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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 정말 바실리오스 2세의 죽음이 쇠퇴의 시작이었는가?

콘스탄티노스XI, 2017-07-19 09:43:43

조회 수
140

 읽어볼 만한 글-
  
  원로원이 비잔티움 사에서도 상당히 중요할 수 있으리라는 개인적 추측을 몇 가지의 글에서 부분적으로나마 보인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꽤 시간이 흘러 또 하나의 소결론을 내릴 수 있는 지점에 이르렀다고 판단이 됩니다. 바로 바실리오스 2세(Basileios II, 963-1025)의 치세가 끝난 이후의 승계 불안성에 대한 의혹과 이로 인한 국가적 쇠퇴라는 관점에 대한 것입니다. 바실리오스 2세의 후계구도가 불안정했는지, 그리고 쇠퇴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인지 알아볼 수 있겠습니다.

  비잔티움사를 한국어로 된 서적으로 접하게 될 경우 가장 주목하기 쉬운 연도가 바로 1025년입니다. 바실리오스 2세가 죽은 해이죠. 대강 2000년도 중반 이전에 비잔티움사를 접한 경우라면 G. Ostrogorsky 선생의 『비잔티움 제국사』(까치글방, 1999)를 통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통사를 충실히 다룬 책은 기실 이 책이 거의 유일한 편이었으니까요. 물론 비교적 최근에 재판되면서 다시 이 책으로 접하는 분도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너무나도 딱딱하고 분위기가 어두워 심하게 졸음을 유발하는 것만 제외하면 1965년에 쓰인 책 치곤 꽤 유익한 편입니다. 이보다 조금 나중에 입문한 경우라면 『비잔틴 제국의 역사』(가람기획, 2003)-조금 놀랍지만 오늘날에는 트레드골드의 조심스럽고 보수적인 해석 역시 거센 비판을 받고 밀려나는 중이긴 합니다-에서 조금 발전된 형태의 통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이제 2006년이 넘어가게 되면 전공자의 글은 아니지만 드디어 그간 한국어 번역서로서는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은 『비잔티움 연대기 1, 2, 3』(바다출판사, 2006)을 통해서도 입문이 가능해집니다. 비교적 중진학자인 주디스 헤린의 『비잔티움』(글항아리, 2010) 등 점차 각론에서도 개선된 내용들이 소개되고 있는 편이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의 예를 제외하면 1025년을 기점으로 전성기와 혼란기를 나누려는 시도가 상당히 작위적인 분위기를 풍깁니다. 이러한 생각은 바실리오스 2세가 후계를 남기지 않았고 그런 불성실함으로부터 국가의 위기가 촉발되었다는 전제를 통해 발전하게 된 결과물입니다. 이런 생각은 과연 사리에 맞는 논리였을까요?

  바실리오스 2세가 왜 후계자를 두지 않았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바실리오스 2세 시대를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는 글은 없고 비교적 상세한 기록들은 비교적 후대에 들어와 선전정책을 위하여 과장되거나 취사선택이 되었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질만한 기록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후계자 선정 자체에 대한 의문은 답을 구할 길이 요원합니다. 그럼 여기서 끝일까요? 잃어버린 연결고리는 없는 걸까요?

  그 답을 원로원(Senatus/Sygkletos)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합니다. 원로원에 대한 설명이 제대로 할애된 통사 서적들은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기존 사서에 대한 재해석이 2000년대 중반 이후에 본격화된 게 그 원인이 아닐까 싶은데, 실제로 영어로 번역되어 나온 사료들만 해도 원로원 아니면 원로의원들이라는 이름 아래서 여러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바실리오스 2세가 죽은 뒤, 3년간 짧은 단독치세를 보낸 콘스탄티노스 8세(963-1028)는 로마노스 아르기로스(968-1034)라는 사실상 몇 살 차이 안나는 원로원 의원에게 자리를 넘겨주게 됩니다. 로마노스 3세는 즉위 당시에 이미 나이가 59세였습니다. 사회적 지위도 높은 콘스탄티노플 시장직도 지냈으니 사실상 초기 제정의 '집정관'을 지낸 경력과 비등한 저명인사인 셈입니다. 비슷한 현상은 이후에도 대체로 계속됩니다. 정치적 이유로 원로원이 동의/지명한 파플라고니아 왕조(1034-1042)를 제외하고 콘스탄티노스 모노마호스(1000-1055)나 콘스탄티노스 두카스(1009-1067) 등 관직경력이 높고 장년층의, 원로원에서 활동하는 명문가 출신들이 대체로 잇따른 황제가 됩니다.

