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시작인 2001년 9번째 달의 11일. 대낮에 미국의 심장인 뉴욕 한복판에서, 테러단체 알 카에다에 의해 하이재킹당한 보잉 767 항공기 두대가 세계 무역 센터에 자살 폭탄 테러를 벌이는 9.11 테러가 발생합니다. 사상자만 1천명 단위로 나온 이 유래 없는 대규모 테러 사건에 친미 서방 국가들은 물론, 반미 감정을 가진 국가들도 이번만큼은 미국을 지지하였고, 심지어는 심심하면 미국을 욕하기 바쁜 중동 지방 이외의 국가로 치면 최고의 반미국가인 북한조차도 이 당시에는 비인도적 테러 행위를 강력히 규탄한다고 주장하면서 평소의 그들로서는 놀랍게도 반미감정을 접어두고 미국을 지지했는데, 여기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습니다.
1976년 8월 18일, 판문점 근처의 미루나무의 가지치기를 위해 미군과 한국군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헌데 북한군이 처들어오면서 상황이 급변. 박철 중위의 주도 하에 북한군은 남한 사람은 건들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왔기에 도망치는 남한 인원에 별다른 위해는 가하지 않았으나, 그 대신 아서 보니파스 대위와 마크 배럿 중위에게 일방적으로 공격을 가하고, 벌목 작업용으로 갖고있던 도끼로 시체를 마구 난도질하는 대형 사고를 저지릅니다. 자기네 소속 장교들이 그냥 살해당한 것도 아니고 도끼로 난도질 당한 것에 주한UN군은 당연히 격노하여 즉각 북한에게 항의하였으나, 아직 사태 파악이 덜된 북한은 도끼가 저절로 날아와 장교들을 공격했다고 주장하였고(...) 이 말도 안되는 변명에 열받은 주한UN군과 한국군은 즉각 데프콘 3, 즉 준전시체제를 발동하고 전쟁 준비에 돌입합니다. 거기에 미국은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아예 핵무기 탑재가 가능한 전략폭격기 F-111 아드바크와 B-52 스트라토포트리스를 위시한 핵 투하 전력, 그리고 항공모함 전단을 몰고오며 무력 진압에 나섭니다.
한편, 미군을 공격하란 지시를 내린 김일성 이하 높으신 분들도 장교 둘을 도끼로 난도질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무력 시위로 그칠줄 알았지 설마 장교 둘을 잔혹하게 죽여버릴 줄은 그네들도 미처 몰랐는지 보고가 올라오자 대번에 기겁해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거냐고 일갈하며 사태 수습에 나섰지만 이미 때는 늦어있었고... 거기에 우방국인 중국과 소련마저도 북한이 한 짓이 워낙 정나미 떨어지는 일이라 "그러길래 왜 그딴 짓을 했냐. 우린 모르는 일이다. 너네가 한 짓이니 너네가 알아서 수습해라."라고 수수방관. 결국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데프콘 2까지 발령되어 전쟁이 터지기 직전까지 갔던 이 사태는 "사람이 죽었으니 유감을 표하라, 푸에블로호 사건 때도 미국이 사과했잖냐" 라는 김일성의 지시와 더불어, 미군이 당초의 임무이던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수행하며 동시에 한국군은 북한군 초소를 공격하였고 이 과정에서 바짝 쫄은 북한이 아무런 군사적 행동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초의 목적을 달성한 주한UN군 이하는 가지치기 작업 후 철수. 사과는 끝까지 하지 않았지만 일단 형식상의 유감 표명을 받아들인 미국이 군대를 물리면서 막을 내립니다.
