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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 49분, 카사 데 토르나도 호텔 1층 로비. 여기저기 단체 여행객, 가족 단위 여행객, 또는 혼자나 두 명이서 온 여행객들로 북적인다. 이곳이 5성급 호텔이기도 하고, 종업원들과 로봇들이 수시로 지나다니며 살피고 있어서 시끌벅적하다든가, 눈에 띄게 소란을 피운다든가 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활기찬 분위기다.
로비 한쪽, 카페 옆에는 현애와 세훈을 위시한 일행이 모여서 가이드북과 팸플릿을 보고 있고, 가이드 미켈은 시작에 앞서 인원을 점검하고, 물으로 목을 축인다.
미켈이 시계를 본다. 8시 50분 정각이다.
“네, 여러분, 안녕하세요?”
미켈이 밝게 인사하자, 일행도 따라서 인사한다.
“이제 첫날이군요. 다들 기대되시죠?”
다들 긍정의 뜻으로 추임새를 넣어 대답한다. 미켈은 일행의 대답에 더 기분이 좋았는지, 한껏 표정이 밝아진다.
“예, 그 기대,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이번 테르미니 패키지 여행을 함께 하게 된 가이드, 미켈 파울리라고 합니다.”
미켈이 간단히 자기소개를 마치자, 일행은 박수로 답한다. 미켈도 더욱 신났는지, 좀 더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자, 여러분! 오늘 갈 곳이 어딘지 아시나요?”
“호수 사원이죠!”
미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현애가 곧바로 대답한다.
“잘 대답하셨습니다! 테르미니에 오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하는 곳이죠. 맞습니까?”
“네!”
“한 가지만 묻죠. 여러분은, 고대의 사원 유적 같은 게 도시 한가운데 있으면, 어떻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거야 간단하죠.”
바로 대답하는 사람은 니라차의 어머니 라차야.
“그런 유적들은 최대한 원래 있던 모습에 가깝게 있어야, 본연의 아름다움이 더 빛나지 않을까요?”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른다. 묘한 분위기가, 일행과 미켈의 사이에 흐른다. 미켈의 얼굴에 나타난 묘한 웃음.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앞에 선 현애부터 시작해서 세훈, 조제, 외제니, 니라차의 얼굴이 온통 궁금증으로 채워진다.
“물론, 일리가 있습니다.”
완전히 다른 한 마디.
그 한 마디만으로도, 일행의 머리를 뭔가 강하게 치고 지나가는 느낌이다. 보통의 유적 여행 가이드에게서 저런 말은 나오지도 않을 텐데!
“많은 분들이 그러죠. 유적은 원래 있던 대로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제 주변의 가이드들도 그렇게들 말합니다.”
다들 가만히 들을 뿐이다. 미켈의 입에서는, 과연 무슨 말이 나올 것인가?
“하지만, 모든 것은 바뀝니다. 이 도시도, 여기 있는 저도, 여러분도, 예외는 아니죠. 저는 오히려, 유적은 시대에 맞게 그 풍경도 바뀌는 게 맞다고 봅니다. 왜 제가 이렇게 말하는지, 이제부터 따라와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자, 가시죠.”
“왔나?”
테르미니의 어느 주택가에 있는 한 저택의 방. 책장에는 책이 가득 꽂혀 있고, 한쪽에는 각양각색의 용기에 담긴 다양한 색깔의 액채들이 담겨 있다. 몇몇 용기에는 라벨도 붙었다. 그 한가운데의 테이블 앞에 앉은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가, 문이 열린 걸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문 너머에는 검은 셔츠를 입은 갈색 단발머리의 여자가 서 있다.
“네, 저 왔습니다.”
“그래, 라자. 장주원 박사 밑에서 고생이 많았군.”
“아닙니다. 오히려 알아낸 게 많았습니다.”
“그래. 일단은 좀 쉬면서 내 명령이 있을 때까지 기다리겠나?”
“음...”
라자는 잠시 뜸을 들이고 입을 연다.
“쉴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물건’을 보스에게 갖다 드리려면, 제가 뭔가를 더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 태양석 말인가? 고맙군. 그럼 일단은 특전대를 라자 자네가 좀 관리해야 할 것 같네.”
“정말입니까?”
남자의 말이 뜻밖이었는지, 라자는 남자에게 반문한다.
“지금 태양석을 찾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하는데, 채굴 업체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차라리 저를 그쪽으로 보내 주시면...”
“물론, 자네 말도 일리가 있어.”
하지만, 라자가 뭐라고 해 보려고 하기도 전에, 정장을 입은 남자는 라자의 말을 일축한다.
