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맡아도 좋은 냄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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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끝을 간지럽히는 향을 음미하며 제스는 투구 아래에서 미소 지었다.
지금 코의 점막을 지나 그의 뇌에 스며드는 향은 고기, 그것도 최상 품질의 고기가 익어가는 냄새다.
적당히 식욕을 자극하는, 그 어떤 향수조차 뛰어넘는 지고의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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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도 제법 기분이 좋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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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향을 조금이라도 더 즐기기 위해 깊게 숨을 몰아쉬며, 그는 실로 즐겁다는 듯이 이 냄새의 제공자에게 나지막이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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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소리, 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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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제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적의로 가득 찬 고함이 주변을 뒤흔들었다.
마치 상처 입은 성대를 억지로 쥐어짜서 울리는 껄끄러운 목소리. 그 음성을 흘리는 이는, 처참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상태로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에스텔. 그녀의 현 상태는 살아있는 넝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가장 심각한 것은 팔과 다리. 불의 흡혈귀와 싸우면서 몇 번이나 불길에 익어버린 그 가녀린 팔다리는 더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었다.
화상으로 인해 일그러진 피부. 그 위를 가득 채운 말라붙은 진물 자국과 물집. 열로 인해 변성돼 제대로 움직이기 힘든 근육까지……. 그 상태로 저렇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 제스가 보기에는 제법 경이로웠다.
물론 그 처참한 상태에 제스가 동정심을 느꼈냐고 묻는다면 오히려 역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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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상판과 몸통만 멀쩡하면 그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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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차하면 멀쩡한 여인의 팔다리를 자르고 개처럼 기르는 일도 허다한 빈민가에서, 저런 상처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즐기기 위해 중요한 것은 그저 몸통과 얼굴뿐.
실제로 팔다리와는 대조적으로 그 두 부위에는 눈에 띌 정도로 커다란 상처는 없었다. 흠집이 생긴다고 해도 고작해야 돈을 조금만 들이면 회복할 수 있는 상처들뿐. 대신에 옷만큼은 기묘할 정도로 많이 상해있는 상태였는데, 그 파손된 부위가 주로 가슴과 국부라는 걸 생각하면 명백한 의도가 엿보일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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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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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만든 광경을 충분히 즐기면서 제스의 입가에는 더욱 미소가 짙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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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소리라? 하하하. 개소리 좋지. 그럼 나 같은 개새끼 밑에서 앙앙거릴 네년은 암캐가 되는 거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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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낄낄거리며 손가락을 휘저을 때마다 사람의 형상을 한 불꽃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불의 흡혈귀.
이 ‘사도’라는 힘을 얻은 이후 죽은 그의 부하들과 융합한 소환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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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계속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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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도는 그리 빠르지도 강하지도 않아 본래라면 에스텔이 쉽게 상대할 수 있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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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자리에 고정되어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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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에스텔의 뒤에는 그녀가 지켜야만 하는 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보육원에서 데려온 아이들.
소각기 위에 매달려 있는 그것들은 제스에게 실로 복덩이와 같았다.
녀석들은 빅토리아를 압박을 제물이 되었고, 에스텔을 이곳에 끌어온 미끼가 되었으며, 그의 능력을 시험할 수 있는 실험체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지금. 그것들은 인질 역할을 너무나도 잘 수행했다.
소각기. 연금술사들이 만든 그 장치는 약간의 불을 흡수해, 강철조차 녹여버리는 업화로 뒤바꿔버린다.
그리고 불의 흡혈귀는 살아있는 불꽃 그 자체.
만약 에스텔이 자리를 피해 공격이 소각기에 닿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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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그 자리에 애새끼들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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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에 남는 건 한때 애새끼였을 잿더미에 불과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 서서 그저 공격과 방어만을 반복해야 한다는 얘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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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쪽이든 답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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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태까지 수없이 일어났던 그 상황을 보면서 제스는 다시 낄낄거렸다.
불의 흡혈귀는 불이다.
그리고 불은 방어든 공격이든 접촉하는 것들을 불사른다.
또 한 번 에스텔의 팔다리에 화상이 늘어나고, 불의 흡혈귀들은 베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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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아쉽긴 하지만 나쁘진 않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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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복되는 형국을 즐기면서는 제스는 조용히 현재 상황을 자평했다.
