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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프터즈] Chapter 14: 불꽃. Episode 57

Papillon, 2021-05-09 12:05:05

조회 수
160

아직 하늘이 검게 물들지도 못했건만, 빈민가 한구석의 지상에는 불의 비가 유성우라도 된 것처럼 내렸다.

처음에 들리는 것은 천둥과 같은 한 줄기의 굉음. 그리고 그 소리가 한 번 울릴 때마다 사람의 형상을 한 불꽃이 터져나가 무지갯빛 환염에게 잡아 먹힌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것은 보랏빛 갑주를 입은 한 사람의 사도.

마치 양 떼에 뛰어든 한 마리 늑대처럼, 자색의 사도는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불의 흡혈귀를 무로 돌려놓고 있었다.

그 모습은 실로 경이로운 광경이지만, 그것을 가까운 곳에서 보고 있는 에스텔의 표정은 가면 갈수록 어두워져만 갔다.

?

상황이 좋지 않아.’

?

언뜻 보기에는 그레고르가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도 불의 흡혈귀를 상대로 그레고르는 절대적인 우세를 보였다.

그러나 진짜 적은 불의 흡혈귀 따위가 아니다.

제스. 불의 흡혈귀를 부리는 화염의 사도.

녀석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화염의 기둥 앞에서 편안히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

그레고르가 불의 흡혈귀를 처리할 때마다, 녀석이 손가락을 한 번 튕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화염 기둥에서 태어난 불의 흡혈귀가 전선에 보충된다.

약하긴 하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군세.

?

놈들을 무시하는 게 정답이겠지.’

?

제스를 노려야 한다.

전장을 살필 때마다 에스텔의 이성이 차갑게 속삭여왔다.

지금 당장 그레고르와 융합해야 한다고. 그 이후 잔챙이 따위는 무시한 채 제스를 베어버려야 한다고.

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

아이들이 아직 여기에 있어.’

?

아이들은 여전히 소각로 위에 묶여 전시되어 있었다.

만약 그레고르가 불의 흡혈귀를 놓치는 바람에 녀석이 소각로 근처까지 도착한다면? 그 순간 거기에 남는 것은 아이들이 아닌, 그저 잿더미에 불과할 것이다.

?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

에스텔의 왼손이 움직일 수 없는 오른손을 대신해 검병을 움켜쥐었다.

수단은 이미 알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그것을 실행할 수 있다. 단지,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힘들 뿐.

?

아마도 오래 버티진 못하겠지.’

?

만전의 상태라면 모를까,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는 그리 오래 싸우진 못할 것이다.

길어야 5.

이 역시 낙관적으로 판단한 것일 뿐, 운이 나쁘다면 일격조차 버티지 못하고 패배할지도 몰랐다.

?

불리한 도박이다.’

?

하지만 가끔은 그런 도박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할 때가 있는 법.

?

그레고르, 제안이 있다.”

?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불의 흡혈귀 하나를 제거한 그레고르의 투구가 그녀를 향해 돌아갔다.

?

놈을 가능한 한 멀리 끌고 가다오.”

?

그녀의 시야가 향한 곳은 제스의 등 뒤에 있는 불꽃의 기둥이 있었다.

?

전부 저기서 나왔다.’

?

처음에 대규모로 소환했을 때를 제외하면, 불의 흡혈귀는 전부 제스가 명령할 때마다 저곳에서 다시 쏟아져 나왔다.

?

녀석만 사라진다면 더는 증원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녀석을 끌고 가능한 한 멀리 가다오. 그렇게만 한다면 내가.”

?

남은 불의 흡혈귀 전원을 상대할 테니.

뒷말은 생략되었지만, 에스텔은 그레고르가 그 의미를 알아들었으리라고 판단했다.

제법 오랫동안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레고르는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것처럼 계속해서 움직였고, 에스텔은 한 마디만 덧붙인 채 침묵을 이었다.

?

나를 믿어다오.”

?

짧은, 하지만 무거운 한 마디.

그 한 마디의 추가 판단의 저울을 움직인 것일까?

?

……알겠습니다.”

?

결국, 에스텔의 의견은 받아들여졌고, 그레고르의 다리가 기괴한 방향으로 변했다.

콰앙-!

이윽고 지축을 울리는 것은 거대한 한 번의 걸음. 그 발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그레고르의 신형은 한줄기 포탄이 되었다.

