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 얼어붙은 시간 속에서 소리는 실종되고 침묵만이 남았다.
다시 일보. 빛조차 동결되니 시야에는 암흑만이 가득했다.
또다시 전진. 오감이 모두 소실되니 범인으로서의 모든 감각이 마비되었다.
네 번째 발걸음. 마법사의 필수 조건인 육감이 소멸했다. 이제 인간의 것은 모두 사라지고, 내게는 오직 고립만이 남았다.
그리고 마지막 한 걸음. 모든 것이 없어져 가던 감각의 공터에서, 새로운 불씨가 피어올랐다.
칠감(七感), 다르게 일컫기를 신의 감각.
사도가 된 이후 나는 늘 칠감과 함께했다. 전투 중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고, 몇 번이나 목숨을 구해줬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그저 단편적인 정보. 미래를 향한 불확실한 예지뿐.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오로지 칠감만이 모든 감각이 사라진 내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귓가에 순풍이 스쳐 지나갔다. 투구를 썼음에도 느껴지는 그것은 바람이되 바람이 아니었다.
옛 군주, 이타콰. 이드라 님에게 꿈의 마녀라는 이름이 있는 것처럼 그분에게도 다른 호칭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
‘바람 걸음걸이(The wind walker).’
?
빛조차 초월할 정도로 빠른 신성에 어찌하여 고작해야 바람의 이름이 붙었나 했더니…….
?
‘이래서였나?’
?
만물이 바람이 되었다.
물체도, 생물도, 감각도, 힘도……. 삼라만상(森羅萬象)의 격류가 바람이 되어 내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것이 내게 주는 것은 압도적인 우월감과 해방감. 세상 모든 것과 고립되었지만, 그 어떤 것에서도 자유롭게 살아가는 그 지고의 쾌락.
?
『어때 형씨, 기분 좋지?』
?
본인은 이미 수없이 겪어본 감각이라서 그런 것일까? 내가 어떻게 느낄 줄 다 안다는 듯이 빅토리아는 싱긋 웃으며 마음속으로 말을 걸어왔다.
?
“응.”
?
너무 흥분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니까.’
?
마음 같아서는 당장 싸움 따위는 때려치우고 이 바람을 즐기고 싶을 정도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적은 나와 마찬가지로 이 감각을 느끼며 나를 노리고 있을 테니.
바람이 내게 속삭이고 있었다.
이 앞에 녀석이 있다고. 녀석이 나를 향해서 다가오고 있다고. 아마 녀석 역시 내가 어디 있는지 모두 듣고 있을 것이다.
?
‘그렇다면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지.’
?
한 걸음. 가볍게 앞으로 나아가자 공간이 접힌 것처럼 녀석과 나의 거리가 줄어들었다. 동시에 이때까지는 느껴지지 않던 녀석의 모습이 선명하게 감각으로 들어왔다.
어지간한 집 한 채보다 큰 덩치. 갑주라기보다는 그저 금속 구조물로만 느껴지는 외형.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근육과 뼈가 뒤틀려 기괴한 소리를 내는 육체.
?
[끼야아아아아악!]
?
녀석은 울부짖으며 찾고 있었다. 본래 자신의 본체가 돼야 했던 것을, 자신과 함께 뒤틀려 버렸어야 하는 존재를.
빅토리아라는 이름의 소녀를…….
?
‘내줄 수야 없지.’
?
쿵-!
이번에는 조금 세게 바닥을 디디자, 발끝에 충격이 느껴지며 공간이 더 빠르게 뒤틀렸다.
녀석은 이제 코앞이다. 그래서인지 감각에 이제는 녀석의 외형만이 아닌 다른 것 역시 잡히기 시작했다.
녀석의 광기, 녀석의 뒤틀림, 그리고 녀석이 지닌 압도적인 힘.
?
‘터무니없는 힘의 양이로군.’
?
