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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미니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주택가.
“파울리 녀석의 오늘 일정은 알아냈나?”
정장 입은 남자가 마주 보고 선 라자에게 묻자, 라자는 바로 대답한다
“오전에 시립박물관을 돌아보고 오후에는 개척촌 테마거리를 구경합니다. 그리고 저녁 시간대는 없습니다.”
남자는 듣다가, 갑자기 눈을 확 뜬다.
“수고했네. 그런데... 개척촌 테마파크?”
“예.”
“여기 바로 근처잖아!”
곧바로 서재 한쪽에 주변 지도가 표시된다. 현재의 위치인 저택은 붉은 점, 개척촌 테마거리는 푸른 줄로 표시된다. 거리는 400m도 채 되지 않는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일망타진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 그렇지 않아도 녀석의 동향을 파악하기는 좋을 거고. 그러기 위해서는 동선을 잘 짜야 할 것이고.”
남자는 지도를 몇 번 눈여겨보더니, 다시 입을 연다.
“정찰대를 좀 대기시켜 주게. 때가 되면 정찰대를 쓸 일이 있을 테니.”
“아니, 보스, 어제 저녁에는 다른 부하들에게 맡기지 않겠다고 하셨잖습니까?”
“내가 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야. 단지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도움이 필요할 뿐이지.”
“하긴, 제가 아는 보스는 항상 그랬죠.”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막 서재를 나서려는 라자를 불러세운다.
“그렇게 말하니 좀 차분한 시간이 필요하겠어. 자네, 커피 한 잔 하겠나?”
“물론이죠.”
그리고 시간은 흘러, 11시 30분.
테르미니 시립박물관 제5전시관은 차분한 분위기 속에 관람이 진행되고 있다. 한쪽에는 미켈과 일행도 보인다. 평소 같았으면 목소리를 높여 가며 설명했을 미켈도 이곳에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약간 높은 정도의 목소리로 설명하고 있다.
테르미니 시립박물관은 총 5개의 전시관과 그 외의 부속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1관은 자연사 전시관, 2관과 3관은 이레시아인 유물, 4관과 5관은 인류 정착민들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중간중간에 영상 상영, 디오라마 전시실 등이 포함되어 있어 다 둘러보는 데는 총 2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보시면, 테르미니 주민들의 생활상과 생활문화, 그리고 시대별 거리의 풍경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쭉 둘러보시고, 더 궁금한 사항 있으면 언제든 제게 물어 보시면 됩니다. 이따가 12시가 되면 정문 로비에서 다시 모이는 것, 잊지 말아 주시고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미켈이 슬그머니 일행의 뒤로 빠지려는데...
미켈의 귀에 현애와 세훈의 대화가 들린다.
“신기하네.”
“뭐가?”
“이런 박물관 같은 데라면 누구 습격하는 사람이 하나 정도는 숨어 있어야 하지 않아?”
“너 그저께의 기억이 너무 강렬했던 거 아니냐?”
세훈은 현애의 말에 조심스럽게 되묻는다.
“여행 온 사람이 그런 거나 생각하고 있다는 게 더 이상하다고.”
“하지만 너도 분명히 겪은 거잖아. 그리고 이 상황은 또 언제 끝날지도 모르고!”
“하긴 그렇지...”
세훈은 그렇게 말하고서, 뒤돌아서 미켈을 본다. 미켈은 세훈을 못 본 척, 다시 다른 데로 고개를 돌린다. 그렇게 듣고 보니, 둘 다 관광객의 입에서는 나오지 않을 법한 말을 하고 있다. 분명 미켈이 이제까지 함께했던 관광객들에게서는 들을 수 없는 말들이다. 도대체 어쨌길래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분명 처음이 조금 평범하지 않기는 했어도 나름 여러 가지 행운이 따라 준 여행인데...
“그런데 그런 거 정도라면 파울리 씨가 잘 대처해 주지 않을까. 근처에 동료들도 있고...”
“어, 잠깐.”
자기 이름이 나오자, 미켈이 세훈을 돌아보며 말한다.
“나하고 크루들은... 해결사나 흥신소 같은 게 아닌데. 우리는 어디까지나 관광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파울리 씨, 그건 저희가 하고 싶은 말인데요.”
세훈이 바로 미켈의 말을 받아 말한다.
“저희는 그냥 여기 관광하러 왔을 뿐이라고요. 여기서 누구하고 싸우고 그럴 줄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러면서 세훈이 현애를 돌아보자, 현애도 고개를 끄덕여 무언의 동의를 나타낸다.
“하긴 그것도 그래. 우리도 원치 않은 공격에 휘말리기야 하지만, 너희만 하겠어? 우리야 후회는 안 한다지만.”
미켈은 한 마디 더 덧붙인다.
“제발 이제 끝날 때까지 아무 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저희도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시간은 흘러, 오후 2시, 테르미니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한 거리.
