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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SMOPOLITAN] #Pilot1 - Another Day at the Office (2)

Lester, 2018-03-13 01:52:15

조회 수
203

Another Day at the Office - 하루하루 똑같은 날(정확히는 Same Shit Different Day의 좀 더 고급스러운 표현이다)




"롤링 하이츠에서 콜 들어왔는데, 근처에 계신 분 있나요?"

택시 라디오를 통해 회사의 배차 요원들 중 한 명인 클로이 풀Chloe Poole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스터와는 얘기를 나눠본 적이 드물었고, 마당발 브로디에게 듣자하니 잠시 휴학계를 내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대학생이라고 했다. 전공은 컴퓨터 계통이라고 하던데 브로디도 그 이상은 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IT용어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나. 이쁜 얼굴이 아깝다느니, 그 쪽 취업이 잘 안 되는 모양이라느니 하는 소문이 많았지만 레스터는 개의치 않았다. 이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레스터는 무전기를 집어들고 말했다.

"마침 롤링 하이츠 옆입니다. 제가 가죠."

클로이가 회선을 모든 기사에서 레스터에게만 돌리고 대답했다.

"고마워요, 리 씨. 손님은 롤링 하이츠 12번지 앞에 계세요."

"알겠습니다."

"글은 잘 쓰고 계신가요?"

클로이가 갑자기 화제를 돌렸다. 이런 걸 물어보는 이유는 둘 중에 하나다. 관심, 아니면 트집. 다행스럽게도 클로이는 트집을 자주 잡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레스터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생각만큼 잘 나오지 않네요. 뭔가 써대긴 하는데, 항상 조금씩 부족해서."

"뭐가 부족한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아마도... 재미?"

"모든 사람의 비위를 맞출 순 없잖아요."

"독자 말고, 저 자신 말입니다. 요새 통 글을 못 쓰고 있어요. 일은 일대로 고되고, 시간이 남아도 집중이 안 된달까."

"그건 정말 심각하네요."

"심각하죠."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신호등이 한 번 바뀔 때까지 말이 없어서 레스터가 침묵을 깨려는데, 클로이가 더 빨랐다.

"저도 정말 걱정돼요. 전공은 컴퓨터 쪽으로 하긴 했는데, 이 기술을 써먹지 못하는 것 같아서..."

대화는 늘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레스터도 클로이도 꿈과 현실이 따로 놀고 있었다. 그렇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그 두 가지 사이의 간격이 벌어진다는 걸 알면서도, 그 해답을 찾지 못해서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그래도 같은 입장이라는 점 때문에 서로를 위로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레스터가 위로하는 쪽이었다.

"그렇게 치면 내가 더 심각해요. 역사로 밥이 나옵니까, 글쓰기로 밥이 나옵니까. 그 동안의 원고도 이미 흔한 내용이라고 다 퇴짜를 맞는 판국에."

"......"

"뭐 누가누가 더 불행한가를 따지자는 것은 아니에요. 남들도 다 그렇게 사니까. 그러니까 '왜 나만 이렇게 재수없는 거야~'라고 슬퍼할 일은 아니라는 겁니다."

레스터가 짐짓 어설픈 연기를 하자 클로이가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덕분에 위안이 됐어요. 고마워요."

"별 말씀을."

그 말과 함께 클로이는 무전을 끊었다. 운전을 하느라 계속 운전석에 처박혀 있어야 하는 택시기사로서는 충분히 재미있게 시간을 보낸 셈이었다.

"아, 손님이 있다고 했지."

레스터는 곧바로 택시를 롤링 하이츠 12번지로 몰았다.


"여기에요오!"

레스터가 택시를 세우자마자 덩치 좋은 여성이 뒷좌석에 올라탔다. 레스터가 백미러를 흘끗 보자 정말 솔직히 말해서 예쁘다고 할 수는 없는 얼굴이 백미러에 한가득 들어왔다. 손님은 그런 눈길을 진작부터 의식했는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 아찌도 내가 못생겼다고 생각하시는구나!"

"네? 아니, 꼭 그런 건 아니고-"

"난 거짓말하는 남자가 가장 싫더라!"

"그렇습니까... 어쨌든, 어디로 갈까요?"

"결혼식장! 아찌, 나랑 결혼할래요?"

"네?!"

레스터는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곧바로 액셀을 밟고 앞에 주차된 차를 들이받을 뻔 했다. 레스터는 얼른 숨을 작게 돌리고 다시 백미러를 쳐다보았다. 손님의 표정을 보고 제정신인지 알기 위해서였다. 헌데 손님은 술도 마약도 하지 않은 지극히 정상인이었고 묘한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말투로 보아 나쁜 속셈을 품은 건 절대 아니었다. 레스터가 어떻게든 대답을 하려는 찰나, 이번에도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됐어요! 싫다고 하는 걸 억지로 시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쨌든 클레멘타인즈 결혼식장으로 가 주세요."

"알겠습니다."

레스터는 손님이 또 뭔가 농담을 던지기 전에 얼른 미터기를 돌리고 차를 몰았다. 레스터가 운전에 집중하는 사이 손님이 다시 말을 걸었다.

