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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프터즈] Chapter 13: 어긋남. Episode 52

Papillon, 2021-04-04 12:00:00

조회 수
121

저벅-.

그저 작은 발소리였다. 특별히 위압적이지도, 마력이 담기지도 않은 평범한 발걸음에 불과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매일 듣게 되는 평범한 소리. 그런데 어째서일까?

저벅-!

그 소리가 들릴 때마다 빅토리아의 심장이 경고를 보내왔다.

지금 저것은, 문을 열고 들어온 저 사내는 너무나도 위험하다고.

두근-!

?

어째서야?’

?

심장이 소리를 낼 때마다 몸이 떨려왔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것만 같고, 손은 제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명백한 이상 현상.

그 기이한 감각의 이름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하던 그녀에게 한 단어가 떠올랐다.

공포.

한때 그녀가 너무나도 익숙해했던 감정. 사람이 파리만도 못하게 죽어가는, 빈민가에서는 실로 흔하디흔한 감정.

하지만 빅토리아는 한동안 이를 느끼지 못했었다.

사도가 된 이래 그녀가 두려워해야 할 리는 없었으니까.

?

젠장, 왜 이러는 거야?’

?

이해할 수 없는 신체의 반응을 제어하려고 할수록 빅토리아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눈앞의 사내는 그녀가 두려워해야 할 자가 아니다. 고작해야 범죄자. 사도는 물론이거니와, 마법사조차 아닌 존재. ‘빈민가의 왕이었다는 거창한 칭호를 달고 있을 뿐, 아무것도 아닌 사내였다.

당장 어제만 해도 그녀에게 너무나 손쉽게 패배한 이가 아니던가? 위협 따위는 도저히 될 리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

왜 이렇게 몸이 떨리는 거야?’

?

이래서야 마치.

?

천적이라도 만난 것 같지?”

?

타닥-!

생각하는 것보다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자신의 귓가에서 울린 목소리에 빅토리아는 놀란 토끼 같은 움직임으로 서둘러 상대와의 거리를 벌렸다.

?

어느새 이렇게 가까워진 거지?’

?

지나치게 겁을 먹고 있었기 때문일까? 상대는 그저 천천히 걸어왔을 뿐인데, 이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젠장!’

?

그 사실을 깨닫자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차가운 땀방울. 어떻게든 당황한 감정을 숨기고 싶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녀의 표정은 이를 숨기지 못했다.

?

큭큭.”

?

그런 그녀가 재미있기라도 한 것인지, 제스는 화상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를 보며 기괴하게 웃고 있었다.

?

여전히 재빠르구먼, 이 빌어먹을 꼬맹이 자식.”

?

공포에 빠져있는 빅토리아와는 다르게 어째서인지 녀석에게는 전혀 두려움이 느껴지질 않았다.

아니 오히려 느껴지는 건.

?

비웃음.’

?

분명 패배한 것은 그였을 터인데, 제스는 빅토리아를 확실하게 비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왠지 소름 끼칠 정도로 기분 나빴기에, 몸을 떠는 빅토리아. 이윽고 그녀는 빠르게 머리를 어떻게든 평정을 되찾고자 했다.

?

젠장, 휘말려서는 안 돼.’

?

냉정해져라.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속삭였다.

지금 상황은 명백히 녀석이 주도하고 있다. 그리고 녀석은 그녀와는 달리 경험 많은 범죄자. 녀석을 이대로 두었다가는 그녀만 불리해지리라.

?

침착해져라.’

?

그렇게 생각하려던 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그레고르가 알려준 호흡법이 떠올랐다.

고통과 긴장감을 완화해준다고 했던가?

?

휴우.”

?

그가 가르쳐준 대로 숨을 깊게 쉬자, 몸이 빠르게 진정되는 게 느껴졌다.

?

고맙다, 그레고르.’

?

지금은 떠난 친구에게 나중에 인형이라도 하나 선물로 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빅토리아는 눈앞의 상대에 다시 시선을 돌렸다.

?

……무슨 생각이야?”

?”

대체 왜 이곳으로 돌아왔냐고, 이 빌어먹을 자식아!”