가운데의 2차선 도로를 중심으로, 주변의 다른 건물들과는 사뭇 다른 풍경의 거리가 펼쳐진다. 이레시아인의 유적과는 또 다른 양식으로, 주로 금속제의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지만, 여기저기가 일그러진 듯한 건물들이 위주다. 이곳이 바로 개척촌 테마 거리로, 이곳에 처음 정착한 인류 정착민들의 초기 정착 마을을 재현한 곳이다. 원래는 그저 옛날 양식의 건물이 많을 뿐인 평범한 거리에 지나지 않는 곳이었고, 시간이 갈수록 점차 퇴락하는 거리였으나, 10년쯤 전부터 테르미니 시청에서 이곳을 개척 당시를 재현한 테마 거리로 꾸미기로 하고 홍보와 여러 가지 행사를 병행한 결과 이곳은 매년 수백만 명이 다녀가는 관광지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하지만, 꽤 활기차 보이는 이 거리에 별안간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여기였지...”
짙은 남색의 정장을 갖춰 입고, 머리를 잘 빗어 넘긴 한 남자가 거리에 들어선다. 그는 거리 한쪽에 서자마자, 잠시 멈춰 서더니 주위를 살핀다.
“파울리는 약 30분 정도 후에 이곳을 지나가겠지. 그리고 나를 쫓는 누군가도, 나를 쫓아 여기에 올 것이고. 그게 누구인가, 정말 궁금하군. 최소한,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라면 대처가 좀 빠르겠는데...”
거리를 쭉 살핀다. 한쪽 구석의 적당히 그늘이 진 자리가 그의 눈에 들어온다. 다른 곳도 몇 번 보더니, 처음에 본 곳을 눈에 점 찍는다.
“저기가 좋겠군.”
남자는 곧바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
“정찰대, 준비한 물건을 내가 지정한 위치에 전개한다.”
“알겠습니다, 수령님.”
“그리고 주변에서 동향을 살핀다. 내 명령이 있으면, 곧바로 달려온다. 알겠나?”
남자는 전화를 마치고, 한 번 더 그곳을 본다. 괜찮은 것 같다. 그가 보기에는.
그리고 30분 후, 개척촌 테마 거리.
아까 남자가 유심히 살펴보던 그 자리에서는, 노점상 한 명이 카트 위에 있는 각종 기념품과 액세서리들을 땅바닥에 깐 돗자리에 늘어놓고 있다. 대부분은 호수 사원 모양이나 서부 유적군의 사원들 모양을 한 조그만 열쇠고리 같은 것들로, 제법 크기가 큰 걸개그림도 보이고, 한쪽에는 과자 같은 것도 놓여 있다. 그는 벙거지를 푹 눌러쓰고 있고, 겉에는 품이 큰 군청색 점퍼를 걸쳤다. 한 손에는 전화를 들고 수시로 뭔가를 보고 있다. 그렇게 어느 정도 물건 진열이 끝나자, 노점상은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는다.
노점상은 적극적으로 호객행위를 한다든가, 시끄럽게 여기저기 떠든다든가 하지는 않고, 그저 가만히 자리에 앉아서 오는 손님들에게 물건을 보여주고 팔거나 할 뿐이다. 그러면서도, 주변에 손님이 없을 때면, 그는 틈틈이 여기저기 한 번씩 돌아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대체 무엇이 불안해서 그런지는 그저 지나갈 뿐인 사람들은 알 수가 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거기 앉은 노점상도 다른 많은 노점상들 중 한 명에 지나지 않는다.
“음... 누가 오는 것 같은데...”
노점상은 거리 한쪽에서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일행에 시선을 고정한다. 그가 보는 눈이 맞다면, 그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은, 미켈과 일행이다. 미켈 말고도 다른 단체 관광객도 많이 보이지만, 일단 그의 눈에 들어오는 건 미켈이다.
“야, 여기 봐봐.”
일행 중 조제가 다른 일행을 부른다.
“여기 다 뭐 파는 거지?”
“뭐긴 뭐겠어? 그냥 흔히 볼 수 있는 노점상이지.”
뒤에서 듣던 현애가 말한다.
“우리가 이런 데를 한두 번 가 보는 것도 아니잖아?”
“그러긴 하지만, 또 이런 데서만 경험해 볼 수 있는 뭔가가 또 있잖아?”
“별 소리를 다 하네. 이런 데는 좀 그만 보고, 건물 안에 있는 가게들이나 들어가 보자.”
“아니, 나 여기 좀 보고...”
“빨리 가자. 노점만 보다가 시간 다 보낼 생각이야?”
“그건 아니지만...”
현애가 조제를 잡아끌 듯 하며 얼른 가자고 재촉한다. 다른 일행도 조제에게 그런 시선을 보낸다. 그러자 조제는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얼굴을 하면서도, 금세 허리를 펴고서 일행을 뒤따라 간다.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노점상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일행이 가는 뒷모습만 주욱 지켜본다. 그의 예상대로, 일행은 그에게는 아무 관심도 주지 않은 채, 거리를 걷다가 한 건물에 차례로 들어간다.