?

하하하! 멍청한 자식!”

?

나름대로 예상이라도 한 것일까? 그레고르의 신형을 예측하기라도 한 것인지 한 지상에서 솟아났지만, 불의 흡혈귀. 녀석들의 손은 곧장 그레고르를 붙잡고자 했으나, 그레고르의 전신에 솟아나 있던 무언가에 잘려 나가 소멸한다.

?

?!”

?

그것이 제스가 에스텔의 시야에서 사라지기 직전에 남긴 말.

이윽고 그레고르와 그는 에스텔의 시야에서 사라졌고, 전장에는 그녀와 불의 흡혈귀들만이 남았다.

?

힘내라,”

?

입가에서 자신도 모르게 뱉어내는 작은 속삭임.

그레고르일지 자신일지. 대체 누구를 향하는 건지 모르는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에스텔은 넝마가 된 몸을 움직여 전장을 가로질렀다.

?

?

*** ***

?

?

역시 오래 갈 수는 없군.’

?

사람을 기준으로는 제법 먼 거리지만, 사도에게는 가까운 거리에 녀석을 떨어트리며 나는 화상으로 욱신거리는 오른팔을 바라보았다.

환염과 사도의 갑주, 거기에 부분 둔갑으로 껍질을 만들어내 방어까지 했건만 불구하고 여기까지가 녀석을 붙들고 갈 수 있는 한계인 모양이다.

?

그래도 심한 수준은 아니야.’

?

이 정도라면 그리 오래지 않아서 완전히 회복할 수 있겠지.

고통을 최대한 억누르며 나는 시선을 틀어 비틀거리고 있는 거대한 갑옷을 보았다.

?

네놈, 어떻게 한 거지?”

?

자신이 판 함정이 부서진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일까? 녀석은 충격에 비틀거리면서도 연신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

그 녀석은 더 빨랐는데도 대응하지 못했는데.”

나는 빅토리아가 아니야.”

?

그 말과 함께 몸에서 우드득 소리가 나며 따개비 특유의 날카로운 껍질이 칼날처럼 솟아났다.

?

더 느리지만, 열기로도 능력이 봉인되지는 않지. 그 간단한 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냐, 멍청이.”

이 자식이!”

?

살짝 도발이 섞인 내 말에 화가 났는지 녀석은 주먹을 휘둘렀지만, 비틀거리는 자세로 휘두른 주먹이 제대로 맞을 가능성은 없었다.

거기에…….

?

느려.’

?

같은 거구인데도 보어헤스 백작의 것과 비교하면 제비와 닭에 가까울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굳이 상형권을 쓸 필요도 없이, 단순히 사도의 신체 능력만으로도 피하는 것에 무리가 없는 수준.

?

빌어먹을 자식이!”

?

과연 빈민가의 암흑가를 지배하던 가락이 없어진 건 아닌지, 주먹이 통하지 않는 것을 알아내자 미친 듯이 불을 뿜어대는 제스. 하지만 그 역시 내 기준에서는 그리 위험하지는 않았다.

?

단순해.’

?

녀석의 불길은 뜨거웠다. 스치기만 한다면, 어떤 동물의 특징을 모방하던 순식간에 녹아내릴 것 또한 자명했다.

하지만 그것도 영향권에 들어갔을 때의 이야기.

단순히 공격을 위해 나를 노리고 뿜어진 불꽃 정도는 회피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거기에서 느껴지는 잔열 정도야 환염의 힘으로 쉽게 억누를 수 있는 정도.

물론 전방위 공격을 가한다면 그건 위험하겠지만.

?

이 정도로 느린 녀석의 공격을 맞을 이유가 없지.’

?

빅토리아가 녀석을 상대로 패배한 건 오롯이 극단적인 상성 열세와 부족한 실전 경험 때문이다.

보어헤스 백작이나 스테파니 씨가 언급될 필요조차 없었다. 블레어가 직접 나서도 이 녀석 정도는 그리 오래지 않아 피떡이 되어서 사라지리라.

하긴 그럴 수밖에 없나.’

?

제길 어째서냐!”

?

나는 버려진 쓰레기를 보는 것 같은 차가운 눈빛으로 씩씩거리는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

분명 그 계집보다 내가 강했을 터인데!”

네가 강해?”

?

