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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미정,소설] 습작

마미, 2013-04-04 17:22:35

조회 수
615

이곳에 오니, 고향이 생각났다. 물론, 내 고향은 여기가 아니긴 하지만. 곳곳이 어느 정도 닮아있었다. 다 잊혀진 것들을 이제 와서 회상한다니, 쓸데없는 짓이다. 사람들이 정말 살고는 있는 것인지 어쩐 것일지 모를 작은 마을, 오는 길마다 포장이 안된 도로 때문에 차가 흔들려서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물론, 자의로 이곳에 온 것은 절대 아니다. 얼마 전에, 좀 골치 아픈 일을 겪었다. 무례한 질문을 던진 토크쇼 진행자를 때렸으니까. 그것도 생방송 중에 저질렀으니. 상당히 큰 사건이었다. 기사1면 가십거리가 되는 것 정도는 우스울 정도였으니까. 그것도 아주 나쁜 쪽으로 흘러갔었고. 가십거리를 다루는 잡지엔 아직도 내 사진이 게재되어 있다. 벌써 두 달 전 일이다. 콘서트 홍보차 들렀다곤 해도, 그런 저질 토크쇼에는 나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 사건 이후로, 법정 출두까지 간데다, 어찌어찌 합의하고 끝냈지만, 생각보다 타격이 컸다. 그 일 이후로, 오너가 대놓고 내게 폭언을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출연 예정이던 광고 몇 가지가 무산된 것은 물론이고. 한동안 PD들도 나를 찾지 않았다.

 

 

“아 씨발, 여긴 제대로 된 주유소 찾기도 힘드냐.”

 

 

매니저가 짜증을 내면서 핸들을 부여잡고 있었다. 뒤쪽이나 앞쪽이나 흔들리긴 매한가지인데다, 잘 작동하던 에어컨도 갑자기 멈춰버린 상태라 안쪽은 후덥지근했다. 흡연자인 매니저가 담배를 피려고 했다. 제 정신인가. 안 그래도 더운 와중에 공기까지 지저분하게 할 생각이냐고 윽박을 질렀다. 그는 낮고 조그맣게 욕을 지껄이고 난 뒤, 옆문 유리 슬라이드를 열었다. 바깥과 별로 다를 것 없이 더운 공기가 매미 울음소리와 함께 차 안쪽으로 파고들어왔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지만, 그 안쪽이 어떤 표정일지 감이 온다.

 

 

“멀미날 것 같은데 천천히 몰아요.”

“그렇게 분탕질 치고 일정 느슨해지니까 기분 좋지? 소속사 연예인 한 명 관리 제대로 못한다고 쌍욕 쳐먹고선 또 한 번 이 꼬라지 나면 모가지라고 그러는데! 집에 돌아가면 입 벌리는 애새끼들만 셋이라고.”

“그만두시고 싶은가 보네요. 제가 대신 보고해드려요?”

“영화 홍보하기도 전에 말아먹고 한다는 소리하곤! 알고는 있어? 나 혼자 죽는 거 아니야. 같이 쫓겨난다고!”

“나야 타 소속사로 이적하면 그만 아닌가요? 아쉬울 것도 없는데. 제발 와달라고 손 내미는 기획사는 넘쳐요. 웃긴다. 내가 연습생이라도 되는 줄 아나보네요. 게다가 여론도 나한테 그렇게 나쁘진 않은데요? 그 진행자 새끼는 그 지랄 하고나서 바로 1년간 방송활동금지 당했다던데. 내가 누군지 알고 매니저 하고 있는 거예요? 나야, 이렇게 기부도 하고 좋은 일 하면서 다시 회복하면 되지만, 그쪽은 아니잖아요?”

 

 

그 한마디에 바로 주변이 조용해졌다. 운전하고 있는 매니저를 말리려던 코디도, 그리고 나도 모두 입을 다물고 각자 다른 방향을 바라볼 뿐이다. 물론, 차 안쪽에 우리쪽 소속인 사람들만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눈꼴 시려운 짓이라도 할 수 있는 거겠지. 외주 쪽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했다간, 또 앵물 역할이나 하게 될 거야. 가능하다면,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아니, 한국이라는 땅 자체를 떠나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벌려놓은 일이 작지는 않으니까. 언제 다시 나갈 수 있게 될지는 모르겠다. 연말에 뉴욕 타임 스퀘어에서 쟁쟁한 인물들이랑 합동공연까지 했었는데. 그런 내가 어딘지도 모를 깡촌 마을로 들르게 되다니.

 

 

“다들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나보네. 희정이 언니도 그래?”

“그 상황이면, 나도 화나긴 마찬가지였겠지. 그래도, 기왕이면 카메라가 끄고 난 뒤로 하지 그랬어. 민아야.”

 

 

하긴, 내 잘못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건 인정하겠지만, 과거를 들먹거리면서 이죽거리는 그 진행자 새끼 입을 찍어버리지 않으면 성이 풀리질 않았으니까. 후회는 한 적 없다. 몇 번이라도, 똑같은 무례를 범하는 놈이 있다면 되풀이 할 거니까. 언니만큼은, 날 아무렇지도 않게 ‘민아야’ 라고 불러주고 있다. 대부분은 매니저처럼 태생부터 무능하고 무례한 사람이거나 극존칭을 쓰는 사람들인데. 이렇게 편하게 부르는 것은 이 코디 언니만이 유일하다.

 

 

“난 그래. 알잖아 언니. 자꾸 옛날 일들 들먹거리는 사람들 보면 진짜 죽여버리고 싶어!”

“그래 알았으니까 좀 진정해 얘. 네가 잘못한 거 없어. 대신, 부탁이야. 제발 그 욱하는 성격 좀 다스려봐. 이제 그때처럼 어린애도 아니잖니.”