물론, 모두가 그 노점상에서 관심이 멀어진 건 아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데...”
일행이 그 건물에 다들 들어갈 즈음, 현애는 잠시 멈춰서서 아까 그 노점상을 돌아본다. 아무래도 불안하다. 불길한 느낌이 든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괜히 드는 느낌은 아니다. 매우 짙게 깔려서 짙은 냄새가 나는 스모그 같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예감이 그렇다.
“뭐지, 도대체... 괜히 드는 느낌은 아닌데...”
그렇게 머리를 흔들며 잠시 그 자리에 더 있어 보려고 하지만...
“뭐해? 빨리 들어와!”
“아, 맞다.”
세훈이 팔을 잡아끌자, 그 자리에 멍청하게 서 있던 현애는 얼른 세훈을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한편, 그 노점상은 건물로 들어가는 일행을 잠깐 보다가, 이내 다시 고개를 돌린다. 그에게도 왠지 불길한 느낌이 든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아... 여기는 왠지 위치가 안 좋은데...”
노점상은 또다시 좌우를 살핀다. 양옆에 보이는 노점상들은 장사가 잘 되는데, 그의 노점에는 사람이 하나도 오지 않는다. 거기에다가 그 이상한 불안감은 점점 더 커진다. 그 불안감을 못 이긴 노점상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나, 노점을 다 걷고, 어디론가 향한다.
이윽고 그가 다시 보이는 곳은 테마 거리 뒤편에 있는 좁은 거리. 지나갈 만한 곳은 겨우 사람 한 명 지나갈 정도밖에 되지 않고, 건물에 가려 햇빛도 잘 안 들어오는 곳이다. 그는 불안한 눈을 하고서 여기저기를 살피다가, 발걸음을 성큼성큼 옮기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몇 걸음 가지 못한다.
“거기 멈추시지.”
한 남자의 목소리가, 그 노점상의 귀를 때린다. 노점상은 그 남자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계속 걸어가려고 한다. 하지만 그 남자의 목소리는 계속 노점상의 뒤에서 들린다.
“그냥 멈추는 게 좋을 거다.”
“......”
“안 그러면, 너는 내가 강제로 멈춰 세울 테니!”
“뭐야, 역시 네 녀석이었던 거냐...”
그 노점상이 벙거지를 벗고, 꽁꽁 몸을 싸매던 점퍼도 홱 벗어던지자...
드러난다.
훤칠한 키의, 짙은 남색 정장을 갖춰 입은, 머리를 잘 빗어넘긴 미청년의 얼굴이.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마드리갈
2021-12-01 21:25:07
여느 관광객들이 하지 않을법한 말...
하긴, 그들의 여정 도중 일어났던 일을 생각해 보면 평온히 관람하는 것 자체가 기적일 거예요. 저같으면 그렇게 여행을 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빨리 일정을 마치려고 출구전략으로 이행했을 거겠지만...
참 신기한 게 어디는 장사가 잘 되고 어디는 파리만 날리고 하는 게 꼭 생기는 건데...
아무리 위장하고 있어도 역시 드러나는 법이죠, 실체는 늦던 빠르던간에.시어하트어택
2021-12-05 21:25:18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줄타기가 잘 되어 왔죠. 미켈을 봐서라도 버텨 주는 걸 수도 있고요...
수민은 아마 이때만을 벼르고 있었기에 저렇게 빨리 알아낼 수 있었을 겁니다.
SiteOwner
2021-12-11 17:36:12
여행에는 항상 변수가 있기 마련입니다.
업무상 출장에서는 동행한 사람의 소지품이 호텔 객실에서 도난당하기도 했고, 동생과의 여행에서는 타고 가던 열차가 선로에 추락한 열기구로 인해 2시간 미만에 도착할 거리를 거의 5시간 걸려서 도착해서 도착지에서 택시를 타고 급히 이동해야 하는 문제도 생겼고, 여행출발당일에 여객선의 출항이 취소되어서 가지 못하고 등등 별별 일이 다 있었다 보니 여행객들이 보통의 관광객이라면 안 할 이야기를 하는 것도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문득 이런 생각이 나기도 했습니다. 만일 지금 타임리프가 가능하다면 몇년대로 가볼까 하고.
개척촌 테마거리 이야기가 나오니 더욱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칼이 칼집에 계속 머물러 있어서는 베지 못하고 독이 용기 속에만 있으면 독살의 도구가 되지 못하지요. 저렇게 불쑥 나타나는 건 반갑지 않지만, 언젠가는 겪어야 할 문제이고 그래서 더욱 떨떠름하게 여겨집니다.시어하트어택
2021-12-12 19:49:44
정말 많은 일을 겪으셨군요. 그 중에는 위험한 순간도 있었고, 기분나빴던 일도 있네요. 뉴스 같은 데서 비행기나 배 같은 교통수단이 결항되었다든가 했다는 뉴스를 보면 여행객들의 표정이 우리가 생각하는 여행객의 표정과는 180도 달라 보입니다. 하물며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면 그것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