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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히로는 로베르토의 그 말이 의아했는지 한번 로베르토를 돌아보더니, 이윽고 되묻는다.
“내가 그걸 어떻게 믿지?”
“선배님, 저는 몇 번이고 말했다고요. 어제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어요.”
로베르토가 그렇게 말하자, 치히로는 기다렸다는 듯 말한다.
“호오, 정말? 그 말만 가지고는 내가 믿지를 못하겠는데?”
“맞아, 맞아.”
치히로의 그 말에 올리버도 맞장구를 치고, 베로니카도 고개를 끄덕인다.
“네가 좀 믿을 만한 무언가를 보여 줘야지.”
“좋아...”
로베르토는 무언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무언가 준비하기라도 한 듯 주머니를 뒤적인다. 그리고 또다시 치히로와 올리버, 베로니카를 원망이라도 하려는 듯한 눈을 하고서 쏘아보는 건 덤이다.
한편 그로부터 조금 시간이 지난 점심시간. 시계는 1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민은 친구들과 헤어지고 나서 집에 돌아와서, 또 이따가 어디를 나가기 전에 집에서 쉴 요량이다. 부모님은 모두 토요일에도 바쁘고, 반디 역시 토요일에도 학교 연구실에서 살다시피 한다. 서언이나 언주가 찾아올 수도 있을 것이나, 오늘 아직 그런 말은 듣지 못했다. 진언은 오늘이 당직 서는 날이라서 당연히 못 온다. 즉,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시간 전까지는 민은 집 안에서 뭘 해도 된다는 것이다.
문득, <트리플 버스터즈>를 한 판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곧장 민은 방에 들어가서, 자기 책상 앞에 앉아서 컴퓨터를 켠다. 물론 책상 옆에는 어제 학교에서 집에 들어가기 전에 사 놓은 쿠키를 그릇에 한가득 쏟아 놨다. 게임을 시작하기 전, <트리플 버스터즈> 공식 사이트에 들어가 본다. 조금 있다가 시작할 게임에 도움이 될까 해서다.
“어디, 그럼 오늘도 한번 공략 영상을 찾아보고...”
민이 사이트를 찾아보다 보니, 우연히 눈에 들어오는 영상 하나가 있다. 여타의 대회 영상들과는 달리, 조금은 좁아 보이는 실내에서 선수 2명이 컴퓨터를 마주 놓고 경기를 하고, 그 위의 홀로그램 화면에 게임 실황이 나오는 장면이다. 선수의 이름은 카일리와 베르니.
“오, 어제 구청에서 열렸다는 그 대회 영상이잖아?”
민은 어제의 그 아쉬움은 뒤로 한 채, 그 실황 영상을 곧바로 돌려보기 시작한다. 영상을 업로드한 사람의 닉네임은 ‘D88D88’. 민도 몇 번 게임 안에서 본 닉네임이기는 한데, 아직 그게 누구인지는 잘 모른다.?
“어디, 좀 많이 어두워 보이기는 하는데, 그래도 한번 볼까.”
영상을 보다 보니, 익숙한 누군가가 또 앞에 앉아 있는 게 살짝 보인다. 그 중 한 명은 손에 뭔가를 들고 있는 걸 보아, 분명히 D88D88과 마찬가지로 실황 영상을 찍고 있는 것일 거다. 머리가 앞에 산을 이루고 있는 게 살짝 신경쓰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건 상관없다.
“그런데... 이 대회 영상은 뭐 이렇게 적지? 분명히 찍은 사람들이 있을 텐데...”
민에게 의문이 드는 점은 그것이다. 아무리 대회에 사람이 적게 왔다고 해도, 실황 영상이 이 정도로까지 적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이 영상보다 자세해 보이는 영상도 없다.
“D88D88? 누구지... 많이 본 닉네임인데...”
생각이 거기에 이르른 민은 온라인 멤버들을 본다. 마침 거기에 잘 아는 닉네임이 몇 보인다.
“유하고... 로지가 들어와 있잖아.”
곧바로 민은 로지에게 전화를 걸어 보지만, 전화를 받지는 않는다.
“하느라 정신이 없는 건가... 에이, 모르곘다. 그럼 나도, 어디 한판 해 볼까...”
한편 그 시간, 구청 옆에 있는 도서관. 미린고등학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육교를 건너서 조금 산책로를 지나면 구청이 나오고, 그 옆으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도서관이 나온다. 소방서와 경찰서도 근처에 나란히 같이 있어 찾아오기는 어렵지 않다. 거기에다가 평범한 관청 건물인 다른 건물들과는 달리 흰색 위주로 칠해져 있어 도서관이 더욱 돋보이기도 한다.
3층에 종합자료실이 있는데, 그 중에도 한쪽에는 만화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거기에 몇 명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데, 그 중에는 윤진도 보인다. 윤진은 한창 만화책들에 빠져 있다.
“이런 데 와 있으면 시간이 잘 간단 말이지.”