 

 

울먹거리면서 말하고 있다니. 나도 참 못났다. 이 못 된 성격 때문에, 지금까지 내 매니저를 하던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고 몇 번인가 바뀌곤 했다. 그에 반해, 코디 그러니까 희정 언니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계속 나와 함께 해주었다. 벌써 10년째다. 옷에 대해서도 꽤 까탈스럽게 굴었었는데, 그래도 다 받아주곤 한다. 언니는 선이 가늘고 유순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남자보다는 덜 넓은 어깨이고 한국 평균의 웬만한 남자보다 키가 컸다. 길에서 처음 마주치면 대부분이 남자로 오인해도 이상하지 않을 외모였다. 머리까지 베이비펌을 한 숏컷이라 더욱 그렇게 보일 수 밖에.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함께한 백인,흑인 가수들도 그녀에 비하자면 한 없이 작아질 정도로 엄청난 존재감이다. 적어도, 내겐 그렇다. 나는 여성 기준으로 작은 키가 아니었지만, 언니에 비하자면 거의 꼬맹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그리고, 너무 불평만 하지마. 우리 좋은 일 하러 가는 거야. 그, 50년째 식물인간인 딸을 돌봐주는 홀어머니 사연 알지?”

 

 

이 언니는, 자기 시집가는 일이 더 급한데 용케 그런 사람들까지 신경 쓴다. 죽었다 깨어나도 이 언니처럼은 못해. 자기가 벌어들인 돈을 몇 번인가 불우한 사람들에게 몰래 기부하곤 했었다. 코디라는 직업이 그렇게 경제적으로 여유 넘치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그만두는 경우가 없다. 차라리, 성당에 다니는 편이 이 언니의 적성에 더 맞을 것 같단 생각이 들곤 했다. 수녀 가운 입고, 미사를 드린다던가. 그런 모습들 말이다. 다른 사람들에겐 거칠게 짜증을 부리곤 해도, 이 언니를 그렇게 대하긴 껄끄럽다. 겉으로 볼 때는 언니라기보단 오빠 같은 느낌인데, 성격은 또 안 어울리게 여성스럽다. 코디 일을 하려면 그래야 하는 거겠지만.

 

 

“몰라. 회사에서 알려주기만 했지.”

“뉴스도 좀 보고 다녀. 요즘, 화제인데. 여기에서 기부활동도 하고 그러면 네 이미지 개선에도 좋고 사람들이 널 다시 볼 거 아니겠니?”

 

 

사실, 이 계획은 언니가 매니저에게 제안했던 것이라고 한다. 단순히 코디로써만 일하는 것은 아니다. 10년 동안 일했으니까 내부 사정은 거의 아는데다, 본인도 능력도 있는데. 정작 매니저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하니까. 그 속사정까지는 알 수 없다. 지금 같은 스케쥴로 일정이 잡힌 것은 결과적으론, 이 언니 때문이기도 하다. 불만이라고 다 털어놔야지 맞겠지만. 차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인 것이 같이 이야기를 하다보면 틀린 이야기는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오히려 반박을 해버리면 나 혼자 떼쟁이 어린애처럼 되어버리곤 한다. 언제나 그랬다.

 

 

“바깥 한 번 봐봐. 날씨도 좋고 하늘이랑 공기도 맑은데. 서울에선 이런 것 없었잖아. 좋지 않아?”

“언니는 왜 매니저일 안 해?”

 

 

예전에도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면, 희정 언니는 그런 식으로 대답해버리곤 한다. 나에 대해서는 부처님 손바닥 안처럼 훤히 꿰고 있으면서도 정작, 내가 희정 언니에 관한 것들에 대해선 아는 점이 별로 없다. 10년이나 지냈는데도 말이다. 부조리하다. 아니나 다를까, 또 못들은 것처럼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리고 있다.

 

 

“차가 안 움직이면, 내려서 걸어가도 괜찮을 것 같고. 그건 싫지?”

“당연하지. 자외선 때문에 피부 다 탈건데.”

“그럴 줄 알고 썬크림 가져왔지!”

 

 

매니저는 오히려 감탄하는 것 같다. 성격 드센 나를 이렇게까지 잘 다루는 걸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 법도 하겠지. 차라리, 이 쓸모없는 남자에게서 급여를 전부 빼앗아 희정 언니 통장을 채우면 좋겠다. 물론, 내 권한이 아니니 별 도리는 없다. 결국 난, 희정 언니의 손에 이끌려서 그 마을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칭얼대는 꼬마조카 달래서 이끄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좋아서 계속 이런 흐름으로 가는 것은 아니다.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고 만다. 언제나 그랬다.

 

 

거의, 아무것도 없는 마을이다. 상가 건물이 몇 개 있었지만, 대충 도료를 들이부은 듯한 바닥에다가 버스도 잘 다니지 않는 동네였다. 공기가 맑고, 자시고. 내겐 진절머리 나는 곳이다.

 

 

“안색이 안좋은데. 멀미약 필요해?”

“아니.”

 

 

멀미가 아니라고 둘러댔다. 사실, 괜찮지는 않다. 건강쪽 문제는 아니다. 주변이 어린 시절 지내던 곳과 너무 닮아있는 까닭일까. 언니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이내 매니저와 잡다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눈치 챘을테지. 혼자 조용히 있고 싶어하는 것 말이다. 언니는 이런 것에서도 남들보다 앞서있다. 물론, 야외활동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산골짜기를 싫어하는 것엔 다른 이유가 있다. 어릴 적 집 안 사정과도 연결된다. 당시엔, 아무 것도 없이 이런 곳에서 친부모와 와 함께 거의 속세랑 떠나시다시피 지냈었다. 일가족이 도시로 오게 되기 전 까지는 말이다.