순수하게 사도로서의 힘만을 계산해도 내 쪽의 열세. 마력이나 그림자 녀석의 힘 같은 부가적인 요소를 포함하면, 그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
아무래도 그저 힘과 힘으로 부딪힌다면 나의 필패일 터.
?
『괜찮겠어, 형씨?』
?
빅토리아 역시 그것을 느꼈는지, 가슴속에서 울려 퍼지는 그녀의 음성에는 살짝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
“괜찮아.”
?
그런 그녀에게 나는 안심하라는 듯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
“내 쪽이 이겨.”
?
힘도, 속도도, 지닌 신력도 모두 내 쪽이 떨어진다. 그렇기에 모르는 이가 본다면 내가 하는 말이 단순히 허세에 불과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녀석이 가까워질수록, 그 힘이 피부에 맞닿을수록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내 쪽이 훨씬 강하다고.
?
[키야앗!]
?
어느덧 녀석과 나의 거리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와 함께 먼저 휘둘러진 것은 녀석의 뒤틀린 손. 어지간한 마차 하나쯤보다 거대하면서도 칼날처럼 날카로운 그 손은 강렬한 냉기를 휘감은 채 내 머리 위로 정확히 떨어졌다.
녀석이 원하는 건 아마 물리적으로 빅토리아의 영혼을 떼어내는 것일 터.
?
‘그렇게 둘까 보냐!’
?
그 거대한 손이 다가오자 살짝 두려운 감정이 들었지만,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내가 ‘보았던’ 것을 흉내 냈다.
녀석보다 느리게 나의 오른손이 움직였다. 거기에 어떤 권능도 담기지 않았고, 응축된 신력의 양도 그리 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퉁-!
녀석의 팔은 고무공끼리 부딪친 것 같은 소리를 내며 허무하게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
[끄륵?]
?
자신의 공격이 튕겨 나간 것이 이해가 가질 않는 것일까? 녀석은 거대한 해골의 모습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행동이 살짝 귀엽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방심은 금물. 나는 자세를 잡고 다시 녀석의 공격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퉁-!
또 한 번 녀석의 팔이 튕겨 나갔다.
조금 전의 무식하던 공격과는 달리 이번에는 중간에 궤도를 틀기까지 했지만, 나에게 닿지도 못한 채 엉뚱한 곳만을 휘저었다.
?
[캬아아아악!]
?
이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녀석은 괴성을 내며 전력으로 내게 뛰어들었다.
이번에 쏟아지는 것은 단타가 아닌 연격.
한 번으로 안 된다면 여럿이면 된다고 본 것인지 녀석은 눈보라 속에서 쏟아지는 눈처럼 내게 끊임없이 공격을 쏟아냈다.
하지만 몇 번을 쏟아내던 마찬가지다.
이 정도 수준으로는 그 어떤 공격도 나에게 닿지조차 못하고 그저 튕겨 나갈 뿐이다.
가하는 것은 그저 약간의 힘.
필요한 것은 작은 빈틈을 파고들 수 있을 정도의 속도.
?
‘빌리겠습니다, 스테파니 씨. 그리고 에스텔!’
?
행동 예측.
두 사람의 무인이 내게 보여줬던 아득한 무의 경지.
?
‘물론 그 둘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지만.’
?
어설픈 내 권법으로는 에스텔처럼 정밀한 동작은 하질 못하고, 떨어지는 내 식견으로는 스테파니 씨 같은 미래 예측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지금 내가 상대하는 것은 고작해야 미쳐 날뛰고 있는 짐승. 그 정도라면 내 수준으로도 ‘약간의 보조’만 있으면 충분히 동작 예측이 가능하다.
사아아아아-!
움직일 때마다 바람이 계속해서 주변을 스쳐 지나갔다.
그것의 본질은 칠감이 느끼는 주변의 정보. 하지만 본디 ‘북풍의 군주’가 가지고 있던 감각이기 때문인지, 그 성질은 놀랍도록 바람과 유사했다.
