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Skip to content
특정 주제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규제개혁에서 잊어버리는 전제 (上)

마드리갈, 2014-03-22 20:39:22

조회 수
221

요즘 규제개혁을 둘러싸고 여러 말이 많이 나오고 있어요.

규제를 암덩어리 내지는 격파의 대상으로 묘사하는 거침없는 표현도 나오고, 끝장토론이라는 것도 실시되었고, 공무원집단은 부패하고 구태의연한 집단으로 묘사되기도 하지요. 자유를 신장하고 부패를 제거하여 사회의 혁신을 도모하자는 취지 자체를 나쁘다고 비난할 수는 없지만, 개혁이라는 것이 방향, 실천방법 등에 따라 그 결과가 개악이 될 수도 있는 여지도 많아요. 그래서 어떠한 미명하게 포장된 개혁이 정말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갈 수 있을지는 바로 그 전제를 볼 필요가 있어요. 전제는 건조물의 기초공사와 같아서, 이것이 부실하면 그 위에 적층될 정책이 건전할 리가 절대로 없는 것이고, 공들인 것이 모두 헛수고로 돌아갈테니까요.


보통 규제개혁을 이야기하면 항상 들먹이는 것이 있어요.

공무원집단을 개혁해야 한다느니, 규제는 줄이고 철폐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느니, 해외의 사례를 보고 배워야 한다느니 하는 것이 있어요. 규제개혁의 3종의 신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하나하나 의문을 제기해 보기로 하죠.


공무원집단은 보수적이고 경직되어 있는 집단이니까 개혁해야 한다고 하지요.

멀리까지 갈 것도 없이, 서번트×서비스 애니에서는 관청에 전화를 걸어서 공무원을 공개비난하거나, 인감도장을 갖고 오지 않은 민간인이 창구직원에게 융통성이 없니 하면서 투덜대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어요. 그리고 현실의 사례는 이것보다 더욱 험악해요. 공무원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온갖 행패를 부려 놓고는 대응하는 공무원이 불친절하게 대응했다고 인터넷에 올리고 분란을 일으키는 것도 모자라 폭력을 행사하기도 해요. 그래서 공무원수험 열풍과 공무원 때리기가 공존하는 기묘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어요. 이런 문제의 책임은 과연 공무원에 있는 걸까요? 예라고 대답하실 거라면, 칼에 의한 살인사건에 대해서는 칼의 제조업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괴상한 주장에도 당연히 찬성해야 해요. 

오늘날의 관료제도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국가에 전적으로 고용된 전업공무원의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이것이 아주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그건 결코 아니예요. 혹시 엽관제라는 것을 들어보셨나요? 한자로는 猟官制라고 쓰는데, 글자 그대로 어느 정당이 정권획득에 성공하면 마치 관직을 사냥하듯이 공직을 정당의 인물 내지는 지지자들로 교체하는 것을 말해요. 이러한 시스템은 시민혁명 직후의 근대민주주의의 근간으로서의 의의는 있지만, 선거결과에 따라서 인적요소가 일거에 교체되다 보니 일관적인 국정수행이 어렵고, 모든 것이 선거에 종속되어 버려서 금권선거 등의 온갖 부정부패를 낳기도 했어요. 그래서 결국은 정치에서 중립적인 전문관료제가 정착하게 되었어요. 따라서 지금의 관료제는 국가의 행정작용을 정국의 변화에 관계없이 일관적으로 그리고 공평하게 수행하기 위해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어요. 따라서 공무원집단은 규범을 준수해야 하고, 규범에 따라 움직여야 해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니 당연히 이 규범을 바꾸는 것은 공무원집단의 일이 아니라 정치권이 해야 할 일이예요.

그렇다면 이제 의문이 풀릴 거예요. 왜 칼로 사람을 죽인 사건에 대해 칼의 제조업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말이 부당한지를.

같은 칼이라도 주부나 요리사가 사용하면 맛있는 요리를 만드는 도구가 되어요. 하지만 이것이 정신이 온전치 않거나 범죄를 꿈꾸는 사람의 손에 들려지면 이것은 사람을 죽거나 다치게 하는 끔찍한 흉기로 돌변해요. 이처럼 어떤 문제가 생기면 일선의 공무원을 탓하기보다는, 그 공무원을 그렇게 행동하게 만든 제도와 법령을 돌아봐야 해요. 그것이 맞지 않나요? 지금은 엽관제를 쓰는 것도 아니니까요. 공무원은 법령에 따라서 행동할 의무가 부과되어 있는데, 규제개혁이라는 미명하에 잘못된 제도와 법령은 생각하지도 않는다면, 정치권이 멋대로 제도와 법령을 만들고, 그 책임은 모두 일선 공무원들이 지라는 것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리고 그렇게 공무원을 처벌로 배제하고 나서는 다른 사람들을 선발하여 다음의 소모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구요. 정말 개혁을 원한다면 정치권이 제대로 책임있게 활동해야 해요. 따라서 공무원 때리기는 사안의 선후관계도 모르는 무식한 소리에 다름아니예요.