 

 

“약은 싫어. 그냥 전부 다.”

 

 

언니는 곧장 내 말을 이해했다. 그렇게, 도착하기까지 별 다른 대화 없이 우리들은 각자의 생각에 골몰하게 되었다. 전부 비워내고 싶다.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텅 빈 시골 하늘처럼. 싸그리 전부 다. 여기를 뜨는 즉시, 바로 다 잊어버리면 되겠지. 멍하니 바깥을 바라보다가, 해바라기가 가득한 언덕이 보였다. 바로 맞은편에는 조그마한 교회가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바깥 풍경을 구경하고 있는 것을 봤는지 언니가 옆자리에 와서 이야길 해주었다.

 

 

“예쁘지 저기? 나 여기 예전에 여행 올 때 저기 먼저 들렀었어. 교회도 들러서 밥도 얻어먹었었고. 목사님이 꽤 좋으신 분이야.”

 

 

글쎄, 난 교회는 다니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풍경만큼은 예쁘다는데 동의할 수 있었다. 한 번 내려서 들러보고는 싶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마을에 도착했다. 유명한 특산물은 한우라고 한다. 그 이외에는 별 볼일 없는 조용하고 작은 곳이었다. 대게 3층 이상을 넘는 건물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흔해빠진 편의점 같은 곳도 보이지 않는 그런 촌구석이다. 간간히 작은 식당이나 구멍가게, 우체국, 경찰서, 동사무소 같은 기본 적인 것들은 보였지만 그마저도 오래되어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것 같은 건물들이었다. 지나가던 마을 사람들 한 둘씩 이쪽을 알아보았다. 으레 그렇듯 예의상 손을 흔드는 것 외에 그들과 접촉하거나 하고 싶진 않았다. 대중이란, 언제나 무례하니까 말이다.

 

 

“모녀랑 기부금 전달 기념 촬영하고 나서 이곳 면장이랑 또 사진촬영이 있다고 하네.”

“면장이고 된장이고 관심 없어 꺼지라고 그래. 그런 거 꼭 해야 돼? 그냥 그 사람들만 만나고 돌아가면 안돼?”

“또 그런다. 아가씨가 자꾸 험한 말 쓰고. 미안하지만 안돼. 사장님이 이번에 너 일정 제대로 다 소화해야 한다고 엄포를 놓으셨어. 알잖아.”

 

 

어린애처럼 또 투정부리다가 결국, 그 모녀가 있다는 집까지 도착했다. 사정이 어려운 집안 치고는 그래도 앞마당은 있을 것은 다 있는 것 같은데. 개를 키운다거나 암탉이 있다거나 하는 걸 보면. 나름대로 돌담도 있는 걸 보니 굳이 기부를 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다.

 

 

“민아야 거기 아니야. 여기서 더 들어가야 돼.”

 

 

그 모녀가 있는 집 길목엔 차가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그만큼 좁고 험했다. 뒤에서 따라오던 밴의 외주 제작사 스태프들도 같이 내려서 걸어가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여기에선 최대한 가면을 쓰면서 행세할 수 밖에 없다. 사실, 언니를 제외하면 소속사에 믿을 만한 사람은 거의 없긴 하지만, 이곳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그보다도 더 하니까 말이다. 그쪽 사람들과 별 볼일 없는 인사치레를 끝내고 난 후,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일본식 가옥이 보였다. 예쁘긴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스산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오는 길목엔 대충대충 방치되어있다시피 하는 묘지들이 있고, 올라가는 돌담 길은 거의 부서져 있었다. 바로 집 옆에 조그마한 우물이 보인다.

 

 

“여기야. 이곳에 두 명이서 살고 있어.”

 

 

집은 고급스러워 보인다. 오래되기는 했어도, 그만큼 운치 있는 곳이었다. 정말로 사정이 어려운 사람들이 맞는 건지 언니에게 넌지시 질문했다. 모르는 것이 뭘까 이 언니는. 오컬트 쪽도 빠삭하다니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시작하고 있다. 역사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대략 일제강점기 전 후부터 알려진 곳인데 이 집에서 지내던 사람들이 한 둘씩 의문사하거나 미쳐버리는 경우가 있었고 용하다는 무당도 몇 번인가 왔었지만, 되려 그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물러간 후로,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집이라고 한다. B급 납량특집 프로그램에나 어울리는 소재였다. 설상가상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모녀가 살 수 있는 곳이 이곳 말고는 없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곳이었지만, 지붕 아래에서 딸을 돌보기 위해선, 어쩔 도리가 없었다고 한다. 생활보조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거의 마을사람들에게 버려지다시피 지냈던 게 분명했다. 언덕 너머로 몇 그루의 나무가 보였다. 잎사귀 하나 없이 죽은 나무들은 멀리 보이는 노을 사이사이에 앙상한 가지들을 뻗고 있다.

 

 

“별로 중요한 건 아냐. 모녀가 여기 이사 들어온 게 10년 정돈데 별 탈 없었던 것 보면 그냥 소문이겠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관련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나는 거의 곁다리로 끼어든 것이나 다름없지만, 기부금 전달자로써 공중파에 나오고 들어가는 것으로 역할은 끝난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거기엔 세 명의 사람이 보였다. 낡고 칙칙한 양복을 입고 있는 백발 성성한 노인 남성. 성경책을 편 채로 앉아있었다. 문 앞에서 우릴 맞아주는 노인 여성. 좀 전에 밖에서 보았던 고목나무가 떠올랐다. 왜소한 몸집에 몸 전체에 주름이 져있는 것이 닮았다. 눈이 잘 보이질 않는지 돋보기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바로 맞은 편, 침대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눈을 뜬 채, 잠들어 있는 50대 전후의 여성이 보였다. 제대로 찾아 온 것 같다. 스태프들이 먼저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상황을 보아 가정예배를 드리던 도중에 온 것 같다. 방문하자마자 희정 언니가 먼저, 익숙하게 인사를 건넨다. 이미, 이들과 면식이 있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어머님. 저 왔어요. 희정이예요.”