그렇기에 ‘나’라면 할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바람을 잘 읽는 이’와 함께 지내왔으니까.
파리와 바퀴벌레와 같은 해충.
둔갑술사로서 잠입을 위해 익힌 녀석들은 바람을 읽는데 인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녀석들의 육체를 구현한다면 나 또한 이를 따라하기에는 충분. 그리고 녀석들을 모방하는 나에게 녀석의 공격은 결단코 닿지 못한다. 아니 그것을 넘어서.
?
‘내가 반격도 할 수 있지!’
[키야아아악!]
?
녀석의 몸통에 내 주먹이 닿기 무섭게 녀석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마치 누가 들으면 크게 다치기라도 한 것처럼 비통한 음성. 거기에 살짝 반색했지만, 직접 눈으로 본 그 결과물은 그리 극적이진 않았다.
?
‘생채기 정도인가?’
?
통증은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제대로 된 타격을 주진 못한다.
?
‘녀석의 방어력이 단단해서는 아니야.’
?
손끝에 느껴지는 감각을 봐서 덩치와는 다르게 녀석은 그리 튼튼하지 않다.
고작해야 불완전한 사도인 제스와 비슷한 수준. 보어헤스 백작은 물론 블레어와도 비교하는 걸 불허할 수준이다.
그렇다면 원인은 다른 쪽일 터.
슬쩍 주먹을 내지른 손을 보니 얇은 건틀릿에 실금이 그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
‘역시…….’
?
지금 약한 것은 내 육체의 강도. 빅토리아와 융합 변이를 하면서 이 갑주의 방어력이 놀라울 정도로 떨어져 있었다.
?
‘하긴 어쩔 수 없나.’
?
빅토리아와 융합한 나는 에스텔과 합체했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닌 힘이 두 배로 늘어났을 리는 만무. 필시 다른 쪽이 약해졌으리라.
?
‘그거면 됐어.’
?
힘이 약하다고? 그렇다면 힘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상처를 입히면 그만이다.
독개구리의 외피를 구현하자 피부와 함께 갑주의 외장이 기괴한 색상으로 물들어간다.
전기뱀장어의 기관을 구현해, 일격 일격에 전격이 깃든다.
구현하는 것은 내가 아는 모든 ‘치명적인 생물’들. 스치는 것만으로 다른 자를 죽이는데 특화된 존재.
?
“권능 발동. 마수구현(魔獸具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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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가 뒤틀리고 근육이 짜 맞춰지며, 내 몸은 전혀 다른 것으로 변이한다.
이윽고 완성된 것은 그저 스치는 것만으로 사람을 죽이는 마수의 육체.
?
‘조금 머리가 아프군.’
?
한 번에 너무 많은 생체 기능을 구현했기 때문일까? 바람을 읽는 것이 슬슬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혼자였다면 감각이 봉쇄된 채 적과 싸워야 했을 터. 하지만 지금 나는 혼자가 아니다.
?
『맡겨줘, 형씨!』
?
바람을 읽는 것은 철저히 빅토리아에게 맡긴다. 그러자 두통은 사라졌지만, 그 때문인지 에스텔과 스테파니 씨의 움직임을 흉내 내는 건 불가능해졌다.
?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어!’
?
이제 녀석은 반격조차 제대로 못 할 테니까.
?
[캬아아아앗!]
?
공격이 스칠 때마다 녀석의 몸에 분명한 상흔이 새겨졌다. 여태까지의 생채기와는 다른 확실한 상처. 치명상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했지만, 그것이면 충분했다.
치이익-!
전기, 독액, 산, 가스, 가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동물성 피해가 그 작은 상처에서 시작해 녀석의 몸을 좀 먹어간다.
?
[끼에에에엑!]
?
상처가 느려져 가는 녀석의 육체. 그와는 대조적으로 침식의 속도는 더욱더 빨라져만 간다.