윤진이 지금 보고 있는 건 <체인지 원>의 지난 회차. 연재된 지는 2년도 더 전이지만 지금 읽어 봐도 여전히 재미있는 건 마찬가지다.
“그래... 이번 권까지가 그 로넨하고 싸우는 에피소드였지?”
그렇게 중얼거리니, 그 에피소드가 다 끝나는 게 아쉽다. 그래도 일단 책을 들었으니, 다 읽기 전까지는 손을 놓을 수가 없다. 그렇게 읽고 있는데...
“오, 윤진 선배님 아닌가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서 올려다보니,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은 남자 한 명이 서 있다. 갈색의 빗어넘긴 머리, 그리고 오른쪽 입술 아래 점이라면... 맞다.
“에밀리오, 네가 여기는 웬일이냐?”
“뭐긴요. 저도 심심해서 온 건데요.”그렇게 말하더니, 에밀리오는 잠시 서가에 있는 만화책을 고르려는 듯 움직이다가, 이윽고 윤진에게 넌지시 말을 건다.
“아, 선배님, 선배님도 어제 그 <트리플 버스터즈> 리그 경기 봤죠?”
“어, 그래. 봤지.”
“이거 제가 찍은 영상이거든요? 봐봐요. 조회수가 이렇게나 많이 올라가고 있죠.”
에밀리오가 보여 준 영상은, 아까 민이 본 그 <트리플 버스터즈> 공식 사이트에 올라간 바로 그 영상이다. 다른 영상들에 비해서 확실히 화질도 좋고, 경기 장면도 모두 선명하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영상들의 조회수의 3배는 넘게 기록하고 있다.
“그래, 그래. 꽤 잘 찍었네.”
“그렇고말고요. 선배님도 혹시, 거기 있었죠?”
에밀리오는 은근히 윤진에게서 돌아올 긍정적인 답을 기대하지만, 윤진의 답은 딴판이다.
“아닌데.”
“네...? 선배님, 정말 어제 그 경기 보러 안 갔다고요?”
“어, 맞아. 나는 거기 안 갔는데?”
“정말... 요?”
에밀리오는 크게 당황한 건지, 다음 할 말이 순간 머릿속에서 지워졌던 건지, 한동안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 윤진은 그런 에밀리오가 이상하게 보였는지, 잠시 에밀리오를 보다가 입을 연다.
“야, 왜 그러고 서 있어? 내가 무슨 못 할 말은 한 것도 아닌데.”
“아니, 그러니까요...”
에밀리오의 머릿속에서는 여러 가지 생각이 엉켜 있다. 윤진에게 잘 보이고 싶은 무언가가, 어제의 경기 결과를 설명하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입, 그리고 다른 무언가도.
“왜 그러고 서 있냐니깐?”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윤진은 그런 에밀리오가 이상했는지 더 뭔가 물어보고 싶어진다. 하지만, 에밀리오가 그걸 알아챘는지는 몰라도, 에밀리오는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한다. 마치 무언가에 쫓기기라도 하듯 말이다.
“저기, 선배님, 저 급하게 가볼 데가 있어서요... 이만.”
“야, 에밀리오! 어딜 가! 내가 너하고 더 할 말이 있는데!”
하지만 윤진이 그렇게 말하건 말건, 에밀리오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어떤 동작을 보이거나 한 것도 보이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에이, 이야기를 좀 더 해 보려고 했더니만.”
그러고서 또, 윤진은 언제 에밀리오와 그렇게 이야기했냐고 묻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시 만화책을 펴들고 보던 책에 집중한다. 하지만 아까와 달리 이야기에 전적으로 집중되지는 않는다. 에밀리오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에이, 생각할수록 그 사진이 왜 자꾸 떠오르는 거냐.”
그러다가 윤진은 무언가 다른 생각이 들었는지, 아까 에밀리오가 소개해 준 그 영상을 찾아본다. 그러다가 에밀리오가 업로드한 영상의 닉네임에 주목한다.
“그래... 에밀리오의 닉네임이 D88D88이란 말이지.”
에밀리오가 말한 다른 것들은 모르겠으나, 그것만큼은 윤진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는다. 마치 강사가 화이트보드에 그 닉네임만 딱 콕 집어 말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그 시간, 미린역 남쪽 카페거리의 한 카페. 2시간쯤 전 소동이 일어났던 바로 그 카페다. 아까의 그 놀라움과 황당함이 담긴 표정은 어디로 가 버리고, 아이란과 예원은 꽤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짓고 있다.
“덕분에 <천재 매니저의 보이그룹 센터>에 대해 꽤 많은 걸 알았는데!”
“나야말로. 마치 동지가 하나 는 것 같은 기분이야!”
아이란과 예원이 카페를 나서며 한 마디씩 하고 있다. 둘은 막 카페 앞에서 헤어져서 각자 길을 나서려던 참이다. 그런데...
“뭐야, 너 또 네 그 취향 전파하고 다니는 거냐?”
