
‘언제부터?’
[언제부터 알아챈 게냐?]
?
나와 같은 의문을 품었는지, 즉시 질문을 던지는 이드라 님의 목소리.
?
[갸하하하하! 처음부터…는 아니고. 거기 둘이서 사랑싸움을 하던 순간부터 알았다. 사도야행 관계자. 둘이 붙어 다닌다. 거기에 하나는 마도기사. 바보도 아니고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아니, 바보가 아닌 이상 보통은 바로 사도인 건 알아채느니라.]
[응? 그런가? 그러면 바보인 거로 치자고! 갸하하하하하!]
?
이건 눈치가 좋은 것일까, 아니면 바보인 걸까?
신을 상대로 잠시 무례한 생각을 했지만, 이윽고 나는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이대로 싸울 수는 없어.’
?
나는 어떻게든 회복할 수 있겠지만, 에스텔은 가능한 한 빨리 치료해야만 한다.
?
“알겠습니다.”
?
자기 온몸이 미칠 듯이 쑤시지만, 어떻게든 걸을 수는 있으리라.
그렇게 나는 에스텔을 업은 채 몸을 끌 듯이 보육원을 떠났다.
바닥에 홀로 기절한 빅토리아를 내버려 둔 채…….
?
?
*** ***
?
?
‘어떻게 된 거지?’
?
따스한 감촉이다. 의식이 돌아온 순간, 에스텔은 그렇게 생각했다. 전신을 타고 흐르는 격통과 이와는 대조적인 따스하면서도 부드럽고, 동시에 단단한 감각.
이윽고 눈을 뜬 에스텔이 본 것은 자신이 호감을 지닌 남자의 등이었다.
?
“음?”
?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잠시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피던 에스텔. 하지만 이윽고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고,
?
“그레고르?!”
?
놀란 그녀는 새빨간 얼굴로 몸부림치려 했지만, 근육이 크게 상했는지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
“일어나셨나요?”
?
이윽고 그녀의 귓가를 울리는 따스한 목소리. 그레고르의 목소리에 반가움과 부끄러움이 뒤섞인 감정을 느끼면서 그녀는 그저 조그맣게 긍정의 뜻을 속삭였다.
?
“몸은 좀 괜찮으세요?”
“글쎄…….”
?
좋지 않다. 마음속에서 답은 곧장 나왔다.
지금 그녀의 몸 상태는 빈말로라도 괜찮다고 말할 수 없었다. 어쩌면 영구적인 손상이 남을지도 모르는 상황. 그나마 그레고르가 그녀의 짐을 꺼내 치유 비약들을 먹인 것 같았지만, 좋게 잡아도 몇 달은 정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
‘전부 내 탓이 아닌가?’
?
애초에 그녀가 거기서 화내지 않았다면 이렇게 다칠 일은 없었을 것이다.
?
“미안하다.”
?
결국,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자신의 부상에 대한 설명이 아닌 사과의 말이었다.
?
“전부 내 탓이다. 내가 그런 말만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 따위는 있지도 않았을 텐데…….”
“…….”
“그리고 내가 더 강했더라면……!”
?
그랬다면 설령 이런 일을 당하더라도 무사할 수 있었을 텐데.
뒷말은 입 밖으로 나왔지만, 그녀의 마음에는 깊숙이 새겨졌다.
만약 자신이 강했더라면.
그 스테파니라는 사도처럼 평범한 마도기사 따위는 우습게 볼 수 있는 힘이 있었다면?
그걸 넘어서 자신이 사도였다면?
?
‘그렇다면 이런 일 같은 건……!’
?
자괴감과 자기혐오.
그 두 감정이 다시 에스텔의 내부에서 터져 나올 듯 날뛰었다. 그리고 그것이 정점에 달한 순간.
?
“아니요.”
?
마치 달군 철을 식히는 것처럼 그레고르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건 제 잘못이에요.”
?
그녀의 감정적인 목소리와는 다른 차분하고 이성적인 음성. 하지만, 에스텔은 거기서 자신 이상으로 자책하는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
“마스터에게 들었어요, 에스텔이 보육원에 가는 걸 꺼렸다는 걸.”
“…….”
“그전에도 에스텔이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느꼈지만, 저 혼자 생각하고 넘어갔어요.”
“그건…….”
“원망하셨죠?”
‘그렇지 않아.’
?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에스텔은 자신의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이었으니까.