이어지는 것은 싸움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유린.
짐승을 상대하기 위한 단순한 사냥.
그 처절한 몸놀림이 끝났을 때, 얼어붙은 시간이 녹아내리며 세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싸움의 끝이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
?
*** ***
?
?
눈앞에서 적이 무너져간다.
상대는 거대하고 터무니없는 힘을 지녔던 적. 평소의 그녀라면 이기는 것이 불가능했을 상대인 만큼, 녀석을 쓰러뜨린 건 분명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녀석은 그녀를 아껴주던, 함께 싸워오던 파트너이기도 했기에.
소녀 빅토리아는 싸움이 끝났어도 웃을 수 없었다.
그녀의 눈앞에서 지금 자신과 가장 오래 사귀었던 친구가 조금씩 그녀를 떠나가고 있었다.
사아아아아-.
거대한 괴물의 형체가 바람과 함께 눈처럼 스러져갔다.
이제는 자신의 모습을 구현하는 것조차 힘든 것일까? 그것은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소멸을 향해 나아갔다.
?
‘기다려야 해.’
?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시간 문제에 불과하지만, 아직 저것이 완전히 소멸하진 않았다는 사실을. 어쩌면 지금도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가만히 있고 싶지 않았다.
?
“파트너!”
?
생각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융합을 풀고 맨몸이 뛰어나오자 그레고르가 사도의 모습으로 당황한 몸짓을 취해 보인다.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일까?
그 상태로도 충분히 그녀를 따라잡을 수 있음에도 그는 직접 움직이지 않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솔직히 무서워졌다.
혹시나 파트너가 여전히 자신을 공격하진 않을까? 자신이 또 배신당하진 않을까? 이렇게 된 것이 모두 자신 탓이라고 하진 않을까?
생각하면 할수록 끔찍한 가정들만이 머릿속에서 끊이지 않고 떠올랐다.
하지만 그래도 멈출 수는 없었다. 친구와의 마지막을 이렇게 파투 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영원할 것 같은 걸음이 끝이 나고, 그녀는 어느덧 거대한 해골 앞에 서 있었다.
?
“…….”
?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입이 움직이질 않았다. 막상 코앞까지 다가갔는데 어째서인지 아무런 말도 나오진 않았다.
?
‘뭐라고 해야 하지?’
?
미안해? 무엇이 미안하단 말인가?
괜찮아? 자신과 그레고르가 그를 이 꼴로 만들었지 않은가?
다행히도 혼란에 빠진 그녀를 구해준 것은 서서히 부서져 가고 있는 그녀의 파트너였다.
?
[갸하하하하! 결국, 이 꼬락서니로 끝나고 말았군.]
?
부서져 가는 녀석의 목소리에는 이전과 같은 힘이 없었지만, 여전히 장난기만은 남아 있었다.
?
[뭔가 예감이 좋질 않아서 그냥 놀다가 끝내려고 했는데, 역으로 그래서 망해버렸군. 젠장. 좀 더 즐기고 싶었는데 말이지.]
?
그는 그렇게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말하더니 빅토리아를 향해 손가락 하나를 내밀었다.
?
‘악수라도 하고 싶은 걸까?’
?
그녀는 서서히 부서져 가는 그 손가락 끝을 잠시 조용히 바라보다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윽고 손끝에서 느껴지는 건 차가운 금속의 감촉. 분명 손끝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감각이건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그것이 따뜻하다고 느껴졌다.
?
“파트너!”
?
갑자기 안개라도 낀 것일까? 빅토리아는 자신의 눈앞이 흐려지는 이유를 억지로 뒤틀어서 생각했다.
?
[갸하하하! 마지막에는 울보가 된 거냐? 울지 말라고, 바보야. 나는 제법 즐거웠으니까.]
“하지만!”
