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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죽여. 파울리 녀석이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호텔 2층 레스토랑 한쪽의 테이블. 몇 명의 남녀가 모여앉아 있고, 푸른 조끼를 입은 남자 옆에 앉은 푸른 머리의 이레시아인이 핀잔을 준다.
“안 그래도 요즘 일이 없어서 모처럼 얻은 기회였는데...”
“아무튼, 콘라트 그 망할 자식...”
또 다른 남자가 푸념 섞인 목소리로 말한다.
“마피아 녀석이 여행업자 행세를 하고 돈을 긁어모으고 다니다 보니까 아주 눈에 뵈는 게 없었지. 조금이라도 방해될 것 같으면 협박하고 다녔고. 그뿐이야? 녀석이 워낙에 헤쳐먹은 게 많았고. 아직 물증이 나온 게 없어서, 정황증거 뿐이기는 하지만, 이름 모를 밀무역상하고 커넥션까지 강하게 있었지.”
콘라트의 이야기가 나오자 다들 목에서 피를 토하듯 콘라트를 비토한다.
“하여튼 그 콘라트 녀석, 어떤 녀석이 그렇게 만들어 줬는지는 몰라도, 잘 죽었다고 기뻐한 게 하루도 안 됐는데, 하필 파울리 같은 녀석이 죄다 가져가 버린 건 뭐람.”
“그러게...”
다들 한숨을 푹 내뱉는 것을 본 푸른 조끼를 입은 남자는 다시 목에 힘을 준다.
“아무튼, 그 녀석한테서 찾아와야 해. 우리의 정당한 몫을!”
“하지만 쉽지 않을 거야.”
짧은 금발의 눈화장을 짙게 한 여자가 미켈을 스윽 흘겨보더니, 이윽고 미켈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리고는 목소리를 팍 낮추고 말한다.
“파울리의 동업자들, 무시해서는 안 될 실력자들이야.”
“응? 동업자들?”
꽤 조그맣게 말했는데도, 테이블에 모인 사람들의 귀가 휘둥그레진다.
“그래.”
“당신이 어떻게 그렇게 잘 알지? 그 녀석에게 동업자가 있다는 걸.”
“왜냐고?”
여자는 또 한 번 목소리를 줄인다. 둘러앉은 사람들이 그 여자에게 더욱 가까이 귀를 기울인다. 여자는 이제 또다시 목소리를 줄여 말한다. 마치 속삭이는 것처럼.
“나도 한때 파울리하고 같이 일해 봤거든.”
“정말이야?”
“그럼. 나 말고도 적어도 한 명 이상의 동업자가 있는 것 같았어. 내가 직접 만난 적이 없어서 자세히는 모르지만, 채굴업자였던 것 같았어.”
“채... 채굴업자라면...”
“역시나, 녀석, 태양석을 노리고 있었어!”
자신들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탄식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려는 걸 겨우 입을 틀어막는다. 푸른 조끼를 입은 남자가 살짝 돌아보니, 미켈은 일행과 함께 식사를 다 하고 레스토랑을 나서고 있다. 그는 곧바로 다시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향해 돌아앉으며, 주먹을 꽉 쥔다.
“어쨌든, 여기 모인 모두, 정신 바짝 차리라고. 알았어?”
남자의 주위에 모인 모두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자,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지? 파울리 녀석이 태양석을 확보하는 건 막아야 하잖아.”
“일단은...”
남자가 잠시 먼 곳을 보더니, 잠시 후 뭔가 좋은 생각이 난 듯, 한 손가락을 펴고 모인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한다.
“일단은 녀석에게 ‘경고’를 해 봐야지. 그 경고의 효과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침식사를 마치자, 시간은 어느새 아침 8시가 되었다. 출발 시간인 아침 9시까지는 한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다. 일행은 자기들마다의 방식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조제와 외제니는 자기들끼리 남모르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고, 시저는 혼자서 창밖을 가만히 내다보고 있다. 현애가 보니 세훈은 자기 혼자 어디로 가 버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마침 창가 쪽에 자판기가 보인다. 음료수나 하나 뽑아서 마셔야겠다. 그리고 바깥 구경이나 하자... 그렇게 생각하며 자판기로 가서 막 음료수를 뽑으려는데...
“여기 있었네.”
“누... 누구?”
등뒤에서 들리는 목소리. 돌아보니...
미켈이 서 있다. 팔짱을 가볍게 끼고, 웃어 보이며.
“뭐야, 여기에 왜...”
“이름이... 남궁현애였지?”
“맞아. 내가 어제 이름을 말해 줬었나...?”
“아니, 말해 주지는 않았지.”
“그래. 말한다는 걸 깜박했지. 혹시 자료를 거기... 뭐냐, 그 회사에서 받은 거야?”
“그래. 내가 가이드로 결정되자마자 여행사에서 자료를 다 넘겨받았지.”
“그래?”