고문, 조교, 조련……. 그런 ‘작업’에 익숙하던 그가 보기에도 현재 에스텔의상태는 제법 만족스러웠다.
단지 아쉬운 것은 소위 ‘손맛’을 볼 수 없다는 것 정도였지만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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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하다고 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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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크루거 가의 비밀 감옥 겸 실험실에 잡혀있었을 때, 그에게 힘을 준 존재는 이렇게 말했다.
‘네 녀석은 선택받지 못했다’라고.
대체 무엇에게 선택받지 못한 건지, 아니 애초에 녀석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느껴지는 건 무언가가 어긋나 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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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녀석들이랑 화염 분사, 그리고 열 감지 말고는 늘지를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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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그 셋은 상성이 맞아서 그럭저럭 이용할 수 있지만, 한계가 있는 건 여전했다.
그중에서도 치명적인 건 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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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절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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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 출력과 최소 출력. 그 둘을 제외하고 그가 낼 수 있는 위력은 없었다.
무인이나 전사라면 이를 굉장히 불편하게 여겼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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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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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스는 둘 다 아닌 폭력배였고, 폭력배에게 힘은 그저 휘두를 수 있다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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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계집도 죽일뻔한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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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그 괴물 같은 계집.
그 계집을 상대하기 위한 기술은 다행히도 효과를 발휘해 녀석을 빈사 상태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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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쪽도 아직 마음에 꺾이진 않았지만, 그리 오래 걸리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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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 때문에 장작이 되는 걸 반복하면, 그런 계집아이의 정신 따위는 쉽게 깨져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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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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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빠져있자니 어느덧 제스의 귀에 그가 원하던 울림이 다가왔다.
시선을 조금 위로 드는 것만으로 보이는 것은, 직격을 맞았는지 오른쪽 어깨를 움켜쥔 에스텔의 상태
제법 고통스러운지, 입가에서 거친 숨소리를 토해내는 그녀의 모습에 제스는 자신의 아랫도리가 뜨거워지는 감각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야 지금 당장에라도 여기서 옷을 벗기고 거사를 치르고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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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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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쓰고 버릴 물건이라면 모를까, 이번에 그가 노리는 것은 그의 곁을 지킬 암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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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하게 조련한 다음에 즐기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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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가 다음 일정을 생각하며 움직이려는 순간.
콰아아아앙-!
허공에서 폭음이 울렸다.
처음에는 겨우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소리가 제법 긴 간격을 두고 들려왔다.
분명 이상하긴 하지만 그뿐. 먼 곳에서 나는 일이라 생각해 다시 본래의 일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시작이었다.
쾅-! 쾅-! 콰광-! 쾅-!
마치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의 뜀박질처럼, 그 소리는 점점 가깝게, 더 빠른 간격으로 울리고 있었다.
?
“뭐야 저거?”
?
그 소리의 끝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기이한 빛을 두른 정체불명의 비행체.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제스가 눈을 가늘게 뜬 순간.
콰아아아아아앙-!
폭음은 충돌이 되어 제스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
“커억!”
?
여태까지 범접 불능이던 사도의 갑주가 장난감이 된 것처럼, 몸이 으스러지는 통증이 폐를 짓눌렀다.
?
‘위험해.’
?
충격 때문에 하늘을 날면서도 제스는 어떻게든 정신을 다잡으려고 했으나,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직후 다시 이어지는 충격.
그 터무니없는 충격의 연쇄 속에서 제스는 서서히 의식을 잃었다.
?
?
*** ***
?
?
끝났다.
직격을 맞았을 때,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에스텔은 그렇게 판단했다.
이대로면 패배한다. 그리고 더는 움직일 수 없게 된 순간, 저 기분 나쁜 자가 무슨 짓을 할지는 예언가가 아니더라도 쉽게 추리할 수 있었다.
?
‘포기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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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이었다면 이렇게 된 이상 그냥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굴욕 속에서 노예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기사로서 저승의 강을 건넜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
‘그레고르.’
?
그녀가 마음에 둔 이.
그에게는 아직 들어야만 하는 답이 있었다.
?