"아찌는 이름이 뭐에요? 난 로라인데."

"레스터입니다만..."

레스터는 자신이 그녀에게 아찌라 불릴 만큼 나이가 많진 않다고 따지긴 싫었지만,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 잠자코 있었다. 하지만 로라는 평소에 대화할 상대가 없었는지 계속 얘기를 꺼냈다.

"레스터 아찌는 내가 오늘 왜 결혼식장에 가는지 알아요?"

"결혼하려고 가시는 거 아닙니까?"

"맞아요, 결혼! 그런데 몇 번째 결혼인 줄 알아요?"

"아뇨."

"일곱 번째에요!"

"네?! 아니, 어쩌다가?"

"얘기하자면 길어요...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첫 번째 남자는 사기꾼이었고, 두 번째 남자는 SM 매니아였고, 세 번째 남자는 정신병자..."

레스터로서는 그 얘기를 쭉 듣고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앞서 클로이와 얘기할 때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말을 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묵묵히 듣는 건 인간으로서의 도리에 아닌 것 같기에, 레스터는 그녀가 듣고 싶어할 만한 질문을 던졌다.

"그럼, 이번에 결혼하시는 분은 어떠신데요?"

"와일드한 성격이 마음에 들어서 청혼했어요! 시쳇말로 뭐라고 하지? 짐승남? 어쨌든 남자답게 딱딱 맺고 끊는 게 너무 마음에 들지 뭐에요!"

"그렇군요. 그 외에는?"

"몸만 좋은 게 아니라 머리도 좋아요. 어딘가의 기자로 활동한다던데, 불량한 업체에 잠입해서 실상을 까발리는 내용을 쓴대요! 참 정의롭지 않나요?"

"그러면 많이 위험할 것 같은데."

"그런데 그 숱한 위기를 겪고서도 용케도 매번 도망쳐 나왔다지 뭐에요! 하늘이 돕는 사람인가 봐요! 아, 그에 비하면 나는 대체..."

"손님도 나쁜 편은 아닙니다."

"로라에요!"

"아아, 알겠습니다. 로라 양."


그 사이에 클레멘타인즈 결혼식장에 도착하자, 로라는 손거울을 꺼내더니 그제서야 메이크업을 시작했다. 로라는 계속 여기저기를 꾸미다가 멍하니 있는 레스터를 보고 재우쳐 물었다.

"설마 이렇게 대기한다고 요금이 올라가는 건 아니죠?"

"아뇨. 저야 시간이 많으니까 천천히 하세요. 그리고 그만큼 결혼이 잘 풀리기를 바랍니다."

"빈말이라도 고맙네요."

"아뇨, 진심입니다. 여섯 번이나 실패했는데 일곱 번이라고 실패한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그런가요?"

"틀림없이 잘 될 겁니다."

"네에, 고마워요. 어머, 시간 다 됐다! 돈은 여기 두고 갈게요!"

로라는 메이크업을 대충 끝내고는 택시 뒷문을 열고 허겁지겁 계단을 올라갔다. 레스터는 그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혼잣말을 했다.

"그래, 방황도 정도껏 해야겠지."

그리고 뒷좌석으로 눈길을 돌리는 순간, 레스터는 충격을 감출 수가 없었다. 지폐 몇 장이 아닌 돈다발이 뒷좌석에 올라앉아 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신문지, 하다못해 1달러 지폐로 장난을 친 게 아닌가 싶어 집어들고 살펴봤지만 틀림없는 100달러 지폐 다발이었다. 얼추 30장은 됐다.

"...뭐야, 저 여자?!"

레스터는 순간적으로 택시에서 내려 결혼식을 구경할까 하는 생각이 치솟아 택시에서 내렸다. 하지만 그는 잠시 생각하다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택시에 올라 그 앞을 떠났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혹시나 자기가 결혼식장에 들어갔다간 일곱 번째 결혼식도 실패로 돌아갈 것 같아서였다.

"나처럼 불행을 몰고 다니는 역귀는 뭐, 가만히 있어야겠지."

레스터는 그렇게 너스레를 떨며 큰 길로 나갔다. 그 순간 이번엔 택시 무전기가 아닌 핸드폰이 울렸다. 레스터가 전화를 받자 나긋나긋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여어, 레스티. 일은 끝났니?"

"슬슬 끝나갑니다."

"그거 다행이구나! 안 그래도 동네 사람들이랑 잔치 벌이고 있어. 오는 길에 들르는 게 어때?"

"그럴까요?"

"그래야지! 다들 오랜만에 네 얼굴 보고 싶어해. 린디 아줌마도 그렇고, 셰클턴 형제도 그렇고, 여러 사람들이 다 모여 있어."

"그렇게까지 모였다면야 안 갈 수가 없겠네요."

앨프레드 박Alfred Park은 레스터가 오랜만에 모임에 나오겠다고 하자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라! 어디서 모이는지는 알고 있지?"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잔치 벌이는 곳이라면야 거기밖에 더 있나요?"