?

여전히 남아있는 공포의 흔적 때문인지 떨리는 목소리. 이를 억제 하려고 노력하면서도, 빅토리아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말을 전했다. 공포와는 별개로 지금 그녀가 품은 의문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

대체 왜 이곳으로 온 거지?’

?

정상적이라면 그는 무슨 짓을 해도 그녀를 이길 수 없다. 이는 평범한 인간인 이상 뛰어넘을 수 없는 굴레다.

아니, 평범한 인간만 그러할까?

마법사도 그녀를 이길 순 없다. 마법사도, 마물도 심지어 다른 사도 역시 그녀를 상대로 승산을 장담치 못한다.

속도는 곧 힘.

그러니 압도적인 빠르기로 움직이는 존재는, 초월적인 강자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애초에 그녀를 맞추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싸울 것인가?

그런데 어째서…….

?

어째서 저렇게 여유롭지?’

?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제스에게는 조금의 급박함도 보이질 않았다. 공포는 물론이거니와 긴장 하나 눈에 띄질 않는다.

?

대체 어떻게?’

아까 말했잖냐, 애송아. 빚을 갚으러 왔다고.”

?

그녀가 그 수수께끼를 파고 들어가기 전에 상대의 대답이 돌아왔다.

?

?’

?

그 단어와 함께 떠올리는 어제의 풍경.

?

……죽이진 않았잖아?”

?

다른 범죄자들을 대할 때처럼, 그녀는 제스와 그 수하들을 상대로도 자비를 베풀었다.

그것만으로도 다른 장소였다면 원한을 사기에는 이상한 것이 없었겠지.

하지만 이곳은 빈민가. 죽이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자비롭다는 의미다.

?

너는 그렇지.”

?

그런 그녀의 말을 인정하는지, 제스는 히죽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

하지만 네년이 우리를 그 꼴로 만든 덕분에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나?!”

?

털썩-!

넝마랑 크게 다를 바가 없던 코스가 땅으로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제스의 상반신. 본래는 그저 평범한 폭력배의 몸이었던 그것은, 이제는 실로 기괴하게 변해있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상처였다. 그중 대부분은 화상 자국. 다만, 그 형태를 보아 불만이 아닌 각양각색의 화학 약품이 그를 태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후 눈에 들어온 것은 얼굴이었다.

누군가의 악취미였을까? 멀쩡하게 남은 제스의 피부 중, 그의 것은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남은 피부는 어제 보육원에 쳐들어온 범죄자들의 얼굴 가죽. 대다수는 이미 반발 작용으로 썩어가고 있었지만, 일부는 멀쩡한 걸 넘어 안구까지 이식되어 있었다.

?

대체 무슨 일이……!”

?

토할 것 같은 그 기괴한 모습에 빅토리아가 입을 가리는 것도 잠시.

제스는 보란 듯이 자신의 상체를 더욱 크게 펼쳤다.

?

크루거 놈들이 버려진 우리를 보고 아주 좋아하더군. 네년의 정보를 캐내야 하는 데 마침 쓸만한 게 들어왔다고 했나? 정말 심문이라면서 별 지랄을 다 하더라고. 어차피 범죄자에다 빈민이니까 뭘 해도 상관없다고 말이야.”

…….”

그 덕에 내 부하 놈들은 모두 죽었다. 모두 내 살가죽이 되었지. 모두 네년 때문에!”

그건 내 탓이 아니야!”

아니, 네년 탓이다!”

?

빅토리아의 부정에 제스는 광인처럼 목소리를 드높였다. 그와 함께 찢어지며 떨어져나오는 가죽들. 그 안에서는 살아있는 구더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

네년이 나를 이 꼴로 만들었다.”

?

증오 그리고 광기.

그 두 가지 칠흑의 마음이, 한 점이 되어 제스의 양 눈에서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인간을 초월한 악의.

그 감정에 빅토리아가 질려서 뒷걸음질 치려던 순간.

?

[갸하하하하! 완전히 돌아버렸군, 파트너.]

?

그녀를 붙잡기라도 하듯, 파트너가 크게 웃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타콰.