“오신다는 걸 깜빡 잊었네. 아유, 내 정신 봐. 죄송해서 이거 어떻게 하나. 가만, 뭐라도 좀 낼테니 기다리시우.”

 

 

당연한 거겠지만, 그녀의 호의는 사절했다.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말이다. 이들 중 몇 명은 다시 여의도로 가야만 한다. 사정상 면사무소에서 사진촬영을 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매니저는 곧바로 전화를 넣었다. 아마, 직접 찾아오게 될 것 같다. 면장인지 뭔지 하는 부류의 인간들 말이다. 주소가 어디냐고 묻고 있는 것 같았다. 본인 관할에 속한 곳인데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은, 그동안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좀처럼 많지 않은 기회가 오니까 자기, 얼굴이나 알리고 싶은 속셈인거겠지. 교활하기 짝이 없다. 이곳에서, 우리를 진심으로 맞이하는 사람은, 나이 지긋한 두 노인들 말고는 없었다.

 

 

“우리 딸이예요. 어때요? 이쁘죠.”

 

 

그렇게 말하며, 노모는 오래된 사진첩에서 사진 몇 장인가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그것은, 제법 오래된 흑백 사진이었다. 희미하긴 했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곧장 스태프들은 바쁘게 움직이면서 그 사진들을 카메라로 담기 시작했다. 7살 전후 정도로 보이는 여자 아이와 고운 외모의 새댁, 바깥에서 찍은 것 같다.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서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찍고 있다. 그들에게도 빛나던 순간은 있었던 것이다. 분명히, 예쁜 사진이었지만 흑백의 음영만큼이나 멀고 아련하다. 난, 어릴 적에 가족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일 따위는 없었다. 어릴 적에 함께 지낸 부모 얼굴 같은 건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적어도, 그들은 이 때 당시 지금보단 행복했을 것이다. 사진을 찍은 장소는 낯설지 않다. 좀 전에 지나쳐왔던 해바라기 언덕이었다. 50년 전.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계속 모습을 유지해온 곳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신기하다, 시간나면 정말로 가볼까.

 

 

“예쁘네요. 이 장소, 알고 있어요.”

 

 

가식이 아니다. 당시의 딸은 정말로 귀엽고 예쁜 모습이었다. 비록 흑과 백의 음영 밖에는 없는 사진이지만, 다채로운 색의 광채를 뿜어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내게선 아득한 장면들이었다. 서로 손을 잡고 해바라기 밭에서 웃고 있는 사진. 마치, 이곳과는 아무 상관없는 동화 속의 인물들처럼. 분명히, 같은 사람들인데도 시간을 거슬러 오른 그들의 모습을 직접 보고 비교하자니 위화감이 짙어져 정면으로 보기 껄끄러웠다. 침대에 누워있는 딸의 머리는 삭발된 상태로 눈을 반쯤 뜨고 있었는데, 별다른 미동조차 없다. 식물인간이니까. 그저, 물을 받아먹는 것 말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사진 속의 귀여운 여자아이가 이런 모습으로 아직 살아있다니. 틀려, 이건 살아있는 것도 아닌 상태잖아. 끔찍하다.

 

 

“마을 입구에서 봤수? 옛적엔 젊은 사람들 많이 들락날락하던 곳이었는데. 요즘은 거의 발길이 뜸해져서. 그래도, 목사님께서 계속 꽃들을 돌보니깐 다행이우. 교회가 바로 옆이거든.”

 

 

그 외에도 추억에 잠기기 좋은 사진들이 많았다. 쓸데없는 상념들에 잠기게 만드는 물건들이었지만 사진에 나온 풍경과 모습들은 정말로 예뻤다.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다면, 굳이 그들 앞에서 예쁘다는 말을 할 필요도 없다. 곧장, 담당 PD가 그녀에게 질문을 했다. 이름은 김옥순. 올해로 83세. 남편은 남북전쟁으로 인해 사별하고 모녀 둘이서만 계속 살아왔다. 일용직을 전전해가면서, 딸을 근 50년 동안 부양해온 사연은, 분명 대중적으로 가슴 찡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가능하다면 이런 사연이고 뭐고 전부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으면 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이따금씩 카메라가 돌고 있는 중에도, 딸에게 말을 걸거나 머리를 쓰다듬어주거나 했다. 찬송가를 펴놓고 딸이 누워있는 침대 앞에서 찬송들을 부르기도 하고. 절망적인 상황이었는데도 포기하지 않고 50년간 딸을 돌보아 왔다고 한다. 오늘 내일 하는 연령대에 접어들고 나서도 묵묵하게 딸을 돌보아 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관계를 이해할 수도 공감조차 할 수도 없다. 그만큼 내 과거는 망가져 있었으니까.

 

 

“아가씨, 보면 볼수록 예쁘네 아유. 우리 딸내미도 딱 아가씨 나이 때 미인이었는데.”

“어머, 고마워요. 어머님, 사진이 꽤 많이 들어있네요?”