“하지만 태양석을 노리는 자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어떤 녀석들인지도, 내가 다 알아 놨지. 그중에 하나는, 내가 잘 아는 녀석이다. 내게 큰 굴욕감을 안겼던...!”
남자는 분함이 밀려오는지, 주먹을 꽉 쥔다. 어느새 그의 목소리도 격앙되어 있다.
“그 녀석, 잊지 못하지...!”
“누군지 대략 알 것 같습니다.”
라자 역시 굳은 표정을 하고 대답한다.
“태양석이 그런 자들의 손에 들어가는 일은 없어야겠지요.”
“바로 그것이다. 내가 자네에게 특전대 관리 임무를 맡긴 이유이기도 하지. 자네의 능력은, 그런 자들을 관리하는 데에는 더없이 좋으니까.”
“하지만 저는 그저, 좀비들을 조종하는 능력일 뿐입니다만...”
“그래서 좋다고 하는 거다. 알겠나?”
“아, 알겠습니다...”
라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일단은 정장을 입은 남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테르미니호의 아침은 은은하면서도 밝게 빛난다. 동쪽에서 비치는 아침 햇빛은 호수의 수면과 호숫가의 시가지, 그리고 호수의 랜드마크인 ‘호수 사원’을 모두 밝게 비쳐 주고 있다. 아침의 호수 사원의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다. 황토색 벽돌로 쌓아 올린 사원은 축구장 반쪽 정도의 면적에, 10층 정도의 높이로, 전체적으로는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고 여기저기 복잡한 문양과 인물, 괴물 등의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레시아인들에 의하면 이 사원이 지어질 당시에는 호숫가에 지어서 지상에서 오고 갈 수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 호수의 수면이 높아지면서 육로로는 접근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고 한다. 여기저기 금이 가고, 물과 닿은 곳에는 수생 식물이 자라서 그야말로 전형적인 버려진 오래된 건물의 모습이지만, 이렇게 아침에 햇빛을 받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황금빛에 가까운 연황토색으로 변해서, 마치 온 건물이 황금으로 이루어지기라도 한 듯 찬란히 빛난다.
호숫가에서 가까운 주차장. 큰 버스가 몇 대 주차되어 있고, 버스마다 적게는 열 명, 많게는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내리고 있다. 여기저기서 내리는 관광객들로 주차장과 그 주변은 활기찬 분위기를 띤다. 일행에 따라 나이대도 다양하고, 차림새도 각양각색이지만, 이들이 향하는 곳은 단 하나, 호수 사원이다. 무엇이 그렇게 사람들을 이끄는 건지, 아니면 그 사원 자체에 뭔가 사람들을 홀리는 힘이라도 있는 건지, 주차장에 내리자마자 분위기부터가 달라진다. 지금 버스에서 내리는 현애 일행도 마찬가지다.
버스에서 가장 먼저 내리는 사람은 시저. 계단을 밟자마자, 건물들 너머로 보이는 호수가 눈에 들어온다. 아직 사원은 보이지 않지만, 시저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딱 벌리며 말한다.
“오! 완전 끌리는데.”
시저의 목소리가 떨린다.
“팸플릿으로 보니까 완전히 황금색이던데, 유적에 무슨 꿀이라도 발라 둔 거 아니야?”
“하하하, 반은 맞고 반은 틀렸죠.”
뒤따라 내리는 미켈이 웃으며 시저의 말을 받아친다.
“물론 건물에 꿀을 발라 놨다든가 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거기에 비견될 수 있을 정도로, 여러분을 끌리는 큰 매력이 있는 건 사실이죠. 그건, 내리면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이윽고, 조제와 외제니를 마지막으로 일행이 모두 버스에서 내린다. 미켈은 기다렸다는 듯, 목청을 최대한 뽑고서는, 일행을 돌아보며 입을 연다.
“자, 여러분! 환영합니다, 테르미니호와 호수 사원에 오신 것을!”
일행이 모두 환호와 박수를 보내자, 미켈은 괜히 우쭐했는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네, 그렇게 여러분이 호응해 주시니까, 저도 여러분께 뭔가 좀 잘 해 드려야겠죠? 그래서, 저만 알고 있는 길로 여러분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파울리 씨만 알고 있는 길이라니요?”
듣고 있던 니라차의 아버지 찻차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의아하다는 듯 반문한다.
“아무리 그런 숨겨진 길이라고 해도, 파울리 씨만 알고 있을 리는 없을 텐데요...”
“물론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좀 있죠. 특히 이런 관광객이 많이 몰리는 곳에서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곳이니만큼, 숨겨진 길도 참 많죠. 그리고 제가 추천하는 길도 그 중 하나입니다. 자, 따라와 보시죠!”