자신이 그레고르를 원망했다는 것도, 그가 자신을 살피지 않았다는 것 역시도.
?
“죄송해요, 에스텔.”
?
결국, 자책감이 흘러넘치는 그레고르의 말에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침묵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
‘나는 뭘 하는 거냐.’
?
문득 가슴이 아려왔다.
왜 자신은 사랑하는 이를 역으로 아프게 하는 건가? 사랑한다고 하면서 상대에게 상처만 주는 건가?
어쩌면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 같은 건 없는 걸까?
정리될 수 없는 감정의 늪.
?
“그레고르, 나는…….”
?
그 늪에 잠겨 들어가며 에스텔이 입을 열려는 순간.
화르르르륵-!
밤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하늘을 꿰뚫는 것처럼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마치 신화 속 화룡이 뿜는 멸세의 화염과도 같은 불길. 그 기괴한 현상은 그녀와 그레고르에게는 묘하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
“사도!”
?
옛 군주와 계약해 지상에 강림한 초월자들. 비록 본적이 없는 권능이지만, 저 불은 분명 사도의 흔적이었다.
?
‘왜 하필 지금!’
?
그 불꽃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는 것도 잠시.
?
“가죠, 에스텔!”
“알겠다!”
?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지만, 민간인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싸워야만 하리라.
잠시 그녀를 내려놓은 그레고르는 이윽고 대지에 섰고,
?
“강림!”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어떻게 된 것이지?’
?
분명 그레고르가 강림을 외쳤건만,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이드라 님?”
?
당황한 목소리로 자신과 계약한 옛 군주를 찾는 그레고르의 목소리. 하지만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
“이게 어떻게 된?”
?
이해할 수 없는 상황.
그 상황에 에스텔 역시 안절부절못하는 상태에서.
?
[잠시 대화를 하지 않겠나?]
?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림자.
녀석이 다시 에스텔과 그레고르 앞에 나타난 것과 동시에, 세계가 혼돈에 물들었다.
?
?
*** ***
?
?
빅토리아가 눈을 뜬 것은 두 사람이 사라지고도 제법 시간이 흐른 이후였다.
?
“어떻게 된 거야?”
?
상황이 이해가 가질 않는지 공허한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보던 빅토리아.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의 눈에 초점이 돌아오면서 서서히 기억이 돌아왔다.
?
“왜 그런 거야?”
?
짧지만 많은 것이 담긴 질문.
평소에는 그 말에 온갖 대꾸를 하며 즐길 이타콰였지만, 이번만큼은 답변이 돌아오질 않았다.
?
“너도 배신자를 조심하라고 했잖아? 그런데 왜 그런 거야?”
?
조금 전과는 다른 길어진 질문. 하지만 질문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목소리는 어째서인지 점점 힘을 잃어가는 것 같았다.
잠시간의 어색한 침묵.
?
[너를 위해서였다.]
?
결국, 그것을 깬 것은 평소와는 다른 진중한 이타콰의 목소리였다.
?
“나를 위해서?”
?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빅토리아의 얼굴이 눈에 뜨일 정도로 일그러졌다.
?
“그게 무슨?!”
?
마치 분노에 찬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것처럼 살기에 가득 찬 목소리. 그 음성에 담긴 분노가 다시 한번 터지려는 순간.
?
[너, 사람을 죽이는 게 싫잖아?]
?
정곡을 찌르는 이타콰의 목소리에 빅토리아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다른 사도를 안 죽이는 녀석들은 본 적 있어. 하지만 굳이 범죄자 녀석들을 상대로도 살려두는 녀석은 네가 처음이다.]
“그건!”
[그런데 그런 녀석이 살인? 그것도 살짝 사이가 틀어졌을 뿐 여전히 친한 녀석들을? 갸하하하하! 지랄하지 말라고, 파트너. 너는 맨정신으로는 죽어도 녀석들을 못 죽여.]
?
말이 이어질수록, 빅토리아의 얼굴은 버려진 휴지처럼 구겨졌지만, 부정할 말은 찾지 못했다.
저것은 분명한 사실.
결국, 조용히 입술을 깨물던 빅토이라는 한숨을 내쉬며 현재 상황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
그녀의 입에서 말보다 한숨에 가까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절하기 전, 그녀는 그레고르를 죽일 뻔했다. 거기에 에스텔을 크게 다치게 했다.