아이란의 눈에 보이는 누군가. 다름아닌 나디아다. 나디아는 혼자 운동을 하는 건지, 레깅스에 트레이닝복 차림이다. 한참 뜀걸음을 하며 지나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디아는 아이란에게 바로 반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뜀걸음을 딱 멈추고 아이란의 앞으로 다가온다.
“왜 꼭 이런 데서 마주치는 거냐고...”
아이란도 그 상황이 내키지는 않았는지, 얼른 나디아의 앞을 피하려고 한다. 예원을 먼저 보내고 나서, 둘이 서로 마주친 상황이다.
“그냥 내가 없다고 생각하고 지나가지 그랬어.”
“후... 듣기에는 미안한데, 너는 항상 내가 ‘아니겠지, 아니겠지’ 하면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더라. 안 그러냐?”
“그게 내 취향인 건 어쩔 수 없는데, 그래서 싸움이라도 하자고?”
“음...”
나디아는 그 자세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던 중, 나디아의 주위로 무언가 기가 발산되는 것같이 보인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는지, 자기도 모르게 초능력을 발동하려는 듯도 보인다.
“내가 싸움을 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는 말하고 있지만, 아무리 봐도 그 말투는 싸움을 피하지는 않겠다는 듯한 말투다. 아이란 역시도 긴장하지 않을 수는 없다.
“아니, 그건 또 싸움을 피하겠다는 것도 아니잖아! 둘 중 하나만 확실히 해!”
하지만 그 긴장 상태는, 갑자기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깨진다.
“허엇, 허엇, 후우-”
누군가가, 별안간 나디아와 아이란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려다가, 막힌다. 당황했는지, 거기에서 빠져나가려다가 실패한 그 누군가는 하는 수 없이 거기에서 조금 숨을 돌리기로 한다.
“뭐야, 누구야?”
“무슨...”
그 누군가가 고개를 드는데, 순간 그 모습이 사라진 것처럼도 보인다. 아니, 나디아와 아이란 사이에 있는 그 누군가가 아예 하늘 위나 땅 아래로 사라져 버린 것 같이, 그 어디에도 누군가가 비집고 들어온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어, 뭐야, 왜 자꾸 꿈틀대?”
그 누군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온몸으로 자신이 여기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흡사 어느 시의 한 구절처럼, 이름은 없는데도 몸부림은 치는 것과도 같다. 제법 꼴사나웠는지 나디아가 한마디 한다.
“좋아, 자꾸 그러면 나도 다 방법이 있는데...”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마드리갈
2023-04-16 13:34:12
문제의 불청객이 로베르토일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의 것이...
에밀리오가 유력해지네요. 게다가 에밀리오가 당황해 하는 건 그냥 당황한 정도가 아니라 타인에게 보여서는 안될 무엇인가가 타인에게 드러나 버렸고 상황을 수습못해서 그냥 사고도 행동도 정지된 것같은...그리고 문제의 그 D88D88이라는 닉네임도 잘 기억되네요. 패턴 자체가 단순하기도 하고...
아이란이 마냥 행복할 줄만 알았는데 나디아가 기분이 어그러뜨리네요.
게다가 그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혹시 투명화 능력을 구사하는 토오루일까요?
시어하트어택
2023-04-16 23:01:20
아직은 그 어느 누구도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 업습니다. 누가 그 능력자라고 확실히 나오기 이전까지는 말이죠. 로베르토도 여러 가지 이상한 정황이 있으니 의심을 안 할 수는 없죠.
아이란과 나디아의 그 긴장을 순식간에 날려 버린 건... 맞습니다.
SiteOwner
2023-04-22 17:01:22
치히로와 올리버와 베로니카의 시선은 의심가는 곳에 잘 가는군요. 뭔가 이상한 짓을 꾸미려는 듯한 로베르토에게는 그 시선이 아주 아프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억지력이지요. 누군가가 보고 있는 상황에서 이상한 짓을 쉽사리 하기는 힘들 것이고 만일 그 상황에서 이전과 같은 불청객이 나타난다면 그때는 에밀리오의 소행으로 특정하면 될 듯 합니다.
역시 에밀리오는 현장에 있었군요. 그리고 도둑이 제 발 저리듯 하는 반응도 보이고. 그래서 윤진의 시선이 바늘로 찌르는 듯 아플 것 같을 것입니다.
아이란과 나디아는 또 저기서 대립중이군요. 그런데 알 수 없는 존재가...
투명화 능력을 사용하는 토오루겠군요. 투명이 존재의 무 자체는 아닐텐데 왜 저런 무모한 짓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시어하트어택
2023-04-23 21:55:11
현재의 반응으로는 둘 중 누가 범인인지 알 수 없지만, 범인은 분명히 현장에 있었고 또 그것을 온몸으로 드러내려 할 것이기에, 그걸 잘 잡으면 범인을 충분히 잡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 투명화 능력을 사용하는 토오루의 꿍꿍이는 아직 알 수가 없지요.