미켈은 이렇게 말하며, 일행의 앞에 앞장서서 일행을 안내한다.
한편 그 시간, 근처의 골목길. 사람 3명 정도가 지나갈 만한 정도의 폭의 좁고 벽돌로 포장된 길을 중심으로, 기념품 가게들과 식당, 그리고 사람들이 사는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아직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골목길은 벌써부터 사람들이 채우기 시작하고 있다.
그 한가운데, 한 사람이 은밀히 전화를 받고 있다.
“도착했습니다... 파울리 녀석이 지나갈 것으로 예상되는 길목에 있습니다.”
빨간색 캡을 쓰고 기하학적 그림이 그려진 흰 티셔츠, 딱 달라붙은 청바지를 입고, 스니커즈 운동화를 신은 한 여자가 서 있다. 거기에 좀 큰 배낭까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전형적인 관광객의 차림이지만, 몰래 전화를 거는 모습에서부터 최대한 숨기려는 목소리, 거기에다가 수시로 주위를 살피는 눈치까지. 이런 행태를 보면 관광객의 모습은 아니다.
“네... 말씀하신 대로, 녀석에게 본때를 보여 드리죠. 기대하십시오.”
모자를 쓴 여자는 잔뜩 벼르는 듯 주먹을 꽉 쥐며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서는 자꾸만 골목길 한쪽을 흘끗흘끗 본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주변 가게들의 기념품을 둘러보는 척하며 슬금슬금 기회만을 살핀다.
한편 그 시간.
“그런데 말이야, 이 길이 뭐가 특별하다기에 가이드가 이리로 데려온 거지?”
골목길에 막 들어선 시저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얼핏 봐서는, 그냥 어디에나 있을 법한 골목길 아닌가...”
“에이, 아무리 그래도 가이드가 추천한 건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옆에서 현애가 핀잔주듯 말한다.
“우리 가이드가 뭘 많이 아는 것 같아. 한번 따라가 보자고.”
“아, 그래...”
미켈도 그걸 들었는지, 천천히 걷다가 별안간 멈추더니 일행을 돌아본다.
“저는 여러분을 실망시켜 드리지 않습니다. 감히 말씀드리는데, 제가 안내해 드리는 이 길은 단연 최고입니다!”
미켈의 단호한 어조에, 시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서, 일행과 발걸음을 같이한다.
그렇게 어느 정도 발걸음을 옮기자, 시저의 눈에도 들어온다.
좁은 골목길 너머로 얼핏 보이는 호수와 사원. 발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호수와 사원이 조금씩 크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어? 파울리 씨? 어디 갔지?”
일행의 시야에서, 미켈이 사라졌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마드리갈
2021-05-06 14:24:53
전작의 라자가 여기서도 등장하고 있네요.
역시 뭔가 큰 소동이 벌어질 게 예상되고 있어요.
이상한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보내기 마련이죠.
관광객으로 보이지만 묘하게 뭔가를 숨기는 듯 주변에 대해 과도하게 경계하는 듯한 그 여자가 위험인물일 수 있겠다는 건 짐작이 되고 있어요. 게다가 필요 이상으로 말이 많은 사람도 그러하죠. 가이드 미켈 파울리도 절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이렇게 드러나고. 대체 미켈의 본심이 뭔지 다시금 의심되네요.
시어하트어택
2021-05-09 22:19:35
당장은 아니어도, 라자는 반드시 나옵니다. 그리고 그때는 테르미니가 완전히 뒤집어졌을 때겠지요.
그 이상한 여자가 누구인지는 다음 화에 드러나게 됩니다.
SiteOwner
2021-05-07 20:41:43
여행업 관련 자격증과 실무경험이 있는 제가 보기에는, 미켈 파울리같은 사람은 그다지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사실 여행이라는 것은 즐기는 데에 주목적이 있고 가이드는 그것을 도우는 사람입니다. 현지에서 알아두면 유용한 정보, 이를테면 유럽에서는 무료화장실의 위치 등을 알고 있다든지 현지 식당사정에 정통하다든지 하는. 이런 정보는 인터넷에 별로 없다 보니 결국 현지에서 일하는 가이드의 도움이 필요한데 미켈같이 처음부터 저렇게 나서는 사람에 대한 제 평가는 높을 수가 없습니다.
같은 곳을 가서 보더라도 그 여행은 모두 각자의 여행일텐데, 불안하군요.시어하트어택
2021-05-09 22:20:54
보통의 여행 가이드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자기 주장이 강한 캐릭터죠, 미켈은. 앞으로 스토리가 진행되면 나오겠지만, 그 성격이 미켈을 승리로 이끌 수도, 나락으로 빠뜨릴 수도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