‘죽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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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이 타는 것처럼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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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을 듣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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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팔이 망가졌는지 검을 들어 올릴 수 없었다.
?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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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왼팔로 검을 옮겨 들고, 억지로 자세를 잡았다.
그가. 그레고르가 올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각오를 굳힌 그녀가 다가오는 제스를 향해 일격을 준비하던 순간, 굉음과 함께 그녀가 기다리던 존재가 강림했다.
그레고르, 그가 이곳에 왔다.
?
“하하하하.”
?
어째서인지 웃음이 나왔다.
분명 통증 때문에 말하는 것조차 힘든데, 마치 미쳐버린 것처럼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에 살짝 의문을 느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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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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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녀의 안에 있는 기사의 측면이 그렇게 그녀에게 속삭이자, 표정이 살짝 굳어갔다.
맞는 말이다. 기사로서 생각하면 지금 그녀는 기뻐해서는 안 된다.
기사는 지켜지는 이가 아닌 지키는 이.
동료가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위험한 장소에 왔다는 사실에 즐거움을 느껴서는 안 된다.
분명, 그렇게 알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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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걸 어찌하란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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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뻤다. 자신을 위해 와준 그레고르가 미쳐버릴 듯이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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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에스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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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 버린 적을 확인하기보다는, 다친 자신의 안부를 묻는 게 기뻤다.
?
‘과연, 이래서 기사 흉내라고 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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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넘어 굴욕감마저 느꼈던 그 발언에 동조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
‘무언가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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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을 나온 이래, 어째서인지 자신을 방해하던 미혹이란 이름의 안개. 그 건너편에 있는 무언가가 살짝 보일 것 같다고 여길 무렵.
화르르륵-!
뜨거운 무언가가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
“저건?”
?
그것은 단순히 불길이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거대했다.
그것은 차라리 탑이었다.
하늘과 땅을 그대로 잇는, 드높고 가는 홍염의 탑.
그르르륵-!
그 탑을 중심으로 수십 명의 불의 흡혈귀가 일어나 군세를 이루었다. 지금까지 단순한 무뢰배 무리처럼 서 있던 것과는 달리 그 형상은 제대로 된 대열이었다.
그들이 경배하는 것은 오직 한 사람.
불의 흡혈귀들이 도열한 열의 끝에는 붉은 갑주와 검은 투구를 쓴 제스가 있었다.
?
“이거 운이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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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충격으로부터 회복되었는지, 겉으로 보기에는 그는 멀쩡해 보였다. 아니, 그것을 넘어서…….
?
‘희열을 느끼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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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있고, 그 꼬마 계집도 있으니 하나 정도는 더 있을 것 같았는데…, 설마 제 발로 걸어들어올 줄이야!”
?
마치 금괴가 자신에게 걸어 들어온 것을 보는 것처럼, 그의 몸짓은 살짝 부자연스러워 보일 정도로 즐거움에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
“너한테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지.”
?
조금 전까지의 모습이 거짓이기라도 한 것처럼 제스는 태도를 바꿔 차가운 목소리로 제안을 건넸다.
?
“너 내 것이 되어라.”
?
?
*** ***
?
?
‘뭔 개소리야?’
?
마치 연인에게 구애하듯 열렬히 손을 뻗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투구 아래에서 눈살을 찌푸렸다.
?
‘저게 통할 거라 여기는 건가?’
?
정작 자기가 좋다고 구애(그런 걸 구애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하던 에스텔은 이 꼴로 만들어놓은 주제에?
지금 에스텔의 상태는 빈말로라도 정상이라고 볼 수 없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후유증이나 흉터 없이 치료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
?
‘융합 변이가 있어서 다행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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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실험해 본 결과, 융합 변이를 한 에스텔은 분리될 때 ‘최선’의 상태로 돌아왔다.
조건부이긴 하지만 사도에 버금가는 회복력.
그렇기에 에스텔이 조금 위험해질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순찰에 동의한 거지만, 그래도 역시 그녀가 이렇게 된 모습을 보는 건 기분이 좋을 수 없었다.
?
“내 친구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그런 제안을 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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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나는 누가 들어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한 적의를 담아, 나는 제스에게 으르렁거리듯 답했다.
?
“친구?”
?