흔히 정치권에서는 국민을 위한다느니 국민의 대표니 하면서 갖가지 제도와 법령을 만들지요. 하지만 이에 대해서 얼마나 자성을 하고 있고, 그 결과에 대해서 얼마나 책임을 잘 지고 있는지는 의문이 들어요. 그리고 오로지 책임은 공무원이 져야 하지요. 이런 구태를 깨고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불필요한 규제인가를 파악하고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개혁일텐데 이런 데에는 하나같이 목소리가 없네요.



(2편에 계속)

마드리갈

Co-founder and administrator of Polyphonic World

6 댓글

대왕고래

2014-03-22 20:59:20

공무원들은 규범에 따라 움직이고, 그러므로 공무원에 의해 일어난 잘못이라면, 그 공무원이 태만했거나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면야, 당연히 그 공무원이 시행하게 된 법이나 제도에 있다는 말씀이군요.

간단히 말해, 뿌리가 잘못되면 무슨 일을 해도 그르치게 된다는 것이군요.


확실히 공감이 되는 말씀이에요.

마드리갈

2014-03-22 21:10:10

그럼요. 뿌리가 썩어 있는 데에는 답이 없는 거예요. 만일 문제있는 제도나 법령의 결함을 고치지 않는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일해야 하는 공무원의 직위는 그냥 전기의자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아무도 일하려 들지 않게 되고, 그러면 복지부동(伏地不動)이 만연하게 되는 거구요.

관청은 아니지만, 네덜란드의 항공사 KLM이 어떠한 상황에도 운항이 지연되면 조종사에게 벌금과 불이익을 주었어요. 이러한 제도가 후일 테네리페 참사라는 583명 사망, 60명 부상의 초대형 항공사고를 내는 원인으로 이어졌어요. 잘못된 제도로 인해 소중한 생명이 끔찍한 죽음을 맞게 된 대표적인 실패사례라고 할만해요.

하네카와츠바사

2014-03-22 21:13:15

저도 일 관계로 관청에 다니다 보면 공무원들은 그냥 법 제도를 이행할 뿐이라는 걸 느끼게 됩니다(그리고 그 업무가 맞지 않는 것 같아 공무원은 안 하리라 마음 먹었지만). 뭐 이번 규제개혁은 나름 재미있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어떤 방면에서 어떤 변화가 생길지, 궁금해지거든요.

마드리갈

2014-03-22 21:22:32

그러시군요. 하긴 일선현장의 직원들은 힘이 없으니, 그리고 최소한의 요구사항이 만족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면 오로지 공무원의 귀책사유가 되니까 그 현장을 탓할 수는 없지요. 상부에서 만들어진 제도와 법규에 구속될 뿐이니까요. 그것을 무시하고 공무원 때리기만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없어요. 그리고 권리는 없고 의무만 부가되는 특정 직위에 가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을 처벌할 수 있는 것도 전혀 아니구요.

저는 이번의 규제개혁이, 그냥 말잔치의 반복밖에 안 될 거라고 보고 있어요. 밖으로는 지금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정말 급한 게 뭔지를 모르는데다 안으로는 개혁을 빙자한 퇴영적인 행태만 반복되니까요.

호랑이

2014-03-25 23:17:26

규제를 풀어준다는 게 누구를 위해 풀어주는지도 생각해 봐야 되겠어요. 돈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과거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가 생겨 자유도를 높히기 위해 풀어주는 규제와, 그저 기업을 위해 풀어주는 규제는 다르니까요.

 

현재 우리 나라에는 서바이벌 게임용 총기에 대핸 정의가 없어서, 완구용 총기의 경우 발사체의 무게가 0.2g, 발사체의 에너지는 0.2J로 정해놓고 있는 모의총보법이 있는데, 문제는 이런 걸로는 게임이 불가능해요. 정부나 국방부가 주최하는 행사에서도 발사체의 에너지를 1J로 정의하고 있는데도 이 규제가 풀릴 생각이 없어요. 법안 통과 자체를 못하니...