이렇게 해서 말로 떠들어대는건 웬만하면 그냥 참고 넘기지만, 자국(혹은 그에 준한 방위조약 하의 동맹국)의 사람이 누구라도 다치거나 죽는다면, 그땐 정말 얄짤없다는걸 멱살 잡혀 내동댕이 처지는걸로 뼈저리게 배운 북한은 만약 9.11 테러 당시 조금이라도 테러를 옹호하거나, 테러 단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면 이번엔 독기 잔뜩 머금고, 명분마저 차고 넘치는 미국이 자비고 나발이고 말 그대로 저세상으로 보내버린다는걸 직감한거죠. 이후 보스턴 마라톤 폭탄 테러 등, 미국과 관계된 테러 행위에 대해서 북한은 일절 자기하곤 상관없다고 극구 부정하고 있으며 항상 하던 대로 반미 감정은 신나게 표출하고 있지만, 미국 성질을 긁는 정도에서 강도를 조절하여 미국이 정말로 무력진압에 나서는건 바라질 않죠.
테러 이후, 미국의 영공 통과 승인 요청을 거부한 파키스탄이 "석기시대로 돌아가고 싶다면 계속 그래봐라"는 흉악한 협박과 "말로 할때 그냥 영공 열어줘라"라는 파키스탄을 향한 중국의 요구에 굴복하여 순순히 영공을 내어준 점. 내로라하는 테러단체들이 상황이 심각한걸 눈치채고 이번만큼은 극구 자신들의 짓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와중, 홀로 신의 뜻이라고 잔치 벌이던 이라크(와 알 카에다)가 주동자로 찍혀서 이라크 전쟁으로 초토화되고 이라크의 지도자인 사담 후세인은 체포되어 처형, 알 카에다의 지도자인 오사마 빈 라덴은 자기 아지트에서 사살된걸 보면, 이 때 북한의 판단은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 남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약하자면, 천하의 개망나니같은 북한이라 할지라도, 최소한 자기 목숨이 걸린 일에는 누구를 편들어야 할지 정도는 판단하고 있다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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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멜로군
2016-06-22 06:00:22
그런곳에서도 판단 못하고 나댄다면 북한은 이미 역사속에나 존재하는 국가가 됬을거라고 생각해요.
파스큘라
2016-06-22 11:10:09
정말 저때 북한이 주저없이 미국의 편에 서서 테러 행위 규탄을 주장한건, 우리로서는 썩 달갑잖지만 그네들의 목숨을 연명하는 한 수가 됐죠. 영공 통과를 거부한 파키스탄이 그럼 석기시대로 되돌려버리겠다는 협박에 깨갱한 점이나, 내로라하는 테러단체들도 다들 눈치보고 이번만큼은 절대로 자기네가 관여한게 아니라고 극구 부정하는 와중에 혼자서 신의 뜻이라느니 꼴 좋다느니 조롱하던 이라크는 결국 이라크 전쟁에 의해 미국에게 흠씬 얻어터졌죠. 만약 저때 북한이 조금이라도 테러리즘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간 안그래도 밉살맞은 국가인지라 이라크 꼴 났을지도 모르죠.
마드리갈
2016-06-23 13:45:58
9.11 테러는 21세기의 시작으로 불리는 국제정치의 큰 전환점이 되는 엄청난 사건이었어요. 즉 이전까지의 전쟁에 대한 패러다임 자체가 완전히 뒤엎어진 것이었어요. 게다가 미국으로서는 본토가 직접 공격당한 사건이라서 이 충격은 그야말로 미국의 모든 것을 바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어요.
당시 납치된 항공기는 모두 4대였는데 그 중 광동체기인 보잉 767 2대는 말씀하신 것처럼 세계무역센터에 격돌하여 건물들을 붕괴시켰고, 협동체인 보잉 757 2대 중 1대는 국방성 건물에 추락하여 큰 피해를 입혔어요. 그리고 다른 1대는 테러범들의 의도대로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죽는 참사로 끝났어요. 보잉 767이 적재한 항공유의 질량을 감안할 때 발생한 에너지는 대략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1/7 정도가 되었으니, 이게 얼마나 끔찍했을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었겠죠.