인간이 아닌 이 신은, 조금도 겁먹지 않은 채 떠벌리며 말을 이어갔다.

?

[아무래도 다시 교육을 해줘야겠어, 파트너. 뭐 상황이야 조금 안 되긴 했지만, 그래도 일단 제압하고는 봐야겠지.]

?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은 장난기 그 자체. 하지만 전투에서 그의 조언은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기에 평소라면 이를 믿고 따랐을 터인데. 어째서인지 빅토리아는 싸워서는 안 된다고 여기고 있었다.

?

뭔가 꺼림칙해.’

?

상대가 분노와 광기에 빠진 건 알겠다. 자신을 증오하고 있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저 남자가, 빈민가의 왕이었던 남자가 고작 그런 사실에 냉정을 잃을 사내인가? 사실은 무언가 함정이라도 준비한 것이 아닐까?

어쩌면 도망치는 것이 옳은 답이 아닐까?

잠시간의 망설임과 시작된 뒷걸음질.

?

[파트너?]

?

자신의 파트너가 의아해할 때까지 이어지던 그녀의 뒷걸음질은 금세 막히고 말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건, 차갑고도 단단한 감촉.

아이린 수도원.

그녀가 살아온 곳이자, 가족들이 머무는 장소가 그곳에 있었다.

?

어쩔 수 없나…….”

?

다른 곳이라면 도망칠 수 있었다. 이 불안감에 몸을 맡기고 미래를 기약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만큼은 결코 그럴 수 없다.

?

아직 집과 가족을 버릴 정도는 아니라서 말이야.’

강림!”

?

외침과 함께 얼어붙는 세계. 추위는 만상을 침식하며 동토를 넓혔다.

본래라면 그 극한의 대지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며 넓어져야 하건만,

?

강림.”

?

세계가 불타올랐다.

?

?!”

?

추위를 몰아내는 것처럼 대기가 끓어올랐다. 돌은 녹아내리고 풀은 재가 되어 흩날렸다.

지상에 태양이 떨어졌다면 이러할까?

생명이라고는 살아갈 수 없는, 극한의 열기. 그 지옥과 같은 불길의 중심에는 붉은 갑주를 입은 사내가 서 있었다.

?

말했지, 빚을 갚으러 왔다고?”

?

제스, 지금은 사도가 된 사내.

그 사내를 중심으로 세상에 지옥이 강림했다.

?

?

*** ***

?

?

세상에 혼돈이 강림했다.

그 외에는 지금의 풍경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모든 것을 뒤덮은 것은 마치 진흙처럼 흘러넘치는 어둠. 그 어둠은 얼핏 칠흑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무수히 많은 색이 섞인 구정물처럼도 보였다.

만물이되 하나, 하나이자 만물.

각자의 영역이 붕괴하고 하나로 뒤섞여 나가는 세계. 그 세계의 중심에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크기와 대략적인 형태를 보아 인간을 닮았다. 하지만 가까이서 본다면 누구도 그것을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으리라.

그것은 평평했다.

초상화 속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녀석은 평평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똑같았다.

평평하든 입체든, 옆에서 본다면 달라야 하건만 녀석은 내 시선에 따라 움직이는 간판과 같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기괴한 건.

?

얼굴이 없어.’

?

얼굴이 없는 건 아니다, 입도 있고 얼굴을 이루는 부속 역시 존재한다.

하지만 도저히 그 얼굴을 읽을 수 없다.

어느 때는 무한에 가까운 얼굴이 떠오르고, 어떨 때는 아무것도 떠오르질 않는다.

?

빌어먹을.’

?

무섭다. 나는 녀석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려워만 한다면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터.

?

대화라니 무슨 소리입니까?”

?

억지로 태연한 척을 가장하면서 나는 눈앞에 나타난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

좋지 않아.’

?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강림할 수 없다.

그것이 너무나도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여차하면 변신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건 폭주한 빅토리아와 싸울 때도 있었던 일이니까.

?

하지만 이건 뭐지?’

?

녀석이 등장한 이래 이드라 님의 반응이 없다. 단순히 침묵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연결이 강제로 끊어진 것 같은 상태다.