하나 더 있어요. 89년에 제정된 관세법이 지금까지 바뀌지 않고 있어요. 89년의 150달러 이상 구매시 관세 항목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요. 물가 상승률은 어마어마하게 올랐는데 말이지요. 이런 부분도 규제가 완화되면 직구를 하는 소비자는 좀 더 혜택을 볼 수 있을텐데, 아직도 풀릴 생각이 없는 걸 보면 아쉬워요

마드리갈

2014-03-26 03:21:32

좋은 논점을 제시해 주셨어요. 바로 그거예요.

달성할 계획이 자유를 증진하기 위한 규제완화 및 철폐인지 특정 기업, 또는 특정 섹터 등을 위한 조치인지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규제는 공정하고 효율적인 자원배분을 도리어 방해하기 쉬우니까요.

관세는 앞으로 계속 쓰기 어려워질 거예요. FTA의 체결, 경제자유구역 설정 등과 같은 자유무역 확대조치가 늘어나면 관세장벽은 좋든 싫든 낮추어져야 하고, 아마존이나 이베이, 라쿠텐 등으로 대표되는 글로벌 전자상거래 덕분에 무역의 주체 및 객체가 개인으로도 확대되니까요.  모의총기 관련으로는 확실히 문제가 있네요. 법 따로 정부기관 주최행사 따로니 되는 게 없네요.

Board Menu

목록

Page 219 / 292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단시간의 게시물 연속등록은 권장되지 않습니다

  • new
SiteOwner 2024-09-06 58
공지

[사정변경] 보안서버 도입은 일단 보류합니다

  • update
SiteOwner 2024-03-28 147
공지

타 커뮤니티 언급에 대한 규제안내

SiteOwner 2024-03-05 163
공지

2023년 국내외 주요 사건을 돌아볼까요? 작성중

10
마드리갈 2023-12-30 348
공지

코로나19 관련사항 요약안내

612
  • update
마드리갈 2020-02-20 3836
공지

설문조사를 추가하는 방법 해설

2
  • file
마드리갈 2018-07-02 971
공지

각종 공지 및 가입안내사항 (2016년 10월 갱신)

2
SiteOwner 2013-08-14 5942
공지

문체, 어휘 등에 관한 권장사항

하네카와츠바사 2013-07-08 6554
공지

오류보고 접수창구

107
마드리갈 2013-02-25 11060
1472

모비 딕(Moby-Dick) 완역본을 읽고 있습니다.

4
HNRY 2014-03-28 212
1471

[게임이야기] 스타크래프트2를 하면서 자주 쓰는 조합

2
데하카 2014-03-27 169
1470

설정 짜면서 이것저것 생각해 본 게 또 있지요

1
데하카 2014-03-26 170
1469

천안함 폭침, 그리고 진영논리

9
SiteOwner 2014-03-26 235
1468

어쩐지 매콤한 칼국수가 먹고 싶어지는 지금입니다.

10
셰뜨랑피올랑 2014-03-25 334
1467

[철도이야기] JR 동일본의 간판, E233계 전동차

2
데하카 2014-03-25 500
1466

무주지 비르 타윌

5
데하카 2014-03-25 626
1465

어찌저찌 건너왔습니다.

10
Lester 2014-03-25 188
1464

카스2 병자호란

1
데하카 2014-03-24 163
1463

댓글이 잘 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2
마드리갈 2014-03-23 243
1462

규제개혁에서 잊어버리는 전제 (上)

6
마드리갈 2014-03-22 221
1461

설정의 차용에 관하여

3
HNRY 2014-03-21 169
1460

쉽게 전파할 수 없는 재미

1
하네카와츠바사 2014-03-20 143
1459

행복할수가 없는 여우

3
여우씨 2014-03-20 177
1458

어제와 오늘에 걸쳐 대단히 고생했습니다

2
데하카 2014-03-19 128
1457

[언어이야기] 고대 중국어

4
데하카 2014-03-18 1546
1456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군요.

6
데하카 2014-03-16 153
1455

나름 열혈적이게 고찰해보는 다음세대를 위해 할일

2
teller13 2014-03-15 129
1454

CM송이 인상적인 1970년대 미국 TV광고

2
B777-300ER 2014-03-15 277
1453

유럽 3대 상용차 브랜드의 변천사

2
B777-300ER 2014-03-15 356

Polyphonic World Forum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