[괜찮다니까. 아마 다시는 직접 보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잊지 않게 선물 정도는 줄 수 있으니까.]
“응?”
?
갑자기 들려온 상대의 말에 살짝 의아해하는 순간, 손끝을 통해 그녀의 몸에 차가운 냉기가 들어왔다.
분명 어지간한 인간쯤은 얼음 동상으로 만들어도 이상하지 않은 냉기. 하지만 그것은 빅토리아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은 채, 천천히 흡수되었다.
?
[약간의 선물이다. 사도로 변신하진 못하겠지만, 내 힘을 조금 쓸 수는 있을 거야. 그것만으로도 이전보다는 살기 편하겠지.]
?
그런 그의 말에 호응하기라도 하듯, 냉기는 그녀의 손에 머물러 작은 눈 인형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새하얀 눈으로 만들어진 고릴라 형상의 인형. 그녀와 파트너가 야시장에서 팔았던 장난감.
파스스슥-!
조금 그걸로 힘이 다한 것일까? 파트너의 육체는 이내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
[마지막으로 너한테 말할 게 있다.]
?
이윽고 육체가 형체조차 이루지 못하고 그저 약간의 흔적만 남은 상태에서, 그녀의 친구 이타콰는 말을 건넸다.
?
[고마웠다, 파트너.]
?
그날, 한 개의 짧은 문장이 그녀의 심장에 새겨졌다.
?
?
*** ***
?
?
전장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 그림자는 그저 조용히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림자를 제외하고 그곳에 자리 잡은 것은 오로지 침묵뿐.
사람은 물론, 쥐나 고양이, 심지어 인간의 눈으로 관측할 수 없는 미생물들까지 모조리 사라진 공간.
그곳에서 조용히 자신의 실험을 관측하던 그는 갑작스럽게 혼잣말이라도 하듯 입을 열었다.
?
[운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그 말과 함께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그의 앞에 나타난 작은 균열. 이 침묵의 공간을 깨고 문을 열고 나타난 한 마리의 암거미.
스테파니, 거미여제 아틀락나차의 사도.
그녀는 사도로 완전히 변신한 상태로 이 침묵의 공간에 비집고 들어왔다.
?
[만나서 반갑군, 스테파니 양.]
?
그림자는 여유롭게 그녀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일전에 압도적으로 자신을 밀어붙였던 상대에게 한다기에는 지나치게 평온한 태도. 혹시나 무엇을 숨겼다고 하기에는 그에게서는 어떠한 낌새조차 보이질 않았다.
?
[이런 대답조차 하지 않는 건가?]
?
그림자는 마치 오래된 친우를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지만, 스테파니는 대답조차 하지 않고 그를 직시할 뿐이다.
이어지는 것은 선공.
약간의 조짐은 물론, 직후의 소음조차 느껴지지 않던 공격은 순식간에 그림자를 찢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걸로 끝.
다시 한번 그림자가 소멸하며 끝냈어야 했던 싸움. 하지만 이번만큼은 결과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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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란 건 참으로 재미있지. 평생을 찾아 헤매도 보이지 않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는 운명 또한 존재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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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잠식한 혼돈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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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얄궂어. 내가 실험을 통해 완성하려고 했던 것과 거의 일치하는 권능을 지닌 녀석이 아무런 조짐도 없이 나타났으니 말이야.]
?
다시 한번 스테파니의 공격이 혼돈을 찢었지만, 그림자의 목소리는 끊일 줄 몰랐다.
?
[원래는 조금 더 느긋하게 움직이려고 했네. 이번에 안 되면 다음, 다음에 안 되면 그 이후에도 시간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가 등장한 이후 조금 더 서두를 수밖에 없었지.]
?
이윽고 허공에 두 개의 물건이 떠올랐다.
하나는 붉은 화염을 새겨놓은 것 같은 반지.
다른 것은 해골을 새겨놓은 것 같은 기묘한 형상의 금속 혁대.