?

대체 저 자식은 뭐야?’

?

뭐하는 녀석이기에 신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 가능하지? 아니, 그 이전에…….

?

왜 옛 군주랑 대화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지?’

?

녀석에게서 느껴지는 기묘한 위압감. 그것은 내가 이드라 님과 만날 때나, 기타 옛 군주의 목소리를 영접할 때 느끼던 것과 같았다.

?

사도인가? 아니면 옛 군주의 화신체?’

?

둘 다 아니다.

오래지 않아 답이 떠올랐다. 어느 쪽도 사실이 될 수 없다. 화신체라면 이곳에 이미 신기를 가진 이가 있다는 의미인데, 이곳에는 나와 에스텔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사도라고 보자니……지금 느껴지는 감각은 사도가 흉내 낼 수 있는 것을 가볍게 넘어섰다.

?

젠장.’

?

답이 보이질 않아.

정보가 부족했다. 사도야행에 참가하긴 했지만 나는 고작해야 평범한 둔갑술사. 신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했다.

?

[후후후. 생각보다 더 긴장하는군. 옆의 아가씨에게서 내 얘기를 듣지 못했나 보지?]

?”

?

내 행동이 재미있는 듯이 낄낄거리며 웃는 그림자. 그 모습이 살짝 기분이 나쁠 법도 했거늘, 이어진 녀석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

에스텔을 이미 만나보았다고?’

에스텔?”

?

혹시나 상대방의 말이 거짓일까 돌아보니 에스텔이 시선을 피한다.

그 말은 나에게는 비밀로 녀석과 만나보았다는 사실.

?

잠깐 그렇다면?’

?

최근 에스텔이 보이던 이상할 정도로 조급한 반응. 처음에는 단순히 사랑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설마 저 녀석을 만났기 때문일까?’

그 사실을 깨닫자, 머리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동시에 표정은 차갑게 식었다.

?

에스텔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호오, 인제 와서 반말인가? 역시 제법 감정적이로군.]

대답해!”

[하하하하! 재미있군! 더 마음에 들어.]

?

점점 분노로 가득 차 가는 나의 목소리. 하지만 그런 나의 목소리는 장난으로만 들리는지, 녀석의 웃음소리는 더욱 커져만 갔다.

?

젠장.’

?

기회만 주어진다면 절대 가만두지 않으리라. 저 녀석만큼은 반드시!

쌓여가는 분노. 그 분노가 정점에 달하기 직전.

?

[, 걱정은 말도록. 그 아가씨에게 한 것은 그저 권유였을 뿐이니까.]

?

녀석은 허망할 정도로 간단하게 얘기해줬다.

?

권유?”

[그래, 아주 간단한 권유지.]

?

혹시 몰라 반응을 확인해보니, 에스텔은 녀석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

대체 뭘 권유한 거지?”

[그리 대단한 건 아니야. 자네에게 할 것과 똑같은 거지. 원하는 걸 주는 것, 그저 그 대가로 내 부탁을 가끔 들어달라는 거야.]

부탁?”

[그래, 부탁. 그리 어려운 건 아니지 않은가?]

?

녀석은 사람 좋게 웃어 보이지만 글쎄.

?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은 대가만큼 더 무서운 것이 있을까?’

?

차라리 정해진 것이라면 금전으로 갚기라도 하건만, 저건 지나칠 정도로 두려웠다.

?

좀 더 알아봐야겠어.’

에스텔에게 뭘 주겠다고 했지?”

[오호. 자네게 아닌 에스텔의 것을 묻는 것인가? 확실히 자네에게도 그녀가 큰 존재인 건 맞나보군.]

질문에나 대답해.”

[미안하지만 말할 수 없네. 그것은 비밀 유지를 위해 필수거든. 하지만 자네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말해줄 수 있네.]

그게 뭐지?”

?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

나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인가? 어린 시절에 꾼 꿈과도 다른 무언가가?

하지만 뒤이어 녀석에게서 나온 건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

[.]

?”

?

순간 할 말을 잃었다.

?

힘이라고?”

?