그 말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는 듯이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는 제스.
갑옷을 입은 상태이긴 하지만, 근육과 지방이 가득한 거구의 사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몸짓에 나는 살짝 몸서리를 쳤다.
?
“그렇군.”
?
이윽고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제스.
슬슬 그 몸짓을 보고 있기 버거운 내가 다른 곳으로 생각을 돌리려던 찰나, 녀석의 입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
“네 녀석 그 심부름꾼이었어.”
“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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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당황했기 때문일까? 녀석의 말을 확증이라도 해주는 것처럼 너무 큰 반응을 보여 버렸다.
?
“역시 그렇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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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라는 뜻이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 그 확신에 찬 태도에 나는 더는 부정해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어떻게 알았지?”
“글쎄 그게 중요한가? 지금 중요한 건 너와 내가 거래할 것이 생겼다는 거지.”
“거래할 것?”
“그래, 그 계집을 원하는 거잖아?”
?
녀석은 시장 바닥에 널린 물건을 대하듯 턱짓으로 에스텔을 가리켰다.
?
“이런 터무니없는 힘을 가지고도 심부름꾼 짓이나 하고 있다니. 아무래도 그 계집을 꾀려고 그러고 있었나 보지?”
“뭐?”
?
저건 또 뭔 헛소리야?
?
“하긴 저 계집이 꽤 좋은 계집이긴 하지. 나도 살면서 저런 건 처음 보니까 말이야.”
?
그 말과 함께 에스텔을 훑어보기라도 하듯 위아래로 움직이는 녀석의 머리.
그 역겨운 모습 때문인지 에스텔이 몸을 떨었지만, 녀석은 이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
“마치 에스텔이 네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군.”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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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에 무언가 이상한 구석이라도 있던 것일까? 녀석은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보였다.
?
“이 세상은 강한 놈이 모든 걸 갖는다. 그리고 너랑 나는 저런 범속한 인간 따위보다 훨씬 강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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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말한 녀석은 장난치듯 주변의 쓰레기들을 향해 손가락질했고, 그럴 때마다 거대한 폐기물이 터무니없는 열기에 흔적조차 남긴 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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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 어떤 마법사가 이런 걸 할 수 있지? 귀족은 이런 게 가능한가? 아니, 불가능해! 나나 너 같은 존재야말로 선택받은 자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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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림 하나 없이 올곧고 환희에 찬 목소리. 그 모습이 꼭 내게 녀석이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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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역시 거물이군.”
“그렇지?”
“그래, 거물이야. 크고 엿 같은 쓰레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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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어를 만난 이래 녀석이 최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 생각을 여기서 바꾸게 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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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거절하겠다는 건가?”
“당연한 소리를. 너 같은 쓰레기 밑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
“그건 곤란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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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투구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잊기라도 한 것일까? 녀석은 겸연쩍은 듯 잠시 머리를 긁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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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새끼는 별로 조련하고 싶지 않은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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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협상 결렬을 알리는 선언과 함께, 수십 개의 그림자가 유성우처럼 쓰레기장을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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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설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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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급했듯이 제스는 사실 자신의 옛 군주와 계약을 나누지 못했습니다. 그가 힘을 쓸 수 있는 건 그림자가 모종의 조처를 한 신기를 주었기 때문이죠.
본디 화염의 옛 군주인 크투가는 제스와는 파장이 전혀 맞지 않습니다. 현재까지 등장인물 중 그와 가장 파장이 잘 맞는 건 에스텔이에요. 만약에 에스텔이 제스 대신에 이 신기를 얻었으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싸웠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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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캐릭터 중 메인 대적자로 등장하는 보어헤스 백작의 외모는 세 캐릭터를 베이스로 삼았습니다.
전체적인 체형은 “Fate/Grand Order”에 등장하는 랜서 레오니다스(이미지 링크 #)에 가깝습니다.
분위기나 인상에 대해서는 “겐간 아슈라”의 주인공 토키타 오마(이미지 링크 #)를 닮았습니다. 살짝 야성적이고 강한 미남이라는 느낌이죠.