?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첫 시험 작을 보여주도록 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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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지면의 혼돈이 일어나 두 물건, 크투가와 이타콰의 신기를 흡수했다. 그와 동시에 탄생하는 기묘한 신력.
?
[강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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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혼돈을 중심으로, 화염과 얼음이 뒤섞인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
[자, 한 번 놀아보도록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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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부딪힌 두 힘.
그리 오래지 않아 이윽고 혼돈 속에는 아무도 남질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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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설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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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르의 융합 변이의 원안은 사실 “하이스쿨 DxD”의 일리걸무드 트리아이나처럼 헤이세이 1기 가면라이더의 폼 체인지 방식에서 따오려고 했습니다.
헤이세이 1기 가면라이더의 가장 대중적인 폼 체인지는 이런 식이거든요.
?
밸런스 특화 기본 형태
스피드 및 테크닉 특화 형태
파워 및 내구력 특화 형태
원거리 특화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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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는 나중에 기각되었는데, 사도의 전투력이 지나칠 정도로 강하다 보니, 원거리 특화 형태를 따로 만들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변경했습니다. 라이트노벨 “오버로드”의 3대 근접전 특화 NPC의 포지션처럼요.
“오버로드”의 3대 근접전 NPC는 다음과 같은 형식입니다.
공격 특화인 코튀코스.
방어 특화인 알베도.
스피드 특화인 세바스.
그리고 이 셋은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이기도 핮요.
코퀴토스는 알베도의 방어력을 뚫지만 세바스에게 공격을 맞추기 힘듭니다.
알베도에게는 세바스의 공격이 통하질 않지만, 코퀴토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없습니다.
세바스는 코퀴토스를 속도전으로 이기지만, 알베도의 방어를 뚫을 수 없습니다.
현재 빅토리아와의 융합 변이는 세바스 포지션, 에스텔과의 융합 변이는 코퀴토스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남은 알베도 포지션은 누가 될지 기대해 주시길 바랍니다.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4 댓글
마드리갈
2021-06-20 23:59:39
이번 회차는 타력본원(他力本願)이라는 말이 왜 오용되어서는 안되는 것인지가 제대로 보였어요.
그렇죠. 거대한 그리고 강력한 적에게는, 힘을 합쳐 맞서 싸우는 것이죠.
그리고, 힘을 합친다는 것은 타인과의 협력은 물론 타인에게서 배우는 것도 포함되는 것. 그 결과는 부분의 합을 넘어서는 것이 될 거예요.
혼돈 속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대체 어떻게 된 건지...문제의 그림자는 이제 소멸한 걸까요?Papillon
2021-06-25 01:55:45
남에게 의존만 해서는 안 되지만, 힘을 합치는 일은 꼭 필요한 것이죠. 그레고르의 융합변이라는 능력은 그렇게 '협업'이라는 것에 특화된 권능이기도 합니다.
그림자와 스테파니의 행방은 현재로서는 비밀입니다. 다만, 아직 끝나지는 않았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SiteOwner
2021-07-07 21:43:53
바람이란 공기의 흐름이고, 공기의 흐름이라는 것은 그 공기를 구성하는 분자들의 운동.
그러니 바람이라는 것은 만물의 본질이자 삼라만상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람 걸음걸이. 상당히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본질을 알고 발전시켜 나가는 그 한 걸음이 될 것이라고 자연스럽게 유추가 됩니다. 정말 감탄했습니다.
그림자와 스테파니의 대결, 정말 알 수 없게 되었군요. 정말 사라진 것인지, 잠시 안 보이는 다른 어딘가로 간 것인지...Papillon
2021-07-11 11:53:34
어떤 초능력이든 그렇지만, 단순한 '무언가'를 다루는 능력이라는 건 사실 그 이상으로 복잡한 경우가 많지요.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스테파니와 그림자 둘 다 아직은 살아있습니다만, 자세한 내용은 비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