저건 너무나 단순한 소원이 아닌가? 꼭 어린애들이나 읽는 영웅전기의 마왕이나 할 법한 이야기다.

?

웃기는 소리 하고 있,”

[더 정확하게는 무력감을 느끼지 않을 힘이겠지.]

?

하지만 비웃으려던 것도 잠시, 녀석이 이어서 한 말에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

[굉장히 오랫동안 그대는 무력감에 시달려왔더군. 그래서 지금도 그걸 너무나 두려워해.]

…….”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 일념 하나로 지금까지 싸워왔더군. 무력한 자기 자신과 적대하면서 말이야.]

?

마치 나 자신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말. 그 발언에 살짝 구역질까지 느끼기 전에 녀석은 내 앞으로 들어왔다.

이윽고 뻗어지는 손.

?

[, 나와 손을 잡지, 그레고르 군. 자네에게는 밝은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다네.]

?

녀석은 내가 어떻게 행동할 줄 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

내가 녀석의 손을 잡을 듯, 움직이자 그림자에 새겨진 미소는 더욱더 짙어졌다. 하지만…….

-!

이건 예기치 못한 것일까? 녀석의 당황한 목소리가 내 귓전을 때렸다.

?

[뭐 하는 거지?]

거절하는 거다. 네 녀석의 손을 잡을 필요가 없으니까.]

?

지나칠 정도로 평온한 목소리.

이미 답이 나왔기 때문일까? 긴장감과 공포심이 묻어져 나오던 내 목소리는 이번만큼은 고요하고 차분했다.

?

예전이었다면 바로 받아들였겠지.’

?

사도가 된 이후 겪은 일들이 없었다면 두말할 것도 없이 놈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녀석이 말한 대로 무력감이야말로 내가 가장 싫어하던 것이었으니까.

?

하지만 이제는 달라.’

?

이드라 님과 만나 힘을 얻었다.

오드리와 대화해 노력할 계기를 얻었다.

에스텔과 함께 싸우며 살아가는 자세를 배웠다.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블레어 그 자식을 만나서 힘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보았다.

그걸 깨달은 이상 돌아갈 일은 없어.’

설령 사도의 힘을 잃게 된다고 해도 나는 이미 성장한 이후이리라.

그렇기에 나는 간단하게 녀석의 제안에 거절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여전히 걱정스러운 것들은 남아있었지만.

?

그냥 물러날까?’

?

내 거절이 예상 밖이었을까?

녀석은 지금까지도 계속 내가 쳐낸 손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녀석 역시 이런 굴욕은 처음이었던 걸까?

그렇게 침묵을 지키던 녀석은 한참이 지나서야 답을 건넸다.

?

[과연 왜 이드라 님께서 당신을 선택했는지 알겠군.]

?

그와 함께 그림자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미소.

?

[제법 강한 거절 의사였네. 자네에게는 제안하지 않도록 하지.]

?

녀석의 호의적인 말에 나 역시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

이걸로 다시 안전해진……,’

?

하지만.

콰직-!

존중이 있었던 것도 잠시. 나를 존중하겠다고 말한 녀석은 이윽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 사지를 조여오고 있었다.

?

위험해!’

?

이 상태에서는 사도는 물론 무술도 쓸 수 없을 터. 설령 동물로 변신한다고 해도 족쇄의 상태를 보아 벗어날 수는 없으리라.

?

젠장! 거짓말인가?’

?

나는 어떻게든 몸부림치고 있었지만, 녀석은 미동도 보이질 않았다.

?

[자네에게 더는 권유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네. 그건 존중하지.]

?

차갑게 속삭이는 녀석의 목소리. 그 목소리는 서서히 움직이며 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내 몸을 조여오는 어둠의 촉수. 그것에 짓눌려 내가 의식을 잃으려는 순간,

?

[, 아가씨 그대는 제안을 받아들이겠나?]

?

녀석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들려왔다.

Papillon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4 댓글

마드리갈

2021-04-04 17:08:33

돌아온 제스는 빈민가의 왕이라는 타이틀을 잃었지만 사도의 지위를 얻었군요.