 

 

스스럼없이 노모는 나를 보며 그런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사진첩에서 딸이 스무살 적에 찍은 사진은 없었기에 확인할 수는 없다. 아마도 그때라면, 지금처럼 침대에 누워있는 것 말곤 할 수 없었을 몸이었으니까. 노모의 주름진 미소는 푸근했지만, 지난 삶이 얼마나 고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흡사 울음을 터뜨리기 전 얼굴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이곳에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져서, 잠시 밖으로 나왔다.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이제 곧 어두워질 것 같다. 산 귀퉁이 너머에서 푸르스름한 달이 노모가 보여주었던 사진들처럼 흐리게 떠있다. 약식으로나마 기부금 전달을 마치고 난 후에, 담당 PD와 몇 마디를 건네고 촬영에 마저 협조했다. 리포터 역할은 맘에 들지 않았지만, 으레 그래온 것처럼 방송용 얼굴로 카메라 앞에 섰다. 아마, 스크린으로 보는 사람들 중 몇몇은 내 이런 모습을 꿰뚫어보고 있지 않을까.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언제나 무의식중에 그들을 의식하는 버릇이 생겨버렸다. 하지만, 이 정도라면 누구에게나 표면상으로 훌륭한 사람으로 비춰질 것이다. 그래, 그거면 충분하다. 카메라가 막 돌아가고 있을 즈음에, 배나오고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 남성이 찾아왔다. 볼품없는 양복에 금목걸이나 금반지를 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카메라 주변에서 두리번거린다.

 

 

“안녕하십니까. 덕성면 면장 김송택입니다. 하하,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그는, 선거철에 유세떠는 후보처럼 일일이 보이는 사람마다 악수를 하며 명함을 건네고 있었다. 카메라맨이 되었건 PD가 되었건. 심지어는 코디 언니와 매니저에게도 일일이 인사를 건네는 쓸데없는 짓을 하면서. 인사를 받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지만, 간단하게 받고 넘기면 그만이었다. 명함 따윈 나중에 쓰레기통에 버리면 그만이니까. 본인이 관리하는 동네인데 장소를 몰라서 물어오다니. 아예, 관심이 없는 것이다. 노모와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오랫동안 절친한 이웃으로 지낸 마냥 어설픈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만나서 첫 인사를 건넨다면 집 주인이 먼저여야 맞는데. 다른 이들에겐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연기에 대한 경력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앞에서 진심 없이 연기를 하는 건 내 쪽도 마찬가지인 입장이라 비난할 수도 없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나가고 싶을 뿐이다. 마음에 닿지도 않고 이해 불가능한 사연에 오래 매여 있고 싶지 않아. 이 프로그램을 계획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희정 언니였다. 원망스러웠지만, 어차피 일이니까 참아야지 어쩌겠나. 예전에도 여러 가지 일로 사고를 쳤을 적에도, 언니는 자신의 재량으로 무마시키거나 해결지은 일이 많았다. 고작 코디에 불과한 직원이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매니저들을 무능한 놈들로 만든 것이다. 이것도, 그런 사연들 중에 하나로 남겠지. 가능하다면, 이것으로 마지막이길. 난 더 이상, 그때처럼 철부지 어린애가 아니야.

 

 

회사와 내 개인 명의로, 기부금 전달식이 끝나고 사진촬영까지 마쳤다. 노모는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되풀이 했다. 물론, 호의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이야 사람이라면 당연한 것임에도, 내겐 그저 부담스러울 뿐이다.

 

 

“제대로 챙겨준 것도 없고 이거 미안해서 어째. 고생들 많았수.”

“아녜요 어머님. 와서 맛있는 거 많이 먹었는데, 선물을 사온다는 걸 잊었어요. 죄송해요. 담에 휴가 내서 한 번 더 들를게요. 얼마 안 있음 가을인데 따뜻하게 입고 지내시구요.”

 

 

나와는 달리, 희정 언니는 능숙하게 노모의 인사를 받고서 문 밖을 나섰다. 한시라도 떠나고 싶은 마음뿐인데, 언니는 그 반대다. 못내 아쉬운 듯 몇 번이고 뒤를 보면서 물러선 걸음을 하고 있다. 고향에 부모님 두고 떠나는 큰 딸처럼 말이다. 무거운 방송용 장비를 짊어진 스태프들보다도 뒤에 서서 꾸물대는 모습을 보니 답답해져서, 나도 모르게 신경질적으로 말이 튀어나와버렸다. 물론, 보는 눈이 많았기에 어느 정도 절제는 해야만 했다. 원래 성격대로 다 드러내 보인다면 또 이곳저곳에서 잡소리들이 튀어나오니까.

 

 

“뭐해 언니! 빨리 가자. 어두워지고 있어.”

“아, 미안해. 기다렸지?”

 

 

달이 완전히 떠오른 시간에 해바라기 밭이 보였다. 피곤해서 눈에 착각이라도 온 걸까. 주변에 밝은 전등 같은 것이 없는데, 그 주변만이 밝게 광채를 내고 있었다. 개똥벌레가 내뿜는 빛 같은 게 아니다. 마치 대낮처럼 확산되어 있는 빛이었다. 차를 타고 밖을 바라본 와중에 본 기이한 광경이었다. 어째서일까. 아무도 없는 장소인데 누군가가 그곳에 머무르기라도 하는듯한 착각이 들었다. 평소 같으면 신기해서라도 폰카로 찍었겠지만, 그마저도 귀찮았다. 매니저도 별 의식을 안했고 외주 제작사들도 눈여겨보지 않았는지 그냥 지나쳐가고 있다. 코디 언니도 피곤했는지 일찌감치 차 안에서 잠든 상태다. 일정을 다 소화하고 나니, 눈꺼풀이 무거워져 간다. 까짓 거, 이제 다 잊어버리면 된다. 그러면 끝이다. 희정 언니는 모르겠지만, 나는 두 번 다시 이곳에 올 일 따위 없으니까.