나는 코웃음을 치며 단 한 걸음의 발걸음으로 녀석의 틈으로 파고들어 양팔을 잡았다.

?

!”

?

당황했는지 바둥거리는 녀석.

분명 제대로 된 사도라면 전신 어디로든 불을 뿜을 수 있을 테지만, 팔이 잡히자 녀석은 그저 당황할 뿐이다.

?

미안하지만 너는 약해. 아니, 약할 수밖에 없지.”

?

그런 녀석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작은 목소리로 녀석의 귓가에 속삭였다.

?

너는 계약을 하지 못했으니까.”

?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빅토리아를 쓰러뜨렸다는 사실에 정체도 모른 채 불을 다루는 사도라는 사실만 파악했다.

하지만 녀석의 이름을 듣게 된 순간, 이드라 님은 무언가 의아하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

[이해가 가질 않는구나.]

?

그것이 녀석의 이름을 듣자마자 이드라 님이 나에게 전한 말.

?

[크투가는 결코 그런 인간과 계약을 하지 않을 터인데?]

?

크투가. 화염의 신은 이드라 님이 말씀하시길 결코 제스와 같은 악인과 계약할 존재가 아니라고 하셨다.

물론 이타콰처럼 사도야행을 포기했을 수도 있지만.

?

그렇다고 해도 이상해.’

?

이타콰는 사도야행을 포기했지만, 자신과 파장이 맞는 사도를 찾았다. 하지만 크투가는 그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고 있다.

본래라면 여기서 추리는 끝나야 할 터. 하지만 그림자와 만나본 나로서는 한 가지 떠오르는 가설이 있었다.

?

만약 그 그림자 녀석이 사도의 힘을 강제로 부여할 수 있다면?’

?

그렇다면 모든 것이 설명된다.

그리고 그 가설은 녀석의 투구를 본 순간 확신이 들었다.

?

검은 투구인가…….”

?

같은 검정인데도 불구하고 밤하늘처럼 아름답지는 않은, 마치 강제로 오탁을 덧칠해 내 만들어낸 것 같은 부자연스러운 칠흑.

?

언젠가 복수해 주마.’

?

-!

그때 본 재수 없는 그림자의 모습이 떠오르자, 무심코 평소보다 주먹을 강하게 내질렀다.

?

, 죽여, 감히,나를!”

?

역시 제법 충격이 있었는지 비틀거리며 말을 증오에 가득 찬 말을 토해내는 녀석. 그 목소리에는 여전히 후회 같은 건 느껴지질 않았다

?

감히?”

?

다시 폭력의 연쇄가 시작된다.

?

무술 따위는 쓰지 않아.’

?

그건 에스텔에게 배운 소중한 추억이다. 이런 놈에게 쓰기에는 지나치게 아깝다.

?

네가 특별하다고 생각해?”

?

단순한 주먹질에 팔이 부러져 나간다.

?

네가 선택받았으니 뭐든 해도 된다고 여기는 거냐?”

?

발차기를 막기 위해 든 팔이 으스러졌다.

?

다시 한번 말해주지.”

?

공격을 막기 위해 지옥 같은 불길이 치솟았지만, 가벼운 스텝만으로 범위에서 벗어났다.

?

너는 약해. 튼튼한 걸 제외하면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약해.”

?

한 번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낫 모양으로 꺾이는 녀석을 보며 나는 그렇게 속삭였다.

?

우리는 특별하지 않아. 그저 우연히 기회를 잡은 사람이지.”

?

특별해지고 싶어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쿠엔틴 그 노인네가 나에게 한 말. 당시에는 상황이 상황인지라 분노와 당혹감만 느꼈지만, 그 뜻을 쓸데없는 자리에서 깨달아버렸다.

?

조금 후회할 마음이 드나? 빅토리아와 에스텔, 아이린 수녀와 아이들에게 사과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

?

3분 정도.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동안 이어진 구타조차 견디지 못한 녀석을 보는 내 눈빛에는 이미 감정조차 깃들어있지 않았다.

?

그래, 알겠다.”

?

한참 고통 때문에 숨을 고르던 녀석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

끝이로군.’

?

그 모습에 드디어 에스텔에게 돌아가도 되겠다고 내가 판단한 순간.

?

네 놈을 망가뜨리려면 그 암캐부터 조져야 한다는 사실을!”

?

콰앙-!