그때 정말 놀랐던 게 북한이 발뺌하는 것. 보통 북한의 평소의 태도와는 판이하게 달라서, 임종 직전의 돈키호테라도 되었나 싶을 정도로 이상하게 보였어요. 그때 북한이 그 테러를 지지했다면 그 뒤는 배드엔딩 확정이었겠죠. 지금도 북한이 테러지원국 지정에 겁을 먹고, 보스턴 마라톤 폭탄테러나 프랑스 파리 동시다발 테러 등의 사건에서 테러리즘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북한이 자기 목에 칼이 들어오는 상황은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같이 보여요.
글에서 다루는 대상이 아주 싫은 것임은 잘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정확하거나 정제되지 않아 과도하게 거칠거나 오해의 여지를 줄만한 표현이 포럼에서 그대로 통용되는 건 아니니까 이건 운영진으로서 말씀드려야겠어요. 참고로 "죽이다", "박살내다", "망나니" 등의 어휘도 남용이 좋지는 않지만 이 정도는 충분히 쓸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에 수정의 대상이 아님은 밝혀 드려요.
파스큘라
2016-06-23 14:17:06
쓰다보니 표현이 저도 모르게 과격해졌네요. 지적해주신 부분 및 본문 내에서 자극적으로 보일만한 부분은 전부 수정했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아이러니한건, 테러에 대한 복수로 시작한 테러와의 전쟁과 이라크 전쟁이 결국 그것때문에 테러리즘이 끝나기는 커녕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라는 괴물을 만들어냈으니 국제 정세라는건 참 애매모호하네요.
여튼 북한도 자기네 인식이 바닥이라는건 충분히 인지하고 있고, 뭐만 일어났다하면 항상 후보군에 들고 있으니 대규모 테러 사태에 즉각 자신들은 그런 짓은 안한다고 부정하는 태도가 우리로선 참 악어의 눈물같아 보이는건 기분 탓일까요...
SiteOwner
2016-06-23 22:58:22
마약중독자라도 "살아서 마약할래, 죽어서 마약 끊을래?" 하는 양자택일 상황에 내몰리면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겠죠. 역시 자기 명줄이 위태롭다 싶으면 안하던 짓도 나서서 하는 법입니다. 비슷한 예로, 북한이 테러지원국 지정을 어찌나 겁내했는지,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이후로는 테러를 안 저질렀다고 변명하는 과정에서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이 북한이 주도한 테러사건이었음을 자인해 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9.11 테러와 도끼만행사건은 여러모로 닮아 있습니다.
9.11 테러의 전조로서 1998년의 케냐 및 탄자니아 주재 미대사관 폭탄테러가, 2000년의 미 해군 군함 콜(USS Cole)에 대한 자폭돌격보트 공격이 있었는데 당시 적극적인 군사대응은 없었고, 결국 2001년에 미국 본토가 테러리즘의 피해를 입는 초유의 사태에 직면해 버리자 미국은 무서울 정도의 분노를 군사행동으로 나타내 버립니다. 2002년 미국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 당시 미국 대표팀이 9.11 테러 현장에서 손상된 성조기를 들고 온 데에서 미국의 각오가 어떤지가 보였습니다.
도끼만행사건 때에도 전조는 있었습니다. 북한은 미국에 대해서는 1968년의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1969년 EC-121 정찰기 격추사건을 일으키면서 계속 도발하였고, 그 해에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무장공작원 남파로 중부지방을 혼란시키는 한편 청와대 기습미수사건까지 일으키는 등의 각종 테러를 자행하였습니다. 하지만 남파 무장공작원에 대한 전투와 사살 이외의 적극적인 대응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1976년에는 북한이 전대미문의 도끼만행사건을 벌이고, 이때도 어떻게 못하겠지 하면서 대충 사건을 덮으려고 했지만 이미 상황은 북한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김일성이 유감표명을 안했다면, 남북국경은 대동강이 되었을 것이고, 평양은 북한의 최전선이 되었겠지요.
Lester
2016-06-24 12:11:08
그런데 그런 '잔머리'가 늘다 보면 통일도 자연스럽게 늦춰지는 거 아닌가...하는 생각도 드네요. 옛날에 비하면 통일의 의미도 많이 변화 내지 퇴색되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