 

 

적어도, 몇 시간 전까지는 그렇게 믿었다. 부디,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이 악몽이기를 깨어나면 으레 그래왔던 것처럼 아무 일도 없기를. 지금 당장이라도 누군가 나를 깨워준다면 좋을텐데!

 

 

“희정언니? 매니저? 다들 어디간거야?”

 

 

눈을 뜬 곳은 타고 있던 밴 안쪽이었다. 그 점은 변함없었지만, 운전자나, 같이 타던 언니 모두들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있다. 문 밖에서 검붉은 빛줄기들이 침투해오고 있다. 아날로그 사진 작업을 할 때나 쓸법한 영사실의 기분 나쁜 어두침침하고 붉은 색. 은은하게 빛나던 달빛도 보이지 않는다. 가로등 불빛도 꺼져있는데다, 하늘에 떠있는 달마저 희무끄레하게 검붉은 빛을 띄고 있다. 시골 하늘에서 잘 보이던 별들도 없다. 도대체 이건 무슨 악몽인걸까. 짙은 불안감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다. 스마트폰의 신호도 들어오지 않았고 연락조차 닿지 않아 조그마한 벽돌로 있을 뿐이다.

 

 

웨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엥!

 

 

그때였다. 고막이 터질 것처럼 큰 기괴한 울음소리가 울렸다. 갑작스러움 울림에 심장이 아직도 벌렁거린다. 마치, 살쾡이나 어린아이의 울음소리 같았다. 근처에서 들리는 것이 아닌, 마치 산에서 울리는 듯한 메아리. 일정한 톤의 높이로 끊이지 않고 이어지다가 사방에서부터 연달아 퍼지며 내가 있는 장소로 모여드는 것처럼 들려왔다. 물이 가득찬 세숫대야에 배수구 마개를 뽑아낸 것처럼 휘몰아쳐 모여드는 소리였다. 그것이, 사방을 포위하며 좁혀들어 오고 있다는 것을. 착각일지 몰라도 계속 머물러 있으면 오히려 위험해질 것이란 직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검붉은 빛이 감도는 불길한 공간들뿐이었지만, 밖으로 나가는 것 말곤 방도가 없다.

 

 

“꺄아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밴의 바로 앞은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천길 낭떠러지였으니까. 게다가, 차체의 반이 언덕 너머에 걸쳐져 있는 아찔한 상황이다. 만약 앞자리에 앉아있었다면, 저 어둠 속으로 굴러 떨어졌을까? 조심스럽게 후방 쪽 문을 열고 가까스로 내리는데 성공했다. 시간을 지체하면 할수록 괴기스런 울음소리가 가까워진다. 차는 앞쪽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쳐 떨어졌다. 얼마나 높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떨어져 내린 뒤, 지면에 부딪히는 소리도 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옆 방향마저 끝없이 이어져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바람이 불었다. 고지대에서 불법한 칼날 같은 바람이다. 여름용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내겐, 감당하기 힘든 추위였다.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이렇게 생생하게 춥다는 걸 느낀다니. 게다가, 물안개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앞길마다 뿌옇게 끼어있어서 방향을 찾는 것도 버겁다.

 

 

“어떻게 해! 어떻게 해! 어떻게 하냐고!!”

 

 

울음소리는 이따금씩 마치 웃음소리처럼 들려오기도 했다. 중간 마다 여자아이 웃음소리 같은 것이 섞여져서 들려오기도 한다. 다리가 풀려서 일어설 수가 없다. 피부로 느낄 수 있을만치 그것들이 가까워져 오고 있다. 지금은, 왔던 길로 되돌아가는 수 밖에 없다. 어디까지나 본능적인 것이었지만, 이 직감이 틀린 적은 없다. 몇 번인가는, 실제로 죽을 고비를 넘긴 일도 있었다. 일어나야만 했다. 힐 따위를 신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곧바로 힐을 벗어서 내던지고 맨발로 내달렸다. 뒤를 돌아보면 무서운 것들이 쫓아오고 있지 않을까. 그런 공포 때문에 제 정신을 차리고 있기 어려웠다.

 

 

“싫어! 쫓아오지마!”

 

 

그저 악몽인데도, 어째서 이렇게 아프기까지 한 걸까. 위에 걸칠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분명히 지금 계절은 겨울이 아닌데. 뚝 떨어진 영하 기온이다. 이상해, 여름밤은 이렇게 춥지 않다. 얼어붙은 흙바닥 때문에 발이 부어올랐다. 중간 중간에 돌이 섞인 곳에 긁히거나 하면 상처가 나고 추위 때문에 쓰리다. 그렇게 아픔을 견디면서 계속 달리다가 어느 순간, 소리가 사라진 걸 알았다. 언제부터인지는 눈치 챌 수 없었다. 브레이크처럼 긴장감이 탁 풀리고 나서, 목 너머로 무언가가 용솟음 쳐 올라온다. 그대로 나는, 길바닥 위에 구토를 했다. 내가 대중에게 받는 인기도, 남들보다 월등한 미모 같은 것들도 지금 이 순간,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이 되었다. 정작, 혼자선 위급할 때 살아남는 방법조차 모른다. 언제나 남의 손을 빌리곤 해왔으니까. 게다가, 내 손엔 아무것도 쥘 수 있는 것이 없어. 말 그대로, 무방비 상태였다. 결국은, 길바닥에 떨어진 돌이라도 집어드는 수 밖에 없었다. 끝이 약간 뾰족하고 주먹으로 쥘 수 있을만한 크기. 차가운 공기 때문에 입김이 눈에 보인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기온이 더 떨어져 내려가는 느낌이다.