대체 무슨 신이 그를 사도로 만든 것일까요. 일단 이골로냑은 아닌 것 같지만, 그 신의 존재가 누가 되었든 그렇게 반갑게 느껴질 것 같지는 않네요. 더 끔찍한 상상도 순간 했는데 일단 지금은 보류하려구요. 조금 전에 컴퓨터의 이상으로 살짝 공포스러운 상황이 벌어졌다 보니...


에스텔이 만났던 의문의 존재는 이제 그레고르의 인식범위 안에도 들어왔네요.

그리고 신사적인 태도와는 다르게 내면은 꽤 강압적이고 폭력적...역시 감언이설의 뒤에는 무서운 게 있어요.

Papillon

2021-04-11 11:42:52

제스가 사도의 힘을 얻은 데는 비밀이 있습니다. 이 비밀에 대한 자세한 건 이번 Act 후반에 밝혀집니다. 힌트를 드리자면, 그림자는 에스텔에게 사도의 힘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의 힘을 얻기 위해서는 옛 군주와의 계약이 필요합니다. 과연 그는 어떻게 힘을 주겠다고 한 걸까요?


그림자의 정체는 비밀입니다만, 그는 좋은 존재가 아닙니다. 위험성으로 따지면 블레어 이상이에요.

SiteOwner

2021-04-17 23:01:44

참 이상하게도, 뭔가 불길한 일이 닥쳐오면 이상징후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게 무슨 뜻인지를 미리 알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니...

빅토리아도 그래서 갑자기 몸에서 느껴지는 것이 있는 것인가 봅니다. 그리고 문제의 제스가 재등장...

참 무서운 신이 많습니다. 어쩌자고 제스같은 이를 사도로 만들었는지...


감언이설을 조심해야 합니다. 물론 처음부터 적대적인 자도 위험하지만, 감언이설로 접근하는 자도 위험합니다. 특히 신뢰가 배신으로 바뀌는 그때가 가장 끔찍합니다. 그게 읽혀서 더욱 무섭게 느껴집니다.

Papillon

2021-04-25 12:16:04

이상하게 나쁜 일은 연달아 오곤 하지요. 그래서 가끔 미신이 진짜로 맞는게 아닌가 생각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제스가 사도가 된 과정에는 좀 복잡한 내막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 이상은 스포일러이니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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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산라이츄 2021-03-16 127
469

[괴담수사대] Prologue-XI. 백면단도

| 소설 3
국내산라이츄 2021-03-16 130
468

[시프터즈] Chapter13: 어긋남. Episode 49

| 소설 4
Papillon 2021-03-14 125
467

[시프터즈] Chapter12: 질투. Episode 48

| 소설 4
Papillon 2021-03-08 135
466

[단편] 오지 않은 봄

| 소설 4
시어하트어택 2021-03-07 129
465

[괴담수사대] 외전 15. 겐소사마 전설

| 소설 3
국내산라이츄 2021-03-02 133
464

[괴담수사대] 외전 14. 저주받은 단도

| 소설 3
국내산라이츄 2021-03-01 124
463

[시프터즈] Chapter12: 질투. Episode 47

| 소설 4
Papillon 2021-02-28 127
462

[초능력자 H] 100화 - 한 조각 맞춰진 퍼즐

| 소설 4
시어하트어택 2021-02-25 120
461

[초능력자 H] 99화 - 차디찬 공기(4)

| 소설 4
시어하트어택 2021-02-21 118
460

[시프터즈] Chapter12: 질투. Episode 46

| 소설 4
Papillon 2021-02-21 123
459

[초능력자 H] 98화 - 차디찬 공기(3)

| 소설 4
시어하트어택 2021-02-18 124
458

[초능력자 H] 97화 - 차디찬 공기(2)

| 소설 4
시어하트어택 2021-02-14 126
457

[시프터즈] Chapter11: 천사. Episode 45

| 소설 4
Papillon 2021-02-14 132
456

[괴담수사대] X-8. 인생의 가치

| 소설 3
국내산라이츄 2021-02-14 127
455

[초능력자 H] 96화 - 차디찬 공기(1)

| 소설 4
시어하트어택 2021-02-11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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