그 둘이 한 행동에 비하면 지나칠 정도로 잔혹한 행위.
?
‘그러고 보니 난 왜 그렇게 행동한 거지?’
?
그 녀석들.
분명 폭주하던 상태의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
‘그게 대체 누구지?’
?
하지만 그런 배신자에 대한 기억은 어디에도 없을 터인데?
?
[혹시 잊어버린 기억이라도 있는 거냐?]
“음, 그러고 보니…….”
‘아이린 수녀님이랑 만나기 전에 난 무엇을 했더라?’
?
너무 오래된 기억인데다가, 아이 시절의 일인만큼 도저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
“아, 몰라! 기억 안 나는 건 어쩔 수 없지!”
?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결국 그 정도야 나중에 알아보기로 했다.
?
‘어차피 중요한 것도 아니고.’
?
오히려 지금 생각해야 할 것은 다시 그 둘과 화해할 방법.
?
‘내가 먼저 사과해야 하나?’
?
길드의 위치는 아니까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
“음, 완벽해!”
?
그렇게 그녀가 다시 기운을 차리려는 순간.
콰앙-!
굉음과 함께 보육원의 정문이 하늘을 날았다.
?
“뭣?!”
?
어지간한 장정보다 두 배는 무거운 문이 하늘을 나는 기괴한 풍경. 그 모습에 빅토리아가 뭐라고 감상을 내뱉기도 전에.
?
“오랜만이다.”
?
익숙한 거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
“빌어먹을 애송이.”
?
큰 신장, 비계와 근육이 섞인 몸. 험상궂은 걸 넘어, 이제는 얼굴 절반이 화상으로 뒤덮인 모습. 그리고 손에 낀 불꽃 모양의 기이한 반지.
?
“빚을 갚아줘야겠지?”
?
제스.
빈민가의 왕이었던 사내가 소름 끼치게 미소 지었다.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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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1-03-28 15:05:36
정말 위험할 뻔 했네요.
그냥 위험한 정도가 아니라, 빅토리아의 경솔함과 폭주가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참사를 낼 뻔 했어요.
게다가 이타콰의 질책은 굉장히 준엄하네요. 그리고 또 그래야 하고...
르네상스 시대의 영국 성악에서 사랑을 말하는 노래의 가사에 고문(Torment)이라는 단어가 빈번히 등장한다든지, 헨리 퍼셀(Henry Purcell, 1659-1695)의 오페라 요정의 여왕(The Fairy Queen)에 나오는 아리아인 "If love's a sweet passion, why does it torment?" 도 같이 떠오르네요. 에스텔의 마음도 이러했을 듯해요.
음, 그런데 이게 무슨...
제스가 돌아왔네요. 빈민가의 왕이 아니라 빈민가의 왕이었던 거한 제스가...Papillon
2021-04-04 12:00:13
이타콰는 그래 보여도 빅토리아를 아끼니까요. 경박하고 가끔 냉혹하긴 하지만, 사실 이드라보다도 사람에게 호의적인 신입니다.
제스가 돌아왔습니다. 이대로 사라질 인물은 아니었으니까요. 그가 무슨 짓을 할 지는 다음 화에 밝혀집니다.
SiteOwner
2021-04-14 20:52:33
일본어 속어인 오레이마이리(お礼参り)가 연상되어서 섬찟해집니다.
원래 오레이마이리란, 신사나 절에서 기원을 한 뒤에 소원이 성취되면 그에 대한 예의를 표하러 다시 그 시설을 찾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게 범죄자가 복역을 마치고 사회에 복귀한 이후에 피해자, 고발자, 증인, 판사, 검사 등을 찾아가서 보복하는 행위를 뜻하는 속어로도 쓰이기도 합니다. 제스가 이렇게 빅토리아를 찾아온 것도 딱 그런 거라서 역시 섬찟하게 여겨지는 감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여러모로 빅토리아의 경솔함이 상황을 최악으로 꼬이게 만든 것 같습니다.
이거야말로 고르디우스의 매듭이겠지요.
Papillon
2021-04-25 12:11:48
확실히 일부 범죄자들의 경우 그런 식으로 보복 행위를 하는 경우가 있지요. 제스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지만, 평범한 보복 범죄 정도는 아닐 예정입니다.
빅토리아의 행동이 상황을 꼬이게 만들었죠. 더 근본적인 원인은 모두의 오해지만요. 이 문제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 지켜봐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