폭음과 함께 주변을 밝히던 빛이 사라졌다. 소리의 진원지는 조금 전 녀석이 있던 장소에 있던 불꽃의 기원.

?

뭐지?”

?

모든 것을 녹여버릴 것 같은 불꽃 기둥은 사라졌지만, 대신에 그 자리에는 사도보다 살짝 약한 수준 정도로 강력한 무언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

제길!”

?

에스텔이 위험하다.

그 생각에 내가 자리를 비우려고 하는 순간, 뜨겁게 달아오른 팔이 내 발목을 잡았다.

?

못 간다!”

?

이미 고철이나 다름없이 망가진 투구 사이로 녀석의 광기에 찬 눈동자가 모습을 이글거렸다.

?

!”

?

녀석을 떨쳐내기 위해 몇 번이고 발을 차보지만, 독기가 가득 찬 녀석의 팔은 풀릴 줄 몰랐다.

?

빌어먹을!”

?

에스텔에게 가야 하는데!

그렇게 내가 녀석에게 벗어나려고 난동을 부리는 순간.

푸른 칼날이 하늘에 보일 정도로 치솟았다.

?

?

*** ***

?

?

뭐냐 저건?’

?

에스텔은 눈앞에 광경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레고르가 제스를 끌고 가 사라진 이후, 에스텔은 치열히 싸웠다. 가뜩이나 만신창이나 다름없던 몸은 이제 움직이는 것이 신기한 상황으로 몰렸지만, 그래도 검을 멈추질 않았다.

그렇게 지난 시간은 3.

객관적으로 보아서는 그리 길다고 할 수 없지만, 영원과도 같은 사투는 불의 기둥과 불의 흡혈귀들이 사라지면서 끝을 고했다.

그랬기에 안도하고 있었는데…….

?

이건 뭐지…….’

?

그것은 불로 벼려낸 혐오감이었다.

살아있는 홍염이 마치 살아있는 고깃덩이처럼 뭉쳤고, 그 표면에서 녹아내리는 인간의 얼굴이 비쳐 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괴한 것은 그 거대한 몸체를 근원으로 해 만연한 촉수.

?

꺄아아아아아!”

?

각각의 촉수에는 불타오르고 있는 사람이 박혀 있었다. 이미 사람 형상의 숯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지만, 눈과 입가에서 피 대신 불을 토하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촉수에 달린 얼굴들은 에스텔이 상대한 불의 흡혈귀들의 얼굴과 일치하고 있었다.

?

설마 그래서?”

?

불의 흡혈귀를 상대하면서 에스텔은 한 가지 의문을 품었다.

어떻게 제스는 끊임없이 흡혈귀들을 충원하는가? 마찬가지로 괴물을 다루던 블레어는 그 한계가 명확하지 않았나?

그 해답이 지금 여기에 있었다.

?

모두 한 마리였다고?”

?

불의 흡혈귀는 군단이 아니었다.

그저 하나.

에스텔이 상대하던 인간형 불의 흡혈귀는 그 괴물의 촉수 중 하나에 불과했다.

?

이길 수 없어.’

?

무인의 감각이 에스텔에게 경고했다.

저것에서 느껴지는 힘은 사도에 비하면 약할지언정 그 그림자조차 능가하고 있었다.

물론 녀석처럼 기괴한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녀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표는 그녀와 소각로에 있는 아이들.

?

피할 순 없어.’

?

그 적은 달라졌을지언정 해야 하는 일은 변치 않았다.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 이대로 피했다가는 아이들은 그저 잿더미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기에 부족한 몸으로 전력을 다했으나 결과는 최악이었다.

?

커억!”

?

고작해야 몸부림에 불과했다.

마치 소가 꼬리를 휘둘러 파리를 쫓는 것처럼 단순한 움직임에 불과했다.

그런데 막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방어 자세는 취했지만, 마력 칼날이 녹아내리면서 왼쪽 어깨를 꿰뚫렸다.

?

빌어먹을.’

?

시야를 돌리자, 어깨가 통째로 증발해 피부 한 장에 의존해 덜렁거리는 왼팔이 보였다.

?

검을 휘두를 수 없어.’

?

오른팔이 망가져서 왼팔로 검을 휘둘렀건만, 이제는 차라리 오른팔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가 되었다.

?

어떻게 해야 하지?’