"잊지 않았구나! 일 끝나는 대로 천천히 와라!"

"네, 앨피 형."

레스터는 전화를 끊자 곧장 자기가 사는 동네로 차를 돌렸다. 오랜만에 동네 사람들 얼굴도 보고 얘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정확히는, 다른 곳에는 없고 동네에만 있는 무언가 따뜻한 분위기를 느끼고 격려를 받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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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필휘지로 계속 써나가고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첫 에피소드는 단순히 세계관 설명이라 별다른 재미는 없을 수도 있습니다. 레스터가 제 오너캐이기도 하고, 그냥 일기 형식으로 써내려가고 있네요. 이전 글이 너무 짧은 것 같아서, 이 에피소드로 한 회만 더 연재하고 다음 에피소드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Lester

그거 알아? 혼자 있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유야 어쨌든 고독을 즐겨서 그러는 게 아니야. 사람들한테 계속 실망해서 먼저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는 거야. - 조디 피코

4 댓글

마드리갈

2018-03-13 12:46:40

지루하고 따분하게 이어질것만 같은 상황이 급변해서 웃음을 주고 있어요.

택시무선에서 레스터 리와 클로이 풀이 주고받는 대화도 그렇고, 별의 별 장광설을 늘어놓은 뒤 100달러 지폐다발을 택시비로 놓고 간 승객 로라가 등장한 상황 또한, 미국식 코미디의 한 장면같아요. 특히, 요즘 영화를 잘 안 보는 터라, 달변가 캐릭터가 나오는 코미디 영화를 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나저나 벤자민 프랭클린(100달러) 30장이라니, 정말 이례적이네요. 그런 고액권은 그다지 잘 쓰이지 않고, 실질적으로는 앤드류 잭슨(20달러) 정도가 실질적인 상한이라고 들었는데, 이게 앞으로 일어날 일과 뭔가 연관이 있으려나요. 그 점이 눈에 들어오고 있어요.

Lester

2018-03-14 00:56:52

생각해보면 현실의 일상생활도 이렇게 재밌어 보이는 구석들이 하나둘 있죠. 그런 것을 염두에 두고 써 봤습니다. 막상 영양가(그러니까 기승전결이라든지)가 없는 것 같아서 괜히 고민되지만요. 미국식 코미디라고 말씀하셨는데 제가 미국 문화(소설과 영화)를 접해서 그런지 이렇게 투닥거리는 장면은 동양적(?)이라기보단 서양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대화의 주제가 미묘하게 다르달까요?


그나저나 100달러가 그렇게 잘 쓰이지 않나요? 뭐 우리나라도 평소에 5만원짜리 지폐를 여러 장 들고 다니진 않지만... 100달러 지폐를 영화나 게임에서 많이 봤기에 그러려니 싶었는데;;; 사실 저기에 나오는 '로라'란 캐릭터는 만화 원피스에 나오는 '구혼의 로라'입니다. 자세히 보시면 제가 어거지로(…) 넣은 힌트들을 찾으실 수 있습니다. 100달러 뭉치를 두고 간 것도 그 캐릭터의 배경을 고려해서 넣은 장면이고요.

SiteOwner

2018-03-13 20:59:06

미국 영화에서 잘 보이는 CB Radio 운용장면이 택시회사와 운전수의 대화로 구현되고 있군요. 그래서 친숙한 느낌이 배가됩니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이것은 미국, 캐나다, 일본 등지에서는 활발했지만 국내에서는 보기 힘든 것이었는데, 요즘은 법인택시회사라면 다 쓰고 있다 보니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에 사뭇 놀라게 됩니다. 참고로 CB는 Citizens Band의 약칭으로, 단거리 비상업 라디오방송용의 주파수대역을 말합니다. 1991년작 영화 Thelma and Louise를 보고 이 용어를 알게 되었다 보니 언급해 둡니다.


하루하루의 생활에 지친 몸을 이끌고 살지만 웃음을 잃지 않는 소시민들의 모습, 그리고 100달러 지폐다발을 택시비로 낸 기묘한 수다쟁이 로라의 모습이 꽤 대조되면서 여운을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잘 감상했습니다.

Lester

2018-03-14 01:00:07

우리나라의 경우는 기술이 많이 발전해서 그런지 라디오와 무전기를 갖다놓기보단 내비게이션에 시스템이 탑재되어 있더군요. 그래서 본부(?)와 얘기하는 건 일절 없고, 요청이 뜨면 '먼저 버튼을 누르는 사람이 임자'라는 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비인간적(?)인 시스템이 싫어서, 시대배경과 상관없이 라디오와 무전기를 넣었고요. 그나저나 셀마와 루이스... 오랜만에 듣는 영화네요. 보진 못하고 영화 리뷰집 같은 데에서 읽었는데, 여성 둘이서 무언가를 찾아 떠나는 내용 아니던가요? 마지막에 둘이서 자동차를 타고 '떠나는' 결말이 인상적이었다죠.


잘 감상하셨다니 저야말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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