다만 눈매가 가늘다는 것이 특징인데, 눈매에 한해서는 세 번째 캐릭터인 “블리치”의 이치마루 긴(이미지 링크 #)를 닮았습니다. 그래서 그레고르는 살짝 야비해 보인다고 생각하죠.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4 댓글
SiteOwner
2021-05-09 14:50:16
이렇게 5월 들어서 처음으로 연재되는 시프터즈의 두 회차 중 처음인 56화를 읽고 있습니다.
간만에 읽게 되어서 매우 반갑습니다. 그리고 재개에 감사드립니다.
에스텔은 저렇게 빈사의 상태에 있고, 제스는 어떻게 그녀를 농락할까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있고, 역시 목불인견의 상태라는 게 보입니다. 역시 저런 상황을 즐기는 제스는 전혀 정상이 아닙니다. 그런 제스의 욕구가 충족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에스텔은 자신을 옥죄는군요. 기사로서의 정신을 유지하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만, 인간은 자력본원의 존재인 동시에 타력본원인 존재라는 점을 애써 부정하려는 데에서는 많은 연민의 감정을 억제할 수 없습니다. 제가 그레고르라면 이에 대해 이야기를 해 줄 것 같은데...
정말 그레고르의 생각처럼, 블레어도 충분히 악독하기 짝이 없지만 제스는 그 블레어를 능가합니다. 갑자기 식은땀이 납니다.
소개해 주신 이미지를 보니 보어헤스 백작의 전체적인 체형은 강하고 아름다운 영웅적인 미장부 그 자체군요. 그런데 역시 눈매가 저래서는 아주 좋은 인상을 받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서양에서 동양인의 눈을 갖고 인종차별의 소재로 잘 삼는 것도 그래서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Papillon
2021-05-16 12:08:19
비록 소여 백작의 저주에서 벗어나긴 했지만, 그동안 쌓아온 가치관이 한 번에 변하지는 않죠. 이번 경험을 통해 그녀가 거기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제스와 블레어 둘 다 악인이지만 결이 완전히 다르죠. 굳이 비유하자면 블레어는 이해가 가질 않는 괴물이지만, 제스는 사고 패턴은 이해가 가지만,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악인이라는 점이겠지요.
보어헤스 백작은 눈을 제외하고는 미장부 그 자체로 그레고르가 살짝 질투를 느끼기도 했지요. 다만 정신은 뒤틀려 있었는데, 그레고르와의 전투 이후 조금 변화가 있을 예정입니다.
마드리갈
2021-05-15 15:39:04
시작부터 끔찍하네요. 그리고 저렇게 바로 1초 뒤를 보장할 수 없는 에스텔에 성욕을 느끼고 있는 제스는 정말 변태...
현실의 온갖 성범죄 사례에도 저런 변태성욕자가 있다고 하죠. 확실히 속이 끓을 정도로 불쾌한 상태네요. 역시 제스의 욕구는 충족되어서 안될 거예요.
그 제스에 일격을 가하는 것으로 드디어 그레고르가 등장했네요. 정말 다행이예요.
그리고, 에스텔이 그레고르에게 느끼는 감정, 이해할 수 있어요. 저 정도로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힘들었을 때 오빠가 군복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고, 오빠가 여러모로 도와준 덕분에 혼란기의 제가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으니까요. 융합변이는 신체적인 능력 말고도 그레고르와 에스텔의 자아도 발전시키는 것 같아서 그게 정말 다행이예요.
제스에 그런 내막이 있었군요. 그림자가 한 모종의 조치로...그 그림자란, 에스텔에게 접근했던 그 그림자인 것이죠?
확실히 보어헤스 백작의 모델이 되는 체형과 얼굴은 묘하게 안 맞네요. 화려한 타이틀을 빼고 보면 뭔가 야비하게 보이는 이미지,,,
Papillon
2021-05-16 12:10:12
블레어와는 결이 다르긴 하지만 제스는 구역질 나는 악인이죠. 그의 미래는 그리 좋지 않을 예정입니다.
제스에게 접근했던 그림자는 에스텔에게 접근했던 그림자가 맞습니다. 그는 사도야행 자체를 이용하기 위한 모종의 일을 꾸미고 있지요.
보어헤스 백작은 눈매 때문에 뭔가 미묘한 느낌을 주는 인물이죠. 그것만 없으면 완벽한 미장부이긴 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