?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도망치는 것이 옳은 판단이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녀, 에스텔은 기사. 그렇기에 지켜야 할 이들을 놔두고 도망갈 수는 없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

나는 정말로 기사인가?’

?

문득 그런 의문이 다시 떠올랐다.

그것은 그녀를 구해줬지만 그리 달갑진 않던 이가 한 발언. 그리고 그레고르의 모습을 보고 그녀가 인정한 사실.

?

소여를 나온 나는 기사인가?’

?

그녀가 기사가 된 이유는 소여에서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에스텔은 그렇게 되어야만 했고,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배웠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소여를 나왔다. 그리고 더는 가문이 아닌 자신을 위해,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

?

그러면 나는 뭐지?’

?

-!

불꽃이 터져 나오며 에스텔의 신형이 하늘을 날았다.

이번에도 남은 것은 중상.

이미 망가진 몸 위로 계속해서 상흔이 추가되어 가는데 그녀의 머리는 이상할 정도로 맑았다.

?

나는 왜 검을 들었지?’

?

그리고 떠오르는 것은 근본적인 의문.

?

나에게 무라는 것은 뭐지?’

?

마치 안개 속에서 헤매던 것 같은 그녀의 머릿속에서,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

그레고르,’

?

첫 만남은 그리 좋지 못했던 사내.

그렇지만 이후 함께 싸우며 우정을 쌓은 전우.

자신을 가문의 속박에서 구해준 남자.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

그와 함께 있고 싶다.’

?

그레고르의 옆에 서서 함께 싸우고 싶었다.

?

기사가 아니어도 좋아.’

?

그저 에스텔로서 그의 곁에 서고 싶었다.

그저 자기 자신을 위해.

?

나 자신을 위해!’

?

-!

다시 한번 불꽃의 촉수가 그녀를 노렸지만, 그녀의 오른팔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막아내고 있었다.

거기에 평소에 그녀가 들던 마력검은 없었다.

그저 주머니처럼 덜렁거리는 왼팔은 유감스럽게도 마력검을 놓친 지 오래다.

하지만 그런데도 촉수는 너무나도 쉽게 막혀 있었다.

우웅-!

오른손에는 순수하게 빛으로 만들어진 검이 들려, 촉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내고 있었다.

순수 마력검.

과거 그녀가 금단의 비기를 사용할 때만 한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던 궁극의 기예. 그것이 숨을 쉬는 것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

나는 에스텔이다.”

?

그녀의 입가가 달싹였다.

?

귀족 영애도 기사도 아닌 에스텔이다.”

?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각성.

단 한 순간의 깨달음으로 인한 마도기사의 급격한 성장. 그것이 지금 에스텔에게서 일어나고 있었다.

?

하압!”

?

망가진 팔이 움직이며 빛의 검이 휘둘러진다.

목표는 저 불쾌하기 짝이 없는 괴물.

?

에스텔 식 비기. 불을 먹는 새.

?

그렇게 칼날은 섬광이 되어서 불길을 잘랐고, 하늘에는 한 줄기 푸른 검흔만이 새겨졌다.

?

?

?

?

=========================================================================================

?

잠깐 설정 이야기

마법 유파 중 마도기사의 설정은 무협에 나오는 무림인이 기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소위 무협지에서 무림인이 단순히 인식을 바꾸는 것만으로 무섭게 강해질 수 있는 것처럼, 에스텔도 자신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으로 갑작스럽게 성장한 것이죠. 요컨대 너 자신을 알라라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까요?

?

Act 2에 나온 다른 주요 조연 캐릭터로는 로즈마리와 소여 백작이 있겠군요. 이 둘은 조연급이라서 외모 설정을 자세히 잡아두진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베이스가 된 이미지는 존재합니다.

?

로즈마리의 경우 베이스가 된 캐릭터는 연희 시리즈(연희무쌍)”의 감녕(이미지 링크 #)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감녕이 한 30대 중반 정도로 나이를 먹으면 변하게 될 이미지라는 생각으로 만들었습니다.

?

소여 백작의 본래 이미지 베이스가 된 캐릭터가 따로 있었는데, 이후 제가 생각한 외모와 일치하는 캐릭터가 등장해 수정했습니다. 바로 도타: 용의 피의 등장인물인 케이든(이미지 링크 #)입니다. 에스텔의 아버지인 만큼 나름 미남이긴 하지만, 그 인격은 그리 좋지는 못하죠. 어찌 됐든 상관없는 사실을 알려드리면, 사실 젊은(혹은 어린) 소여 백작은 흔히 생각하는 이상적인 기사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사도야행에서 일어난 일로 성격이 바뀌어버렸죠.