  아르기로스(Argyros), 모노마호스(Monomachos), 두카스(Doukas) 등 후기 마케도니아 군주를 배출하거나 두카스 왕통을 배출한 가문은 공통적으로 9세기 또는 10세기 이후 출현하였고 주요 관직을 지내면서 원로원에도 진출한 이들이었습니다. 이 원로원은 그럼 어떠한 곳이었나요?
  미하일 3세(842-867)의 모친인 테오도라는 858년 궁궐을 떠나 낙향하면서 원로원을 대상으로 국고 상황을 자세하게 밝혀버립니다. 이를 통해서 미하일 3세의 낭비벽을 견제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기록이 왜곡되어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여튼 이런 방식이 개연성 있다고 당대인들은 생각했다는 점은 입증됩니다- 콘스탄티노스 7세(913-959)를 총대주교 니콜라스(Nikolas), 알레한드로스 2세(Alexandros II, 912-913) 그리고 로마노스 1세(920-944)로부터 보호해 낸 한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이후에도 원로원은 시민대중과 하나로 혹은 때때로 독자적인 주체로서 정치의 축으로 활약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1028년 이후 1057년까지 그리고 두카스 왕조 시대(1059-1067/ 1071-1078) 동안에 정치가 혼란에 빠져 있었다기보다는 원로원이 중심이 되어 집권을 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좀 더 타당하리라고 봅니다. 물론 바실리오스 2세 말년에 약간의 잡음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1021-1022년 경 바실리오스 2세가 제1차 조지아 원정을 떠나있을 무렵 아나톨리아 동부 지역에서는 바실리오스를 도와 불가리아 평정에 큰 공을 세웠으며 이제는 동부군 총사령관이 되어 있는 이피아스(Xipias)가 동료 니키포로스(Nikephoros) 장군을 꼬드겨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들의 목적은 바실리오스의 사후 구도가 불확실하니 이피아스가 중심이 되어 대권을 장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의 세력 자체는 별 것 아니라고 쳐도 이들은 조지아, 바그다드의 부와이 조(Buyaid), 함단 조 등과 긴밀한 동맹관계를 형성하며 위협을 가했습니다. 이것이 순식간에 진압된 이후에도 그러나, 바실리오스는 자신이 후계구도를 굳이 세우지 않습니다.
  결국 이는 두가지 가능한 결론을 도출하게끔 만듭니다. 하나는 바실리오스가 후대 따위 깔끔하게 포기해버리고 될 대로 버려뒀다는 것. 다른 하나는 군부를 견제할 뿐 별다른 조치 없이도 후대가 안정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콘스탄티노스 8세가 비록 62년간 국사 한 번 돌본 일은 없이 니케아의 별장에서 지내고 있었지만 어쨌든 정권을 인수하였고 불안한 가운데서도 원로원과 왕실의 결합을 통해 정국을 이행하였습니다. 바실리오스 2세의 의견대로 카파도키아 군부를 적당히 멀리하는 가운데 원로원은 시민-원로원의 연합 위에서 황제국가를 운영하고자 합니다. 그 절정기는 콘스탄티노스 9세에 도달하게 되었고 그의 넓은 포용정책에 대한 이견으로 원로원-시민대중이 분열하기 전까지는 대체로 안정적인 치세가 이어졌습니다. 그 틈을 파고든 것이 첫째로 파플라고니아 군벌이었으며 결국 카파도키아 군벌과의 각축전이 이어진 끝에 대가문 원로원 체제는 1078년에 최종 붕괴됩니다.

  결과적으로 여기서 필자가 다루는 1025-1081 사이의 시대를 구분하자면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1025-1057: 후기 마케도니아-원로원 시대
1057-1059: 파플라고니아-콤니노스 군벌 시대
1059-1067: 두카스-원로원 시대
1068-1071: 카파도키아 군벌 시대
1071-1078: 제2 두카스-원로원 시대
1078-1081: 제2 카파도키아 군벌 시대

  이 중 제2 두카스 시대를 제외하면 나머지 시기는 집권 세력이 시민대중(주로 콘스탄티노플 중심이지만)과 결합하여 정세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약 집권층이 시민들과 분리되어 그 지지를 온전히 받지 못하게 된다면 1057년, 1059년, 1067년, 1078년에서처럼 권력에 대한 도전이 일어났을 때  저항할 수 없음을 잘 보여줍니다. 1025-1057 사이의 기간이 쇠퇴로 규정될 수 없다는 점은 이를 통해서도 잘 확인됩니다.