미켈은 들고 있는 서류가방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낸다. 눈에 띄는 제목은 다름아닌 ‘추천서’. 간단한 몇 마디가 쓰여 있고, 밑에는 찻차이의 이름과 서명이 적혀 있다.
“역시, 이분께 한마디 하니까, 바로 되더라.”
“하긴, 그렇게 한밤중에 결정된다는 게 쉬운 건 아닌데.”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며 밖을 본다. 호텔 자체가 다른 곳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건물들 너머로 멀리 호수가 희미하게 보인다.
“오늘... 저 호수에 가는 거였지, 아마?”
“맞아. 테르미니호와 호수 사원은 여기 오는 관광객이라면 한 번씩 둘러보는 필수 코스지.”
이미 검색해서 이미지를 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 미켈이 그렇게 말하니 상상력이 더욱더 자극된다. 금방이라도 가서, 호수를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이 자꾸만 든다!
“거기 호숫가에, 근사한 쇼핑몰도 있어. 어떤 사람들은 그 쇼핑몰이 보기 거슬린다고도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렇게까지 거슬리는 건 아냐. 보기 좋으면 좋았지.”
“그래? 보통 그런 일 하는 사람들은 그런 상업시설이 유적 근처에 있으면 싫다고 그러지 않아?”
“아니야. 그건 편견일 뿐이지.”
“그래...”
미켈의 말을 들으니 현애는 실제로 보면 어떤 광경인지 더욱 궁금해진다. 편견을 깰 정도의 광경이라면 어떨지 기대가 될 수밖에 없다.
“기대해도 될까? 당신이 자신 있게 말하니까 말이야.”
“기대하라고. 후회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게 여행에 대한 기대로 부풀어 가는데...
“호오, 여기 있었군.”
낯선, 그리고 처음 듣는 남자의 목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온다.
“설마 설마 하고 와 봤는데, 역시나 예상은 틀리지 않았어.”
보인다. 계단 아래쪽에 남자 한 명이 몸을 반쯤 숨기고서 미켈을 노려다 보고 있다. 그리고 남자의 시선이, 미켈 뒤쪽에 있는 현애에게도 향하고 있다. 남자는 현애에게도 적대적인 시선을 숨기지 않는다. 그 시선이 매우 거슬린다.
“누구냐, 너.”
현애가 그 남자를 돌아보며 열이 서서히 오르는 투로 말한다.
“남이 즐겁게 노는 데 끼어드는 거 아니야.”
“내가 방해라도 한 건가?”
남자는 계단을 서서히 오른다. 이윽고, 가죽 재킷을 입은 금발의 남자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난다.
“아, 중요한 시간에 방해한 건 사과하지. 하지만 내가 받은 방해에 비하면 지금의 방해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봐.”
남자는 미켈을 음산한 눈으로 바라본다. 그 눈길이, 현애에게도 잠깐 스친다.
“미켈 파울리, 그리고... 이름 모를 동업자인가?”
“말 좀 똑바로 하시지.”
현애가 불쾌함을 가득 담아 금발의 남자를 노려보며 말한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그건 이제 차차 알게 되겠지.”
금발의 남자는 지지 않겠다는 듯 말한다.
“어찌 됐든 간에, 나는 너희들이 뺏어간 정당한 몫을 되찾아야겠다. 지금 바로!”
“호오, 그러시겠다.”
미켈은 남자의 적대적인 모습을 보고도 빤히 그를 노려다보며 말한다.
“개리 매쿨이었지. 스코프 컴퍼니에서 늘 시시콜콜한 잡일이나 도맡아 했었고.”
“너 이 자식...”
매쿨이라고 불린 남자는 미켈의 입에서 말이 다 나오자마자, 주먹을 불끈 쥔다.
“그 정당한 몫이라는 게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상대해 주지.”
“좋다, 덤벼라!”
“그 패기, 어디까지 갈지 궁금하군.”
미켈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자, 매쿨은 더욱더 열이 받은 듯 소리 지른다.
“아으, 이 자식들! 좋아, 보여 주마! 나한테 무릎을 꿇어도 후회하지 마라!”
현애는 겉으로는 짐짓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별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고 매쿨이 어떻게 나올지 지켜본다. 하지만 속으로는 마구 끓어오른다.
별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한다. 어쩌다가 이렇게 아무 상관도 없는 데에 휘말려서 이 모양인가... 고생은 저번주까지 실컷 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저 녀석은 또 뭐라고 말하며 공격을 해 올까. 또 무슨 초능력을 사용해서 나하고 옆의 미켈을 곤경에 빠뜨릴 것인가? 혹시 별것도 아닌 능력인데 집요하게 괴롭혀서 시간을 끌려는 건 아닌가? 아니면 어마어마한 능력으로 공포에 빠뜨릴 것인가?