Papillon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4 댓글

SiteOwner

2021-05-09 15:02:49

악인은 자신의 목적 하나만 달성하면 됩니다. 그러나 선인은 그럴 수는 없지요. 일단 감당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래서 선인이 악인과 최소한 대등해지려면 몇 배의 힘을 가져야 하지요. 그래서 힘 없는 정의는 무의미하고 정의 없는 힘은 잔혹하다든가 그런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에스텔의 그 마음을 그레고르가 읽어낼 수 있어서 천만다행입니다.

그리고, 제스가 계약을 한 것이 아니라 모종의 편법을 썼다 보니 결코 완전할 수 없었고 그 약점이 이제 제스에게 철저히 불리하게 작용하게 되겠군요. 게다가 에스텔은 드디어 자신을 속박하고 있었던 그 족쇄를 벗어던졌습니다. 그 누구도 아닌 에스텔 자신으로 있고 싶다...역시 스스로 빛을 내는 천체인 별이라는 뜻에 부합합니다. 


로즈마리의 베이스가 된 캐릭터는 꽤나 의외의 모습이군요. 저는 죠죠의 기묘한 모험 2부의 리사리사를 상상했습니다만...

저 감녕이 나이가 들어 30대가 되면 상당히 오묘할 것 같군요. 각도에 따라서 판이하게 다를 것 같은 예감이 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옛 모습을 잘 떠올릴 수 있지 않알까 싶기도 합니다.

소여 백작의 베이스가 된 캐릭터는 진중하고 근엄해 보이는군요. 이상적인 기사의 이미지에 부합했던 그 소여 백작이 그렇게 된 것은 역시 씁쓸합니다. 어느 지위가 되는 것도 어렵지만, 자신을 온전히 지키는 건 더 어려운 건가 봅니다.

Papillon

2021-05-16 12:13:24

타인을 지키면서 싸우는 건 그냥 싸우는 것보다 훨씬 힘들죠. 그래서 히어로가 빌런보다 고생하는 것이기도 할 겁니다.


에스텔은 이번 일을 계기로 크게 성장하게 되었죠. 앞으로 그녀는 더욱 활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여 백작이 그 꼴이 된 건 권력욕도 있지만, 사도야행에서 있었던 일 때문입니다. 당시 소여 백작(현 소여 백작의 아버지이자 에스텔의 할아버지)이 기사도 때문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거든요. 자세한 건 나중에 밝혀질 예정입니다.

마드리갈

2021-05-15 16:57:17

해치워도 줄지 않는 적...

그레고르가 불의 흡혈귀를 잘 해치우고 있다지만 이래서는 언젠가 그레고르도 한계에 부딪치겠죠. 게다가 불완전하더라도 일단 사도가 된 제스는 보통 강한 상대가 아니고...게다가 아이들이 끔찍하게 변형되어 소각로 위에 묶인 채로 전시되어 있는 상황이 있는 터라 제스를 상대로 구사가능한 선택지도 많지 않네요.


에스텔의 도박도, 그레고르의 결단도, 이제 상황을 바꾸네요. 분명 쉽지 않은 상황이었고 고민할 시간도 별로 없었지만...

그리고, 에스텔은 드디어 "에스텔" 이 되었어요. 다른 무엇도 아닌 그녀 자신.

역시, 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가 이렇게도 드러나네요. 그야말로 자신을 시프트하고, 상황을 시프트하는 원천적인 힘.


로즈마리의 베이스는 연희무쌍의 감녕이군요. 저는 페이트 시리즈의 우미인을 상상했는데...

소여 백작의 베이스는 케이든. 역시 고전적인 미남이네요. 영웅호걸의 풍모가 있는. 그런데 딱 거기까지이고 실상은...

Papillon

2021-05-16 12:16:14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지요. 괜히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현대까지 이어져 오는 것이 아닌 것처럼요.


로즈마리의 이미지에 대해서는 의외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군요. 확실히 우미인 같은 이미지도 조금 닮은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소여 백작의 겉모습은 전형적인 영웅호걸의 이미지지요. 실상은 말씀하신 것처럼 전혀 그렇지 못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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