 

 

왜 언니는, 이런 곳을 오자고 한걸까? 지독할 정도로 원망스러웠다. 아무리 희정 언니라고 해도, 지금이라면 거침없이 욕설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의지할 수 있는건 그 언니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축 늘어질 것만 같았지만, 이런곳에서 그대로 잠들어버리기라도 한다면, 영영 깨어나지 못할 것이다. 지독할 정도로 생생한 감각들. 이제 알 수 있다. 이건, 꿈 따위가 아니야. 조금이라도 안전한 곳을 찾아야만 한다. 마을이 있는 쪽으로 가면 나아질지도 모른다.

 

 

“뭐야 여긴?”

 

 

분명히, 그곳엔 마을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처음에 기억하고 있던 그 마을의 모습이 아닌. 전혀, 다른 동네였다. 거의 쓰러져가는 옛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비슷했지만, 을씨년스러운 공기만 감도는데다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이 위치쯤에는 파출소와 우체국이 서로 붙어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저 낡은 폐가가 있을 뿐. 그 주변엔, 비슷비슷한 낡은 건물들이 이어져 있고 그 너머는 안개뿐이다. 길이 이어져 있는 걸 보아 이곳으로 더 들어가면 무언가 더 있을지 모른다.

 

 

“계세요?”

 

 

집 안 어디에도 불빛은 없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오랫동안 방치된 것처럼 보이는 집들 말고는 없다. 그 중에서, 한 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구멍뚫린 창호지가 보이는 마당식 집이었다. 어둡지는 않다. 검붉은 빛이 주변에 온통 가득하기에, 주변을 식별할 수 있다. 집 안에는, 몇 가지 집기들이나 물건들이 있다. 시골마을에서도 거의 사라져버린 아날로그 TV가 보인다.

 

 

“아무도 없어요?”

 

 

용기를 내어 소리를 크게 지르고 싶었지만, 도저히 목청이 터지지 않았다. 무대에 설 때엔 그렇게 풍부한 성량을 자랑하던 내가 기어들어가는 육성으로, 그것도 벌벌 떨면서 말하고 있다. 남 일이었다면 우습다고 넘겨버렸을까? 조여드는 불안감 때문에 무언가라도 확 하고 갑자기 나타나면 까무러칠 것 같았다. 눈을 질끈 감고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자. 그곳에는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신발이 한 켤레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조금 오래되어 보이는 단화. 맨발로 계속 추운 지면 위에 서있을 순 없다. 상표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고 낡아서 그런지 곳곳에 구멍이 조금씩 나있는 촌스러운 디자인의 신발.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곧장 신었다. 내 발 사이즈와 딱 맞아 떨어지는 크기다.

 

 

“히익!”

 

 

갑자기 TV가 켜졌다. 아무도 누르는 사람 따윈 없었다. 갑작스러운 소리 때문에 그대로 기절할 뻔도 했다. 당장이라도 그 TV를 내동댕이쳐서 부숴버리고 싶었지만, 억제하기로 했다. 방안의 집기는 단순했다. 이불 몇 개와 TV하나, 나무로 된 찬장 위의 그릇이 전부였다. 치이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신호 없는 화면만이 보여 졌다. 예전에 보았던 공포영화가 생각났다. 이렇게 계속 화면이 나오다가 우물가가 나오고 그 안에 있던 귀신이 화면 밖으로 튀어나오는 식의 내용이던 영화 말이다. 몸이 굳어 움직일 수 없었다. 이제 곧, TV에서 무서운 괴물이 튀어 나오지 않을까.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걱정하며 벌벌 떨었다. 그저, 시끄러운 TV소리만 방 안에 울릴 뿐인데, 괴물 울음소리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난 후, 한 30초 정도 지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다가 갑자기 꺼져버렸다. 이곳 주변엔 전봇대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켜지는 걸까. TV소리가 꺼짐과 동시에 주변의 붉은 빛들이 사라져간다. 불빛 하나 없는 심해 속처럼. 붉은 색으로 빛나던 달도 사라지고 기온은 계속해서 떨어져간다. 혹시나 싶어 더듬거리며 TV를 다시 키자 거짓말처럼 주변에 다시 붉은 빛들이 감돌기 시작했다.

 

TV는 30초동안 신호 없이 소음을 내다가 다시 꺼졌다. 기온 때문에라도, 무언가를 걸치고 있어야만 했다. 내동댕이쳐져 있던 낡은 이불을 걸치고 앞쪽을 묶어서 망토처럼 둘러멨다. 적어도 아까보다는 추운 것이 덜하다.

 

 

웨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엥

 

 

“꺄아악!!”

 

 

처음에 들었던 그 기괴한 메아리다. 고막이 터질 정도로 아주 가까운 곳에서 크게 울려왔다. 그것은, 울음소리, 혹은 여인이 광소하는 것처럼 들리곤 했다. 지진으로 생각될 커다란 진동도 함께 수반하고 있다. 금방이라도, 집이 무너질 기세라 뛰쳐나올 수 밖에 없었다. 폭삭 내려앉는 폐가들처럼, 내 이성도 내려앉아버릴 것 같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안개 속을 무작정 내달렸다. 만약 눈을 돌리게 되면, 그곳에 괴물이 입을 크게 벌리고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그저 단순히 공포영화를 찍는 장소라고 생각하면 좀 진정이 될까? 그 기괴한 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다. 밤벌레나 산새의 울음소리조차 전혀 들려오지 않는 싸늘한 길목들만이 눈앞에 나올 뿐이다. 그런 사실들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안개 속에서 정체모를 것들이 이빨을 갈며 이쪽을 노려보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 존재 따위는 어디에도 없는데 홀로, 피해의식만 더 깊어져 간다. 그렇다고 마음을 잠시 놓아버리면 또 어디에선가, 그 기괴한 소리가 맹수처럼 튀어나올 것 같아 긴장을 늦출 수도 없다. 숨을 한참 몰아쉬며 뛰어오니, 또 낮선 길목이 나왔다. 분명, 전까지는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또 인적 없는 외길만 보이고 있다. 뒤돌아보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마을의 흔적이 사라졌다. 신기루 따위는 아니야. 지금 내가 신은 단화와 둘러멘 이불이 그 증거다. 하지만 지금은, 건너편이 보이지 않는 붉은 안개만이 짙게 껴있을 뿐이다. 지진으로 다 내려앉은걸까? 긴장이 탁 풀리자, 이번에는 물줄기가 바닥에 고이는 것이 보인다. 아랫도리가 축축하게 젖어왔다, 수치스러움을 느낄 정신도 없이 차오르는 공포 때문에 울음이 터져나왔다.