아니, 그것보다도, 모처럼 좀 쉬고, 즐겁게 충전하려고 온 여행인데, 어제에 이어 오늘도 싸움으로 시작되면 또 어쩌자는 말인가. 솔직히 어제 공항에 내리자마자 상대한 콘라트 같은 경우는 그냥 불량배가 시비를 걸어서 혼내 줘야겠거니 하고 생각한 것이었고, 미켈은 오해를 푸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아침부터 이렇게 싸움을 걸어오다니... 꽃길을 걷다가 갑자기 구멍 속으로 떨어지는 기분이다. 그리고 예감이 안 좋다. 이런 싸움이 9박 10일 내내 이어질 것 같다는 그리 좋지 못한 예감이, 벌써부터 머릿속을 확 사로잡는다. 이러다가 여행 끝나고 돌아와서도 싸우는 거 아닌가? 이런 생각까지 든다.
“뭐, 좋아. 어차피 이렇게 됐으니...”
“거기 너!”
매쿨이, 중얼거리던 현애를 가리킨다.
“내가 왜?”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매쿨의 목소리에서 독기가 팍팍 묻어나온다. 거기에다가 묘한 손동작도 함께. 매쿨이 오른손 검지만 펴고서, 빙빙 돌린다.
“우선은 저 여자부터 처리하지. 그다음은 파울리 네놈의 차례다!”
매쿨의 외침이 현애의 귀를 때리는 그때.
“읏...”
어질거린다, 갑자기.
머리가 핑핑 돈다. 마치 머릿속에 벌레나 새 같은 게 들어가서 이리저리 머릿속을 휘젓는 것 같다. 거기에다가 눈앞도 핑핑거리며 흐느적거리기 시작한다. 시선을 한 군데에 못 두겠다. 이 상태로는.
“이건 도대체...”
핑핑 돌아가는 머리, 거기에 휘청거리는 두 발. 한순간에 흐려진 눈앞까지. 휭휭 돌아가는 머릿속에, 점점 서 있기가 힘들어진다. 숨도 조금씩 쉬기가 힘들어진다. 몸의 무게중심이 점점 한쪽으로 쏠리고 있다. 당장 어디에라도 기대 있어야, 이 어질거리는 게 조금이라도 줄어들 것 같다!
“하... 하...”
다행이다. 어떻게든 벽에 기댔다. 바닥에 꼴사납게 쓰러진다든가 하는 일은 막았다. 하지만 여전히 이 어지럼증은 마찬가지로 현애의 머릿속과 온몸을 괴롭히고 있다. 급히 벽에 손을 기대 본다. 벽에 손을 기대니까 당장 몸을 가누지 못하는 건 어떻게든 막을 수 있지만, 대신에 머리가 더욱 지끈거린다. 눈을 지끈 감아도, 이 불쾌한 어지러움은 쉬이 없어지지 않는다.
“자, 어떠냐, 파울리?”
매쿨은 미켈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한껏 도발의 수위를 높인디.
“생각 잘 해라! 네가 현명한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네 녀석도 옆의 동업자처럼 만들어 줄 테니!”
“호오, 그러셔?”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마드리갈
2021-04-30 17:10:32
문제의 콘라트가 정말 보통 인물이 아니었군요.
드라이버를 살상도구로 쓰는 외로운 늑대라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그 차원을 뛰어넘는 큰손이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포악한 인물이기도 했군요. 그래서 그가 만인의 공적이 되어 있을법하네요.
문제의 태양석이라는 광물, 혹시 죠죠의 기묘한 모험 2부에 나오는 에이쟈의 적석같은 물건일까요?
콘라트와 미켈 이야기를 하던 사람들이 결국 미켈과 현애가 동행중인 것을 기다리고 있다 그 앞에 나타났네요.
그리고 현애가 동업자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네요. 또 오해...
매쿨의 능력은 정말 고약하군요. 갑자기 귀가 근질근질해지는 듯한...
시어하트어택
2021-05-02 21:22:13
콘라트의 역할은 원래 저렇게 단역으로 설정되었기는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등장인물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그가 테르미니에 끼쳐 왔던 악영향도 드러나게 될 겁니다, 아마도.
태양석에 관한 건 스토리가 좀 진행되면 알 수 있을 겁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저것이 '키 아이템'이라는 것이겠죠.
SiteOwner
2021-05-07 20:40:50
공공의 적이군요, 그 콘라트라는 자는. 게다가 이상한 소문도 많이 있고...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는 말이 여기서도 증명되는 건가 봅니다. 그 콘라트가 없어지자 비난의 화살은 문제의 가이드 미켈 파울리를 향하는 것을 보니.
역시 타이틀의 힘은 강력합니다. 제대로 얻은 타이틀은 위력을 발휘하고, 잘못 얻어진 타이틀은 자신을 위태롭게...
그나저나 현애는 언제 자유롭게 될까요...안타깝습니다. 또 이렇게 원하지 않는 상황에 휘말리니까요.시어하트어택
2021-05-09 21:58:45
아마 3부가 끝나기까지, 저 오해는 아마 계속 이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나마 길어봐야 열흘 안에 저 상황은 모두 마무리될 테니 그게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