  11세기의 혼란이란 현상은, 이런 점에서 볼 때 어느 황제의 잘못이거나 판단 착오, 불성실한 태도라는 사소한 요인이라기보다는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는 여론정치의 현장에서 현 집권세력과 대중여론과의 급속한 관계 변화를 통해 일어났던 현상으로 조망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구도의 변화를 일종의 도식으로 만들어보면 다음과 같겠습니다.

 

 

 

 

 1025-1057(의 세력구분)

 

 1057-1059

   

 

 1078-1081

 

 

출처:http://cafe.daum.net/shogun/9xm/8866?anchor=_cmt-8866-3 


타사이트를 돌아다니다가 좋은 글을 발견해서 한번 소개해봅니다. 

콘스탄티노스XI

도시가 무너져 가는데, 나는 여전히 살아있구나!-1453, 콘스탄티노플에서. 유언.

https://en.wikipedia.org/wiki/Constantine_XI_Palaiologos-이미지

3 댓글

마드리갈

2017-07-21 14:30:22

지도자의 죽음이 분명 시대의 성쇠에 영향을 끼쳤다고는 할 수 있죠. 그런데 그것을 하나의 가능성으로 제시하는 것과 그것을 이유로 단정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일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면 바실리오스 2세가 타계한 뒤의 반세기 남짓한 기간 동안의 정국변화 양상을 설명할 때 주장의 설득력의 강도가 아무래도 달라질 수밖에 없을 거예요.

사실 한 세대 정도의 치세가 안정적이라는 것은 선대의 지도자가 다져 놓은 기반이 공고하지 않으면 쉽사리 달성할 수 없는 것이고, 또한 당시에 고안한 제도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나게 되면 초창기에는 상정하지 못했던 폐단이 드러나고 그 폐단을 비집고 들어가서 이득을 취하는 암적인 존재가 대두되기 마련이죠. 그러니 바실리오스 2세의 치세가 상당히 뛰어나서 사후 한 세대 정도까지는 그 폐단이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까지의 수준은 되었다고 보는 게 적당할 듯해요. 그렇다면 바실리오스 2세의 죽음을 쇠퇴기의 시초로 보는 건 좀 시기상조가 아닐까 싶어요.

SiteOwner

2017-07-22 22:16:49

어떤 지도자가 죽은 후 한 세대나 지나서 국가체제가 흔들리고 쇠퇴했는데 그것을 그 지도자 탓으로 돌리는 것은 너무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그 지도자의 치세 동안 해결하지 못한 현안이 나중에 국가의 쇠퇴의 원인 중의 하나로 작용했다고 보는 것도 가능한 방법론이기는 한데, 이것에 너무 집착하게 되면, 그 지도자 사후에 후계자들은 대체 무엇을 했는가, 그렇게 선대의 지도자에 책임을 지우는 것으로 면책되는 것인가 하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론에 도달하게 되기도 합니다. 저 분석이 시사해 주는 점이 그래서 많습니다.


이게 국내 근현대사의 분석에도 상당히 유용할 수 있는데, 오늘날의 사회문제를 그냥 과거 권위주의 정권이 누적시킨 사회문제가 표면화되어서, 짧게 말하면 요즘 말하는 적폐 운운하는 것으로 단순화시켜서 말하는 사고방식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상기시킬 수도 있기도 합니다. 그 논리는 그 자체로 가혹할 뿐만 아니라 후대가 무능하다는 것밖에 말해주지 못하는 비판을 위한 비판으로 흐를 위험이 농후하고 많은 경우 자학사관을 정착시키거나 극단론으로 빠지는 지름길이 되고 말아 버립니다.

좋은 글을 소개해 주신 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콘스탄티노스XI

2017-07-24 15:00:57

뭐...개인적으로 '적폐청산'에 어느정도 동의하는 바가 꽤 있긴 하지만, 해당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중 상당수가 국개론이나 대책없는 조선비하론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아서 여러모로 피로해지는 경우가 꽤있긴 하더군요. 가끔씩은 '적폐청산론이란게 과연 옳은건가?'라는 회의까지들 정도라.... 한편으론 근데 주변 어른들 여럿 만나보면 '정치인들 다똑같아!'하면서'진보정권의 잘못'에 대해서 말씀 하시면서 정작 후대의 '보수정권이 뭘했는가'는 한마디도 하시지 않으시더군요. '극과 극은 통한다'려나요? 하여튼 그런걸 좀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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