 

 

 

“희정 언니, 희정언니. 으아아아아아앙 희정언니.”

 

 

 

주저앉아서 애처럼 희정 언니를 부르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안개를 헤쳐 나갈 배짱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그대로 주저앉았다. 차라리 기절한다면 나아질까. 시선이 조금씩 흐릿해질 찰나, 눈앞에서 작고 조그맣게 반짝이는 것들이 보였다. 가까이서 확인하니, 노랗고 밝은 광택을 띈 해바라기 꽃잎들이 지면을 수놓고 있었다.

 

 

그것들은, 헨젤과 그레텔이 길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떨어뜨렸던 빵조각과 돌멩이처럼 길을 만들고 있었다. 검붉은 밤 속에서 유일하게 밝은 광채를 내뿜고 있는 꽃의 잔해들은 겁에 질려있던 내게 안정을 주었다. 노모가 보여줬던 해바라기 사진처럼 포근한 빛깔이다.

 

 

이 길을 쭈욱 따라가면 안전한 곳에 도착하게 될까? 광채들을 밟아나가며 마을 어귀를 도는 중에, 안개 너머에서 밝게 빛나고 있는 능선이 등대처럼 빛나고 있는걸 보았다. 나는, 크고 사나운 개에게 쫓기는 꼬맹이처럼 꽃잎들이 일러주는 그 길로 내달렸다.

 

 

발을 내딛자, 주변이 변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놓인 해바라기가 보였다. 높다란 곳에서 하얀 구름이 떠있는 화창한 오후. 말갛게 해가 솟아있는 공간. 이따금씩 서늘한 바람이 불면서 해바라기 꽃잎들이 바람에 날린다. 매앰매앰- 매미울음 소리가 사방에서 울린다. 노파심에 뒤를 돌아보니, 붉은 안개가 사라져있었다. 지나온 곳과 마찬가지로 비현실적인 공간이었지만, 적어도 춥고 불안한 느낌은 전혀 없다. 오히려, 그대로 잠들어도 안심할 수 있을 편안한 공기가 감돈다.

 

 

“어?”

 

 

피로 때문에 잠깐 눈이 흐려서 살짝 비볐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가로수 길이 생겼다. 모세가 지팡이로 홍해를 가른 것처럼 트인 길 좌우에 해바라기들이 둘러서서 태양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향한다. 길바닥엔, 해바라기 꽃잎들이 또 다시 길을 만들었다. 밝은 광채를 내고 있는 그 꽃잎들은, 마치 내게 말을 걸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눈높이 아래에 있던 해바라기들이 지금은, 내 키보다 더 높은 곳에서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눈을 비비고 난 후에, 손을 보았다. 분명히 길쭉길쭉했을 내 손이 작아졌어. 어떻게 된 걸까? 몸이 작아진 것 같다. 입었던 옷이 헐렁해졌고 단화는 지나치게 크다. 몸에 두른 이불이 땅에 닿는다. 꽃잎 건너편에 호수가 보인다. 곧장, 다가가서 얼굴을 비춰보았다.

 

 

호수로 다가가 얼굴을 비추자 낮 익은 여자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9살 때의 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없애버린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선명하게 돌아오다니. 도대체, 나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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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정하지 않았고.... 퇴고없이 뼈대만 대충 올려보았습니다.

아직 완성된 것도 아니구요... 쓰면서도 스스로 느끼는건 아직은

필사를 더 하고 읽는 것에 더 주력해야만 하겠다는 느낌입니다.

자동으로 들여쓰기 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려주실분.... 흑흑

마미

30세가 코앞인 마법소녀(?)

3 댓글

라비리스

2013-04-04 20:38:23

음..... 주인공이 사고(?)로 의해 과거로 이동한건가요? 아직 모호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집중하기 좋은 소재들이 많네요. 건필하시길...

마드리갈

2013-04-05 22:58:43

섬찟하기도 하고 신비하기도 하고...

제 문학적 소양이 낮아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몇 번을 읽어도 난해해요.

들여쓰기를 하시려면, 에디터 화면에서 정렬 관련을 선택하시면 되어요. 숫자 또는 기호 붙이기 오른쪽의 화살표 되어 있는 거 보이시죠? 아니면 단축키 Tab으로도 할 수 있어요.

SiteOwner

2020-01-16 23:34:57

현실의 무게가 처음부터 크게 느껴지다가, 갑자기 전개된 반전에 꽤 놀랐습니다.

그러다가 마주하게 된 것이 어릴 때의 자신이라니...

뭔가 꿈에 나올 것 같군요. 그런 꿈을 꿀 수 있다면 선택하겠느냐 묻는다면 수락할 것 같지는 않겠습니다만...


잘 감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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